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약 80년 전, 1940년대 독일 나치 정권 때다. 한 경찰부대 사령관으로 600명의 부하를 지휘, 약 1년간 9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이가 있다. 당시 30대 초반의 오토 올렌도르프(Otto Ohlendorf, 1907~1951)! 전쟁 후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그는 ‘교수형’ 평결을 받았다. 자녀 5명을 남긴 채 만 44세에 사형으로,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올렌도르프를 비롯한 22명의 전범을 재판에 세워 철저히 단죄한 검사,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인 벤 페렌츠(Benjamin Ferencz, 1920~2023)! 그가 1947년, ‘학살자 명단 보고서’를 발견하자마자 학살범 단죄 결심을 한 것은 만 27세였다. 당시 판사는 올렌도르프의 외모나 유창한 언변에, “착한 것 같아 마음에 든다. 그런데 당신 같은 이가 사람을 그토록 죽인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1945년 11월 21일 나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시작됐다. 사진은 1946년 9월 30일 피고들이 전쟁 범죄 재판의 평결을 듣고 있는 장면. 연합뉴스 자료사진
끝까지 괴물로 사형 당한 유대인 학살자
마침내 ‘교수형’ 평결이 나온 뒤, 올렌도르프는 집행관을 따라 사형장으로 걸어간다. 모든 재판과정을 면밀히 지켜본 페렌츠 검사 역시 올렌도르프를 뒤따랐다. 검사가 올렌도르프에게 물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할 말이나 후회 같은 게 있습니까?” 페렌츠 검사는 행여 그가 5명의 자식들에게 “사랑한다”거나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아무 할 말도 없습니다.” 올렌도르프가 말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인간성이 마비된 괴물!
“그래도 뭔가 후회의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올렌도르프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페렌츠 검사, 마치 그에게서 마지막 남은 인간성의 실낱이라도 건지려는 듯 유도 질문을 했다. 그러나 올렌도르프는 매우 당당했다.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내 누이라도 죽였을 것….” 검사 페렌츠가 귀를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그 같은 ‘확신범’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말아야 했다.
독일 영화 <아주 평범한 사람들>(만프레드 올덴부르크 감독, 2023)에 나오는 한 장면을 내 나름 정리한 것이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왼쪽)과 그의 작품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합성
오웰에게 생명의 의미 성찰케 한 힌두인 사형수
전혀 다른 분위기지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버마의 나날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카탈로냐 찬가>, <동물농장>, <1984> 등을 쓴, 조지 오웰(1903~1951)이라는 필명의 영국 작가가 있다. 그는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벵갈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아버지가 식민지 관리로 일했기 때문. 만 두 살 무렵 오웰은 어머니와 영국으로 돌아갔다.
오웰의 집안 형편은 평범했는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그는 스스로 “상류 중산층의 하층”이라 했다. 이는 증조부가 쿠바 인근의 자메이카에 있는 플랜테이션 농장으로부터 큰돈을 벌었지만, 재물 상속이 별로 없었기 때문.
오웰은 식민지 관료 양성을 위한 학교이던 ‘이튼스쿨’을 포함, 학창 시절을 그리 행복하게 보내진 못했다. 만 19세이던 1922년, 그는 (35년간 식민지 인도의 하급 관리로 인생을 보낸) 아버지처럼 식민지 공무원(경찰)이 되기로 결심, 같은 영국 식민지였던 버마로 간다. 1927년 영구 귀국까지 총 5년에 걸친 그의 버마 시절은 오웰이 영국 제국주의 현장에 배치된 권력자(가해자)의 입장에서 식민지 권력관계의 실상을 체험할 생생한 계기였다.
흥미롭게도 오웰은 지위 상승을 추구하던 세태와 달리 ‘하방’의 길을 걸었다. 버마에서의 5년간 식민지 경찰 경험은 유일한 권력의 자리이자 자기 인생에선 예외적으로 ‘높은’ 자리였다. 아니, 식민지 경험에 대한 그 특유의 성찰이 그로 하여금 기꺼이 밑바닥 삶을 향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고세훈 교수는 2006년 “지식인과 제국주의”란 논문에서 제국경찰 오웰이 식민지 버마에서 ‘평등 없는 친밀성’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 그를 밑바닥의 작가로 이끌었다고 본다.
일례로, 버마에서 제국경찰로 일하던 오웰은 자신의 하인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지만, 그가 하인에게 아무리 친절하고 인정스럽게 한다 하더라도 주인과 하인이라는 불평등한 관계 자체는 극복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권력자 위치에 있고 하인도 순종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권력자는 여유와 친절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오웰이 내연녀 내지 창녀와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창녀나 내연녀를 아주 살갑게 대할 수 있었던 배경엔 불가피하게 백인 경찰과 식민 여성의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오웰은 같은 영국인 클럽 안에서는 ‘저 혼자 신사’인 탓에 왕따 당하기 일쑤였고, 하인이나 여성과도 진정한 친구가 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그럼에도 오웰은 자기 관할 감옥에서 어느 힌두인 사형수를 사형장으로 호송할 때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불과 30여 미터 떨어진 교수대를 향해 걷던 그 힌두인 사형수가 도중에 물웅덩이를 피하려고 옆으로 비켜갔다. 그 장면을 본 오웰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까지 정신이 멀쩡하고 건강한 한 인간의 생명을 파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눈치챘던 것이다.
앞의 오토 올렌도르프와 달리 이 힌두인 사형수는 확신범이 아니라 ‘우발범’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오웰의 아버지야말로 영국 제국주의가 식민지 인도를 확실히 관리해야 모두에 좋다고 믿는 ‘확신범’인지 모른다. 그에 비하면 ‘평등 없는 친밀함’으로 현지인들과 인간적 교류를 원했던 오웰은, 전쟁 당시 올렌도르프 사령관이 유대인 학살 명령을 내렸을 때, 차라리 ‘겁쟁이’라 욕을 먹더라도 “도저히 사람은 못 죽인다”며 앞으로 나섰던 ‘이탈범’에 속한다. 그 뒤 유럽으로 돌아가 작가가 된 오웰은 마치 속죄의 길을 걷듯, 자본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자본 전체주의인 파시즘 및 공산 전체주의인 스탈린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글을 죽을 때까지 쓰고 또 쓴다. <오웰의 장미>에서 리베카 솔닛은 오웰의 친구 조지 우드콕을 인용, “그의 자기 재생 능력은 그가 평범한 것,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경험, 그리고 특히 자연과의 접촉에서 누리는 기쁨에 있었다.”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명 감수성을 지키는 길
여기서 나는 페렌츠 검사가 본 사형수와 제국경찰 오웰(예비 작가)이 본 사형수를 나란히 떠올린다. 검사 페렌츠의 사형수(올렌도르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냉혈한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평소에 유대인과 러시아 볼셰비키(공산주의)를 동일시했고, 이들을 국가의 적이라 믿는 ‘확신범’이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교육받고, 세뇌된 탓!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시스템과 일체감을 느꼈다. 일종의 ‘강자 동일시’! 반면, 예비 작가이자 제국경찰인 오웰이 본 사형수는 그 마지막 순간에조차 생명을 가진 인간의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설사 그가 죽을 짓을 했다 하더라도 그는 필시 ‘우발범’이었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나치전범을 단죄한 독일 뉘른베르크 재판 자료들이 미국 알래스카 옥션사 경매에 올랐다. 사진은 경매에 나온 나치 완장과 메달. 연합뉴스 자료사진
페렌츠 검사는 당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의미에 대해, “(전범에 대한) 복수나 응징이 아니라, 평화롭고 위엄 있게 살 인간의 권리를 확인받는 과정”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확신범’ 사형수로부터는 결코 인간의 얼굴을 찾을 수 없었다. 검사가 사형수로부터 배울 점은커녕 오히려 자괴감만 들었다. 반면, 예비 작가 오웰이 동행한 사형수는 죽으러 가던 도중에 물웅덩이를 피해 걸을 정도로 정신이 맑았다. “정신이 멀쩡하고 건강한 한 인간”이었던 오웰의 사형수는 오웰에게 인간성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이 근원적 체험은 오웰로 하여금 제국주의 가해자와 식민지 피해자 구도를 ‘이탈’하게 했고 결국 치열한 작가가 됐다.
그런데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저술한 크리스토퍼 브라우닝 교수는 흥미롭게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 현장에서조차 ‘확신범’만 있었던 게 아니라 한다. 오히려 대다수 병사나 경찰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처럼) ‘아주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출발했는데, 이들이 일단 명령에 복종할수록 점차 학살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지면서 갈수록 야만화했을 뿐이라는 것! 만일 이들이 초기의 살상 명령에 순순히 복종 않고 한사코 자신의 평범한 인간성을 지키려 했다면 상당 정도 가능했다고 봤다. 실제로, 상부로부터 학살 명령을 받은 대대장은 실행 대원들에게 “자신이 없다면 빠져도 좋다” 했고, 500여 명 중 12명이 빠지겠다고 하자 이 ‘이탈범’들은 임무에서 제외됐고 별다른 징계 처분도 받지 않았다 한다. 물론 브라우닝 교수의 사례 분석을 나치 시대 전반에 일반화할 순 없지만, 최소한 위 사례만큼은 일리가 있다.
우리가 평소에 권위에 대한 복종이나 주변의 동조 압박을 절대화하지 않고, 또 낙인‧배제‧죽음의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고, 상황과 맥락은 물론 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얼마나 ‘멀쩡한 정신’으로 보는가에 따라 ‘탈주’ 가능성이 열린다는 얘기다. 홀거 하이데 교수는 “포퓰리즘의 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녹색평론> 2018년 159호)에서 (두려움을 감추는 한 형태가 분노나 증오로 나타나지만 이는 근본적 사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기에) “진정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두려움을 억압하는 시도를 마침내 그만 두는 것”이라 했다. 마치 ‘생명 감수성’을 가진 12명의 이탈이나 조지 오웰의 탈주처럼 능동적 행위자가 되려면!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보다 많은 용기를 내어 우리가 가진 두려움을 제대로 해소할 수 있는 개인적‧사회적 조건들을 창출하는 일”이 중요하다.
지금의 검찰공화국에 ‘멀쩡한 정신’이 남긴 말
따지고 보면, 우리는 비단 전쟁 때 학살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 야만적인 상황에 놓인다. 일례로, 국가기관이나 지자체, 검찰, 경찰, 언론, 기업, 은행, (핵)발전소, 군대, 학교, 종교 등에서 예사로 일어나는 ‘진실 조작’ 압박 역시 전시의 ‘학살 명령’과 유사한 야만적 상황이다. ‘진실 조작’에의 동조나 묵인은 타인 이전에 이미 ‘자기 학살’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자신이 날마다 경험하는 이 숱한 야만의 상황들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자유인(自由人)으로 살 수 있을까? 오웰의 사형수가, 그리고 작가 오웰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이다. 103세에 작고한 ‘멀쩡한 정신’의 페렌츠 검사가 “내 할 일은 다했다. 이제 젊은이들에게 바통을 넘긴다.”고 한 말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지금의 ‘검찰공화국’ 대한민국에!***
출처 : [강수돌 칼럼] 검사의 사형수와 오웰의 사형수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