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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나의 천사가 앞장설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3,20-2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0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21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22 너희가 그의 말을 잘 들어 내가 일러 준 것을 모두 실행하면,
나는 너희 원수들을 나의 원수로 삼고,
너희의 적들을 나의 적으로 삼겠다.
23 나의 천사가 앞장서서
너희를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그들을 멸종시키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10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Angels of Heaven and Earth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사를 보내시어, 곁에서 그들을 지키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곳으로 데려가게 하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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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천사를 보내시어, 길에서 그들을 지키고 당신께서 마련한 곳으로 데려가게 하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그들 곁에 천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이들, 그들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 있는 천사들과 하느님 때문에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까요?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을 이해하려 할 때는 언제나 그를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 바라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에게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의 근거를 말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 근거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사형 폐지 문제로 가면 더 분명해집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이, 어떤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의 생명을 존중하여야 하는 것은 그의 ‘뒤에’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복음의 작은 이들에게 돌아와 봅시다. 그 작은 이들이 어린이들이나 겸손한 이들만이 아니라 사회의 많은 사람이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흉악범이라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또는 나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이들, 나와 맞서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들에게도 그들을 돌보는 천사가 있습니다. 저런 인간을 왜 천사들이 돌보느냐고 투덜거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천사들의 돌봄에 감사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천사들에게 이끌려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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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는 주로 하느님 백성을 불행과 어려움에서 ‘지켜 주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곳으로 이끌어 줍니다(창세 48,16; 탈출 23,20; 시편 91[90],11 참조). 이처럼 구약 성경은 천사들이 우리의 일상 안에서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천사는 어떤 모습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저마다 수호천사가 있으며, 그들이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하느님보다는 세속의 성공과 물질의 풍요를 더 높은 기준으로 삼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경쟁하고, 때로는 복음의 논리보다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우리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치지 않도록, 힘겨워서 쓰러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를 지켜 주고 보살펴 주는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잊고 지낼지라도, 우리의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일상이 무척이나 바쁘고 힘들겠지만, 하루에 한 번이라도 하느님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 어떨까요? 아무런 조건없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수호천사를 보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아무 조건 없이 하느님을 찬양한다면, 하늘 나라의 수호천사들도 우리의 소리에 맞추어 함께 더욱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것입니다.(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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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어린이’의 그리스말은 ‘파이디온’인데, 본디 이 단어는 열 살 아래의 아이나 유아를 가리킵니다. 이 말에서 ‘파이다고고스’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직역을 하자면 ‘어린이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우리말로는 ‘보호자’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이’란 어른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아이를 뜻합니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당 신부였을 때 날마다 미사에 참례하는 서너 살짜리 꼬마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제가 사탕을 줄 때 말고는 자기 아빠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껌딱지’처럼 아빠에게 붙어 있는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저는 저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께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가?’, ‘과연 나는 저 아이처럼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로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나약하고 부족하며 철없는 아이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형제로 내어 주셨고,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파이다고고스’, 곧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오직 그분께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것뿐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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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특사를 임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호하며 이끌도록 하셨습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 곁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이면서,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달해 주고,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와 함께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악과 불행에서 지켜 주면서 우리가 악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진 뒤 자신들이 누릴 지위와 서열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대답하십니다.하느님 나라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회개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죄를 아파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한 방향으로 가던 사람이 자기 인생의 모든 진로를 완전히 바꾸는 것, 온전히 하느님께 향하는 것을 뜻합니다.두 번째 조건은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신중하지도, 독립적이지도, 성숙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무능력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며 어른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유치함이나 미성숙함이 아니라 의존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하느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세 번째 조건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존중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얼굴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자세입니다. 모든 이가 수호천사를 모시고 있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내 수호천사의 인도를 바라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예수님의 눈길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먼저 향합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에서 이방인들이라고 제외될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져야 합니다. 거부당하고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복음 전파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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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이 탈출기 말씀의 근간은 ‘하느님을 잘 섬기고 거역하지 말라.’는 것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는 약속된 하느님의 땅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으므로, 아무리 미약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 대전에는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우리 모두는 빈부귀천을 떠나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 아름다움은 가끔 우리가 간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머물 때, 내적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외면적인 아름다움보다, 남루한 모습과 고통을 견디어 내는 주름살 속에 담겨 있는 내적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수호천사를 공경하는 기념일에 우리는 하느님 앞에 우리의 기도를 전달해 주고 하늘 나라의 순례 길을 함께 걸어가는 영적 존재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미약한 존재이므로 악마의 유혹에 휘둘리거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수호천사를 보내시어 악과 불행에서 지켜 주도록 배려하십니다. 수호천사들은 우리가 날마다 벌이는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지혜와 의견을 줍니다. 수호천사에게 우리의 앞길을 비추고 인도하도록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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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미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찾게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느낄 때, 하느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찾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으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우리가 비록 의식하지 못할 때라도, 늘 내 앞을 밝혀 주시고, 우리의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먼저 움직이시고, 먼저 배려하시는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수호천사를 보내시어 우리를 지키게 하시고, 우리의 보호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단지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어린이의 순수함은 세속적인 모든 계산과 이기심을 넘어 그저 그분의 무한한 사랑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내어 맡길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전통인 ‘수호천사께 드리는 기도’는 바로 나 자신을 비우고 온전히 그분의 인도와 사랑에 나 자신을 내어 맡기게 만들어 줍니다. “언제나 저를 지켜 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아멘.”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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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의 안내자, 동반자, 보호자, 친구로 천사를 보내 주셨는데, 특히 각 개인의 일생의 여정 전체를 지켜 주고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하도록 지정하신 영적 존재를 수호천사라고 합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도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서 신기하게 보호를 받거나 구출되었음을 종종 체험하곤 하는데, 특별히 순박한 어린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오늘 독서는 시나이 산을 떠나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의 여정을 거쳐야 하는 이스라엘을 천사가 인도하였음을 전하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라는 개념과 연결시켜 묵상한다면 논리적인 비약일까요?
우리는 사람의 목숨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세상, 하느님을 애써 잊으려고 할 뿐 아니라, 아예 외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수십 명,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건 사고들이 빈번하기 때문인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인권의 고귀함은 실종된 것 같습니다. 사소한 일이나 다툼으로 살인이 벌어지는가 하면, 대중 매체를 통하여 고독사는 물론 엄청난 숫자의 자살률을 접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노숙인을 비롯하여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내몰린 듯한 열악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업신여기는 천한 사람들에게도 천사들이 함께 있고, 그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명을 받아 그들을 돌보는 것이니, 결국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는 것이지요.
남들이 업신여기는 작은 이들을 천사들을 통하여 돌보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도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위험에서 보호해 주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천사들처럼 우리도, 우리 곁에서 이 세상 순례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지켜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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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오래전부터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 신심의 대상일뿐더러 신학적 성찰의 가치가 높은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수호천사 기념일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깊이 머물러 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지낸 ‘소화’ 데레사 성녀 대축일의 복음과 거의 같습니다. 성녀의 영성에 깊이 공감했던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노스가, 그의 책에 사인해 주기를 청하는 한 브라질 소녀에게 ‘어린이다움’의 위대함에 대하여 적어 준 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이 추악한 세상은 오직 시인들과 아이들의 순박한 공감으로 말미암아 지탱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시인들에게 충실하고, 어린 시절에 충실하십시오! 절대로 어른이 되지 마십시오!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채려면 복음서를 읽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를 닮아라.’ 그런데 어른들은 기만당한 어린 시절을 향해 여러 세기에 걸쳐 이렇게 되풀이합니다. ‘우리를 닮아라.’ 당신이 오랜 세월을 다시 읽을 때, ‘세도가’는 무력하고 ‘박사’는 무지하며 ‘권모술수’는 어리석다고 점점 더 믿게 된 이 늙은 작가를 떠올리며 기도해 주세요.”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의 질서 안에서 본디 모습을 찾는다는 ‘어린이 정신’을, 유혹과 위협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간직하며 살아가는 데에는 큰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약속하듯, 하늘의 천사들은 우리의 이러한 영적 투쟁에 늘 함께할 것입니다. 수호천사 기념일에 제 가슴속의 어린이의 마음을 오랜만에 만나며 조용히 미소 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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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수호천사를 공경하는 축일입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천사입니다. 수호천사는 사람이 가는 길마다 지켜 주고, 사람의 시중을 들어 주며, 사람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달해 줍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에 놓일 때마다 수호천사의 도움을 구합니다. 수호천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일러 줍니다. 예로부터 신자들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하늘로부터 천사들을 보내 주시어, 이 집에 사는 모든 이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소서.”라는 기도를 바쳐 왔습니다. 그만큼 수호천사는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 우리가 혹시라도 악마의 유혹에 걸려 넘어질 때, 우리 곁에서 우리를 붙잡아 일으켜, 다시 주님을 따라갈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당신을 받아들이며, 특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작은 이들을 돌보고 있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그를 지켜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섬기면서 사랑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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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천주여, 하늘로부터 천사들을 보내 주시어, 이 집에 사는 모든 이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소서.” 피난 교우들이 즐겨 바쳤던 이른바 ‘천사 기도문’입니다. 가끔 ‘구교우’ 어르신들이 이 기도문을 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사람의 오른쪽 어깨에는 ‘수호천사’가 있고 왼쪽 어깨에는 ‘사탄’이 있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늘 흘려들었던 그 말을 가끔씩 기억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 나이 들면서 말씀을 다시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좋은 영’이 있고 ‘악한 영’도 함께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이 어린이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린이의 마음’으로는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부모를 믿고 의지하듯 주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마음입니다.
우리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수호천사가 있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천사를 기억한다면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가면 그의 ‘수호천사’가 도와줍니다. 선한 영께서 축복으로 감싸 주시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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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당하면 반발심이 생깁니다. 얕잡는 말을 하는데 가만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업신여김을 당하면 누구라도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깔보는 말을 예사로 합니다. 무시하는 행동을 쉽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탓입니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좀 더 생각한다면 쉽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보고 있다고 하십니다. 하찮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를 보호하는 수호천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언젠가 나도 무시당합니다. 남을 업신여기면 언젠가 나도 업신여김을 당합니다.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말과 행동을 수호천사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시하는 말보다는 격려하는 말이 더 쉽게 나오도록 살아야 합니다.
“칭찬 한마디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했습니다. 기쁨을 주는 말과 행동은 서로를 천사로 만듭니다. 불만을 갖고 바라보기에 무시하는 감정에 휩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업신여기는 말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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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발자국, 자국마다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었네.” 어느 시인이 고백한 시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때를 어떻게 헤쳐 나왔는지를 돌이켜 보면, 신기하게도 주변의 도움을 받게 된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 삶 안에서 천사들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수호천사 역할을 하게 된 때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데 여러 가지 방법과 존재들을 이용하실 수 있고, 또 이용하신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언제나 도와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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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휴가를 맞아 모처럼 친구들과 기차 여행을 떠났습니다. 달리는 기차 안에는 신문을 보는 사람, 선잠이 든 사람, 요기를 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주위 사람들을 개의치 않는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갔습니다. “저 멀리 높은 하늘이 있고, 들판은 온통 누런색이야. 한가운데에는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도 있네. …… 아, 이젠 산이다. 아래에서부터 단풍이 들고 있어. 노란색, 붉은색……. 꼭대기에는 큰 바위도 있네.” 간간이 여자의 나지막한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그러면 코스모스도 피었겠네. 많이 피었나요?”
처음에는 단순히 가을 풍경에 취한 사람의 대화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큰 목소리에다 자꾸만 반복되는 이야기가 귀에 거슬렸습니다. 주위의 승객들도 모두 그러한 낌새였습니다. 결국 승객 하나가 참다못해 일어나서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하였습니다. 좀 조용히 하자고 말할 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승객은 이내 흠칫 놀라며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알고 보니, 큰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각 장애인의 남편이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부인의 손을 꼭 쥐고, 다른 손으로는 창밖의 풍경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승객은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말없이 쳐다보았습니다. 부인이 볼 수 없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도록 온몸으로 설명하고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100달러 지폐 속 인물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뛰어났지만, 대단한 세계적인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피뢰침, 다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뇌파 측정기, 홀로그램 기술 등을 발명했습니다. 더군다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가 벤저민 프랭클린이 64년 동안 기록하고 실행한 13가지 덕목을 기본으로 하여 디자인한 시스템 다이어리로도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대부분 땅딸막하고 뚱뚱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100달러 속에 있는 노년의 프랭클린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실제 키는 177cm로 그 당시에는 장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평생 꾸준히 운동해서 아주 단단한 근육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력적인 갈색 눈동자에 숱이 아주 많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100달러 속에 있는 인물과 왜 다를까요? 몸 좋은 프랭클린의 초상화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이 좋을 때는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노년의 벗겨진 머리, 많이 나온 배만 두드러집니다.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성형도 하고, 또 명품으로 온몸을 감싸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닐까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큰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외모보다 삶 자체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그 삶을 기억합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처럼 말입니다.
예수님도 세속적 삶보다 영적인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취급하여 경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참견을 할 수 없었고, “조그만 게 까불어.”라면서 무시하곤 했었지요. 이렇게 보잘것없는 어린이가 오히려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른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다가는 후회할 삶을 만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는 것은 물론이고, 어린이를 당신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큰 관심을 갖고 우리의 삶을 기억해 주십니다. 수호천사 기념일인 오늘, 우리는 누구의 수호천사로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삶이란 이어달리기와 같아. 내가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기면,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건네지(발레리 폐랭).
혹시 그런 사람 있으신가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 그런 사람 있으신가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 말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나를 지지해주고, 나를 걱정해주고,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 나를 위해 대신 죽을 수도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극(史劇)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호위무사(護衛武士)라는 직책이 있습니다. 왕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 무예나 검술이 뛰어난 민첩한 사람을 호위무사에 임명합니다. 이 사람의 행동의 특징은 은밀함입니다. 언제나 왕 근처에 있지만 있는 듯 없는듯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과 온몸의 신경은 언제나 왕의 안전을 위해 깨어있습니다. 위기 상황이 오면 지체 없이 개입하거나, 최악의 상황에서는 온몸을 던져 왕을 대신해 칼을 맞습니다. 그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왕의 안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안전과 영혼 구원을 위해 아주 충실하고 날렵한 호위무사(護衛武士)를 파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우리에게 파견된 그의 이름은 수호천사(守護天使)입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만큼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우리를 끔찍히 생각해주시고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위해 노심초사하시면서 돌보아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매일의 인생 여정 안에, 지근 거리에서 경호실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수호천사들은, 하느님을 대신해서 인생의 세세한 부분까지 배려해주십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수호천사의 존재는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호천사들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우리 인생길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수호천사들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매일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수호천사들은 매일 우리가 걷는 여행길의 방향을 올바른 쪽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천사에 대한 강조가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 여러 곳에서 수호천사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아주 명백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로서 수호천사의 현존에 대해 의심치 말고 믿어야 마땅합니다.
수호천사는 굴곡지고 사연 많은 우리네 인생길을 지켜줍니다.(시편 91,11) 수호천사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탈출 23,20) 뿐만 아니라 수호천사는 우리의 시중까지 들어줍니다.(히브 1,14) 하느님을 대신해 인간에게 복을 내려줍니다.(창세 48,16)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달해 줍니다.(토빗 12,12) 투옥되어 큰 곤경 중에 빠져있던 베드로 사도는 여러 차례 수호천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사도 12,7)
베르나르도 성인의 권고에 따라,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순수하고 어린이다운 마음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수호천사에 대한 신심을 좀 더 키워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수호하는 그들의 존재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탈출 23,20)
먼저 자기를 멸시하지 않고는 타인을 멸시할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작은 이들을 멸시하지 않아야 하는 이들이 그들이 수호천사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란 뜻입니다.
여기에 타인을 멸시하는 이들은 반드시 자기 자신부터 멸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위 ‘땅콩 회항’과 같이 나의 위치로 타인을 멸시하는 행위는 이미 자신이 자기를 멸시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받는 사람이라면 사랑받는다는 증거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 가장 큰 증거가 수호천사입니다. 수호천사와 가까웠던 비오 신부님은 항상 영적 자녀들에게 수호천사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수호천사에 대해 열심히 가르치셨던 비오 신부님은 때때로 밤새도록 수호천사들이 메시지를 전하는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 비오 신부님과 함께 산 조반니 로톤도에 있는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미 밤 11시가 되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누군가가 성스러운 수호천사를 비오 신부님께 보내어 축복받자고 제안했습니다. 모두 무릎을 꿇고 그렇게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비오 신부님이 고아원으로 가시던 길에 그들 앞을 지나가시며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젯밤 11시에 다섯 명의 수호천사가 한꺼번에 들이닥쳤었소.”
어느 날 한 부부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가 열이 나고 있었습니다. 약이 있긴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정 무렵,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와 함께 여기에서 잠을 자고, 나는 옆 방에서 자겠소.”
그러고 나서 남편은 잠들기 전에 자신의 수호천사를 비오 신부님께 보냈습니다. 정확히 1시 5분 전이었습니다. 새벽 3시에 남편이 깨어나 아이를 생각하고 가 보니, 아이의 열이 내리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기뻐서 아내를 깨웠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말했습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 수호천사를 비오 신부님께 보냈어요.” 그러자 남편도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몇 주 후, 남편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비오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성당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비오 신부님은 남편을 향해 가리키며 농담을 하셨습니다. “당신 집에서는 밤에도 쉴 시간이 없어요!” 남편이 미안하다고 말하자, 비오 신부님은 밝게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해할 일이 아니오. 밤에도 수호천사들이 찾아오는 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오.”
남편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려고 하자, 비오 신부님은 그 감사를 사양하셨습니다. “먼저 감실로 가요 아니면 성모님께 가든지.”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안 남편은 겸연쩍게 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 하나 여쭤볼까요? 어느 쪽 수호천사가 먼저 왔지요? 제 아내의 수호천사였습니까, 저의 수호천사였습니까?” 이에 비오 신부님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셨습니다.
“당신 수호천사가 먼저 왔소. 1시 5분 전에 당신의 수호천사가 왔고, 조금 뒤에 아내의 수호천사가 왔소.”
비오 신부님은, 미사에 참석하지 못할 상황이 생기면 자신의 거룩한 수호천사에게 미사 중의 뜻을 하느님께 전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수호천사를 통해 은총을 받는 존재임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타인을 멸시할 수 없습니다. 타인도 그러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무시하는 사람은 나도 무시당하는 사람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사라지려면 우리 곁에 수호천사를 많이 두어야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변신은 극적으로 전개됩니다. 아버지를 죽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자각이 깊어지고 사랑과 구원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그를 공개적으로 죽이고 싶다고 말해왔지만, 정작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사생아였던 스메르쟈코프였습니다.
드미트리는 자기 애인인 그루센카도 아버지가 빼앗으려는 것을 알고는 아버지와 형제들, 애인에게까지 분노합니다. 그러나 스메르쟈가 자신의 살인이 들통날까 봐 자살하자, 형의 약혼녀인 카테리나와 바람을 비운 동생 이반까지도 형의 편을 들어 그를 석방시키려 합니다.
알료샤는 수도사가 되어 하느님께서 사랑하심을 매일 방문하여 끊임없이 설득하고 그루센카는 자신과 함께 벌을 받자며 20년 동안 드미트리를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지금까지 자신이 아버지와 형제들과 애인까지도 멸시하며 살아온 것에 20년 형도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버지를 통한 모든 이들도 자신처럼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고는 모두를 존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우는 이들이 수호천사들입니다. 하느님은 그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고 우리 각자에게 수호천사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수호 천사를 믿지 않으면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이고 그 멸시는 이웃에게 이어집니다.
1948년 10월 3일, 요한 23세 교황은 자신의 여동생 안젤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은 매일 최소 다섯 번은 천사에게 기도하고, 마음속에서 자주 천사와 대화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네 수호천사와 친해지고, 당신이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호천사와도 가까워져라. 이 하늘의 파수꾼들, 그 신비로운 증인들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잘못된 길에서 얻는 쾌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흡연, 음주, 도박, 마약과 같이 중독성이 있는 것은 웬만한 결단으로는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도 있습니다. 특히 집단적인 선택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처음 전투에서 15,000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때라도 정치인들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맺었으면 더 큰 피해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탈리아는 12번의 전투를 더 벌였고, 700,000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나서야 전쟁을 끝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시청사 건물을 4000만 파운드를 들여 2년 안에 건축하기로 했습니다. 건설사는 비용이 더 든다는 이유로 예산을 청구했고, 시간도 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정부가 건설사를 잘못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면 더 큰 손실은 없었을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수렁에 빠져들 듯이 예산을 쏟아 부었고, 4억 파운드를 들여 5년이 지나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2년 전에 이태원 참사가 있었습니다. 1년 전에 해병 순직 사고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이 있습니다. 응급실에 의사가 부족해서 군의관과 공공 보건의가 파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이 잘못하면 손을 버려야 한다. 두 손으로 불타는 지옥으로 가는 것 보다는 한 손 만으로도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 발이 잘못하면 발을 버려야 한다. 두 발로 불타는 지옥으로 가는 것 보다는 한 발만으로도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 눈이 잘못하면 눈을 버려야 한다. 두 눈으로 불타는 지옥으로 가는 것 보다는 한 눈만으로도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책임자를 문책하고, 진실을 파악하고, 잘못된 것에 대한 사과가 있는 것입니다. 국회는 야대여소로 구성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행정부는 이런 현실을 인식하고 쌓여 있는 국가의 현안을 풀어가야 합니다.
김구 선생님이 꿈꾸던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마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분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가 가는 모든 길을 지켜 주시리라.” 누가 천사일까요? 아첨과 아부로 눈과 귀를 가리는 사람은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책임을 회피하려고 권력의 동아줄에 의지하려는 사람도 결코 천사가 압니다.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권만 챙기려는 사람도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주변을 보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연말연시에는 사랑의 나눔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돼지 저금통을 가져오기도 하고, 군인들도, 기업체를 운영하는 분들도 이웃을 위한 나눔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나눔이 더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치를 해도 함께 나누고, 잔치가 있으면 이웃을 초대하였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신 분의 장례를 위해 함께 수고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예전에 농경시대에 있었던 방식의 나눔이 계속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쁘고 분주한 현대사회에 살면서도 나눔의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수호천사입니다. 오늘 내가 전하는 따뜻한 말과 친절은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절망 중에 있는 친구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수호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기도 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수호천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어진 눈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땅에서
우리에게 닿은
우리의 천사들의 눈길은
하늘에서
하느님께로 이어지지요
하늘에서
하느님께 닿은
우리의 천사들의 눈길은
땅에서
우리에게로 이어지지요
땅에서
우리의 천사들에게 닿은
우리의 눈길은
하늘에서
하느님께로 이어지지요
하늘에서
우리의 천사들에게 닿은
하느님의 눈길은
땅에서
우리에게로 이어지지요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우리가 시편91장 11절에서 보면 이렇게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곧 천사는 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직무를 수행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아이들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아이들과 논다는 것이 때로는 시답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곧 ‘애들은 가라’는 식으로 어른의 가치관 속에서 아이들의 가치관은 우스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이 가진 그 순수함을 잃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천사는 그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이에게는 악마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며 하느님을 바라볼 때 천사는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가 가야할 바른 길로 인도해 주리라 믿습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요청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을 더 쉽게 풀어보자면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당시 존중받지 않는 이들 중 몇몇이 있는데 여자들(과부 포함) 그리고 노인들 마지막으로 어린이입니다. 힘이 없는 이들, 또 약한 이들을 존중하지 않았고 무시하였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힘없고 약한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며 또 예수님의 말씀처럼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복음에서처럼 그들의 천사, 즉 수호천사가 각 개인을 보호하고 좋은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수호천사를 기념하는 날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알아야 하는 날입니다. 수호천사가 우리 옆에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수호천사에게 의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수호천사에 대한 체험 등이 있습니까. 인간의 생각으로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일을 체험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만약에 사고를 당했는데 죽지 않고 살았을 때, 마음속으로 악한 생각이 올라올 때 갑자기 신앙인인데 라는 말이 떠오를 때, 그리고 한동안 기도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데 갑자기 “기도해야 하는데”라는 말이 올라 올 때, 이것이 여러분을 인도하는 수호천사의 음성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수호천사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수호천사가 큰 사람이 되는 길을 알고 있으며 여러분을 그 길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수호천사와 마음속으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멘!
『우리는 서로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1) 여기서 ‘작은 이들’은 ‘나보다 작은 이들’, 즉 ‘나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천사들’은 ‘그들의 수호천사들’을 뜻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라는 말씀은, 수호천사가 항상 하느님 곁에 있으면서, 자기가 맡고 있는 사람의 일을 하느님께 곧바로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수호천사가 항상 곧바로 말씀드리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각 사람의 일을 세세하게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하느님의 보호와 사랑’을 뜻합니다.
알고 계시니까 곧바로 조치를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보호와 사랑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일도 수호천사가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천사가 하는 일은, 또는 천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진짜 뜻은,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의 일을 언제나 항상, 늘 살펴보시고, 다 알고 계시고, 언제나 항상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입니다.>
수호천사가 늘 지키고 있으니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곧 그들을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힘이 없어서 무시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반대로 읽으면, “너희가 힘이 없어서 업신여김을 당하더라도 좌절하지 마라. 하늘에서 너희의 수호천사들이 하느님께 늘 말씀드리고 있으니.”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말씀은 ‘작은 이들’, 즉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그렇게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호천사가, 또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늘만 쳐다보면서 언제 올지 모르는 하느님의 도움을, 또는 수호천사의 도움을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가?
그렇지만, 인간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도 많고, 곤경에 처한 이웃을, 또는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웃을 마치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이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그런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수호천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그 사람이 나의 수호천사입니다.>
3) 그것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도 ‘작은 이들’을 위한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무기력하게 하늘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의와 평화가 제대로 실현되는 세상을,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고, 지금 내가 있는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조금씩이라도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공동체가 나서야 하고, 서로 연대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인들의 공동체, 즉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작은 이들의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4) 수호천사의 반대쪽에는 항상 악마가 있고, 수호천사는 늘 선행과 사랑을 권고하는데, 악마는 늘 악행을 부추깁니다.
천사의 권고대로 할 것인지, 아니면 악마가 유혹하는 대로 할 것인지,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로마 12,13-16).”
<궁핍한 성도들, 우는 이들, 비천한 이들은 ‘나보다 작은 이들’이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곧 수호천사의 권고대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고, ‘작은 이들’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악마는 그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라고 유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내가 ‘작은 이’의 입장에 있을 때, 수호천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주님의 심판에 맡겨라.” 라고 권고하는데, 악마는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 기다리지 말고 직접 정의를 실현해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율법이 있으니, 네가 당한 만큼 앙갚음해도 된다.” 라고 유혹합니다.>
길 위의 종교, 길 위의 그리스도, 길 위의 사람들 - “그리스도인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10월 한달 저를 행복하게 살게 할 좌우명시입니다. 선물처럼 찾아온 시입니다. 산은 ‘불암산’을, 당신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강론 쓸때가 바로 주님앞에 서듯 하루중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날마다 기록을 남기듯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수도원은 섬이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중심지이자 세상의 축소판같은 곳입니다. 온갖 일이 다 일어납니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도 세상 공부가 가능한 곳입니다. 12세기 마지막 교부라 칭하는 성 벨라도는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책은 우리 체험의 책이다. 내 매일 삶의 책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배울 때 전체를 한눈에 파악해서 매일의 일을 잘 통합하여 일관성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만이 렉시오디비나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하루도 렉시오 디비나 대상의 또 하나의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계속될 아직은 미완(未完)인, 하루하루가 내 삶의 성경책 1쪽입니다. 어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형적인 가을이었습니다.
“하늘보면
마음은
훨훨날아
흰구름되네”
흰구름 가을 하늘보며 배밭사이 산책중 떠오른 시입니다. 아침부터 저녁늦게 까지 수도원 초창기부터 수도원 제반 공사시 많이 봉사한 포크레인 기술의 달인, 요한 형제가 시종일관 즐거운 모습으로 길 보수에 정성을 쏟고 있었습니다. 신고배 수확이 끝난 창고에 들리니 엄청나게 큰 배들에 경탄했고 부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저절로 나온 시입니다.
“배가
엄청나게 크다
밤낮
쉬지않고 컸구나!
나는
그동안 뭘했나?”
살아있는 동안 쉬지 않고 일하는 배나무들이요 밤낮 쉬지 않고 큰 배들이 놀라웠습니다. 얼마전 루벵 대학교수들에 대한 교황님의 강론도 일부 생각났습니다.
“약자들을 배려하는 연민가득하고 포용적인 문화를 건설하도록 하라. 이 불꽃이 내내 살아 있도록 하라; 영역을 확장하라! 쉼없는(restless) 진리 추구자들이 되라. 너희들 열정이 쇠퇴함을 허용하지 말고, 지적 무기력함에 항복하지 마라.”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제1독서의 욥이 그러합니다. 쉼이없이 참으로 치열히 한결같이 주님을 섬겨온 욥이요 예수님입니다. 훌쩍 뛰어넘어 욥기 9장을 공부하지만, 시간되면 생략된 4-8장까지 읽어보세요. 욥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왜 그토록 하느님의 신뢰와 인정을 받았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내가 의롭다 하여도 답변할 말이 없어 내 고소인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네.”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아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신심깊은 욥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그가 이런 엄청난 하느님의 시험과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음도 평소 쉼없이 주님을 섬기고 공부하며 살아온 내공의 결과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도상중에 있는 예수님께도 이런 내공을 느낍니다.
길 위의 주님이요, 길 위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님은 집이 없었던 길 위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길들(other Ways)에게 열린 길(the Way)이었습니다. 루카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예수님과 당신 일행의 집에 계시는 모습을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새삼 ‘길 위의 그리스도(Christus Viator)’, ‘길 위의 인간(homo viator)’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길가는 사람인 구도자는 ‘정처없는 방랑자’가 아니라 ‘정처있는 여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문득 박목월의 나그네란 시가 생각납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가끔은 이런 나그네 되어, 하느님 찾는 나그네 되어 홀가분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베네딕도회의 정주생활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정주의 ‘뿌리(root)’와 내적 여정의 ‘길(route)’이 공존하는 삶입니다. 밖으로는 하느님 기다리는 정주의 산이요,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물길따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여정이어야 안주가 아닌 진짜 정주의 삶이 됩니다.
참으로 뿌리와 길의 모순을 절묘하게 살아내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요 예수님과 당대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끊임없는 주님을 향한 길 위의 삶이지만 정주처 하느님께 날로 깊이 뿌리내린 삶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와 부활의 도상이라는 아주 절박한 시점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역시 길을 가는데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예나 이제나 얼마나 절박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세 경우의 주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평생 화두가 됩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의 삶이 변질되고 타락했는지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 뿐이 없습니다.
1.“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
하느님만을 정주처로 한 나를 과연 따를수 있겠느냐며 첫째 사람의 요구를 은연중 거부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결코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절실하게 살아내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2.“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나라를 알려라.”
두 번째 나를 따르라 할 때 아버지의 집에 가서 먼저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자에 대해 에둘러 거부하는 예수님입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의 절박성을 앞서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의 장사는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주님을 모르는 죽어있는 이들에게 장사를 맡기라는 것입니다. 정말 삶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자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전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목표는 단 하나, 한 번 뿐인 인생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3.“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세 번째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추종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 참 냉혹해 보입니다. 역시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절박한 삶에 부수적인 것들은 생략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지향이 아닌 미래 지향의 하느님 나라를 향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주옥같은 말씀은 무뎌지고 세속화되는 우리를 부단히 일깨우는 평생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뿌리의 사람이자 길의 사람이 되어 파스카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줍니다.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김준수 신부님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18,10)
예전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마니또’ 게임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베트남에 있을 때 저도 학생들과 마니또 게임을 통해서 자신이 뽑은 형제의 보이지 않는 수호천사가 되어 그를 위해 기도하고 말없이 도와주다가 어느 정한 시기가 되면 미리 준비한 선물을 주면서 내가 바로 너의 수호천사였다, 하고 고백하도록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수호천사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는 사실이 삶에 큰 위로와 힘이 되리라 봅니다. 또 누군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수호천사임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의 행복을 빌어주고 그가 잘되길 바라면서 살아갈 때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본인 역시도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호천사가 분명히 누구인지 알지는 못해도 수호천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면 우리 또한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서 어느 분의 묘비에 ‘당신의 나의 천사’였습니다, 라는 표현을 보면서 더 실감 나게 다가왔었습니다.
사실 과거보다 현대에 들어와서 천사들에 대한 공경은커녕 언급조차 회피하고 존재마저 의심하는 경우가 많음을 느낍니다. 어느 분의 표현에 의하면, 이런 현상은 성전 건축물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더군요. 중세기부터 근대 이전에 봉헌된 유럽의 성전들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천사들의 성상이나 성화들이 요즘 현대식 성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음을 저도 안식년 동안 유럽 각 나라를 여행하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그러더군요. 이는 곧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만 의존하려는 유행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오늘도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하고 외치면서(묵4,8) 성인들과 함께 천상 예배를 드리며, 지상에서도 수많은 영혼과 함께하여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며,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고 있음을 우리는 매일 미사 감사송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클레멘스 10세 교황(1670-1676)은 10월 2일을 수호천사 축일로 정하여 온 교회가 기념토록 하였습니다. 수호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히1,14) 존재들입니다. 이와 같이 수호천사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인간들을 위험과 악마의 해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주며, 선한 생각과 관심을 불어넣어 주며, 사람을 위해 스스로 기도하고, 사람의 기도를 하느님 대전에 올려주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수호천사의 보호와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도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18,10)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시선에서 시편 8편을 음미하면서 들어 보도록 합시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천사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시8,5.7.10) 오늘 수호천사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섭리와 배려에 감사하면서 늘 수호천사들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에 힘입어 하느님의 모상적 존재로서 품위와 존엄함을 잃지 않도록 깨어 살아가도록 합시다.
<인간은 참으로 존엄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들’ 하나라도 그지없이 존귀하게 여기신지라 그들의 수호천사들을 두어 당신과 함께 있도록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천사들이 존귀한 존재인 것이라기보다 천사들을 붙여 보호해야 할 만큼 ‘인간이 존재가 존귀함’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서로 송사하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송사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2-3)
그렇습니다.
그날이 오면, 천사들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토록 인간은 존귀합니다.
이는 <시편> 8편을 떠올려줍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 8,5-6)
그렇습니다.
‘영광과 존귀의 관’이 천사에게 씌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인간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결국 ‘천사’는 하느님이 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되는 ‘영광과 존귀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참으로 존엄합니다.
그지없이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이 존귀함을 잘 보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귀함도 잘 보호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인간의 존귀함은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에서 오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인간의 존귀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존엄을 평가하거나 도구로 전락시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예외 없이 존귀한 존재로 존중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나가야 할 사명도 부여받고 있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혹 우리의 관심이 ‘큰 사람’에게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곧 우리가 '큰 사람이냐 작은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냐?'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형제가 나에게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주님!
무엇을 하든 당신을 지향하여 일하게 하시고,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게 하소서!
모든 주어진 것을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드리는 감사가 되게 하소서!
오늘 나의 모든 삶이 당신께 바치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예비신자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생애 중에 어딘지 모르게 누군지 모르게 여러분을 구해주셨다고 느낄만한 사건이나 상황이 있었습니까?”
“언젠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이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평등하고 똑같이 천사들을 한 명씩 정해주셨기에, 그 어느 누구도 낮은 자로 저평가 되어서는 안 되고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여러 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지켜주시고 돌봐주십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천사들이 존재로서의 영이고, 활동으로는 천사라고 전합니다. 그들은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며 전령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고 있기”(마태 18,10) 때문에, “하느님 말씀 순히 들어 그 영을 시행하는 능한 자들”(시편 102[103],20)입니다(329항). “순수한 영적 피조물인 천사들은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격적인 피조물들이며, 죽지 않는 피조물들이다. 그들은 보이는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더 완전하다. 그들 영광의 광채가 이를 증명한다.”(330항) 라고 규정합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고, 주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알리는 전령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합니다(331항). “창조 때부터 구원 역사의 흐름을 따라, 줄곧 이 구원을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알리고, 이 구원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 라고 전하며,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준 이도 가브라엘 대천사라고 합니다(332항).
“사람이 되신 ‘말씀’의 생애는 강생부터 승천까지 천사들의 경배와 봉사에 싸여 있다.” 그리고 재림 때에도 그분 곁에서 그분의 심판을 도와드리게 될 것입니다(333항).
“교회는 삶의 모든 면에서 천사들의 신비하고 능력 있는 도움을 받는다.”(334항) 전례 안에서 교회는 천사들과 하나되어, 하느님을 “거룩하시도다” 라고 노래하며, 천사들의 도움을 청하며, 특별히 몇몇 천사를 기념하며 축일을 지냅니다(335항). “사람은 일생 동안, 생명의 시작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천사들의 보호와 전구로 도움을 받는다.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신앙으로, 하느님 안에 결합되는 천사들과 인간들의 복된 공동체에 참여한다.”(336항)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호위하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명에 봉사하는 천사들이 지상 순례길에 있는 교회를 도와주고, 모든 인간을 보호하기에 천사들을 공경합니다(351, 352항).
우리의 인생이 어머니 뱃속에 점지된 순간부터 우리를 위해 배정된 수호천사를 공경하며, 우리도 우리 서로에게 보이는 수호천사가 되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지지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하느님 나라는 누가 사는 나라인가?<마태오18/1-5,10>10/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선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가는 곳인가 마태 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 들의 것이다.” 하십니다. 이 땅이나 저 세상이나 마음이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 하시며 아린와 같은 사람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어떤 곳일까? 주님의기도 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 하지만 어떤 나라인지 아는 사람 흔하지 않고 그져 그 나라가 있다고 믿는 것 뿐입니다. 그 나라는 자유 평화 기쁨이 있는 나라입니다.
자유라 함은 자기 능력 것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차가 철로위를 마음것 달리는 것처럼 법과 계시에 따라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법이란 자기마음대로 아니고 하느님의 뜻과 모든이의 일치된 뜻으로 일어집니다.
법을 따라 사는 사람은 겸손하고 온유함이 있어야 하며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저는 수도자로 순명서원은 진 선 미에 따라 살겠다는 서원이며 하느님 뜻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 하느님 나라의 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평화안에 사는 사람은 제산이 많고 풍요로움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가진 바를 나누는 사람이며 남의 것을 빼앗거나 가지려는 사람은 불안과 적정으로 가듯 차 있어 마음이 편하지 않으며 적고 큰일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는 사람은 평화를 모릅니다. 어린이는 있는 것 만족하고 기대심 기다림 속에 살아 욕심 없이 살기에 마음이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수도자는 내것이 없어 내어주는 삶을 살고 희망 속에 살아가며 많은 유혹에서 벗어나게 살고 있습니ㅏ.
기쁨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서로존경하고 존중하며 긍정적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존재함을 감사하고 사는 사람 당신이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당신이 행복해지게 되는 것 사랑입니다. 사랑을 접근입니다. 떨어지면 사랑은 중단 되고 너가 있어 즐겁고 기쁘고 행복해 집니다. 서로 손잡고 걷는 사람 기쁘지만 서로 떨어져 걷는 사람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정결로 모든이 안에 모든 이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차별 없는 삶을 살며 누구하고도 기쁨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하늘나라에 제일 큰사람은 섬기고 나누고 친교를 하는 사람입니다. 어린이는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누구나 하고 합께 합니다. 오늘 하늘나라에 사는 날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수호천사란 하느님의 명에 따라 사람을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선으로, 하느님 뜻에 맞는 올바른 길로 이끄는 일을 하지요.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전담 천사를 임명하시어 도와주시고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호천사는 우리가 보통 ‘천사’라고 하면 떠올리는 일반적인 모습, 즉 등 뒤에는 날개가 달려있고 하얀 광채로 빛나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영적 존재의 모습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런 영적 존재는 우리 마음과 영혼에 작용하여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 수는 있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에게 수호천사가 되어주기를 바라실 겁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도 ‘서로 사랑하라’고,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고 하신 것일테지요.
이 말씀을 듣고 누군가는 주위를 둘러보며 ‘내 수호천사는 누굴까’하고 찾아보실 것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 세상 모든 이가 다 나에게 등을 돌려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고 나를 응원해 줄 사람, 내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새벽에도 달려와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 있다면 힘들고 괴로운 세상살이를 버텨나갈 힘과 용기가 생길거라 생각하며 그런 ‘수호천사’와 같은 이가 내 앞에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슬프게도 오직 나만을 위한 ‘귀인’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은 현실 속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마음가짐을 지니는가에 따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를 그런 ‘귀인’으로, 나의 수호천사로 만들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첫째, 내가 만나서 관계 맺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메신저로 여기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나에게 당신 뜻을 전하시려고, 그분께서 나를 여러가지 방식을 통해 올바른 길, 더 좋은 길로 이끄시려고 그 사람을 보내주셨다고 여기고 행동으로도 그렇게 대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 사람이 나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언제나 나에게 본보기가 될만한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아프게 콕콕 찌르는 그 말이, 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그 행동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주위를 살피게 하며 과한 욕심과 교만을 삼가게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나 자신을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악으로부터 지키게 되는 것이지요.
둘째, 어린이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의 어린이 같은 모습을 이해와 사랑으로 포용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습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여 성장할 기회로 삼지요. 또한 다른 이의 부족하고 미성숙한 부분을 넓은 아량과 깊은 안목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기에 그 사람 때문에 내 마음이 상할 일도, 내가 누군가에게 미움이나 원망을 살 일도 없습니다. 함께 하는 모든 이로부터 사랑받으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지요. 즉 모든 이가 내 ‘수호천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수동적인 모습으로 내 수호천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을 생각만 하지 말고, 나 스스로가 다른 이에게 수호천사가 되어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을 시작하면서 제자들이 이렇게 물어봅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스승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가장 크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죠.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예수님 시대에 어린이들은 흔히 생각하는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그런 의미라기보다,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없고, 어른들에게 순종하며, 남이 해주는 대로 살아야 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힘없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불쌍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을 당신의 이름으로 돌보는 것이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거라고 말씀하시죠.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며 큰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자제하거나 감정을 억제하여 맹목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으로서 일상의 삶 가운데 하느님과 이웃에게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는
바로
수호천사입니다.
모든 것이
익어가는 계절에
우리를 떠나지
않는 수호천사를
생각합니다.
메말라진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수호 천사
기념일입니다.
낯설고 두려운
저마다의 삶에
수호천사를
주셨습니다.
수호천사를 통해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호천사와 함께
걸어가며
하느님께
감사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축복이며
선물입니다.
수호천사의
도움으로
우리 삶의
행복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을
불행으로부터
붙들어 주십니다.
다시금 구원이
무엇인가를
절실히
체험합니다.
우리의 여정이란
수호천사와 함께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누군가를 위한
수호천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애틋한 사랑이
특별한 배려로
우리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남편을 성당 나오게 하려고 많은 시도를 했습니다. 주님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했고, 미사 참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도 말했습니다. 봉사와 희생의 기쁨도 말하면서, 함께 이 모든 것을 같이 하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고 이야기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석하는 성가정이 되었으면 했지만, 어떤 시도를 해도 말을 듣지 않는 남편 때문에 늘 속상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느 신부님을 찾아가 자신의 사연을 다 이야기한 후에 말했습니다.
“아무리 남편을 성당 나오게 하려고 해도 모든 방법을 써도 전혀 변화가 없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남편 앞에서 주님 이야기를 많이 하기보다, 주님 앞에서 남편 이야기를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앞에서 남편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남편을 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주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는 것보다, 남편을 위한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힘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실제로 남편이 “나도 한 번 성당에 한 번 가볼까?”라면서 스스로 성당에 나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남을 위해 기도하는 그 자체가 수호천사의 모습이 아닐까요? 앞선 아내가 바로 남편의 수호천사가 되어서 기도해줬던 것입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수호천사란 하느님의 명에 따라 사람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천사를 말하지요.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를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의 수호천사는 누구지?’라면서 주변을 둘러보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수호천사 역할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받을 사랑보다 남에게 베풀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에 기초한 기도가 커다란 힘을 가져오게 됩니다.
제자들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곧 주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수호천사이며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이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해라(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남을 이해하는 방법
한 번도 일탈해 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모범적이고 원칙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뉴스에 등장하는 죄짓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범죄가 다시 발생하지 않기 위해 더 엄하게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번은 어느 국회의원 아들의 일탈 이야기가 뉴스에 나왔습니다. 그는 이 국회의원에게 문제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가정교육도 제대로 못 시키는 사람이 어떻게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통해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었습니다. 글쎄 외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사고를 친 것입니다. 그것도 주동자로 몰려서 더 큰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남에 대해 비판을 했던 사람이 이제 다른 이의 비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죄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남을 이해하는 방법은 그 사람과 같은 위치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도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완벽하게 눈높이를 맞추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요? 자신은 늘 위에, 남은 늘 아래에 뒀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수호천사들의 보호아래 있는 동안에야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 주변에 이런 분 한분 있는가요? 나보다 더 나를 더 끔찍이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 나를 위해서라면 불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는 사람.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사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린다할지라도 절대 나를 떠나지 않는 사람. 나를 위해서라면 새벽 세시에도 달려와 줄 수 있는 사람.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는 그런 사람, 즉 살아있는 수호천사로 인해 고통과 시련의 골짜기를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주변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보면 확실합니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런 사람 하나 정도 만들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수호천사 축일입니다. 깊이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 구성원 서로 서로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 서로서로는 바로 그런 수호천사 역할을 하라고 하느님이 맺어주신 인연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 팍팍하고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살아있는 수호천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언젠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나 혼자 걸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동반해주지 않는 외로운 길을 쓸쓸히 걸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삶의 한 구비 한 구비 가만히 돌아보니 그 누군가의 소리 없는 배려 속에 지금까지 살아왔더군요.
생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되짚어보니 그 누군가의 열렬한 기도로 뒷받침되어 있더군요. 지나온 나날들 나 혼자 힘으로 버텨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늘 제 등 뒤에서 저를 받쳐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하느님께서 제게 붙여주신 수호천사였습니다. 뒤돌아본 제 나날들, 그 어느 순간도 수호천사가 함께 하지 않은 걸음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들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제가 가는 길목마다 지키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달려들 때면 어느새 주님의 천사들이 달려와 제 앞을 막아주었습니다. 사는 게 너무 고달파 주저앉고 싶을 때 마다 든든하고 따뜻한 천사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행여 돌부리에 넘어질세라 주님의 천사들이 저를 떠 받들어 주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호천사는 우리 각자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 보내시어 짝을 맺어주신 영적 존재입니다.
본질상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 우리들, 유혹 앞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우리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물이자 친구가 수호천사입니다. 그들은 우리 일생 내내 우리와 함께 걸어갈 동반자이자 수호자입니다.
늘 우리 지척에서 생생하게 현존합니다. 우리와 함께 길을 같이 걸어왔고, 앞으로도 같이 걸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품에 영원히 안기는 순간까지 우리의 영적 도우미로 살아갈 고마운 존재입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호천사는 이런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 험난한 세파 앞에 우리는 언제나 어린이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 앞에 가로놓인 길은 매우 멀고 또 먼 것만이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수호천사들의 보호아래 있는 동안에야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수호천사들은 충실하고 슬기로우며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만 그들을 뒤따르고 그들에게 매달리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보호 밑에 머물도록 합시다.”
수호천사는 마치 ‘공기’처럼 사랑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저는 수호천사를 향한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 날이 되어서야 저의 수호천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1년 동안 수호천사는 저를 위해 열심히 은총을 전달해주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수호천사의 사랑은 마치 ‘공기’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기는 없으면 죽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고 보채지도 않습니다. 가장 좋은 옷은 입은 줄도 모르게 의식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옷이랍니다.
수호천사는 마치 공기처럼 좋은 옷처럼, 그렇게 자신을 버린 온전한 사랑을 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제목이 ‘나를 찾아줘’(2014)란 영화가 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완벽한 부부 닉과 에이미. 그러나 결혼 5주년 기념일 아침, 에이미가 흔적도 없이 실종됩니다. 경찰은 에이미가 결혼기념일 선물로 숨겨뒀던 편지와 함께 곳곳에서 드러나는 단서들로 남편 닉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합니다. 미디어들은 살인 용의자인 닉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고 시간이 갈수록 세상의 관심이 이 사건에 집중됩니다.
예전에 닉이 아내가 싫어져 젊은 여학생과 바람도 피우고 아내를 때린 일도 있었지만, 살인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에이미가 꾸민 것이었습니다. 에이미는 하버드대를 나온 수재이고 유명한 작가입니다. 자신 같이 잘 나가는 인물이 시골뜨기인 닉과 결혼해 줬는데 무능한 데다 바람까지 피우는 남편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남편을 살인죄로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이미가 챙겨간 돈을 도둑맞게 되자 예전에 자신을 쫓아다녔던 한 남자에게 가서 숨어지내게 됩니다. 그 남자는 돈은 많았지만, 에이미를 가두어놓고는 어디도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남편 닉은 살인죄를 벗기 위해 자신이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모두 TV에서 폭로하고 아내 에이미에게 사랑하니 돌아와 달라고 말합니다.
힘겹게 떠돌던 에이미는 이번엔 자기를 가둬놓던 남자를 죽여 정당방위로 꾸미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집착하던 남자에게 납치되어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목숨을 건 영웅으로 세간에 화제가 됩니다.
하지만 남편은 이 모든 것이 아내가 꾸민 것임을 압니다. 아내가 살인까지 저지른 것을 알지만 세상이 영웅이라 믿고 있는 여인을 살인자로 내몰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 남의 아이를 밴 아내와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말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돌아오기 위해 살인까지 했어요. 당신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었죠?”
아내는 남편이 완벽해지기를 바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자신은 다른 누구보다 더 완벽하게 행복해야만 하는데 약간 수준이 모자란 시골 출신 남편이 자신의 수준을 따라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물론 남편은 그런 아내 밑에서 아내의 비위를 맞추며 숨죽이듯 살아왔지만, 너무 힘이 들어 결혼하자마자 바로 이혼을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완벽을 추구하던 아내에게 이혼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아내에게 외도하는 모습이 들키게 되어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된 아내가 자신에게 이런 모멸감을 준 남편이 사형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모든 일을 꾸몄던 것입니다.
천사를 묵상해야 하는 날에 이런 섬뜩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에이미가 천사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사랑으로 알고 있었기에 천사의 사랑을 그 반대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이미는 열등감이 강한 여자였습니다. 자기의 성공과 남편의 성공을 통해서 자존심을 채우려는 여자였습니다.
그녀가 자주 하던 놀이는 ‘나를 찾아줘’였습니다. 여기저기 단서를 남겨놓고 온종일 남편이 자기를 찾는 것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놀이였습니다. 처음엔 재미가 있었지만 자기를 찾지 못하는 남편을 보며 화를 냅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소멸해 간다고 느끼기에 자기 존재를 세상과 남편을 통해 증명해내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세상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남편을 더 완벽하게 만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남에게 알아달라고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존재가 사라져가는 한 인간의 마지막 시도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잠시만 신경을 써주지 않으면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수호천사는 어떻습니까? 이미 하느님의 보호 아래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았습니다. 존재가 사라질 위험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알아달라고 보채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 년 동안 내 옆에 있었지만 이런 날이 되어야 간신히 수호천사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그래도 수호천사들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공기’와도 같은 사랑입니다.
공기는 없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공기를 마시며 살아도 매번 공기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자신을 찾아달라고, 알아달라고 안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자신은 존재를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있는 한, 그리고 나무가 있는 한 공기는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인간이 사라져도 공기는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천사는 이와 같은 사랑을 합니다. 사랑을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천사입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에 대한 소록도 분들의 증언입니다. 그분은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하고 생명의 은인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라고 말하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천사를 본 일도 없으면서 천사를 압니다.
꽃다운 20대에 소록도를 찾아 평생을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다가 할머니가 되어 이제 봉사를 받아야 할 때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홀연히 떠나가 버렸습니다. 본인들의 삶도 중요했을 텐데 먼 이국땅에서 어쩌면 버려지다시피 한 이들을 위해 평생을 산 이들이기에 우리는 천사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천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천사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호해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그 사람은 어린이가 됩니다. 걱정이 없고 많이 웃고 즐겁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받아주고 위로해주고 또 누군가에게 천사가 됩니다. 이미 그렇게 인정받은 이들이기에 자신들이 봉사한 이들에게 다른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공기처럼 있다가 사라집니다. 사랑을 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수호천사와 같은 사랑의 모습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태풍의 영향으로 침수가 예상된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신문사는 지대가 높기 때문에 큰 걱정 없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하에 가보았더니 외부에서 빗물이 들어왔고, 지하실에 물이 고였습니다. 다행히 하수가 역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벽에 성당 미사가 있어서 갔더니 수녀님과 교우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간밤의 비바람으로 성당의 지하에도 물이 스며들었다고 합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제게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문사만 지하에 물이 들어온 것은 아니란다. 하느님의 머무는 성전에도 물이 들어왔단다.’ 미사를 마치고 산보를 갔습니다. 여기저기 간밤의 비바람으로 차들이 멈추어서 있었습니다. 모두들 지하에 고인 물을 빼내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문사에 물이 들어온 것은 그나마 적은 양이었습니다. 배수가 잘 되어서 오후가 되니 물은 대부분 빠졌습니다.
지난 8월입니다. 20년간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미군이 철수하기로 하였습니다. 미국은 탈레반과 협상하였고, 탈레반은 철수하는 미군에게 협조하기로 하였습니다. 미국이 철수하면서 다른 나라들도 현지에 있던 자국민들을 철수 하였습니다. 한국은 철수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협조하였던 아프가니스탄의 협조자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협조자들은 고향을 떠나서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탈레반에게 받을 불이익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한국의 외교관들은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고, 한국으로 오기로 했던 협조자들 모두를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이번 철수 작전의 이름은 ‘미러클(Miracle)'이었다고 합니다. 위험하기도 했고, 어렵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보안과 완벽한 소통으로 모두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 정부는 이 사람들을 난민이 아닌 한국을 도와준 특별기여자 신분으로 대하였습니다.
이분들의 직업은 대부분 의사, 약사, 간호사, 행정요원들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은 아프가니스탄 바그람에서 병원을 운영했고, 이 사람들이 그 병원에서 함께 일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의 격리가 끝나면 한국에서 일 하고 싶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정부도 특별기여자인 이분들에게 법적, 행정적 도움을 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분들이 머무는 숙소가 진천에 있었습니다. 진천의 주민들도 적극 환영하였다고 합니다. 낯선 땅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내는 사람들에게 한국 정부, 한국의 외교관, 진천 주민은 천사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가장 굶주린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교가 달라도, 피부색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지금 아픈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천사는 본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 직무와 직책에 따라서 구분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권세를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전하는 따뜻한 말과 친절은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절망 중에 있는 친구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수호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기도 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수호천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하느님 신비 체험, - 용기와 기쁨, 찬미와 감사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매월 첫 주 금요일은 수도원의 고백성사날이고 어제 10월 첫 주 금요일에도 우리 수도형제들 모두가 고백성사를 봤습니다. ‘수도자들 고백성사 보나마나’라는 우스개 말도 있지만 고백성사를 기다리는 모습 또한 영성체를 하고자 줄 선 모습만큼 아름답습니다. 믿음과 겸손의 표현이 고백성사요, 하느님을 만나 죄를 용서받고 마음의 순수와 기쁨을 회복하니 이 또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마침 반려견을 쓰다듬으며 성모님 상을 배경한 한 수도형제의 모습이 참 평화롭고 아름다워 즉시 사진에 담고 카톡으로 전송하며 나눈 메시지입니다. 이 평범한 장면 또한 저에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후예! 사랑하는 안토니오 수사님! 파이팅!”
“감사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아들,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이팅!”
비상한 하느님 체험만이 아니라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무수히 일상에서 평범한 하느님 체험을 합니다. 또 가난한 자매가 오랜만에 고백성사차 들렸는데 몇 켤레의 양말을 선물했고 이 또한 저에겐 하느님 감사의 체험이었습니다. 마침 고마운 마음에 냉장고에 있던 배즙도 대접했습니다. 얼마전 출판계 스타 편집자 이연실님의 김훈 작가님의 인터뷰 기사도 감동이었고 저에겐 이 또한 하느님 체험이었습니다.
“제 조카 이름까지 김훈 작가님의 소설 속 캐릭터 ‘나루’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어요, <남한산성>에서 마지막 희망의 상징이 된 아이, ‘나루’의 한자 이름을 김훈 작가님이 지어 주셨어요. 엄마가 농사를 지으시는데, 그 흙묻은 채소들을 김훈 작가님이 보물처럼 껴안아 들고 가시면서,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비싼 와인보다 나한텐 이게 더 큰 보물이라고 말씀해주시니까 정말 뿌듯했어요.”(한겨레9.25일;15면)
성웅聖雄 이순신을 바탕으로 <칼의 노래>라는 스테디 셀러 소설을 쓴 가톨릭 신자인 김훈 작가의 따뜻한 인간미가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요즘 아낌없이 사용하는 이름 앞에 붙이는 ‘사랑하는’이란 말마디입니다. 그냥 이름 부르기보다는 이 좋은 호칭을 아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사랑하는’ 이라는 고백의 호칭을 쓰고 나면 마음도 깨끗해지고 또 그대로 이루어 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어제 저녁기도시 시편 121장이 새삼 감미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은 너를 지키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면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당신이 네 영혼을 지켜 주시리라
나거나 들거나 너를 지켜 주시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러하시리라”(시편121,4-8)
이 또한 하느님을 체험한 시편 작가의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을 그대로 내 체험으로 만드는 것이 시편성무일도의 은총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결코 절망하거나 원망하거나 실망할 수 없습니다. 우울이나 정신적 질환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모두가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을 체험해야 영혼이 삽니다.
도대체 하느님 맛이 없으면 이 광야인생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중독에 급기야 폐인으로 만드는 ‘세상 맛’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하느님 맛’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하느님 맛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형제들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의 답答이자 약藥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용기와 기쁨의 예언자 바룩이 영적 이스라엘인들인 우리를 향한 권고입니다.
“이스라엘인이라 불리는 내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너희는 너희를 길러 주신 영원하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너희를 키워준 예루살렘을 슬프게 하였다. 아이들아, 하느님께 용기를 내어 부르짖어라. 이 재앙을 내리신 주님께서 기억해 주시리라.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고 너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
바룩의 하느님 체험이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하느님 망각으로 인한 무지의 병보다 큰 영혼의 병도 없습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할뿐 아니라, ‘메멘토 데이’, 하느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으로 영원한 기쁨의 근원이신 영원하신 하느님을 끊임없이 찾아 만나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이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단골 말마디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오늘 복음의 주제도 주님을 체험한 제자들의 기쁨과 감사입니다. 일흔 두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 와 활동을 보고하자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니 이 또한 하느님 체험의 반영입니다. 철부지 제자들의 주님 체험에 감격해 바치는 다음 예수님의 감사기도입니다. 막연한 종교의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 구체적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하느님 체험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드님의 일치 체험의 고백과 더불어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행복선언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지상천국의 하늘나라 신비를 사는 우리 모두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이들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으려고 하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하느님 체험만이 무지의 눈을 열어 하느님의 뵙게 하고, 무지의 귀를 열어 하느님 말씀을 듣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용기와 기쁨,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교회는 수호천사 기념일로 지냅니다. 가톨릭 기도서에는 없지만 전통적으로 바쳐온 수호천사 기도문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새삼 하느님의 모든 천사들은 하느님 자비의 현현이자 그리스도 예수님의 현존임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도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고 다스리소서.”-아멘.
아침 시작과 더불어 바치는 가톨릭 교회와는 대조적으로 동방정교회에서는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전 수호천사께 다음 기도문을 바칩니다.
“우리와 일생을 같이해 주시는 거룩한 천사님!
이 죄인을 멀리하지 마소서. 만일 당신이 떠나신다면, 제 마음의 빈자리를 악마가 차지하고 온갖 흉계로 나를 지배코자 할 것이니, 저를 떠나지 마시고, 제 손을 이끌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하느님의 거룩한 천사여!
당신은 우리 영혼과 육신의 수호자이시니, 제가 지날날 당신을 걱정케 한 일들과 오늘 지은 여러 가지 죄들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이 밤에도 악마의 침범에서 감싸주시어, 하느님의 꾸중을 받지 않도록 하소서. 그리고 언제나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선한 믿음을 가진 종의 자세를 잃지 않도록 간구하여 주소서.“- 아멘.
<하느님의 얼굴을 보아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에서
당신의 천사가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고 있어요
하늘에서
나의 천사가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고 있어요
하늘에서
우리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고 있어요
그러니 말이에요
당신과 나 우리
땅에서도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아요
그러니 말이에요
당신과 나 우리
땅에서 함께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듯이
땅에서 서로에게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아요
당신과 나 우리
마침내 하늘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날까지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생활하시는 것은 알지만 우리는 사실 우리 능력만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에게 언제나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과 방식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주 ‘천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방식이 되기도 하고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계신 듯 느껴지는 천사, 그 중에도 우리 각자를 도와주시고 함께하시는 수호천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름난 대천사가 아니어도 우리가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천사들이 우리에게는 대천사의 모든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 무엇을 하는지 우리에게 한 마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십니다. 오늘 복음 속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중에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 천사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이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이들의 천사가 있음을 말하고,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동시에 우리들의 모습을 아버지께 비춘다는 것도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살지만 그 하나 하나의 가치는 결코 소홀해지거나 판단에 의해 소외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천사들이 알려주는 사실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 하나 하나를 살피시고 돌보신다는 이야기이며 지금도 그 천사들이 우리를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진짜 천사의 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이야기, 또 사람들로부터 전해지는 모습으로 머릿속으로 그려볼 뿐입니다. 그들이 정말 날개가 있는지, 영적인 존재인지도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존재는 분명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들을 통해서 늘 우리를 살피고 우리도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보이지 않는 수호천사들께 선물하나를 했으면 합니다. 늘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있는 천사들이 웃음을 머금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는 어린이처럼 서로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우리의 생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18, 1-5. 10(수호천사 기념일)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하느님께서는 ‘작은이들’ 하나라도 그지없이 존귀하게 여기신지라 그들의 수호천사들을 두어 당신과 함께 있도록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천사들이 존귀한 존재인 것이라기보다 천사들을 붙여 보호해야 할 만큼 인간이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서로 송사하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송사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2-3)
그렇습니다. 그날이 오면, 천사들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토록 인간은 존귀합니다.
이는 <시편> 8편을 떠올려줍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 8.5-6)
그렇습니다. 영광과 존귀의 관이 천사에게 씌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인간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결국, 천사는 하느님이 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되는 하느님 되는 영광과 존귀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참으로 존엄합니다. 그지없이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이 존귀함을 잘 보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귀함도 잘 보호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인간의 존귀함은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에서 오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인간의 존귀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존엄을 평가하거나 도구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존귀한 존재로 존중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나가야 할 사명도 부여받고 있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혹 우리의 관심이 ‘큰 사람’에게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곧 우리가 큰 사람이냐 작은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내 형제가 나에게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또 내가 내 형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주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주님!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게 하소서.
무능함을 받아들이고, 신뢰하고 의탁하게 하소서.
우러르고, 존경하게 하소서!
아기가 어머니께 속해 있듯,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어머니께 소중한 아기처럼,
제가 당신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소서. 아멘.
하늘에 있는 우리의 수호 천사들
이기우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나서, 이를 믿고 따르는 백성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늘 뵙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8,10). 이를 수호천사라고 부르는데, 그들의 역할은 하느님과 백성 사이를 연결해 주고, 백성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오기 위해서 위험에서는 보호해 주고 선행에서는 도와주는 것입니다(탈출 23,20.23). 이렇게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를 돕는 수호천사를 영적으로 알아보는 능력을 신앙 감각이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들은 올바른 그리스도교 교리와 실천을 파악하고 그에 동의하며, 잘못된 것을 배척하도록 해 주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본능, 즉 ‘신앙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바탕해서 모든 세례 받은 이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 곧 예언자직, 사제직, 왕직에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르쳤습니다.
아직 복음서가 쓰여지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에 접한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를 기억하도록 이끌어주신 성령의 은총으로 신앙 감각을 발휘하여 주일마다 모여서 이 소식을 되풀이하여 공유했는데, 이것이 복음서의 원재료로서 ‘Q 자료’라고 불리는 사도 전승이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집단적인 신앙 감각은 앞으로 올 일들에 대해서도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보건비상사태로 주일이나 평일의 미사참례가 어려워지고 성당 안에서 신자들의 모임도 어려워지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나 애덕을 실천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신앙 감각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웃 신자 가정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없는지, 부동산으로 불로소득을 저마다 탐내는 세상의 우상숭배 풍조에 맞서 의롭게 살기 위한 길은 무엇일지 등등 얼마든지 능동적으로 처신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박해시대 교우촌이 교우들의 집단지성과 자발성으로 생겨났듯이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미사에 참석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첫째, 매일미사 책이라도 보고, 그날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고, 둘째, 이 말씀에 대해 응답을 하기 위하여 천사들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를 바라면서 하늘에 있는 우리의 수호천사들이 귀기울여 듣고 있을 겁니다.
나의 수호천사님 감사합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마니또’ 비밀친구라는 뜻의 이태리 말이다. 수호천사역을 맡은 뽑기 친구를 말한다. 나에게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소중한 수호천사가 있다. 미사전례 중 아침미사는 신부님들에게 많은 부담이다. 본당신부님은 새벽미사를 매일 늦는다. 그리고 교중미사도 늦었다. 그때만 해도 신자분들이 미사 주례신부를 마냥 늦어도 불평없이 기다리던 호시절이있다. 주례할 신부가 미사에 늦으면 제의방 수녀님은 중간에서 눈치보느라 늘 불안하다. 미사 시간이 늦었다며 주례신부에게 알려주는 수녀를 오히려 야단쳤으니 내가 보아도 해도 너무했다. 요즘도 가끔 그런 신부가 드물게 나타난다. 그래서 성무정지가 내려지기도 한다.
나는 신학교 생활 내내 공동체 기도며 미사전례가 있는 시간이면 예비종과 관계없이 30분 전에 성당에 도착했었다. 아마도 내 기억으로 한번도 공동체 기도나 전례에 늦지 않았다. 시계를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데도 그 시간만 되면 마치 태엽이 잠김에서 풀리듯 전자동으로 두뇌를 잠에서 깨웠던 것 같다. 은퇴할 때까지 일상이 늘 편하게 진행되었다.
새벽미사에 한 두 번은 왜 늦지 않겠는가? 그럴 때 나는 잠결에 ‘미사드려야지요!’ 하는 음성을 여러번 듣곤 했다. 그때마다 ‘앗차, 미사가 늦었구나’ 하고는 정신을 차려 잠에서 깨어났고 미사에 임했었다. 얼마나 수호천사가 고맙던지 늦지 않고 미사를 봉헌하곤 했었다. 나에게 ‘미사를 드려라’ 똑똑한 말로 재촉한 분이 나의 ‘수호천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보좌신부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수호천사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 했다.
본당신부님 수호천사는 어떨까? 떠올려 보고 싶다. 아마도 수호천사가 본당신부의 잠을 보호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선한 일을 하도록 돕는 수호천사가 본당신부님에게 잠꾸러기로 만든 것은 아닌지? 마사 때마다 제대로 지켜진 미사가 없었으니 이런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해 본다.
오늘 수호천사 기념일이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91[90],11). 나의 수호천사께 감사드린다.
나의 수호천사,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그러기에 오늘도 나는 꼭 제 시간, 제자리에 용케도 서있다. 감사를 드린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우리가 시편91장 11절에서 보면 이렇게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곧 천사는 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직무를 수행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아이들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아이들과 논다는 것이 때로는 시답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곧 ‘애들은 가라’는 식으로 어른의 가치관 속에서 아이들의 가치관은 우스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이 가진 그 순수함을 잃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천사는 그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이에게는 악마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며 하느님을 바라볼 때 천사는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가 가야할 바른 길로 인도해 주리라 믿습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십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지상 순례길을 걷는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수호천사를 정해 주셨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감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어도 우리는 언제나 저마다의 수호천사의 보호와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가장 큰 사람이라고 답하십니다. 어린이는 꼭 나이가 어린 사람을 한정하기보다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작고 보잘것 없고 가난한 이들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인간적 눈으로 볼 때 아무리 힘 없고 볼품 없어 보이는 이라도 자기 편이 있답니다. 게다가 그 편은 하늘에서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며 그를 더 안전하고 선하게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요. 바로 수호천사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지상에 있는 우리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긴밀히 연결해 주는 존재가 바로 수호천사일 겁니다. 모든 이가 당연히 존중받아 마땅한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인데, 예수님은 그에 더하여, 각자의 자기 편이 하늘의 아버지 곁에서 우리를 든든히 지켜 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당신이 보내실 천사와 긴밀히 움직이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탈출 23,21)
주님은 천사에게 당신의 이름을 담아서 보내십니다. 파견되는 존재는 파견하신 분의 뜻에 온전히 동화되고 순종하여 말하고 움직입니다. 자신이 지니고 온 그 이름의 영광과 무게, 가치를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의 말을 잘 들어 내가 일러 준 것을 모두 실행하면, 나는 너희 원수들을 나의 원수로 삼고, 너희의 적들을 나의 적으로 삼겠다."(탈출 23,22)
우리가 천사의 말을 잘 들으면 하느님도 그 천사가 했듯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주님의 뜻에 잘 따르기만 하면 우리는 천군만마 정도는 비길 수 없는 우리 편을 이제와 항상 영원히, 지상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갖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시고, 천사들도 우리 편이라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작고 가난한 변두리 인생이어도 부족한 게 무어랍니까! 타인의 작음은 물론 자신의 작음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면 조금 더 가지고 조금 더 올라가고 조금 더 힘 있다고 자랑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함부로 갑질하고 으스대며 업신여기는 자만 더 추레해질 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삶이 힘겹고 지칠 때는 나의 수호천사도 내 편, 그 천사와 얼굴을 마주하고 나를 위해 고심하고 염려하시는 하늘의 아버지도 내 편이시라는 사실에서 용기와 위로를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수호천사와 함께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힘 내어 순례 여정을 걸어갑시다. 하느님을 든든한 빽으로 두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툿찡 포교 베네딕토 수녀회 대구 수녀원
"내가 수녀님 수호천사가 되어줄께!"
예전에 어떤 수녀님에게 들었던 말입니다.
이 말이 힘든일 생길 떄 마다 제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천사가 된다는 것은 어떤 큰 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닌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해주고 기다려주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되는 것 같습니다.
대학생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만 잘하면 되고, 내가 더 잘 살아야 하고 공부를 잘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못 되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힘들지만 타인을 배려하고 어렵지만 내려놓고 이해하는 작은 천사가 되어보려 노력 합니다.
남이 먼저 천사가 되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닌 내가 먼저 천사가 되어 보는 것...
그러면 언젠가는 내가 가는 곳곳마다 모두가 기쁘게 웃으며 살 수 있는 하느님의 작은 나라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오늘 하루 나는 누구의 수호천사 되어 살아갈지,
어떻게 하면 나의 두 날개를 활짝 펴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감싸안아 줄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작은 천사들이 되어보길 기도합니다.
회개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라고, 자신을 낮추는 이가 되라고, 그리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바로 이 보잘것없는 어린이와 같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어린이의 특징 몇 가지를 곰곰이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순수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뒤끝’이 없습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합니다. 어쩌면 이 같은 어린이의 특징들을 우리 스스로가 어느새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회개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조금 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회개란 어른의 마음보다 어린이의 마음을 되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던 기억을 각자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어린이의 마음이 얼마나 자리 잡고 있습니까?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한 교우가 자기 강아지를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새끼 강아지는 참 이쁜데 크면 보기 싫어서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것 중에 하나가 세월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예뻐서 크지 않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시간이 흘러가지 않으면 좋을 법한 희망은 희망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월은 멈출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도 세월이 멈출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린이가 좋지만 영원히 어린이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린이는 순진하고 단순합니다. 그렇지만 어린이는 철이 없어서 세상 물정을 모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성인과는 다르기 때문에 구약에서 약자의 대명사는 바로 어린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작은 어린이 같은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람이 보잘 것 없이 보일지라도 그에게도 천상에서 하느님을 마주하는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18,3)
제자들은 어린이가 아니고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세상 이치로 따져 다시 어린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들은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다시 어린이가 되는 것에는 단서를 붙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은 어린이 되기에는 나이가 들었을 뿐 아니라 어린이 시절에 가졌던 특징도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면 인체학적으로 다시 어린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로 지녔던 그 좋은 특징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어린이의 특징 중에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18,4)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교만해 질 수 없었습니다. 교만은 무엇인가 힘이 있거나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데, 어린이는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가리켜 가진 것 없는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잡으려고 했던 재물, 명예도 사실 사라지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거나 잡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욕심을 갖고 조금이라도 더 갖고 누리려고 애쓰며 살아 왔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사실은 내 것도 아닌데도 내 것인 양 착각하며 살아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회개할 때에 비로소 그런 것들을 벗어 버리고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리석었던 탐욕의 굴레에서 빚어지는 교만과 겉꾸밈으로 일그러졌던 지난 허물의 모습에서 진실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진실보다는 겉으로 꾸며진 것들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가난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모습인 우리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께서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고 하신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스운 얘기 같지만 여기서 ‘회개’를 목욕에다 비유해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나가서 지내다 보면 땀도 나고 때가 끼고 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비누나 샴프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몸에 붙었던 군더더기의 때를 말끔히 청소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회개하는 것도 어린이의 우리 모습에 어른이 되면서 쌓아두고 계산하고 꾸미고 하다 보면 군더더기들이 붙어서 가난하고 순수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가리거나 일그러트릴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창조된 ‘하느님의 모상’의 본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주님께서 어린이의 비유에서 의미하는 것은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보잘 것 없고 소외된 이들에게도 잘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을 마무리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8,10)라고 이르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세운 어린 아이일 수 있고, 또한 힘없고 가난한 이를 말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 중에 사람을 보호하고 이끌어 주는 역할을 맡은 천사를 수호천사(守護天使 custos angelus)라고 하지요.
한국 천주교회에서 ‘호수천신 (護守天神)’이라고 하다가 ‘수호천사’로 바꿔 불렀습니다. 성경에서 수호천사의 모습을 보면 ‘모든 길에서 사람을 지키게 하시고.’(시편 91,11), ‘하느님께 기도를 전하며,’(토비 12,12) 또한 ‘모든 불행에서 사람을 구하는’(창세 58,16)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라고 말씀하신대로 사람마다 그들을 보호하는 수호천사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전례력으로 정한 수호천사 기념일을 맞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주님말씀을 우리의 삶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감사를 드려야 하겠지요. 나아가 내 이웃도 그들 각자의 수호천사가 있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랑하시고, 총체적으로 사랑하시는 주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오늘의 수호천사 축일과 며칠 전의 대천사 축일은 어떻게 다른가요?
그야말로 대천사, 큰 천사와 소천사, 작은 천사의 차이인가요?
며칠 전 대천사 축일을 지냈는데 오늘 수호천사의 축일을 또 다시 지내고, 굳이 지내는 뜻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하느님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을 기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보편적, 공통적으로 사랑하시지만 도매금으로만 사랑하시지 않고 소매금으로도 사랑하신다는 거지요.
이는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고,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창조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지만 우리 각자에게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시어 이 부모를 통해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는 것처럼 나만의 천사를 보내시어 나를 그렇게 소중히 지켜주신다는 뜻일 겁니다.
이는 또 이런 의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빛은 우리 모두를 비추지만 우리가 그 빛 속을 거닐지 않고, 개인의 어떤 이유로 어둠을 걸을 때 나만을 비추는 전조등과 같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로서 우리를 하느님께 잘 인도하시지만 우리가 그 길을 잘 따라가지 않거나 못할 때 나만의 천사를 보내시어 무리에서 이탈한 나를 하느님께로 다시 인도하게 하심과 같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빛 속을 잘 거닐면 어둠이 없을 것이고 길이신 주님의 인도를 잘 따르기만 한다면 길 잃고 방황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호천사도 필요 없고, 굳이 수호천사를 보내실 이유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탈출기의 주님은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시며 당신을 잘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도 잘 듣지 않고 주님을 잘 따르라는 수호천사의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 수호천사가 많습니다.
길을 잘못 갈 때 길을 알려주는 사람도 수호천사고, 알려주었음에도 계속 그 길을 갈 때 나무라는 이도 수호천사며, 가다가 힘들고 지칠 때 같이 가자 격려하는 이도 수호천사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때 이들이 바로 나의 수호천사인지 모르고 그들을 함부로 대하고, 그들의 인도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원수로 갚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총력적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인도하는 수호천사,
나무라는 수호천사,
격려하는 수호천사,
모두를 동원하여 우리를 온갖 어려움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그들의 말을 잘 듣고 인도를 잘 받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랑하시고, 총체적으로 사랑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천사들이 너 가는 길마다 지켜 주시기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 (Sermo 12 in psalmum Qui habitat, 3. 6-8: Opera omnia, Edit. Cisterc. 4[1966], 458-462)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시어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시리라.” 인간 자녀들을 위한 그분의 놀라운 업적과 그분이 보여 주신 자비에 대해 모든 이가 주님께 감사 드리고 주님을 찬미하면서 “주께서 뭇 민족 가운데 큰일을 이루셨다.”고 말했으면 합니다.
주여, 인간이 무엇이길래 당신께서 그를 그토록 생각하시고 당신의 마음을 그에게 두시옵니까?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그에게 두시고 그를 염려해 주시며 그를 돌보아 주십니다. 더욱이 그에게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고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며 또한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그리고 하늘에는 우리를 돌보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존재가 하나도 없도록, 당신께선 그 복된 영들을 우리의 봉사자로 보내 주시어, 우리를 지키는 소임을 그들에게 맡기시고 우리의 수호자가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시어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시리라.” 이 말씀은 사람에게 참으로 큰 공경심과 신심과 신뢰심을 불러일으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그들의 현존에 대해 공경심을, 그들의 자애에 대해 신심을, 그들의 보살핌에 대해 신뢰심을 품어야 합니다. 그들은 현존하고, 당신의 동반자로서만이 아니고 수호자로서 당신 앞에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 현존합니다.
비록 그들에게 임무를 준 것은 주님이시지만, 그들이 그렇게 할 때 큰 사랑으로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려울 가운데 있는 우리를 돌보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수호자들에 대해 신심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 보답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또 마땅히 해야 하는 만큼 그들에게 공경심을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든 사랑과 공경심은 주님께로 돌려져야 합니다. 우리도 천사들도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할 수 있는 자격과 사랑과 공경을 받을 자격의 밑바탕을 그분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그분 안에서 천사들을 열렬히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들은 장차 어느 날엔가 우리의 공동 상속자들이 될 것이며, 현재에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담당하도록 세우신 수호자들이요 보호자들입니다. 아직 어린이로서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여하간 우리는 어린이들이고 또 우리 앞에 가로놓인 길은 매우 멀고 또 먼 것만이 아니고 위험하기까지 하지만, 이런 위대한 수호자들의 보호 하에 있는 동안 두려워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들에겐 정복당하는 일도 속는 일도 있을 수 없으며, 더더구나 우리의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동안 우리를 속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충실하고 슬기로우며 또 능합니다.
그렇다면 두려워 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그들을 뒤따르고 그들에게 매달리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보호 밑에 머물도록 합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함승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파이디온'은 열 살 미만의 아이 혹은 유아를 가리킬 뿐 그 자체로 구체적인 뜻을 지니진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에서 파생된 '파이다고고스'라는 말은 직역하면 '어린이를 이끄는 사람', 우리말로는 '보호자'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어린이'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자기보다 어른인 누군가의 인도와 보호를 꼭 필요로 하는 존재,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작고 약한 존재를 의미하게 되지요.
이런 어린이처럼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서 내가 '어린이'와 같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작고 약하며 부족한 나는 나보다 무한하게 어른이신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보호해주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보호자, 즉 수호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호천사'라고 하면 우리를 위험과 고통으로부터 100%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디가드' 같은 존재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수호천사는 우리를 그런 식으로만 보호하는 존재가 아니지요. 그들이 활동하는 방식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뵙고 있다'는 말씀은, ‘작은 이들’이 괴롭힘과 업신여김을 당하면 그들의 수호천사들이 곧바로 하느님께 그 일을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시며 지켜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살다보면 내가 늘 '피해자'의 입장에만 서 있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내가 상대적으로 '강한 자'의 입장이 되어 나보다 작고 약한 이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며 이용하려 들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수호천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내 곁에서 양심의 목소리를 통해 '그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나를 타이르며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다 내가 말을 안듣고 계속해서 잘못된 길을 걸으면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보고 내 죄를 그분께 낱낱이 고발할 것입니다. 무조건 편들어 주고 도와주기만 하는건 우리를 진정으로 보호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엄한 훈계와 사랑의 매로 우리가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도 그들이 해야할 중요한 역할인 것이지요.
'수호천사 기념일'인 오늘, 때로는 따스한 용서와 포용으로, 때로는 따끔한 훈계와 사랑의 매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끄시고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며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매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수호천사'가 되어줌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길을 끝까지 함께 잘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에서 보호하는 천사입니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를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십니다. 다음은 수호천사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90],11).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창세 48,16)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우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죄를 반복하여 저지르지 않으며, 새롭게 마음을 먹고 다시 거룩하게 살고자 회개하는 이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정직하고 착하게 살아서 바보같이 보이고 모자란 사람처럼 비춰지는 이들이 정작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4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작은 이들 안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마음이 주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이이며, 주 하느님께서 펼쳐주시는 사랑을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이들은 주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된다고 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5절)
이렇게 예수님께서 어린이같이 보잘것없고 세상에서 못난 이로 취급당하고 작은 이들처럼 비춰지는 이들을 존중해 주고 사랑할 줄 아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뒤처진 이들로 판단하고 무시하며 업신여기는 그 작은 이들을 돌보고 있는 영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 작은 이들을 돌보라고 파견하신 하느님 사랑의 천사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0절)
우리는 어쩌면 선택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작은 이들을 존중하고 동등하게 맞이하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주 예수님의 사랑을 담은 말씀을 실천하는 작은 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서 큰 사람이 되려고 온갖 탐욕을 다 부리고 발버둥을 치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해서 허망하게 일생을 마치는 하늘 나라의 작은 이가 될 것인지?!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를 돌봐 주며 우리를 주 하느님께로 이끌고 계시는 수호천사들에게 평생 짐만 되지 말고, 기꺼이 주님 사랑의 사도가 되어 우리도 누군가 뒤처지는 이들에게 보이는 수호협조자가 되어, 주님 사랑의 나라를 함께 이루어 나갑시다.
모든 이의 천사가 되자 <마태 19, 1-5. 10> 10월 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은 안젤라 본명을 가진 사람의 축일입니다. 저는 천사를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사는 동안 무수히 천사를 만나고 천사가 되기도 합니다. 천사의 사명은 오늘 아침기도 즈가리아의 노래 후렴에 나옵니다. “주여,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어느 날 유기서원 때 왜관에서 김천 평화동 성당 본당 신부 환갑잔치에 가는 도중 하나밖에 없는 길이 막혀 길을 찾아 헤매는데 그 동네 사는 청년이 냇가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이 나온다고 하여 그 말대로 따라가니 길이 나와서 길을 따라가면서 수련장 신부님이 “오늘 하느님이 천사를 보내 주시어 길을 찾아가게 되었다.” 하시며 하느님에게 “감사합니다.” 하시기에 그 말의 뜻을 마음에 새기며 천사를 만나고, 나도 천사가 되는 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길에 얼마나 많은 천사를 만나고 나도 천사가 되어야 합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들어온 수호천사에 대한 말을 들은 것은 원산 수녀원에서 < 지금 대구 사수동 분도 수녀원> 수호천사 학교를 운영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 늦깎이 청년들에게 지식을 전해주는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그들의 천사란 바로 각자에게 수호자 천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천사는 여기 사는 저에게 보내고 저의 모든 사정을 하느님께 전할 뿐 아니라, 나의 인생길을 지켜주시고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역할을 합니다. 착한 사람, 나를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을 천사 같다고 합니다.
나는 천사 어머니를 만나 저를 낳고 길러주시고 기도해주신 어머니 천사를 알고 있으며, 그 외 많은 천사의 도움으로 옷도 입고 아침저녁 음식을 먹도록 농사짓는 농부부터 음식을 장만하는 천사까지. 도움을 받고 살아갑니다.
나는 어떤 사람의 천사일까요?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을 알려주는 천사,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의 인도자,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손을 가진 천사여야 합니다.
말 못 하는 사람의 대변자, 죄를 범하고 무서워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천사, 온갖 일에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천사로 살고자 합니다.
말씀으로, 어떤 이가 “저는 이런 죄를 지어서 죽으면 지옥에 갈 것 같아서 밤잠을 설치고 불안해서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 하면 저는 하느님 시편 136<135>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라는 기도를 전해주며 자비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가볍게 해드리며 천사의 역할을 합니다.
이번 종신서원 자 피정으로 저 멀리 앉아있던 형제가 제 앞에서 식사하게 되었는데, 평상시 식사 때 앞에 있는 형제가 식사 때 과일을 깎아 주어야 먹는 것을 봤기에 저도 과일을 깎아주는 천사의 역할을 하니 잘 받아드시어 그 순간 행복했습니다.
매 순간 감사의 삶을 살듯이 매 순간 천사가 되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나의 천사이면서 나는 너의 천사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빨갛게
감이
익어간다.
진정한
수호천사는
가까운
우리 삶의
자리에 있다.
지금껏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여전히 놓치고
사는 우리들이다.
더 없이 중요한
것이 하느님
사랑임을
다시금
가르쳐준다.
우리 자녀들을
살리시듯
구원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기도는
수호천사로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지켜주는
믿음의 천사
감동의 천사를
우리들에게
주셨다.
불안과 초조를
확신과 의지로
바꾸어 주며
하느님을
향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을
매순간
뜨겁게
만나게된다.
더더욱 중요하고
값진 것이
우리들 삶에서
무엇인가를
만나게된다.
누군가를
하느님께로
이끌고
사랑으로
지켜내는 일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음을
수호 천사를
통하여
보게된다.
남몰래 흘린
눈물이 아니라
우리의
수호 천사와
함께 흘린
뜨거운 눈물임을
알게된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수호천사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의
관계 또한
누군가에게
고마운
수호천사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사랑은 이렇듯
친밀하고
구체적이다.
혼자서 울고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되자 소리를 내서 웁니다. 이 모습을 본 후배가 말합니다.
“언니, 그거 되게 이기적인 거예요. 언니가 도와달라고 해야, 나도 도와달라고 할 때 마음이 편하죠.”
이 상황은 어느 책에서 읽은 부분인데, 큰 공감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사람, 무조건 주기만 하는 사람은 당연히 부담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 남들에게 도움받는 것을 힘들어하고 어색해했습니다. 그에 반해서 베푸는 것을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이 이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아주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만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서 상대방을 만나야 했습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천사인 수호천사를 보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날인 것입니다. 이 수호천사가 무조건 다 해주면 과연 행복할까요? 주고받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천사는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이 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들을 기쁘게 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 모습이 오늘 복음에 나오듯, 어린이처럼 사는 삶입니다. 순수한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강조하십니다. 어린이는 자신이 부족한 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도와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른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을 줍니까? 재롱도 부리고 예쁘고 애교 넘치는 말과 행동을 하면서 큰 기쁨을 줍니다.
이렇게 순수한 어린이가 되어야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런 모습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순수함을 나약함의 모습으로 생각하면서, 대신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높은 곳에 오를 생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보기에 좋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어떠실까요?
수호천사의 도움을 청해보십시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달라고...
회개는 하느님이 찾아오실 때, 곧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셨을 때, “어서오십시오.”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정반대의 말. 그러나 둘 다 정답이 될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 오히려 걱정거리가 많아져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므로, 차라리 아무것도 몰라야 마음이 편하고 좋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속담이 맞는 것 같지만, ‘아는 게 힘이다.’라는 정반대의 속담도 있습니다. 과연 어떤 속담이 맞는 것일까요?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속담도 기억납니다. 그만큼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반대의 속담인 ‘쇠뿔도 단김에 빼라’도 있습니다.
정반대의 뜻으로 대치되는 속담입니다. 이는 상황에 따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가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하는 답만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면 어떨까요? 남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답만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이 여러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수호천사는 나를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고 있으며, 그의 시선을 늘 나를 향해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라는 말에 절대 공감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나마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하는, 좀 더 살맛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 어떤 흐름, 다시 말해서 영적인 존재가 반드시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랑과 자비로 가득하신 하느님께서 따뜻한 시선으로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언제나 청춘이신 성령께서 우리 삶 한 가운데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며, 세상과 인간을 새롭게 하시고, 기쁨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위로자이신 성모님께서 상처 투성이인 우리네 인생 여정에 자상한 어머니로서 늘 동반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존재, 수호천사들이 항상 우리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앉을 때나 일어설 때나, 길을 걸어갈 때나 누워있을 때나,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특급 도우미로서, 수호천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수호천사의 존재를 생각하니 참으로 마음이 든든해지고 편안해 집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들로 인해, 시절이 하수상하니,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집나서기도 걱정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수호천사란 존재 자체가 얼마나 큰 의미요 위로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오늘 수호천사 기념일을 맞아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분들의 존재를 굳게 믿으며, 그분들의 존재에 대한 깊은 감사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 얼마나 굳은 믿음을 지니고 있으며, 일상 생활 안에서 얼마나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 삶은 좀 더 진실되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좀 더 거룩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늘 우리와 가장 가까이 몸붙여 살아가는 사람들, 가족, 친지, 형제, 동료들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주신 수호 천사들입니다.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를 성장시키고, 서로 힘이 되어 주라고 엮어주신 수호천사 말입니다.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수호천사는 마치 내가 직접 고용한 사설 경호원처럼 언제나 적극적으로 나를 밀착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고 있으며, 그의 시선을 늘 나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육적인 삶에 너무 푹 빠져 살아가다보니, 영적인 삶, 영적인 존재, 우리의 수호천사들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영적인 삶, 영적인 존재, 영적인 세계는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너무 인간적·지상적 삶의 방식에만 몰두한 나머지, 또 다른 방식의 세계와 존재, 삶에 대한 감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방식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그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오 복음 18장 3~4절)
창조론과 진화론: 천사의 학설, 악마의 학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수호천사가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고 있음을 잊고 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호천사의 역할은 자기가 수호하는 사람의 존엄성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면 당신의 천사들을 한 명씩 우리 각자를 보호하도록 파견하셨겠습니까? 우리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악마와 천사가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의 존엄성을 높여주는 수호천사와 같은 이들도 있고 그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존엄성을 간직하려면 우리는 악마의 목소리보다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수호천사의 목소리와 악마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천사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머리에는 창조론이 들어있습니다. 악마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 머리에는 진화론이 들어있습니다. 나치가 유태인들을 학살하기 위해서는 악마의 목소리 쪽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처럼 존엄한 존재를 그렇게 학살하다가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미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진화론은 그들에게 좋은 믿음을 줍니다. 유전자에는 우성과 열성이 존재하는데, 자신들은 우성인자를 가졌고 유태인들은 열성인자를 가졌다고 믿으면 됩니다. 우성인자가 살아남고 열성인자가 사멸하는 것처럼, 독일인은 살아남고 유태인은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유전자의 진화를 위해서라면 5백만이든, 6백만이든 죽여도 자연세계 내에서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화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화론을 따르면 집단적으로 악마에게 이끌릴 수 있습니다.
이런 악마의 이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책이 있는데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입니다. 이 책은 인간은 진화되었기 때문에 박테리아나, 쥐나, 인간이나 다 같이 유전자를 보호하고 운반하는 도구의 입장에서 그 존엄성의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다윈의 추종자인 도킨스는 인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유전자라고 말합니다. 벼락에 맞은 어떤 아미노산과 같은 화학물질이 생명체의 시초가 되는 유기화합물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포막을 가지게 되고 우연히 자기복제를 할 수 있는 세포가 됩니다.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다 우연입니다. 어쨌거나 그 자기복제를 할 수 있게 된 유전자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생존을 위해 자신들을 운반해 줄 도구들을 만듭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되거나 쥐가 되거나 사람이 됩니다. 유전자가 곧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자입니다. 사람은 그저 그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유전형질을 후대에 물려주게 만드는 기계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남을 위해 희생하거나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까지 그는 이기적인 행위라고 말합니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이기적인 행위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유전형질을 지닌 자녀들의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이기적인 행위일 뿐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의 눈에는 결혼하지 않고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을 포기하면서도 남을 위해 사는 사제나 스님도 새로운 유전자인 그런 문화와 믿음(밈)을 전해주는 도구의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세계의 베스트셀러라는 작품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감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론은 자신의 우성인자를 위해 다른 열성인자를 살해하거나 학살해도 된다는 생각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런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그런 사람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그저 유전자를 나르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고 격하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반면 창조론에 더 근접한 책이 있는데, ‘부르스 립튼’의 『당신의 주인은 DNA가 아니다, 믿음의 생물학』이라는 책입니다. 이분도 스탠퍼드 의대에서 교수를 지내신 분입니다. 세포 전문가이신데, 이전까지는 유전형질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분은 DNA가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식이나 믿음이 DNA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DNA는 그저 자기복제를 하여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기적 유전자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물 실험을 하는 것 중에 플라시보, 노시보 효과가 있습니다. 약물은 분명히 유전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인간의 의식에 따라 좋은 영향도 나쁜 영향도 미치거나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유전자가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나 믿음이 유전자에 영향을 줍니다. 이에 인간의 주인은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의식, 특별히 인간이 믿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병자가 기적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근거를 과학적으로 제시했고, 인간이 단순히 세포들의 결합체라는 진화론과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각자가 옳다고 믿는 것을 주장합니다. 진화론도 어떻게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생겨나는지 알지 못하고, 창조론도 하느님이 계심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 싸움은 영원히 지속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믿어야 합니다. 마치 사막의 모래들이 모여 저절로 시계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을 믿어 인간은 그저 모래에 불과하다고 여기던가, 아니면 위대한 기술을 지니신 분이 만들어 낸 시계는 모래와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가치 있다고 믿기 위해 창조론을 믿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걸 믿건, 저걸 믿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진화론을 믿으면 인간은 그저 벽돌과 같은 물질에 불과하다고 여겨 법적제재가 없다면 이웃에게 막 대해도 되지만, 진화론을 믿으면 가장 작은 이들이라도 하느님의 천사들이 함께하시니 양심상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수호천사는 자신의 존재로 우리의 존엄성을 높여주는 분입니다. 창조론을 주장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리켜 누군가의 수호천사로 살 것인지, 진화론을 주장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며 남을 쉽게 죄짓게 만들 수 있는 악마처럼 살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결정에 달려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생 때입니다. 여름에는 늘 바빴습니다. 본당의 여름 행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의 여름 성경학교, 여름 신앙학교가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함께 준비하기도 했고, 답사를 다녀오기도 했고, 야영장이나 수련원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여름이 분주했다면 겨울에는 좀 여유가 있었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면서 구유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여름의 행사에 비하면 한결 여유가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주로 새벽미사를 다녀오고 본당 사무실의 업무를 도와주곤 했습니다. 3학년 때입니다. 선배 신학생에게 ‘나환자 마을’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겨울방학에 나환자 마을에 가서 봉사한다고 합니다. 주로 아이들 교리를 가르쳐주고, 어르신들 농장 일을 도와준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나환자 이야기를 들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습니다. 1984년 처음으로 선배 신학생과 함께 나환자 마을엘 다녀왔습니다.
선배 신학생은 주로 어른들과 함께 지냈고, 저는 아이들과 지냈습니다. 교리를 가르쳐 주고, 시간나면 같이 놀았습니다. 눈 오는 날 눈싸움도 하고, 산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꽁꽁 얼었던 낙동강을 건너 시내에서 자장면을 먹고 오기도 했습니다. 저녁에는 방에 옹기종기 모여 게임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부모님은 어려운 시절을 살았지만 아이들은 모두 밝고 깨끗했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여학생은 새벽에 연탄을 간다고 오기도 했고, 중학교 다니는 학생은 계란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성당 마당에는 종탑이 있었고 종을 치면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아이들이 예쁜 손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아이들이 보내준 편지를 읽으면 즐거웠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이었는데 이제 그 나이의 아이들을 가진 부모가 되었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걷는 친구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주변을 보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동안 ‘카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목적지가 같은 분들을 연락해서 승용차를 함께 이용하는 나눔입니다. 연말연시에는 사랑의 나눔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돼지 저금통을 가져오기도 하고, 군인들도, 기업체를 운영하는 분들도 이웃을 위한 나눔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나눔이 더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치를 해도 함께 나누고, 잔치가 있으면 이웃을 초대하였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신 분의 장례를 위해 함께 수고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예전에 농경시대에 있었던 방식의 나눔이 계속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쁘고 분주한 현대사회에 살면서도 나눔의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수호천사입니다.
오늘 내가 전하는 따뜻한 말과 친절은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절망 중에 있는 친구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수호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기도 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수호천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수호천사는 우리 인간을 하느님께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를 정해 주시어 지키고 도와주게 하셨다고 전합니다.
시편91장11절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또한 창세기48장 16절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우리가 대인관계 안에서도 만나는 이의 뒷배경이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아무리 우습게 보일지라도 그 사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실 신앙인들의 뒷배경은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뒷배경입니다. 거기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천사들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작은이들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렇게 수호천사와 더불어 언제나 하느님 안에 선을 지향하고 주님과 함께 사도직을 수행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직무를 잘 수행해 나가면서 하느님 안에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교회는 수호천사 기념일을 지내고 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파견되어 그를 악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선을 행하도록 이끌어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천사이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아무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10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라고 묻는다. 이 ‘하늘나라’가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어린이들처럼 처신할 때 장차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인지는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둘 다 해당되는 것이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제자들처럼 자신을 높이지 말고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오직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겸손을 촉구하신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4절).
그러면서 또한 예수께서는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을 예수님의 처신과 명령,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5절) 불쌍한 어린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아 같은 어린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 선행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베푼 선행으로 간주하신 ‘최후의 심판 설교’(마태 25,31-46)를 연상케 한다. 물론 이 구절이 앞의 내용, 즉 겸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마태오는 여기에 수록을 하고 있다. 아마 그것은 이러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그만큼 낮추지 못하면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수록하고 있을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10절)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태오 교회의 미천한 교우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무너뜨려서도 안 되고 그들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염려하는 천사들이(토비 5,6-7.22; 사도 12,15)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기”(10절) 때문이다. 이 천사들은 하느님 가까이서 시중드는 매우 높은 천사들이다.
이 천사들은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하느님께 고발하기도 하는 자들이다.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 낮추어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우리가 우리 형제를 업신여김으로써 또한 그들을 창조하신 하느님까지 멸시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인간은 바로 보이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자.
<수호천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수호천사 기념일>(2020. 10. 2. 금)(마태 18,1-5.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이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적절한 때가 되면 잘못된 일들을 모두 바로잡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사회적인 약자에게 가해지는 횡포와 억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라는 말씀은, 자기보다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면 안 된다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들의 천사들’은 수호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뵙고 있다는 말씀은, ‘작은 이들’이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하면 그들의 수호천사들이 곧바로 하느님께 그 일을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시고, 작은 이들을 특별히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힘없는 사람들을 편애하신다는 뜻도 아니고, 사람을 차별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작은 이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킬 힘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시는 것입니다.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힐 때, 힘없는 사람들의 수호천사들이 곧바로 하느님께 그 일을 말씀드린다면, 그러면 그때 ‘힘 있는 자들의 수호천사들’ 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힘 있는 자들의 곁에서 약한 이들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타이를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하느님께 가서 힘 있는 자들의 죄를 고발할 것입니다. 수호천사라고 해서 무조건 편을 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막는 것도 수호천사들이 하는 일입니다.>
어떻든 이 말씀은, 사회적으로 힘 있는 자들에게는 경고 말씀이 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됩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하느님을 거슬러 반역 행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곧바로 천벌이 내리지는 않겠지만, 즉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겠지만 (2베드 3,9),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작은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느님의 보호와 도움이 더디게 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시기와 방법을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앙갚음 하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로마 12,19).
수호천사가 하는 일이 가장 잘 드러난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를 행진할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탈출 13,21-22).”
(‘주님께서는’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 말을 ‘주님께서 보내신 수호천사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수호천사의 보호와 도움은 곧 주님의 보호와 도움입니다.)
그런데 무조건적인 보호와 도움은 아닙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탈출 23,20-21).”
수호천사가 도와주기를 바란다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수호천사의 보호와 도움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요셉에게 헤로데의 음모를 미리 알려 주고,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킨 천사가 대표적인 수호천사입니다 (마태 2,13-14).
실제로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동방 박사들이 헤로데의 계획을 눈치 채고 요셉에게 그것을 알려 주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왕궁의 누군가가 요셉에게 알려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동방 박사들이, 또는 그 누군가가 수호천사의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남을 도와주는 수호천사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수호천사의 일을 하면 수호천사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는 요셉에게만 알려 주고 베들레헴의 다른 집들에게는 안 알려 주었을까?
또는, 요셉은 혼자서만 알고 사람들 몰래 베들레헴을 빠져나갔을까? 아마도 천사는 아기가 있는 베들레헴의 모든 집에 다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천사니까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또는, 요셉은 그냥 떠나버리지 않고, 다른 집들에게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안 믿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믿었더라도 어떤 사정으로 피신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른들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베들레헴의 아기들은 억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수호천사는 왜 그 아기들을 지켜 주지 못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의문은 오늘날에도 이런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수호천사가 있다면, 왜 아직도 이 세상에는 억울한 일들이 많이 생기는가? 힘없는 사람들은 왜 아직도 고통과 고난을 겪고 있는가? 내가 지금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데,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탄의 세력이 전멸할 때까지는, 이 세상에 ‘악’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이 모두 회개하거나 심판 받을 때까지는 이 세상에 ‘죄’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악과 죄를 물리치기 위한 우리의 사랑과 선행 실천도 역시 숙제로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위치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수호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겠지만, 지금 내 곁으로 다가와서 나를 도와주는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수호천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늘안과 믿음생활 하며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은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한 사람들 개별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어린이는 수호천사와 직통한다는 점을 예수님은 자주 설명하셨습니다.
세상에 물 안 든 상태는 하늘을 직관하며 단순 겸손 소박하단 겁니다.
어린이가 하늘에서 큰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 초심인생에 유의 합시다.
세상에 물든 어른들은 하늘나라도 세상처럼 보게 돼 하늘맹인 됩니다.
제 눈의 안경이란 말처럼 세속에 찌든 우리 눈 하늘맹인 되고 맙니다.
하늘나라의 아버지 뵐 날 기대하며 지금부터 하늘눈으로 세상 삽시다.
하늘맹인 영생살기 곧 지옥이니 하늘안과 믿음생활하며 고쳐봐야겠죠.
수호천사 기념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가끔은 헛소리를 할 때가 있다. 내 말이 아니다. 나와 무관한 딴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일을 보고 놀란다.
아주 먼 옛날, 언젠가 동료들과 놀러갈 때의 일이다. 운전을 내가 하고 가는데 동료에게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했다. “요즘은 통 경찰들을 만나지 못했어” 이 말을 어쩌자고 했는지 기분이 이상하고 찝찝해 취소하고 싶었지만 이미 발설되어 주어 담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나는 동료들을 태우고 운전하고 길을 떠나는데 비가 뿌리고 있었다. 나는 그 말 이후 조심껏 서행하고 가는데 반대편 차선에서 트럭이 달려오다 정면으로 내 차를 들이 받았다. 사건접수가 되고 현장실사 과정에서 결과는 상대편 운전자의 일방과실로 종료가 되었다. 그날 나는 헛소리 한대로 하루 종일 경찰서에서 현장에서 많은 경찰들을 보아야 했다.
나는 수호천사가 있음을 안다. 내 본의가 아니게 헛소리를 할 때면 그 소리가 수호천사의 메시지로 알아듣는다. 그리고 헛소리가 나올 때면 나는 그날은 조심을 하던가 아예 하던 일을 손에서 놓았다. 될 수 있으면 나는 그 일 이후로 빈 말이라도 예사롭게 넘기지 않는다.
나는 수호천사가 계심을 믿는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90〕,11).
나는 수호천사에게 기도한다.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창세 48,16).
그리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조심 조심 오늘도 수호천사의 도움으로 즐겁게 행복하게 길을 간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천사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질문에는 묻는 이의 관심사가 들어 있기 마련이지요. "큰 사람". 제자들의 로망이고 욕망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제 곧 제자들은 예수님의 답을 통해 지상의 나라에서의 "큰 사람" 개념과 하늘 나라의 "큰 사람" 개념이 다르다는 걸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과 대조되는 "작은 이"를 보여 주십니다. 게다가 어린이처럼 작아지지 않고서는,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을 꿈꾸기는커녕 그곳에 들어가지도 못하리라고 단호히 언급하시지요.
어린이처럼 작아지는 길은 "회개"입니다. 높고 강하고 큰 것을 추구하던 방향성을 되돌려, 낮고 약하고 작은 것에 눈길을 주고 다가가 하나가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엽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사람은 누군가를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뿐 아니라 어떤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초라하고 나약하고 비천해 보여도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생각과 마음을 담고 있고, 하느님 계획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이 작은 것 안에서 거대한 우주를 볼 수 있기를, 작은 이들 안에서 하느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럴 수 있다면 모든 존재에 대한 경외감과 존중은 절로 일어나지요. 제자들이 하늘 나라의 큰 사람 되기를 꿈꾸기 전에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작음을 향해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들이 더, 더, 더 작은 것을 꿈꾸었으면 좋겠다." 하고 속삭이시는 듯합니다.
제1독서의 대목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탈출 23,21)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 현존, 하느님 권능, 하느님 영광의 다른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천사에게 당신 이름을 맡기신 것은, 그 천사의 명예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지요.
주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의 천사를 존중하고, 거역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천사는 보내신 분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고 실행하는 존재니까요. 천사를 신격화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에 하느님 뜻이, 그의 행동에 하느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천사들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께 우리의 사정을 아룁니다.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 못해도 우리 주변에서 우리와 동행하며 보호하지요. 구약의 인물들이나 마리아처럼 직접 천사를 대면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의 다양한 존재들을 통해 천사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천사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으려면 시선은 작고 낮은 곳으로, 마음은 약하고 고통 받는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회개"인 것이지요. 이 시선과 이 마음을 지닌 이에게 천사는 도처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줄 것입니다. 천사의 몸짓은 아주 고요하고 섬세해서 크고 강하고 높은 것을 좇는 시력에는 포착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우리를 떠받치고 보호해왔는지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지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서 지구 반대편에서 홀로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천사가 있습니다. 한 사건이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원인과 결과들의 고리를 거쳐 우리 앞에서 폭발하기까지, 우리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천사들의 피땀과 눈물이 격한 충격을 흡수하고 방향을 틀어 우리를 보호해 왔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지요.
우리도 누군가의 천사일 수 있습니다. 바람결에 실어 보낸 따뜻한 안부와 기도가 이 세상 누군가에게 밥이 되고 위로가 되고 살 힘이 될 수 있으니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실천하는 모든 사랑의 몸짓이 곧 천사의 몸짓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천사가 되고 싶습니까? 살아서도 천사가 되는 길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이에게 또 모르는 이에게 기도 천사, 격려 천사, 위로 천사, 나눔 천사, 기쁨 천사, 감사 천사, 미소 천사, 안부 천사... 여러분 자신이 이미 누군가에게 작은 천사였다는 사실이 보이시지요? 여러분은 세상 눈에는 가려져 있지만, 작은 것을 보시는 주님 눈에는 선명히 감지되는 숨은 천사입니다. 이 세상 어둠과 고통 속에서 이렇듯 천사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천사 되시길 축윈합니다.
신비의 바다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수영을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맥주병이라고 하지요. 제가 그렇습니다. 사람들 말로는 몸이 경직되어 그렇다는데, 머리로는 몸에 힘을 빼야지 하면서도 막상 물에 들어가면 어느새 몸에 힘이 들어가버립니다. 그런데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물 속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운동을 해도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고, 물 위에 떠 있으면 평화로운 마음마저 든다고 하지요. 또 체력을 유지하며 물 위에 떠 있는 ‘생존 수영’을 배우면, 몇 시간이라도 떠 있을 수 있다고 하는데, 저로서는 그저 신기하고 부러울 따름입니다. 우리 영성 생활의 발전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자기 힘으로 허우적거리다가 점차 힘을 빼고 물 위에 뜨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조금씩 신비의 바닷속에 나를 내맡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점차 성령께서 이끄시는 흐름에 따라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잔뜩 긴장해서 내 힘으로만 하려 하지 말고, 마치 엄마 품에 안기는 어린아이처럼 당신 신비 속에 뛰어들라는 초대라 여겨집니다. 특별히 수호천사 기념일을 보내는 오늘, 항상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신뢰하며 깊은 물 속에 몸을 띄워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당신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은
늘 그렇게
내 곁에 내 안에
계시건만
내가 커질수록
당신은 희미해지고
나만 있으면
당신은 사라지고
내가 작아질수록
당신은 또렷해지고
내가 없으면
당신이 전부이지요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함승수 신부님
여러분의 자녀가 시험에서 국어 95점, 사회 90점, 생물 70점, 수학 30점을 받은 성적표를 들고 왔습니다. 그 네 가지 과목 중에 어느 것에 가장 먼저 눈이 가십니까? 그리고 어떤 과목에 대해서 자녀와 대화를 나누시겠습니까? 실제로 미국에서 부모들을 대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더니, 전체의 77%에 해당하는 부모들이 가장 먼저 눈이 가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대화를 나눌 과목으로 성적이 가장 안좋은 '수학'을 선택했습니다. 반면 최고점을 받은 '국어'에 주목한 부모는 전체의 6%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기 자녀의 약점을 보완해야 더 높은 성적을 받고, 그래야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에 비해 단 6%의 부모들만이 자녀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자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또 자녀가 잘하는 부분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함께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6%의 부모들이 자녀들과 더 친밀하고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존중해주는 부모들이 하는 말이니 자녀들도 더 귀기울여 들으며 따르려고 하겠지요.
어린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합니다. 자녀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존중해주고 장점을 찾아주는 일, 못하는 것에 대해 혼내기보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도록 격려해주고 더 좋은 삶의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며 우리가 보다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어린이들을, 나보다 능력이 부족한 이들을 무시하곤 합니다.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함부로 그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며 더 능력있는 사람인 내가 그들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그들을 윽박지르기도 하고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우리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사는 그들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음을...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외면하는 우리보다, 천사들을 통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겸손한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지를 전할 '특사'를 임명하시어 우리들 각자와 동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험에서 보호하며 올바른 길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우리가 '수호천사'라고 부르는 존재가 그들이지요. 수호천사는 신앙의 여정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가 모든 유혹을 이겨내도록 이끌어주고 악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수호천사가 우리를 돕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린이'처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으며 착한 일을 하는 어린이처럼,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도우심에 나 자신을 의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이들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타인의 허물과 잘못을 보듬고 용서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존중하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이처럼 마음이 넓고 깊은 사람이 진정으로 '큰 사람'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천사입니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 한 분을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다음은 수호천사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90〕,11).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창세 48,16).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가끔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누군가가 나를 음해하나?’하는 의구심이 들다가도, 일이 잘 풀리면 ‘누군가가 나를 돕는구나!’ 하는 겸손한 마음은 들지 않고 내가 잘해서 그런 줄 알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앞에 세우시고는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루카 18,10) 라고 이르십니다.
온 세상 우주 만물을 돌보시고 헤아리시는 주 하느님의 눈과 귀에는 우리의 일상이 하나도 빠짐없이 올라가고 숨은 것도 보시고 들으시는 주님 대전에 고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진실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 하느님 앞에 늘 겸손하고 진실하며, 결코 오만해지거나 죄악의 유혹에서 건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이 세상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을 잘 헤아리게 해주시고 함께하면서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기를 감히 청합니다.
천사는 날개로 하늘을 난다. <마태 18, 1-5. 10> 10월 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천사는 날개로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서 얼굴을 뵙고,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고 즐기며 죽지 않고 하느님의 뜻만 따르는 존재입니다. 우리도 천사가 되어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살아야 세상에서는 가장 작은 자이지만,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도 여기서는 하느님을 희미하게 보지만 죽어서는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주님은 나에게 날개를 달라고 하시며 천사들과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날개를 찾아보니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크고 아름다운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개는 꿈이며 이상의 날개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어도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을 넘어 저 태산도 넘고 구름 위를 날아갈 수 있어 어디서나 하느님을 대면하여 만나고, 주님과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연락 오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안정시켜주고,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고, 믿음 희망 기쁨 중에 살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나도 천사가 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오늘 수호천사의 기념일, 살면서 만났던 천사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고 나도 많은 이의 천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친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여 길을 만들어주고,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주고, 그가 팔이 없으면 팔이 되어주고, 손이 없으면 손이 되어주고, 생각이 부족하면 높은 이상의 생각을 알려주고,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어 주는 날개를 달고 살고 싶습니다. 꿈이나 희망이 아닌 현실이어야 합니다.
누가 저를 보고 “신부님, 성당에는 발바닥 신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니 몸에 달린 발로만 성당에 가고 마음과 정신은 다른 것을 찾는다고 할 수 있고, 기초 단계의 신앙을 지적하기도 하고 날개 없는 믿음의 삶을 말하기도 합니다.
날개를 달고 천사들처럼 주님의 얼굴을 뵙고 찬미 찬송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디나 계신 하느님을 어디서나 만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몸에 날개를 달지 않고, 발로만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을 찾지 않고 땅을 헤매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하염없이 지나가고 이 몸은 늙어 시들어 가지만, 세월에 끌려가는 사람과 끌고 가는 사람은 다르게 구분됩니다. 나는 천사의 날개를 달고 세월을 끌고 가렵니다.
날개를 저어 높이 날면 세상 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날개가 없으면 땅의 변화에 휩쓸려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천사의 날개를 달고 하늘을 향해 날아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을 찾아 만나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할 때 주님 중심으로 살고, 흔들리지 않고 깊고 넓고 견고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두가 천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기도의 내용 따라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죽음은 천사가 되어 하느님을 맞대면하며 사는 영원한 행복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맛보려면 천사의 날개를 달고 살아야 합니다.
천사들이 너 가는 길마다 지켜 주시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Sermo 12 in psalmum Qui habitat, 3. 6-8: Opera omnia, Edit. Cisterc. 4[1966], 458-462)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시어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시리라.” 인간 자녀들을 위한 그분의 놀라운 업적과 그분이 보여 주신 자비에 대해 모든 이가 주님께 감사 드리고 주님을 찬미하면서 “주께서 뭇 민족 가운데 큰일을 이루셨다.”고 말했으면 합니다. 주여, 인간이 무엇이길래 당신께서 그를 그토록 생각하시고 당신의 마음을 그에게 두시옵니까?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그에게 두시고 그를 염려해 주시며 그를 돌보아 주십니다. 더욱이 그에게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고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며 또한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우리를 돌보는 이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존재가 하나도 없도록, 당신께선 그 복된 영들을 우리의 봉사자로 보내 주시어, 우리를 지키는 소임을 그들에게 맡기시고 우리의 수호자가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시어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시리라.” 이 말씀은 사람에게 참으로 큰 공경심과 신심과 신뢰심을 불러일으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그들의 현존에 대해 공경심을, 그들의 자애에 대해 신심을, 그들의 보살핌에 대해 신뢰심을 품어야 합니다. 그들은 현존하고, 당신의 동반자로서만이 아니고 수호자로서 당신 앞에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 현존합니다. 비록 그들에게 임무를 준 것은 주님이시지만, 그들이 그렇게 할 때 큰 사랑으로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려울 가운데 있는 우리를 돌보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수호자들에 대해 신심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 보답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또 마땅히 해야 하는 만큼 그들에게 공경심을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든 사랑과 공경심은 주님께로 돌려져야 합니다. 우리도 천사들도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할 수 있는 자격과 사랑과 공경을 받을 자격의 밑바탕을 그분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그분 안에서 천사들을 열렬히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들은 장차 어느 날엔가 우리의 공동 상속자들이 될 것이며, 현재에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담당하도록 세우신 수호자들이요 보호자들입니다. 아직 어린이로서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여하간 우리는 어린이들이고 또 우리 앞에 가로놓인 길은 매우 멀고 또 먼 것만이 아니고 위험하기까지 하지만, 이런 위대한 수호자들의 보호 하에 있는 동안 두려워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들에겐 정복당하는 일도 속는 일도 있을 수 없으며, 더더구나 우리의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동안 우리를 속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충실하고 슬기로우며 또 능합니다. 그렇다면 두려워 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그들을 뒤따르고 그들에게 매달리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보호 밑에 머물도록 합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허락한 시간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수호천사가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기쁜 사람이
되게한다.
올바른
선택으로
빛나는 모든
순간순간이
되게한다.
우리의 입과
귀를 열어 주며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따르게한다.
우리와
함께하는
일상의
수호천사이다.
저마다의
수호천사는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이다.
다양한 날씨처럼
삶에 지친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와 함께한다.
안쓰러워 하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다.
힘겨운 일상을
함께 견디는
수호천사이다.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우리의
일상안에
하느님의
수호천사가
있다.
삶의 고귀함과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수호천사는
오늘도 우리의
왼편 오른편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 준다.
수호천사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