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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문득 눈이 떠지고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는 순간을 겪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와. 오래도록 천장을 바라보신 밤이 한 번쯤 있지 않으십니까? 자식 걱정 건강 걱정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안까지 그 마음의 무게를 안고. 오늘 하루를 보내신 분도 많으시리라 여겨집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슴 한 구석에 품고 지내.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젊을 때는 없어서 두려웠는데 나이가 들어 조금씩 가진 것이 많아진 지금 오히려 더 이를까 두려워지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삶의 어느 지점에서 마주하게 되는 뜻밖의 풍경입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마주할 경전은 바로 이 두려움에 대한 답을 담고 있습니다. 바냐 심경 단 260자 600권에 이르는 대반야경의 반야 가르침이 단 260자의 압축되어 전해져 내려온 지혜의 정수입니다. 이 짧은 경전 안에 부처님의 반야 가르침의 핵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고 그 안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 채널 불교 등대가 불자님들께 전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경전을 외워 얻는 위안이 아닙니다. 왜 반야 심경을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지. 왜 부처님께서 이 짧은 260자의 마음의 불안이 풀리는 이치를 담아 두셨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그 위치를 한 글자씩 따라가며 차근차근 밝혀드리려 합니다. 오늘 이 법문을 끝까지 들으시면 마음에 오래 머물러 있던 불안의 정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바냐 심경 본문에 새겨진 네 글자를 만나게 되십니다. 무유공포 곧 두려움이 없다는 부처님의 선언입니다. 왜 이 말씀이 당연한 귀결인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실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경전입니다. 법당에서 사시해 볼 때마다 외우시고 49제와 초하루 법회에서 거듭 독성에 오신 바로 그 경전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현장 법사가 구범 여행 중 위기의 순간마다 의지했던 경전으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불자들에게도 법회와 일상에서 가장 자주 외우는 경전 중 하나로 자리 잡아 왔던 것입니다. 그만큼 익숙한 경전이지만 한 글자 한 글자의 뜻을 온전히 아시는 분은 의외로 많지 않으십니다. 마하바냐 바라밀다. 심경 이긴 이름 안에 이미 답이 있습니다. 관자 재보살이 문을 여시는 첫 문장 오은계공 도일 체고액 그리고 가장 유명한 여덟 글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뒤따릅니다. 그 뒤로 펼쳐지는 공의 가르침과 감각도 없고 경계도 없다는 여러 부정의 문장들이 이어지며 마침내 친무가의 무유공포의 선언에 이르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아재아재 발화아제 저 언덕으로 함께 건너가자는 간절한 진언이 놓여 있습니다. 이 모든 구절이 하나의 답을 향해 흘러갑니다. 왜 두려움이 사라지는가?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에 입을 빌려. 설하신 그 원리를 앞으로 약 80분에 걸쳐 차근차근 풀어 드리겠습니다. 경전의 뜻을 머리로만 하는 것과 한 구절 한 구절의 이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평생 반야 심경을 입으로 외워오셨지만 정작 그 뜻을 깊이 새길 기회가 많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이 그 깊은 이치를 마음에 새기는 뜻깊은 자리가 되어 드리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약 2600년 전 인도 땅에서 설해졌지만. 그 말씀이 가리키는 자리는 바로 지금 우리의 마음 아닙니다. 여기서 밝혀드릴 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밤 가슴을 짓누르는 그 불안이 왜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그 이치를 꿰뚫어 보셨는지 그 놀라운 통찰을 함께 따라가 보려 합니다. 자 이제 그 여정을 함께 시작해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먼저 반이야. 심경이 어떤 경전인지 그 탄생의 배경과 이름 자체에 담긴 뜻부터 차분히 풀어 드리겠습니다. 바냐 심경이 어떤 경전인지를 이해하려면 그 이름부터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짧게 반야 심경이라 부르는 이 경전의 본래 이름은 마하반야바라밀타심경입니다. 10 글자로 이루어진 이 긴 이름 안에 이미 이 경전이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 하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먼저 첫 글자 마하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크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크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크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과 견주어 큰 것이 아니라 비교 자체를 넘어서는 큼을 말합니다. 하늘의 경계가 없듯 바다의 끝이 없듯 부처님의 지혜는 어느 한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전의 첫 자리에 마하라는 한 글자를 올려두셨습니다. 두 번째는 바냐입니다. 이 두 글자가 오늘 우리가 따라갈 경전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다니냐는 산스크리트 어프라지냐를 한자로 옮긴 말이며 그 뜻은 곧 지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세상에서 말하는 총명함이나 많이 아는 지식과는 결이 다른 앎입니다. 머리로 쌓은 앎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병을 고치는 의사의 지식 법을 다스리는 재판관의 지식 그런 지식과는 층이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밝혀주신 바냐는 사물의 거치 아닌 그 뿌리를 비추는 힘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살아오시면서 많은 일을 겪으시고 많은 것을 배우셨을 줄 압니다. 그런데도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은 여전히 한자리에 남아 있을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아무리 쌓여도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바냐가 가리키는 지혜는 바로 그 자리 세간의 앎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자리를 비추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세 번째는 바람이 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 또한 인도에서 건너온 그대로의 소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풀면 저 언덕에 이르는 것 곧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쪽 언덕은 번뇌와 두려움이 머무는 자리이고 저쪽 언덕은 번뇌가 쉬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사이에 한 줄기 깊은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강이자 집착의 강이며 미움과 원망이 고이는 강이었습니다. 그 강을 건너가는 일 그것이 바로 바라밀다의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 언덕은 어디 먼 곳에 따로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찾아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강은 우리 마음 안에 흐르고. 저 언덕 또한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바람 밀다는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닌 마음의 눈이 바뀌는 일을 뜻합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보는 눈이 달라지면 이미 저 언덕에 이른 것입니다. 네 번째가 심 그리고 경입니다. 심은 보통 마음 심자로 읽기 쉽지만 이 경전에서 가리키는 심은 조금 다른 울림을 가집니다. 한 몸 가운데 가장 소중한 자리 곧 심장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무엇이 심장인가? 부처님의 그 방대한 반야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자리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경은 가르침의 길을 가리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걸어온 길이요.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갈 길이 됩니다. 그러니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이라는 이 긴 이름을 이어붙이면 한량 없이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의 심장이라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름 다섯 마리를 풀어놓고 보면 이미 이 경전이 향하는 자리가 환히 드러납니다. 두려움과 번뇌가 흐르는 이쪽에서 그것이 본래 실체 없음을 보는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게 하는 지혜의 경전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전이 어떻게 해서 단 260자가 되었는가?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사연이 있습니다. 반야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은 본래 한두 권이 아니었습니다. 소풍 받냐 대품반이야? 금강바냐 인왕바냐 등 여러 갈래의 반야 경전이 흩어져 전해졌습니다. 이를 모두 합한 대반야바라밀다경은 무려 600 권에 이르는 방대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어지간한 수행자도 평생을 걸어야 다 읽기 어려운 분량이었던 것입니다. 그 600권의 점수를 단 260자로 간추려 담아낸 것이 바로 반야 심경입니다. 마치 드넓은 바다의 짠맛을 한 방울의 물에서 맛볼 수 있듯 반야부 경전의 가르침이 이 짧은 경전 한 편의 오롯이 모여 있습니다. 이것이 밤편입니다. 문자에 메이지 말고 그 한 방울이 가리키는 바다 전체의 맛을 보셔야 합니다. 예로부터 반야 신경이 이토록 널리 퍼진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경전의 가르침이 깊을수록 그것을 간직하고 가까이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수백 권에 이르는 경전은 읽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뜻을 새기기는 더욱 어려운 까닭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려면 아이도 어른도 그를 배운 이도 배우지 못한 이도 품에 지닐 수 있어야 했습니다. 누구든 한 번 외우고 가까이 둘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냐 심경은 바로 그 피로에 응답하여 나온 경전입니다. 짧고 간결하되 깊이는 조금도 얕지 않은 그야말로 한 손에 들 수 있는 심장이라 하겠습니다. 바냐 심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지금의 형태로 널리 읽히게 된 데에는 중국 현장 법사라는 분의 인연이 깊이 스며 있습니다. 7세기의 구법승 현장 스님은 한 경전의 뜻을 제대로 새기고자 인도로 향하는 긴 길을 떠나셨습니다. 사막을 건너시고 높은 산을 넘으시며 수많은 위기 앞에 서야 했던 분이셨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 고된 여정의 순간마다 마음을 다잡게 해 준 것이 바로 반야심경이었다고 합니다. 구절 하나하나가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의지처가 되어 주었던 까닭입니다. 인도에서 돌아오신 현장 스님은 수많은 경전을 한자로 옮기셨고 그 가운데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많이 읽힌 것이 바로 이바냐 심경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법당에서 손을 모으고 외우는 바로 그 경전의 뿌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불자들의 일상 속에서도 반야 심경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새벽 예불에서 사시 예불에서 초하루 법회에서 그리고 49세의 간절한 마음 앞에서 불자들은 이 260자를 되풀이하여 외웁니다. 49일에 길을 떠나는 망자를 배웅할 때도 살아있는 이의 번뇌를 달랠 때도 가장 먼저 소리내어 있는 경전이 되었습니다. 한국 불교 의식의 거의 모든 자리에 이 경전이 놓여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가까운 경전이기에 뜻을 하나도 모르신 채로 수십 년을 외워 오신 분도 계십니다. 소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말씀을 하시는 어른도 많습니다. 물론 그 말씀도 맞습니다. 경전에 올린 자체가 이미 한 수행의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자님들께서 법당에서 손을 모으고 이 경전을 외우실 때 그 소리가 마음의 어느 깊은 자리를 건드리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는 그 올림에 뒤에 놓인 뜻을 함께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뜻을 알고 외우는 것과 모르고 외우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뜻을 알게 되시면 단순히 외우던 구절이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며 우리의 마음을 건드려 옵니다. 이 작은 경전이 어떻게 두려움을 녹여내는가? 왜 위기의 순간마다 현장 법사의 마음을 지켜주었는가. 그 이치가 눈앞에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름 안에 이미 답이 놓여 있다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마 바냐 바람일다. 심 경 이 다섯 마디가 가리키는 방향은 오직 하나로 모아집니다.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러 번뇌가 쉬는 자리에 가담는 것 그 길을 가장 짧은 260자로 열어 두신 경전이 바로 바냐 심경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이 경전이 실제로 어떤 말씀으로 시작되는지를 함께 따라가 보려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하셨는가? 그 이치에 뿌리가 되는 첫 물음부터 차분히 풀어 드리겠습니다. 바냐 심경에 문을 여는 그 첫 문장 안에 우리가 오래 품어온 두려움의 칠마리가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한 가지 물음을 드려봅니다. 사람은 왜 두려운가? 이 물음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답이 쉽게 나올 것 같지만 막상 스스로 묻고 보면 쉽게 풀리지 않는 물음입니다. 돈이 없어서 두려운가. 몸이 아파서 두려운가. 혼자 남겨질까 두려운가. 하나씩 짚어 보면 두려움의 얼굴은 수십 가지로 갈라집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보신 자리는 그 수십 가지 얼굴에 뿌리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 서로 다를 뿐 그 아래에는 하나의 같은 자리가 놓여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냐 심경이 첫 머리에서 오온과 공을 이야기하시는 까닭도 바로 그 뿌리 자리를 먼저 보이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두려움에 뿌리자리에는 두 글자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무명이라 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반야심경 본문 후반부에 놓인 전도 몽상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이 두 마디가 가리키는 뜻을 먼저 풀어드리겠습니다. 두 말씀이 함께 가리키는 곳은 같은 자리입니다. 곧 실상을 잇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뒤집힌 눈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말합니다. 무명이라는 말씀부터 찬찬히 들여다보십시오. 없을 무 밝을 명 문자 그대로는 밝음이 없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나 그 밝음이 없다는 말이 세상의 빛이 꺼졌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마음이 실상을 비추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해는 떠 있되 눈을 감고 서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받기 어두운 탓이 아닌 눈이 닫혀 있는 까닭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마음이 바로 그와 같다고 전하셨습니다. 세상이 본래 어두워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의 눈이 감겨 있기에 두려움이 생겨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로는 세 가지를 보지 못한다. 하십니다. 첫째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이치 곧 재핵 무상을 보지 못합니다. 둘째는 모든 것에 고정된 나가 없다는 이치 곧 재범무아를 놓치게 됩니다. 셋째는 그 모든 것이 결국 괴로움으로 이어진다는 이치 곧 일체 계고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데 묶어 삼법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보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붙잡게 됩니다. 흘러가는 것이 머물러 있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며 본래 비어 있는 것을 가득 차 있다고 여기게 되는 까닭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두려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한 생각 뒤집어 보십시오. 만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본래 변치 않는 것이라면 이를 걱정이 애초에 없었을 것입니다. 건강도 재물도 자식도 사랑도 변하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이유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변합니다. 흐르는 것을 손에 쥐어두려 하기에 그 손끝에 두려움이 매달려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보신 두려움의 첫 번째 얼굴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평생 매달려 온 걱정의 대부분이 이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혹여 병이 들까 애를 태우게 되고 자라서는 좋은 자리를 얻지 못할까 밤을 새우게 됩니다. 장성한 뒤에는 멀어질까?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또 흔들리기도 합니다. 건강이 좋으실 때는 늙음이 두려우며 늙어가시면 병들미 걱정되고 병이 들면 떠남이 두려워지기 마련입니다. 이 모든 두려움이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뿌리를 파보면 한결같이 한 자리에서 솟아나고 있습니다.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게 붙잡으려는 마음 그 한 자리입니다. 두 번째 얼굴은 더 깊은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반야 신경에서는 그것을 전도 몽상이라 부르십니다. 전도는 뒤집혔다는 뜻이고 몽상은 꿈 같은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뒤집힌 눈으로 세상을 보고 꿈속의 허상을 실상이라 믿는 것입니다. 무엇이 뒤집혔는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는 이렇습니다. 본래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 여기고 본래 괴로움의 씨가 있는 것을 즐거움이라 여깁니다. 본래 나라 할 것이 없는 자리에 나를 세우고 본래 깨끗하지 못한 것을 깨끗하다. 여기는 마음. 이 네 가지 뒤집힘을 사전도라 이름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 네 가지 뒤집힘 위에 얹혀 살고 있는 까닭에 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이 결국 두려움의 씨앗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십시오. 어둠 속에서 새끼주를 밟고 그것을 뱀이라 여겨 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새끼들은 새끼줄일 뿐 뱀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사람의 가슴은 쿵쾅대고 식은땀이 흐르며 발은 굳어집니다. 공포는 생생하되 뱀은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두려움이 꼭 이와 같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실제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뒤집힌 눈이 만들어낸 그림자에 놀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일상 속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자식이 평소보다 늦게 들어오는 날 밖에 큰 사고가 난 것은 아닐지. 가슴이 내려앉은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저 길이 막혀 늦은 것뿐인데 마음속에서는 이미 큰 사건이 벌어져 있습니다. 건강검진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머릿속에 온갖 병이 스쳐 지나가며 밤잠을 설치신 기억도 있으실 것입니다. 결과지가 왔을 때 대부분은 아무 일이 아니었는데 기다리는 동안에 두려움은 생생하였습니다. 새끼줄을 뱀이라 놀라던 그 자리와 본질이 조금도 다르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느끼는 이 불안은 모두 가짜라는 말씀인가? 그렇게 단순하게만 들으시면 오해가 생깁니다. 부처님께서 가리키시는 자리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마음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일어나는 뿌리자리가 뒤집힌 날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을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십시오. 한밤중에 일어나는 그 불안 가운데 정말로 지금 이 순간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비롯된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미리 걱정이거나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대한 후회의 되새김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자리에는 없는 일들을 마음이 끌어와 그려놓고 그 그림에 스스로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마음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바깥의 사물이 아닌 그 사물을 실체로 잡아두려 하는 마음 안의 손길입니다. 손에 쥔 것이 있어야 잃을 수 있고 이를 대상이 있어야만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본래 비어 있는 자리에는 잃을 것도 놓칠 것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반야 심경이 첫 문장에서부터 공을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공은 허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붙잡을 자리가 본래 없음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붙잡을 자리가 없어진 마음에는 두려움이 머무를 기댈 것 또한 사라지게 됩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는 이치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두려움의 정체를 먼저 한번 들여다보았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수십 가지 얼굴이 아닌 그 아래 놓인 한 자리 곧 뒤집힌 알매자리가 진짜 원인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뿌리를 알고 나야 바냐. 심경이 앞으로 펼쳐 보이실 공의 가르침이 낯설지 않게 다가옵니다. 다음 시간에는 반야 심경이 이뿌리 자리에 어떻게 첫 빛을 비추기 시작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맨 처음으로 보신 한 구절이 있습니다. 돈이 모두 콩함을 비추어 모든 괴로움을 건너셨다는 그 선언입니다. 그 짧은 선언 안에 두려움을 녹여내는 첫 열쇠가 놓여 있습니다. 이제 반야심경의 첫 문장 안으로 걸음을 옮겨보겠습니다. 본문을 펼치면 맨 앞에 이런 한 줄이 놓여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원계공 도일체고액 반자 그대로 읽으면 어렵게 들리시겠지만 이 한 줄 안에 바냐 심경이 전하려는 모든 말씀에 씨앗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긴장을 놓으시고 한 글자 한 글자 함께 풀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관자 재보살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관은 비추어 본다는 뜻입니다. 자제는 걸림이 없다는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면 비추어 보되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이름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관세음 보살과 같은 분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소리를 낱낱이 들으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모든 실상을 걸림없이 비추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바니아 심경의 말씀은 관자재보살이 사리자에게 이르시는 형태로 펼쳐집니다. 문을 여는 이 첫 장면에서도 관자재보살이 앞에 나서십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반야의 가르침이 머리의 논리가 아닌 관하여 비추어 보는 수행의 장에서 열린다는 점을 경전 첫머리에서부터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귀로 들어 이해하는 지혜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직접 보아 얻는 지혜가 반야임을 관자재보살이라는 이름 자체로 가리키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얻게 됩니다. 바니아 심경은 암기의 대상이 아닌 관의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외워서 입에 담는 자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한 구절 한 구절을 마음의 눈으로 비추어 보아야 본래의 뜻이 열리는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자리 역시 그저 해설을 듣는 자리에 그치지 않고 마음의 한 편을 여시어 가만히 비추어 보시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말씀이 행심반이야. 바람일 다시입니다. 행심은 깊이 행하였다는 뜻이고 바냐바라밀다시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어붙이면 관좌 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 계실 때라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한 글자가 있습니다. 바로 깃을 심 곧 심이라는 글자가 되겠습니다. 반야에는 얕은 바냐가 있고 깊은 반야가 있습니다. 얕은 바냐는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자리까지입니다. 깊은 반야는 이치가 그대로 내 마음이 되어 마음의 결이 바뀌는 자리를 말합니다. 관자재보살은 바로 이 깊은 반야를 행하고 계실 때 한 장면을 비추어 보셨습니다. 그 장면이 바로 조겨 놓은 계곡입니다. 조견은 비추어 보았다는 뜻이고 오운 계공은 오은이 모두 공하다는 뜻입니다. 이 네 글자를 풀어내는 일이 오늘 이 자리에 첫 열쇠가 됩니다. 먼저 오온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오은은 다섯이고 오는 쌓여 이루어진 무더기를 말하므로 합하면 다섯 무더기가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가 나라고 붙잡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뜯어 보실 때 그 정체가 결국 다섯 무더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께서 평생을 지켜온 이 나라는 자리도 이 다섯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다. 하나씩 가만히 짚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무더기는 색이라 하십니다. 색은 흔히 빛깔이나 모양을 가리키는 글자이지만 불교에서는 그보다 훨씬 넓은 뜻을 지닙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것 형상을 가진 것 일체를 말합니다. 우리의 몸 뼈와 살과 피부도 세계 속하며 눈앞에 나무 돌 집 자동차 또한 세계에 해당합니다. 한마디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영역 전체가 되겠습니다. 두 번째는 수라 부르십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느낌이 됩니다.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 하는 세 갈래의 느낌이 매 순간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셨을 때의 선선한 바람 자식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따뜻함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 상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이 수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됩니다. 세 번째는 산이라 하십니다. 받아들인 것을 모양 짓고 이름 붙이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저것은 사과 저희는 내 자식 이것은 좋은 일 저것은 나쁜 일 이렇게 끊임없이 경계의 이름표를 붙이는 마음이 바로 상의 자리가 되겠습니다. 네 번째는 행위라 하십니다.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의 흐름을 말합니다. 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저희를 해야 한다. 이 물건을 가져야 한다. 이 모든 움직임이 바로 행의 작용이 됩니다. 다섯 번째가 시기라 하십니다. 식은식별하고 분별하는 의식을 가리킵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나의 경험으로 묶어내는 마음의 뿌리 자리가 됩니다. 흔히 우리가 나의 의식 나의 마음이라 부르는 바로 그 울림에 해당합니다. 이 다선 무더기 곧 색수상 행식이 쌓여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몸이 있고 느낌이 있고 생각이 있고 의지가 있고 의식이 있어 이 모두를 묶어 나가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관자재보살께서 깊은 반야의 눈으로 비추어 보신 자리는 이 다섯 무더기의 정체였습니다. 여기에서 한번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보통 나라고 하면 그 안쪽에 무언가 변하지 않는 발맹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내 몸이 병들어도 그 알맹이는 남아 있을 것 같고 내 마음이 흔들려도 근본은 지켜질 것 같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바로는 그 안쪽에 따로 숨어 있는 고정된 알맹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선 무더기가 인연 따라 잠시 모여 이 모양을 이루고 있을 뿐 그 바깥에 따로 서 있는 나가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 정체가 바로 개공 모두 공화당을 선언입니다. 다선 무더기 중 어느 하나도 고정된 실체로 서 있지 않으며 서로 인연하여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흐름일 뿐이라는 말씀이십니다. 몸도 공하고 느낌도 공하며 생각도 공하고 의지도 공하며 의식 또한 공합니다. 이 다섯이 모두 공화당이면 이를 묶어 세운 나라는 이름도 결국 잡을 수 없는 흐름 위에 얹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선언이 얼마나 큰 말씀인지 한번 가만히 헤아려 보십시오. 우리가 평생 지키려 애써 온 그나. 잃을까 두려워하고 상처받을까 움츠리며 인정받지 못할까 바르르 떨어온 그 자리 그 자리가 본래 고정된 실체가 아닌 인연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무더기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한마디 앞에서 두려움에 뿌리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경제는 바로 뒤에 네 글자를 덧붙이십니다. 도일체 고액이 바로 그 네 글자가 됩니다. 돈은 건넸다는 뜻이고 일체 고액은 모든 괴로움을 말합니다. 이어풀면 이로써 모든 괴로움을 건너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신 순간 관자재보살께서는 이미 모든 괴로움의 강 저편에 서 계셨다는 뜻입니다. 불자님들 이 도라는 한 글자를 가볍게 지나치지 마십시오. 돈은 건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건네 주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관자 재보살 한 분이 먼저 건너신 자리를 우리에게도 열어 보여 주시는 까닭입니다. 홀로 닫아두지 않으시고 저 언덕의 소식을 이쪽까지 전해주시려는 자비의 손길이 이 한 글자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반야 신경의 첫 문장이 품고 있는 선언입니다. 긴 설명이 붙기 전에 경전은 이미 결론을 먼저 내어 주고 있습니다. 깊은 반야로 오은의 공함을 비추어 보면 모든 괴로움이 건너진다. 이해한 줄이 260자 전체의 뼈대가 됩니다. 물론 온이 어떻게 하여 공한 것인지 그 관계에 이치는 다음 시간에 이어 풀어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먼저 관자재보살께서 내려주신 이 첫 선언을 가슴에 담아 두십시오. 돈이 모두 공하다. 그러므로 건너지 못할 괴로움이 없다. 반야 심경이 문을 여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오래 품어 온 두려움의 뿌리가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관자재보살케서 내리신 첫 선언을 함께 보았습니다. 돈이 모두 공하다는 그 한마디가 두려움에 뿌리를 흔드는 첫 열쇠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남으십니다. 몸과 느낌과 생각 또 의지와 의식 이 다섯 가지가 분명히 지금도 여기 이렇게 있는데 어째서 공화다 하시는가? 오늘 이 자리에서는 바로 그 관계의 이치를 풀어드리겠습니다. 반이야 심경은 다섯 무더기의 공함을 선언하신 뒤 곧바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십니다. 살이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00즉시색 이 16 글자가 오늘 우리가 함께 마주할 구절입니다. 바냐심경 260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이자 깊이의 한가운데에 놓인 심장과도 같은 말씀이 되겠습니다. 먼저 맨 앞에 자리잡부터 살펴보십시오. 사리자는 사리불이라고도 부르는 부처님의 제자이시며 지혜가 가장 뛰어나기로 이름이 높으셨던 분이십니다. 관자재보살께서는 앞서 내리신 그 선언을 지혜 제일의 제자인 사리자에게 이어 설하시는 형식을 취하십니다. 지혜의 눈을 갖추신 분에게 건네시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이어지는 구절이 얼마나 깊은 자리를 가리키는지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색불이공 공불이 새깁니다. 색은 앞서 살펴본 대로 물질과 형상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부리는 둘이 아님이며 공은 비어 있음을 말합니다. 풀어 읽으면 색이 공과 둘이 아니며 공 또한 색과 따로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처음 들으시면 같은 말을 방향만 바꿔 두 번 하신 것처럼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자재보살께서는 말씀 한 줄을 허투루 포개어 두지 않으십니다. 여기에는 깊은 까닭이 놓여 있습니다. 색불이공 색이 공과 둘이 아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속에 이미 공의 이치가 들어 있음을 가리킵니다. 저 돌 저 나무 이모 이손 모두 형태가 뚜렷하고 손에 잡히는 실체처럼 보이지만 그 어느 것도 홀로 서 있지 않습니다. 둘은 바람과 비와 오랜 세월이 만나 빚어졌고 나무는 씨앗과 흙과 햇볕이 인연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형상이 있으되 그 안에 고정된 알맹이가 없다는 이치 이것이 세간에 이미 놓여 있는 공의 모습입니다. 공불이 생 공 또한 색과 둘이 아니라는 말씀은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키십니다. 공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무가 아닙니다. 고정된 알맹이가 없을 뿐 2년 따라 지금 여기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공은 사물의 바깥 어딘가에 따로 숨어 있는 어떤 원리가 아닌 바로 이색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줄을 함께 읽으시면 색과 공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색은 색대로 공은 공대로 한쪽에 서 있는 두 물건이 아닌 한 자리의 두 얼굴인 것입니다. 마치 파도와 물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파도는 분명 모양이 있고 움직임이 있지만 그 본바탕은 물입니다. 파도를 떠난 물이 따로 있지 않고 물을 떠난 파도 또한 따로 있지 않습니다. 형상과 바탕이 둘이 아닌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파도와 물의 이치를 우리 몸엔 한번 얹어 보십시오. 지금 이 몸도 매 순간 들고 나는 순결과 오가는 피와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세포들이 만들어내는 한 흐름입니다. 십 년 전에 이 몸과 오늘의 이 몸은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구성은 이미 여러 번 바뀌어 왔습니다. 파도가 잠시 그 모양을 지어 보였다가 다시 물로 돌아가듯 우리의 몸 또한 인연 따라 이 모양을 지어 보이고 있는 한 파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간에서 바로 공을 보시는 첫 걸음입니다. 이 파도와 물의 자리를 이해하고 나서야 그 다음 구절이 온전히 들어옵니다. 색즉시공 공적 시세.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앞에 색불이공 공부리 새끼 둘이 아님을 밝히는 소극적 표현이었다면 색즉시00즉시색은 한 걸음 더 나아간 말씀이 됩니다. 둘이 곧 하나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 8 글자가 품고 있는 힘은 참으로 깊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몸이 곧 공의 모습이고 공의 위치가 곧 지금 이 몸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따로 먼 곳에서 공을 찾을 까닭이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몸과 마음 그 자체가 이미 공에 드러남인 것입니다. 그런데 반이야 심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같은 이치를 나머지 내 무더기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주십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느낌과 모양짓기와 의지와 의식 이 네 가지 또한 이와 같다는 말씀이십니다. 앞에서 색에 대해 설하신 네 구절의 이치가 느낌에도 생각에도 의지에도 의식에도 똑같이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이 역부여시 한마디를 풀어보면 한 편의 거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수불위공 공불이 수 수죽
공직 시수 산불이공 공불의상 상직 시공 공직 시상 행과 시계 대해서도 같은 구조가 그대로 이어집니다. 다선. 무더기 하나하나가 공과 둘이 아니며 곧 공 그 자체로 드러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말하자면
반이야 심경은 여기서 같은 이치를 5번 반복하여 설해 주십.
일부러 내 구절을 다 펼쳐놓지 않으시고 역부여식 한마디로 묶어 넘어가십니다. 이치가. 같으므로 그저
뿐임을 밝히시려는 뜻입니다. 한. 번 꿰뚫으면 5 무더기 모두가 한 꿰미에 꿰어진다는 말씀으로 들어주십시오. 2. 대목이 왜 중요한가? 몸의 공함에 그치지 않고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의식도 모두 공한 것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몸은 더덥다고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내 느낌 내 생각만은 단단한 실체라 붙잡고 살아갑니다.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한다는 그 생각 내가 그때
그랬어야 한다는 그 후회 이것만은 내 것이라 끝까지 놓지 못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부처님께서 같은 이치를 한 번 더 들이대어
것입니다. 가만히 자신의 마음 한 자락을 비추어 보십시오. 어젯밤. 잠을 설치게 했던 그 걱정이 오늘 아침에도 똑같은 무
있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한 달. 전 가슴을 찌르던 그 말 한마디도 지금은 이미 옅어졌거나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수 있습니다. 느낌과 생각은. 고정된 실체로 서 있지 않고 인연 따라 흘러가는 흐름입니다. 바니아 심경은. 바로 이 흐름의 이치를
수상행식 역부여시 여덟 글자에 담아 전해 주십니다. 여기까지 이르시면
앞서 관자재보살께서 내리신 오온계공의 선언이 왜 그토록
큰 말씀이었는지 한층 또렷해집니다. 색과 공이 따로 있지 않고
수와 공 또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상도 행동 식도 공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다선 무더기가 이미 공의 이치 위에 얹혀 흐르고 있었
일을 무엇이 따로 고정되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본래. 이를 알맹이가 없는 자리에서 두려움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심장이라 일컬어지는 대목입니다. 수많은. 조사 스님들이 이 16자를 붙들고 평생을 공부하셨고
수행자들이 2한 9절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여다본 이 자리 역시 그분들이 서셨던 바로 그 자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길고 화려한 해설이 이 구절의 깊이를 더해 주는 것이 아닌 한 번 가슴으로 받아들이
그 순간이 이 16자의 참뜻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2. 구절을 가슴에 가만히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색즉시공. 공적 시세. 지금 여기에 이 몸과
마음이 곧 공에 드러남임을 한번 비추어 보십시오. 그. 한 번의 관조만으로도 반야의 문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옵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심경이 이공의 이치를 한 걸음 더 깊이 풀어 보이시는 자리로 이어집니다. 생겨남도. 사라짐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다고 하시는
6가지 부정의 구절을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모니 공과 둘이 아니라는 그 이치
건네받으신 사리자에게 관자재보살께서는 이어 한 걸음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가십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중불감. 오늘. 이 자리
함께 풀어드릴 구절이 됩니다. 얼핏 들으면. 어렵게 느껴지시겠지만 한 글자씩 따라가 보시면 앞서 말씀하신 공의 이치가 한층 또렷한 빛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앞머리의. 시제법 공상을 살펴보십시오. 지는 이것이라는. 뜻이고 제법은 모든 법 곧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킵니다. 공상은 공한. 모습입니다.
이어 붙이면 이 모든 것들의 공한 모습이라는 뜻이 됩니다. 관자 재보살께서는
색과 수상 행식에 이어 이번에는 범위를 더 넓혀 세상 모든 법의 공의 이치를 들이대시.
것입니다. 그 공한 모습이 어떠한가? 그? 답이 이어지는 여섯 글자로 이루어진 세 마디에 담깁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한자 세상이 각각 짝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 아닐 불을 붙여 양쪽을 동시에 비우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단단히 붙잡고 있는 세 가지 대립 구도를 부처님의 눈으로
해제하시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첫. 번째 짝이 불생불멸입니다 생은. 태어남이며 멸은 사라짐을 가리킵니다. 풀어. 읽으면 태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는 뜻입니다.
들으시면 터무니 없는 말씀처럼 느끼실 수 있습니다. 눈앞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어제까지 옆에 계시던 분이 떠나가시는 일을 우리는 매일 마주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찌 태어남도 사라짐도 없다 하시는
관자재보살께서 가리키시는 자리는 태어남이라는 사건과 사라짐이라는 사건의 바깥쪽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양이 처음 눈에 들어오는 순간을 태어남이라 부르고 그 모양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을 사라짐이라 부릅니다.
그 모양 이전에 이미 흐르고 있던 인연의 흐름을 보시면 새로 생겨난 것도 없고 어디론가 끊겨 사라진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한. 포기 벼의 이삭을 떠올려 보십시오. 저. 이삭은 땅에서 홀로 솟아난 것이 아닙니다. 흙이. 있었고 물이 있었으며 햇볕이 있었고 지난해 뿌려진 한 알의 씨가 함께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인연이 모여 잠시 이삭의 모양을 지어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삭이 사라진 뒤에도 그 안에 있던 물과 흙과 양분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 또 다른 인연을 짓습니다. 본래 홀로 시작된 바가 없었고 완전히 끊어져 없어진 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몸은 부모님이 계셨기에 있고 부모님은 또 그 부모님이 계셨기에 있었습니다.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한 점에서 홀로 시작된 태연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이 몸이 사라진다 하여도 그 안을 흐르던 순결과 원소는 온 세상으로 돌아가 또 다른 인연을 짓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보신 불생불멸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이 대목이 먼저 떠나보낸 분을 가슴에 품고 계신 분들에게 어떤 위로가 되는지를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분의 존재가 완전히 끊겨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탄생의 모양이 우리 시야에서 거두어졌을 뿐 그 안에 담겼던 순결과 원소와 인연은 다시 다른 모습으로 이어져 흐르고 있습니다. 불생불멸의 가르침은 단순한 논리가 아닌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가장 오랜 슬픔을 조용히 다독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짝이 불구부정입니다. 구는 더러움이며 정은 깨끗함을 가리킵니다. 풀어 읽으면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말씀이 됩니다. 이 말씀 앞에서도 처음에는 고개가 갸웃해지실 수 있습니다. 더러운 것은 더럽고 깨끗한 것은 깨끗한데 어찌 그 둘을 동시에 부정하시는가? 관자 재보살께서 가리키시는 자리는 더러움과 깨끗함을 갈라놓는 우리 마음의 분별 자체입니다. 한 잔에 물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 물이 더러운지 깨끗한지를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사람이 마시기에는 깨끗하지만 반도체 미세 공정에서 쓰기에는 더러운 물일 수 있습니다. 한 조각의 흙도 그러합니다. 밭에서는 생명을 길러내는 소중한 흙이지만 마룻바닥에 떨어지면 먼지라 불립니다. 더러움과 깨끗함은 대상 자체에 붙어 있는 본래의 성질이 아닙니다. 보는 자리에 따라 쓰임에 따라 잠시 부처지는 이름일 뿐입니다. 마음에 대해서도 같은 이치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마음은 깨끗하고 탐내는 마음은 더럽다고 나누어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바탕에서 보시면 마음 자체에 더러운 마음과 깨끗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작용이 있을 뿐입니다. 본래 자리에서 보면 붙이고 떼어낼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세 번째 짝이 부준불감입니다. 증은 더해짐이며 감은 줄어듦을 가리킵니다. 풀어 읽으면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것을 더하려 애쓰고 줄어들까? 조바심을 내며 살아갑니다. 재산이 늘어야 안심이 되고 줄어들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건강이 쌓이기를 바라고 늙어가며 줄어든다고 괴로워합니다. 공덕도 더 짓고자 하고 허물은 덜어내고자 합니다. 이 모든 마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자연스러운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관자재보살께서 비추어 보신 공의 자리에서는 원래 늙어 주는 바가 따로 없습니다. 드넓은 바다를 떠올려 보십시오. 강물이 쉴 새 없이 바다로 흘러들어가지만 바다는 더 불어나지 않습니다. 햇볕에 물이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가지만 바다가 더 줄어드는 법도 없습니다. 들고 나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있대. 그 본바탕의 크기는 더해지지도 덜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반야의 눈으로 본 제법의 모습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이 부중불감의 이치는 오래 수행하셨어도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 있으셨던 분들께 한마디 위로가 되어 줍니다. 오늘 기도가 잘 되지 않았다 하여 어제 싸운 공덕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마음이 흔들렸다 하여 본래 자리가 깎여 나가는 일 또한 없습니다. 본바탕의 크기는 내 마음에 오르내림을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이 한마디를 가슴에 품으시면 그동안 스스로를 자주 탓하셨던 분들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실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세짝의 부정을 따라오시면 한 가지 결이 몸으로 느껴지시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생과 멸 구와 정 증과 감이라는 우리의 뿌리 깊은 대립구도를 하나씩 지어가십니다. 그러면서 모든 법의 본래 모습이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 있지 않음을 보여 주십니다. 있다고 붙잡을 자리도 없다고 물리칠 자리도 본래는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 6 글자의 부정이 우리의 일상에 닿는 자리를 한번 짚어 보십시오. 우리가 밤마다 뒤척이게 만드는 걱정의 많은 부분이 바로 이 세 가지 대립 위에 얹혀 있음을 알아차리실 수 있습니다.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생멸의 짝을 붙잡고 있는 것이며 나의 허물을 덮고 남의 허물을 들추려는 마음은 구정에 짝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부족할까? 조바심을 내는 마음은 증감에 짝을 놓지 못하고 매달려 있는 까닭입니다. 관자재보살께서 건네시는 말씀은 이짝 지어진 대립들을 한 꺼풀씩 벗겨주시는 가르침이 됩니다. 극자기 본래 단단한 실체가 없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죄오던 희미한 겸 느슨해지는 자리가 열립니다. 다음 시간에는 관자재보살께서 20의 27을 우리의 감각과 경험의 세계에까지 적용하시는 대목으로 나아갑니다. 본에서 한 걸음 더 넓게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의 자리까지 비추어 보시는 반야심경의 다음 구절을 함께 풀어드리겠습니다. 관자 재보살께서 오온과 제법에 차례로 공의 이치를 비추신 뒤 이제는 그 눈길을 한 걸음 더 넓은 자리로 옮겨가십니다. 바로 우리의 감각과 그 감각이 만나는 바깥 세계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마음의 분별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함께 풀어드릴 구절은 이렇게 놓여 있습니다. 시고 공중무생 무수상행식 무한이비설신의 무색성 향미촉법 무한계 내지 무의식계 환자가 길게 늘어져 있어 어렵게 느껴지시겠지만 기둥은 오직 한 글자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없을 무입니다. 관자 재보살께서는 이 모자를 되풀이 놓으시면서 우리가 실제로 붙잡고 있던 모든 자리들을 하나씩 비워내십니다. 먼저 앞머리에 시고 공중무생 무수상행식부터 살펴보십시오. 시고는 그러므로라는 뜻이고 공중은 공한 자리 가운데라는 말이 됩니다. 풀어 읽으면 그러므로 공한 자리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수도산도 행도 식도 없다는 뜻입니다. 앞서 살펴본 다섯 무더기를 이번에는 공의 자리에서 다시 한번 비우시는 대목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니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결코 아닌 고정된 실체로 붙잡을 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몸과 느낌 생각과 의지와 의식은 분명히 지금 여기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작용들이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흐름일 뿐입니다. 어느 것도 고정된 알맹이로 서 있지 않음을 다시 한번 못 박아 주시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여섯 글자가 무한이비설신이입니다. 우리 몸의 여섯문이 되는 감각기관을 하나하나 들어 보이시는 대목이 되겠습니다. 많은 눈이며 이는 귀이고 비는 코이며 서른혀이고 시는 몸이며 의는 생각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목까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의의 곧 생각하는 마음까지 감각의 자리에 나란히 놓으십니다. 바로 이것이 불교의 고유한 통찰이 됩니다. 이 여섯 가지를 한자어로 육군이라 부릅니다. 불이 그늘 쓰는 까닭은 이 여섯 자리가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여섯 개의 뿌리 창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만나고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일이 이 여섯 문을 통과하여 일어나게 됩니다. 관자 재보살께서는 바로 이 6 창고 앞에서도 고정된 실체로 붙잡을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6 글자가 무색 성향미초법이 됩니다. 앞선 육군이 우리 안쪽에 여섯 문이라면 여기에 놓인 6 가지는 그 문을 통해 만나는 바깥의 6대상입니다. 색은 눈이 만나는 모양과 빛깔이고 성은 귀가 만나는 소리이며 향은 코가 만나는 냄새를 말합니다. 미는 혀가 만나는 맛이고 촉은 몸이 만나는 감촉이며 법은 뜻이 만나는 생각의 대상이 됩니다. 이 여섯 가지를 육경이라 부릅니다. 앞에 육군과 지금의 육경을 합하여 열두 가지 그것을 십이처라 이름하십니다. 저는 자리라는 뜻이며 안과 밖이 만나 감각의 경험이 일어나는 열두 개의 지점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거의 모든 일이 이 열두 지점을 떠나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바니아 심경은 바로 그 모든 자리 하나하나에 공의 이치를 다시 들이대어 주십니다. 여러분 이 열두 자리가 얼마나 우리 일상에 가까이 있는지 잠시 짚어 보십시오. 아침에 눈을 뜨시면 창으로 스며드는 빛이 먼저 눈에 닿고 멀리서 새소리가 귀를 지나며 부엌에서 풍기는 밤 냄새가 코를 스치게 됩니다. 뜨거운 찻잔이 손바닥에 닿는 감촉 입안에 퍼지는 구개맛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따라 일어나는 생각들 아침 한때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시비처는 이미 분주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산다는 것은 결국 이 열두 자리의 쉴 새 없는 움직임 속에 놓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관자 재보살께서 색부터 법까지 6 가지를 무라는 한 글자로 비워내시는 까닭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맛보는 그 경험 자체가 우리 안에 남기는 흔적이 결코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밝히시려는 것입니다. 한때 귀한 보석처럼 빛나 보이던 물건도 세월이 지나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한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던 향기 또한 기억 속에서 흐려져 갑니다. 모든 색과 소리와 냄새는 인연 따라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만남일 뿐 그 어느 것도 붙잡아 두어야 할 고정된 알맹이로 남지 않는 까닭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무한계 내지 무의식계입니다. 내지는 중간을 줄여 넘긴다는 표현이 되겠습니다. 불면 안개부터 시작하여 의식계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개에도 붙잡을 실체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계라는 말이 한 번 짚고 넘어갈 자리가 됩니다. 개는 세계 또는 영역을 뜻합니다. 육군 여섯에 육경 여섯이 만나면 그 사이에서 여섯 가지 식이 태어납니다. 눈이 빛깔을 만나면 안식이 일어나고 귀가 소리를 만나면 이식이 일어나며 코와 혀와 몸과 뜻에서도 각각의 식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여섯 가지 식을 육식이라 부릅니다. 육군과 육경과 육식을 모두 합하여 18가지 그것을 18개라 이름하십니다. 바니아 심경은 이 183개 모두에 공의 이치를 비추어 주십니다. 여기서 식이라는 자리를 한번 더 짚어 보십시오. 식은 단순히 안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바깥에 있는 어떤 대상을 안쪽의 나의 경험으로 옮겨오는 다리와도 같은 작용입니다. 그런데 이 다리 자체가 공이라는 말씀은 바깥의 일이 곧바로 내 안에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같은 말 한마디를 두고도 어떤 이는 크게 상처를 받으시고 어떤 이는 그저 흘려보내시기도 합니다. 소리와 귀는 같았으나 그 사이에 일어나는 시기 달리 작용한 까닭입니다. 이 자리가 왜 중요한가? 우리는 살면서 자주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바깥에 무엇이 나를 환하게 했다. 저 사람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내 귀에 들린 그 소리가 내 눈에 비친 그 장면이 나를 괴롭게 만든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파냐 심경은 괴로움이 바깥의 어느 한 자리에서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눈과 모양 귀와 소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식 이 세 가지가 맞물려 돌아갈 때 비로소 한 경험이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 자리 어느 쪽에도 고정된 실체가 따로 서 있지 않습니다. 눈 자체도 공이고 빛깔 자체도 공이며 그 둘 사이에서 일어난 식또한 공입니다. 세자리가 모두 공한데 그 사이에서 일어난 경험만 단단한 실체로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때 나를 그토록 흔들어 놓았던 말 한마디도 지나고 나면 한 인연의 자리였음을 알아차리실 수 있습니다. 소리와 귀와 생각이 잠시 모였다가 흩어진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이 12초와 18개 전체에 공의 이치를 비추어 주시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경험이라 부르는 모든 자리가 인연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흐름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 흐름 바깥에 따로 붙잡아 둘 알맹이가 없음을 알게 되시면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한때 그토록 무겁게 얹고 다니던 수많은 기억의 짐이 조금씩 제 무게를 덜어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오은의 공함에서 시작된 가르침이 감각과 세계 전체로까지 넓어지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이 오랜 가르침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걸림없이 자유롭게 하여 주시는지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바냐 심경이 오랜 준비를 거쳐 마침내 건네시는 한마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품어온 두려움이 어떤 빛 앞에서 녹아내리는지를 차분히 풀어드리겠습니다. 이제 반야 심경은 그 오랜 길의 정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관자 재보살께서 오온과 제법 12처와 18개에 이르기까지 공의 이치를 두루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 오랜 준비의 끝에 드디어 그 모든 말씀이 하나의 선언으로 모아지는 자리에 이르십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구절은 바로 이렇게 이어집니다. 무무명 영무무명진 내지 문호사 영문호 사진 무고진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신문가에 무과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문장이 길게 흘러가지만 그 안에 담긴 흐름은 하나로 꿰어져 있습니다. 한 걸음씩 따라가 보시겠습니다. 먼저 앞머리의 무무명 영무무명진에서 시작됩니다. 무명은 어둠 곧 실상을 보지 못하는 마음의 자리입니다. 앞선 시간에도 잠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무명조차 따로 붙잡을 실체가 없음을 여기서 다시 한번 비우시는 것입니다. 뒤어내진 문호사 역문호 사진이 따라옵니다. 노사는 늙음과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한생에서 가장 무겁게 다가오는 두 글자조차 본래 고정된 실체로 붙잡을 자리가 없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 사이에 내지라는 한마디는 중간을 줄여 넘긴다는 뜻입니다. 몰래 이 자리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시비 연기라 불리는 열두 고리의 흐름이 놓여 있습니다. 무명에서 시작하여 생각과 이름과 몸과 여섯 감각 자리로 이어지고 거기에서 집착이 일어나 결국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기나긴 인연의 사슬입니다. 다니아 심경은 그 열두 고리 전체를 비추시면서 어느 한 고리도 고정된 실체로 세워두실 것이 없음을 한꺼번에 드러내어 주십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무고진 멸도입니다. 이 네 글자는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설하신 네 가지 거룩한 진리 곧 사성제를 가리킵니다. 삶은 괴로움이며 그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끊어질 수 있으며 끊어가는 길 또한 있다는 가르침이 사성제입니다. 바니아 심경은 그토록 근본이 되는 진리마저 고정된 실체로 세워두지 말라 당부하십니다. 사성제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닌 그 가르침조차도 우리가 또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로 움켜쥐지 않도록 풀어놓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자리를 가볍게 지나치지 마십시오. 우리는 때로 수행을 쌓아갈수록 가르침 자체를 또 하나의 집착으로 삼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 법은 맞고 저 법은 틀렸다. 이 길은 바르고 저 길은 그르다는 분별을 단단히 세우게 됩니다. 바로 그때 처음에 풀어놓자 하셨던 그 마음이 다시 굳어지는 까닭입니다. 바니아 심경은 바로 그 굳어짐까지도 풀어주시려는 가르침이 됩니다. 그 뒤를 따라오는 무지한 무듯 밤도 없고 어둠도 없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무엇인가를 얻어 가려는 마음조차 또 하나의 집착이 될 수 있음을 짚으시는 대목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이르러 반야 심경은 심지어 깨달음이라는 가장 고귀한 경지까지도 공의 이치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으십니다. 이어 이무소 듣고 곧 얻을 바가 없는 까닭으로라는 한마디가 놓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본론의 한가운데가 열립니다. 보리살타 의바냐 바라밀다고. 보리살탕은 보살을 가리키며 의반야바라밀다고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이라는 뜻입니다. 풀어 읽으면 보살은 깊은 반야에 의지하는 까닭에 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네 글자가 2번 장의 심장이 되겠습니다. 신문가에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가에는 거리껴 걸림 곧 마음을 붙들어 매는 장애를 말합니다. 그 걸림이 없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무가애고 무유공포가 뒤따라옵니다.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다. 이해한 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어 보십시오. 바니아 심경이 260자를 달려와 우리에게 건네시는 결정적인 선언이 바로 이 자리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치는 두려움을 억지로 누르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참아내는 것도 모른 척 덮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붙잡고 있는 걸림 곧 실체로 주려는 손길이 놓이는 그 자리에서 두려움이 기댈 곳을 잃고 저절로 물러간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걸림이라는 한 글자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십시오. 걸림은 바깥 사물에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어떤 자리를 실제로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그 손의 힘이 곧 걸림입니다. 자식의 장래를 붙들고자 하는 마음 건강을 꼭 지키고자 하는 마음. 사람들의 시선을 놓지 못하는 마음 그 손에 힘이 단단할수록 그 자리에 두려움이 들러붙을 틈도 넓어집니다. 바냐 심경은 그 손에 힘이 풀려나는 자리를 가리켜 무유공포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지금 지금까지의 긴 여정이 오직 이 한마디를 위한 준비였습니다. 모니코하고 제법의 6자리가 비어 있으며 12처와 18개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서 있지 않다는 말씀을 이어주셨습니다. 그 모든 말씀이 결국 걸림없는 마음의 자리를 열어 보이시려는 한 흐름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원리전도 몽상 구경열반입니다. 그 원리는 멀리 떠난다는 뜻이고 전도 몽상은 앞서 여러 차례 말씀드린 뒤집힌 생각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경열받은 마지막 열반의 자리 곧 번뇌가 완전히 쉬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어 붙여풀면 뒤집힌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르신다는 말씀입니다. 전도 몽상이라는 네 글자를 다시 한 번 짚어 두십시오. 앞서 부처님께서 보신 두려움의 뿌리가 바로 이 자리였습니다.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 여기고 비어 있는 자리를 가득 차 있다. 여기는 그 뒤집힌 말입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어진다는 것은 바로 이 뒤집힘이 한꺼풀씩 벗겨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걸림이 풀리고 뒤집힘이 바로 세워질 때 번뇌가 본래 쉬는 자리가 그 자리에서 열립니다. 그 자리를 경전은 구경열반이라 부릅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한 수많은 두려움의 장면들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병을 진단받던 어느 날의 막막함 사랑하는 이의 부재 앞에서 무너졌던 그 방 앞날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홀로 뒤척이셨던 숱한 시간들이 마음에 남아 계실 것입니다. 모래 수행하셨어도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바냐 심경의 이 한 줄은 바로 그런 시간 한가운데로 내려와 걸림 없는 한 자락을 열어 보여 주시는 말씀이 됩니다. 두려움을 부정하시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꾸짖으시는 것 또한 아닙니다. 다만 그 두려움이 기대어 서 있던 한 자리가 있습니다. 곧 실체로 붙잡으려 애쓰던 마음의 손길입니다. 그 손길이 풀려날 때 두려움이 더 이상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한다는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한마디가 더 놓입니다. 3세 재불 의반야바람일다고 드가뇡따라. 삼막 삼보리 3세 제불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뜻합니다. 의반야 바라밀다고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시는 까닭 드가뇡다나 산막 산보리는 더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프로 읽으면 3세의 모든 부처님 또한 깊은 반야에 의지하시는 까닭에 더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으신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 한 줄은 참으로 큰 힘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니라는 가르침인 까닭입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 반야에 자리를 거쳐 가셨습니다. 지금의 부처님들도 이 자리를 지나고 계시며 앞으로 오실 부처님들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냐 심경을 외우는 우리의 마음짜리가 바로 그 길 위에 놓여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바냐 심경이 이 모든 가르침을 한 웅큼의 진언으로 여미어 주시는 마지막 대목으로 나아갑니다. 매일 입으로 되뇌는 그 짧은 진언 속에 오늘 우리가 풀어 본 걸림 없는 마음의 자리가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반야 심경이 긴 가르침의 걸음을 마치시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따라와 주신 모든 구절이 이제 한 몸큼의 진화 속으로 여미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풀어드릴 구절은 이렇게 놓여 있습니다. 고집안 야바라밀다 시대 신주 시대 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재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얼 아재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재 모지 사바 먼저 고지반 야바라밀다부터 살펴보십시오. 고지는 그러므로 알아라 하는 뜻이고 반야바라밀다는 우리가 내내 따라온 그 이름입니다. 이어 네 가지 찬탄이 놓여 있습니다. 시대 신주 시대 명주 시무상주 시무 등등주 대신주는 크고 신령한 주문이며 대명주는 크고 밝은 주문이고 무상주는 위가 없는 주문이며 무등등주는 견줄 바가 없는 주문이 되겠습니다. 내 마디가 거듭 쌓이면서 이 바냐의 가르침이 얼마나 깊고 귀한 자리인지를 전해주시는 대목이 됩니다. 이 네 마디의 찬탄은 그저 수식어가 아닙니다. 경전은 반야의 가르침을 주문이라 부르셨습니다. 주문이란 본래 외우는 그 자체로 마음의 어떤 자리를 움직이게 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반야의 가르침 역시 머리로만 이해하는 이치가 아닌 입으로 외우고 귀로 들으며 마음에 젖어드는 말씀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이야 심경은 오랜 세월 한국의 법당에서도 가정의 불단 앞에서도 끊임없이 소리내어 외워져 왔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능재일체고. 진실불허입니다. 능재는 능이 없앨 수 있다는 뜻이고 일체군은 모든 괴로움을 말합니다. 풀어 읽으면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며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는 말씀이랍니다. 앞서 관자 재보살께서 도일 최고액 곧 모든 괴로움을 건너셨다고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그 자리가 이 진언 안에 그대로 담겨 있음을 다시 한번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다음 다음에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알이 따라옵니다. 이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서라시니 그 주문은 곧 이러하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앞선 긴 설명이 모두 이 한 주를 향해 흘러오고 있었습니다. 이어 마침내 바냐 심경의 마지막 진언이 놓입니다. 아재아제 발아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 이 진화는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소리를 한자로 그대로 옮겨적은 것입니다. 뜻을 한자로 번역하지 않고 소리를 그대로 살려 두신 까닭이 있습니다. 진화는 뜻보다 울림이 먼저 마음에 닿는 말씀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인도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이 땅 한국에서도 이진원은 소리의 모양 그대로 외워져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입으로 되뇌는 그 소리가 바로 2500여 년 전의 울림과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짧은 한 주를 가만히 입속으로 굴려 보십시오. 낮에는 가자 하는 외침이고 바라아제는 저 언덕으로 가자 하는 구름이며 바라승 아재는 저 언덕으로 다 함께 가자 하는 말씀입니다. 뒤에 따라오는 모진은 깨달음이며 사바하는 두루 이루어지다 하는 거두는 소리가 됩니다. 이어 붙여 풀면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다 함께 저 언덕으로 가자. 깨달음이여 두루 이루어지이다 하는 발언이 되겠습니다. 한번 소리 내어 읽어 보시면 이 진언 자체가 이미 한 발걸음임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가자 가자 같은 말을 거듭 놓아 주신 까닭은 깨달음의 길이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지 않음을 드러내시려는 뜻입니다. 가고 또 가고 다시 또 가는 그 쉼없는 걸음이 곧 반야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아승아제라는 한마디가 참으로 깊습니다. 승은 다 함께라는 뜻입니다. 나 홀로 건너가는 것이 아닌 모든 이와 함께 건너가자는 간절한 부름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바냐의 길이 자비의 길과 둘이 아님을 마지막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일러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함께 따라온 긴 여정을 가만히 되짚어 보십시오. 반이야 심경 260자는 관자재보살에 깊은 선언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모닝 모두 콩함을 비추어 모든 괴로움을 건너셨다는 그 첫마디였습니다. 이어 색과 공이 둘이 아닌 이치가 펼쳐졌고 생과 멸 더러움과 깨끗함 늘어남과 줄어든 내 짝들이 차례로 내려놓이게 됩니다. 감각의 여섯 문과 바깥의 여섯 대 상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시까지 비추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모든 자리가 공의 빛 앞에 가지런히 놓이는 자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무가의 무유공포에 한 줄이 건너오셨습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머무를 곳을 잃는다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이 영상을 처음 여신 그 물음 왜 두려움이 사라지는가 하는 그 물음의 답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을 없애는 길이 아닌 두려움이 기대어서던 그 손길 자체가 풀려나는 길을 반야 심경은 건네주신 것입니다. 돌이켜 보시면 260자라는 짧은 분량 안에 참으로 많은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평생 동안 설하신 반야의 가르침이 이한경전에 고요히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외우는 것으로도 깊은 인연이 맺어지고 여러 해에 걸쳐 되낼수록 그 뜻이 한 겹씩 깊어집니다. 어떤 분은 수십 년을 외우셔도 새로운 자리를 발견하십니다. 어떤 분은 오늘 처음 그 뜻을 만나신 것만으로도 마음의 한 구석이 환해지시는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이 260자를 외우실 때에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우리의 마음을 한꺼풀씩 벗겨주는 손길임을 떠올려 보십시오. 법당에서 예부를 올리실 때 49세의 간절한 시간 앞에서 혹은 홀로 잠 못 드시는 밤에 이 경전을 차분히 염송해 보시면 좋습니다. 뜻을 따라 천천히 읽으시고 호흡을 고르시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에 담아 보십시오. 마지막 진언 아재아재 바라아제에 이르러서는 마음속으로 함께 길을 걸으시는 듯이 외워보시기 바랍니다. 하루 한 번 아침에 맑은 마음으로 한번 외우시고 밤에 잠들기 전에도 한번 외워 보시면 좋습니다. 그 하루 두 번만으로도 이 경전의 공덕은 고요히 우리 삶에 스며듭니다. 사경을 해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됩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손끝으로 옮겨 쓰시다 보면 경전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새겨지는 자리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백파렴주를 손에 쥐시고 하나란 알코올이 쉬면서 바냐 심경을 외우시는 방법도 좋습니다. 염주의 한 알이 지날 때마다 한 번씩 260자를 떠올려 보시면 108번의 관조가 쌓여 그대로 한 수행의 자리가 열립니다. 꼭 108번을 다 채우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 혹은 21번 내 힘이 닿는 자리에서 정성을 들이시면 그 공덕은 결코 얕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횟수가 아니라 한 번을 외워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시는 그 마음의 결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공부한 바냐의 가르침이 여러분 가정마다 고요히 스며들기를 소망합니다. 마음에 걸림을 한 겸 내려놓으시고 오래 안고 오신 두려움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 가라앉기를 바라노라. 이 공덕을 모든 인연이 있는 분들께 회양하며 함께 저 언덕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두 손 모아 축원드립니다. 어쩌면 이 영상을 만나시기 전까지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말씀이 멀게 만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260자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와 보시니 그것이 결코 허황된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이치 안에 이미 놓여 있던 길이었음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제 이 가르침은 더 이상 낯선 경전의 문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되낼 수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긴 범문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이 가르침이 마음에 닿으셨다면 아래 구독 버튼과 좋아요. 버튼을 눌러 주십시오. 불교 등대의 다음 범문에서도 부처님의 깊은 말씀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재아재 발아 아재 발아승아제 모지 사바 오랜 세월 절에 다니시면서 수행을 놓지 않으시면서도 마음 한쪽이 늘 무거우셨던 분이 계실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경전을 읽고 108배를 올려도 어딘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듯한 막막함에 사로잡혀 오셨을 줄 압니다. 부처님께서 정말로 전하고 싶으셨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그 물음이 풀리지 않은 채 마음속에 남아 있으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법화경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법하시면서 마지막에 약 꺼내신 진짜 가르침입니다. 이 경전을 여신 순간 5천 명의 제자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부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갈 사람은 나가도 좋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진실이다. 법화경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단 하나의 이유를 밝히신 경전입니다. 그 이유란 모든 중생에게 부처의 길을 열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선문도 연각도 보살도 결국 하나의 길로 돌아온다는 선언 이것이 일불승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들어왔던 바냐. 심경의 공사상 금강경의 무주삼보시 이 가르침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법화경은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의 큰 길을 향한 방편이었다고 밝힙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 진실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생의 근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대학 강의를 들려줄 수 없듯이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르침을 나누셨습니다. 소승과 대승 성문과 보살 이 구분 자체가 방편이었으며 마침내 때가 이르렀을 때 법화경을 통해 하나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것이 법화경이 다른 어떤 경전과도 다른 결정적인 지점이 됩니다. 법하경은 화음경 반야경과 함께 대승삼부경으로 불립니다. 천태종의 소의경전이며 예로부터 경전의 왕이라 불려왔습니다. 한국 불교에서도 화음경과 함께 사상의 두 기둥을 이루어 왔으며 강원에서 수익과 과목으로 채택될 만큼 그 무게가 깊은 경전입니다. 7 권 28 품으로 이루어진 이 방대한 경전 안에는 불타는 집에서 아이들을 구하는 아버지의 비유가 담겨 있습니다. 가난한 아들이 자기 안에 보물을 모르고 살았다는 이야기도 이어지며 극악인 제바달다에게조차 성불의 수기를 내리시고 팔세 용왕의 딸이 순식간에 부처가 되는 장면까지 펼쳐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여자도 악인도 축생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법화경 후반부에 이르면 더욱 놀라운 말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인도에서 35세의 깨달은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과거에 이미 성불한 영원한 부처라고 밝히십니다. 이것을 구원실성 곧 오래전에 이미 선불하셨다는 뜻으로 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관세음 보살의 서원도 바로 이 법화견 보문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관세음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33가지 몸으로 변화하여 중생을 구하러 오신다는 그 약속이 법화경에 담겨 있습니다. 2500년 전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이 경전을 설하셨을 때 법회 모인 대중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가르침 앞에서 몸을 떨었습니다. 그동안 배워온 모든 것이 방편이었다는 말씀은 수행자들에게 벼락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충격 너머에 더 크고 확실한 약속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부처가 된다. 이것이 법화경의 심장입니다. 오늘 이 법문에서는 법화경 28품의 핵심을 9개의 흐름으로 풀어드리겠습니다. 방편이란 무엇이었는지 일불승이 왜 혁명적 선언이었는지 제자들에게 내리신 성불의 약속은 어떤 의미였는지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며 따라와 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에는 법화경이 우리 삶에 건네는 최종 약속 앞에 함께 서게 될 것입니다. 법화경의 첫 번째 문이 열립니다. 방편품입니다. 법화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 바로 이 방편이라는 두 글자에 담겨 있습니다. 법화경 서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삼매에 드시어 미간에서 광명을 놓아 동쪽 만 8천 세계를 두루 비추셨습니다. 대중은 이 전례 없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이윽고 삼매에서 일어나신 부처님께서는 이어지는 방편품에서 사리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처의 지혜는 깊고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지혜의 문은 알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이 말씀을 세 차례 반복하셨습니다. 그러자 법회에 모인 대중 가운데 5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법회를 떠났습니다. 이것이 오천 퇴석입니다. 오랜 세월 부처님 곁에서 수행하며 자신은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고 여겼던 이들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진짜 가르침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 순간 자만심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이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5000명이 떠난 것은 가르침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기가 이미 다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떠나는 그들을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이 가운데 가지와 입만 있고 열매가 없는 자들이 물러갔으므로 이제 좋다. 사리브라 잘 들으라. 부처님께서 5천 명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여신 까닭이 있습니다. 법화경의 가르침은 마음이 비어 있어야 담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득 찬 그릇에는 아무것도 보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빈 그릇이 된 대중 앞에서 그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으셨던 진실을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진실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에게 이렇게 설하십니다. 내가 이전에 설한 성문승과 연각승과 보살승 이 세 가지는 모두 방편이었다. 오직 일불순만이 진실이다. 이 말씀이 법화경 방편품의 심장입니다. 그동안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사성제도 팔정도도 12연기도 모두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으로 이끄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방편이란 무엇입니까? 산스크리트어로 우파야라 합니다. 목적지까지 데려가기 위한 수단이며 중생의 근기에 맞춰 펼치신 가르침의 방법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증상에 따라 다른 약을 처방하듯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르침을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약이 다르다고 해서 건강해지려는 목표까지 다른 것은 아닙니다. 방편은 거짓이 아니었으며 진실에 이르는 자비로운 길이었습니다. 방편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방편을 쓰신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마냥 내가 처음부터 일본순만을 설하였다면 중생은 혼란에 빠져 이 법을 믿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방편으로 세 가지 길을 보였다. 이 말씀 속에는 45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부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상을 내지 말라 하시고 반야 심경에서 공을 깨우치라 하신 가르침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모든 범문이 중생을 불타는 집 밖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밤편이라는 말을 듣고 지금까지의 수행이 가짜였느냐고 되물으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법하경은 분명히 답합니다. 아닙니다. 양의 수레가 아이를 불타는 집 밖으로 이끈 것은 사실입니다. 그 수레가 아니었다면 아이는 집안에서 타 죽었을 것입니다. 방편은 진실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가는 달이었습니다. 법화경은 이 방편의 의미를 하나의 비유로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핫택 삼고 불타는 집과 세수레의 비유입니다. 한 장자가 있었습니다. 넓은 집에 수백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집에 불이 붙었습니다. 사방으로 불길이 번지고 기둥이 무너지는 가운데 독춤과 악귀들까지 들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놀이에 빠져 있었기에 장자가 소리쳐 불러도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장자는 생각하였습니다. 이 아이들을 억지로 안고 나가기에는 문이 좁고 아이들은 너무 많다. 그래서 장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기로 하였습니다. 문 밖의 양이 끄는 술에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 이 세 가지가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수레를 타고 싶은 마음에 다투어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문을 나서니 그 자리에는 세 종류의 수레가 아니라 크고 흰 소가 끄는 하나의 큰 수레만 놓여 있었습니다. 장자는 모든 아이에게 똑같이 그 큰 수레를 내어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장자는 부처님이십니다. 불타는 집은 삼개 곧 우리가 사는 이 세상입니다. 양의 수레는 선문승을 사슴의 수레는 연각승을 소의 수레는 보살승을 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저마다의 수행 단계에 맞추어 세 가지 길을 보여 주셨으나 그것은 불타는 집에서 아이들을 꺼내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짜 수레는 처음부터 하나뿐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일불승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장자가 하필 수레를 미끼로 삼은 까닭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진리를 알고 싶은 마음 남을 돕고 싶은 마음 이것이 중생의 선한 바람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바람을 살려 불타는 집 밖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방편은 중생의 마음을 읽으신 자비의 지혜였습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장자가 아이들에게 차별 없이 똑같은 큰 수레를 주었다는 점입니다. 양의 수레를 원했던 아이나 소의 수레를 원했던 아이나 받은 수레는 동일하였습니다.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성문이든 보살이든 어떤 길로 시작했든 상관없이 결국 도달하는 곳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우리 삶을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수행을 시작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싶어서 경전을 펼치신 분도 계셨을 것이며 중생을 돕겠다는 서원을 세우신 분도 있으셨을 줄 압니다. 시작점은 저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화경은 말합니다. 그 모든 시작이 사실은 하나의 길 위에 있었다고 우리가 걸어온 그 길이 헛되지 않았다고 부처님께서 방편을 쓰신 까닭은 중생을 속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한꺼번에 진실을 열어 보이면 중생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앞서 5천 명이 떠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금기가 물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불성을 들으면 그 말씀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중생의 근기를 하나하나 키워오신 것입니다. 법화경 방편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십니다. 시방세계 가운데 이승의 법도 없거늘 하물며 삼 승이 있겠느냐? 이 말씀의 무게를 느껴보십시오. 선문도 없고 영각도 없으며 보살도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불순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 이것이 방편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수행을 돌아볼 때 그것은 방편이었으되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의 수레를 타고 싶어서 불타는 집을 나온 아이도 사슴의 수레를 타고 싶어서 나온 아이도 결국 똑같이 큰 흰 소의 수레를 받았습니다. 길은 여럿이었으나 도착지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올린 108배도 밤마다 외운 나무아미타불도 이 하나의 큰 수레를 향해 나아가는 걸음이었습니다. 수행의 모양은 달라도 그 안에 깃든 간절함은 모두 같았으며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간절함을 통해 우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방편품은 법화경의 관문입니다. 이 관문을 지나면 부처님께서 왜 세 가지 길을 하나로 모으셨는지 그 일불승의 참듯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방편품에서 세 가지 수레가 사실은 하나였다는 진실이 열렸습니다. 이제 법화경은 그 하나의 수레 일불승이 무엇인지를 본격적으로 밝혀 나갑니다. 회삼귀일 세 가지를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는 이 네 글자가 법화경 전체를 꿰뚫는 핵심 교리입니다. 괴삼귀일이란 성문승과 연각승과 보살승 이 세 가지 길이 결국 하나의 불승으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방편품에서 시방불토 가운데 오직 일불승의 법만이 있을 뿐이며 둘도 없고 셋도 없다고 설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교리의 정리가 아니라 2500년 불교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 까닭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자신이 걷는 길에 따라 스스로를 구분하였습니다. 알아한의 경지에 이르러 생사를 끊겠다는 선문이 있었고 홀로 깨달아 연기의 이치를 통찰하겠다는 연각이 있었습니다.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보살도 별도의 길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법화경은 이 모든 구분이 허물어진다고 말합니다. 성문이든 연각이든 보살이든 결국 모두 부처가 됩니다. 길은 셋이었으나 목적지는 처음부터 하나였습니다. 이 가르침이 당시 수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경전의 장면을 통해 느껴보십시오. 법화경 신의품에서 사리부를 비롯한 네 명의 큰 제자가 부처님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문이라 여기며 이미 열반을 얻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얻은 것은 진짜 열반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수행하며 자신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었던 이들이 법화경 앞에서 그 믿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수행해 보신 분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슴으로 느끼셨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미 도달했다고 여겼던 곳이 사실은 중간 정거장에 불과했다는 깨달음은 환희이면서 동시에 통렬한 참회이기도 하였습니다. 시내품에서 내 제자는 자신들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하나의 비유를 들어 고백합니다. 우리는 마치 부자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난하게 살아온 아들과 같았다고 부처님 곁에 있으면서도 부처님의 진짜 재산이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고 이 고백 속에는 자기 수행에 대한 자만이 얼마나 깊은 장애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경전의 말씀은 하는데 삶에서는 여전히 흔들리는 그 간극을 느끼셨던 분이 계실 것입니다. 사성제를 외우고 팔 정도를 알면서도 화가 치밀어 오르면 어찌할 수 없었던 경험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법화경은 그런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흔들림조차 진실로 향하는 과정이었다고 법하경은 이 회삼귀일의 뜻을 하나의 비유로 풀어줍니다. 장자공자의 비유 가난한 아들 이야기입니다. 한 장자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을 떠난 아들은 오랜 세월 떠돌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Google로 연명하고 남의 집품을 팔며 자신이 장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이 아들이 우연히 아버지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됩니다. 장자는 아들을 단번에 알아보았으나 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거대한 저택과 화려한 모습에 오히려 겁을 먹고 도망치려 하였기에 장자는 억지로 붙잡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인을 보내. 아들에게 허드렛 일을 시키며 서서히 가까이 오게 하였습니다. 아들은 수십 년 동안 아버지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며 조금씩 마음의 그릇을 키워갔습니다. 마침내 장자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비로소 아들을 불러 진실을 밝힙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이 모든 재산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 이 비유에서 장자는 부처님이시고 가난한 아들은 우리 중생입니다. 아들이 잊어버린 보물은 우리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불성을 가리킵니다.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오랜 세월 가르치신 것은 이 아들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며 그릇을 키운 과정과 같았으며 마침내 그릇이 무르익었을 때 법화경을 통해 진실을 열어 보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가 가리키는 바를 마음에 담아 보십시오. 우리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범불아 여기며 부처와는 거리가 먼 존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절에 가서 기도하면서도 부처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시고 나는 여기 아래에 있다고 느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법화경은 말합니다. 그 보물은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다고 다만 내가 잊고 있었을 뿐이라고. 이것이 일불승의 근본 토대이며 훗날 불성사상으로 이어지는 가르침입니다. 불성이란 모든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뜻합니다. 장자공자에 비유해서 아들이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나 사실은 아버지의 전 재산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본래부터 선불의 씨앗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법화경 이전의 가르침에서는 성문과 연각은 선물할 수 없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화경은 이 벽을 완전히 허물어 버립니다. 불성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러므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일불승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회삼귀일의 참뜻입니다. 성문의 길을 걸으며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했던 수행도 연각의 길을 걸으며 홀로 이치를 공부했던 시간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보살의 길을 걸으며 남을 위해 서원을 세웠던 발신까지 모두 이 하나의 진실을 향해 흘러온 것이었습니다. 법하경은 그 어떤 수행도 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더 큰 길의 일부였다고 밝혀줄 뿐입니다. 법화경 비유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십니다. 삼계는 편안한 곳이 아니다.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 온갖 고통이 가득하여 심이 두렵고 두려운 곳이다. 이삼계에서 중생을 건져내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방편으로 세 가지 길을 보이셨으나 궁극의 뜻은 오직 하나 중생을 선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비유품에서는 한 가지 더 주목할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장자가 아이들에게 약속한 세 가지 술에 대신 큰 흰 소의 수레를 준 것에 대해 이것은 거짓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처음에 약속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었기에 이것을 허물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방편이 결코 속임수가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방편은 언제나 중생이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향해 이끄는 자비의 힘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수행을 하든 그 수행의 끝은 하나로 모입니다. 전수경을 독성하든 108배를 올리든 참선을 하든 염부를 하든 그 모든 길이 부처가 되는 하나의 큰 길 위에 놓여 있습니다. 법화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근본적인 위로는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길을 걸어왔든 상관없이 그 길은 이미 부처의 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지금 이 순간 내 수행이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탓하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입어. 화경의 가르침 앞에서 잠시 그 마음을 쉬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성문에게도 연각에게도 모두에게 똑같은 큰 수레를 주셨습니다. 수행에 깊고 얕음으로 나누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때가 이르면 모두가 같은 자리에 이른다는 것 이것이 일불승의 약속이며 법화경이 2,500년 동안 전해 온 희망입니다. 장자공자에 비유해서 아들이 마침내 자기 안에 보물을 발견하였듯이 우리도 법화경을 통해 본래가 주어진 불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불성이 수행을 해서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안에 있었으되 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이며 법화경은 그 사실을 마침내 열어 보여 주는 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삼큐일의 가르침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불승을 선언하신대 그치지 않고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선불의 약속을 내리시기 시작합니다. 일불승의 진실이 열리자 부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선불의 약속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을 숙이라 합니다. 바다 기록한다는 뜻으로 미래의 성부를 확정 짓는 약속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의 미래 선불을 확정지어 주시는 법화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이 이제부터 펼쳐집니다. 가장 먼저 수기를 받은 제자는 사리불이었습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로 이름 높은 사리불에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리브라. 너는 미래세의 화광열애라는 부처가 될 것이다. 그 국토의 이름은 이루이며 그 세계는 평탄하고 깨끗하여 온갖 장엄으로 가득하리라. 이 수기를 받은 사리불의 반응을 경전은 이렇게 전합니다. 사리부른 환희에 차서 몸을 땅에 던져 부처님께 절하였으며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부처님 곁에서 법을 들으면서도 이러한 가르침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저 역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혜 제일이라 불리던 사리불조차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가 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수행자라 하더라도 법화경을 만나기 전에는 선불이 자기 일이라고 여기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법화경의 숙이는 성불이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주어진 약속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사리브레이어 부처님께서는 가섭 목걸이란 수보리 가전연 등 큰 제자들에게도 차례로 수기를 내리십니다. 법화경 수기품에서는 이 장면이 구체적으로 펼쳐집니다. 각 제자마다 미래의 이를 부처의 이름과 국토의 이름 교화할 중생의 수까지 하나하나 밝혀 주십니다. 이것은 막연한 격려가 아니라 확정된 약속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수기를 받은 제자들이 모두 선문이었다는 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법화경 이전까지 성문은 아라한의 경지에서 머무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보살만이 선불할 수 있다는 것이 통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성문 제자들에게 직접 선물을 확약하셨습니다. 법하경의 혁명적 면모가 바로 이 대목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숙이는 큰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법화경 500제자 수기품에서는 500명의 아라안들이 한꺼번에 수기를 받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모두가 미래세의 보명 열애라는 같은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설하십니다. 500명이 모두 같은 이름의 부처가 된다는 것 이 말씀 속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선불의 높고 낮음이 없으며 먼저 되고 나중 됨에 차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숙이의 범위는 여기서 더 넓어집니다. 각인 수기품에서는 아직 수행이 완성되지 않은 학인 곧 배우는 단계에 있는 2000명의 제자들에게도 수기가 내려집니다. 알아한의 경지에 이른 이들뿐만 아니라 아직 도중에 있는 수행자들까지 선불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이 대목이 주는 위로를 느껴보십시오. 수행이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시는 분 경전을 읽어 뒀듯이 잘 와닿지 않아 답답하셨던 분 법화경은 그런 우리에게도 숙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파자 파티와 야수다라를 비롯한 비군이들에게도 수기가 내려집니다. 2500년 전 인도 사회에서 여성 수행자에게 선불을 약속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자와 제가자 남성과 여성 그 어떤 경기도 두지 않으시고 숙의를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법화경이 품고 있는 평등의 힘입니다. 이 500 아라 한들도 수기를 받고 나서 법화경 안에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감격을 표현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주보주의 비유입니다. 한 사람이 친구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친구가 그의 오단에 갑진 보석을 꿰매 넣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보석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여러 나라를 떠돌며 의식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훗날 다시 그 친구를 만나서야 옷 속에 보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보석을 꿰매 넣어준 친구는 부처님이시고 술에 취해 잠든 사람은 우리 중생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성불의 씨앗을 심어두셨으나 우리는 그것을 모른 채 괴로움 속을 헤매어 온 것입니다. 숙이란 부처님께서 그 보석의 존재를 마침내 알려 주시는 행위입니다. 법하경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약초 유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숙의를 받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에게 해당하는 비유를 서라십니다.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립니다. 이 비는 산과 들 골짜기와 평야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적십니다. 큰 나무도 작은 풀도 약초도 관목도 저마다의 크기와 뿌리에 맞게 물을 머금습니다. 같은 비가 내리되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풀은 작은 풀대로 각자의 그릇만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이렇게 설하십니다. 우리의 가르침은 하나의 맛이지만 중생이 근기에 따라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마치 한 가지 비가 서로 다른 풀과 나무를 각각 자라게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약초 유품의 핵심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차별이 없으되 중생이 받아들이는 깊이는 저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같은 법당에서 같은 법문을 들어도 어떤 분은 눈물을 흘리시고 어떤 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같은 경전을 읽어도 오래 읽을 때와 10년 전에 읽었을 때 마음에 와닿는 깊이가 다르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르침이 달라서가 아니라 무리의 그릇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