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습한 장마가 다가온다
부드러운 열무 두단, 얼갈이 한단이, 지나온 세월처럼 무겁다.
50번째 복권이 당첨된 명당복권 앞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다.
장마가 시작되면 매일 비가 내리고, 어쩌다 해가 나면
밤새 후들거리던 배추, 무우, 열무 등 밭작물들은 푸욱 푹 제풀에 녹아 내린다.
올해도 장마 전에 열무김치를 한다고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 날을 잡았다
장마가 시작되면 열무 등의 가격은 천장부지로 치솟는다
어처구니가 없어지고 웃기만 하던 작년이 생각난다.
열무김치를 한 통주려고 며느님을 불렀다
염치도 모자라고 자칭 타칭 잔소리꾼인 며느님은 열무김치 앞에서 한 말씀하신다.
"어머님 김치는 양념범벅이라 '맛있게' 먹어도 적자에요."
이게 무슨 말씀인고
남보다 양념을 두배로 일품 양념만을 사용하는 나는
"본래 김치는 양념이 기본이란다."
"본시 김치는 전주가 본향이란다" 를 기본으로 김치를 담근다.
진안 고래실 텃밭에서 막내동생이 지은 맵고 달고 시원한 고추, 청양고추와
작은이모님이 선별하신 멸치액적 원액, 까나리액젖 원액, 강경 새우젓 원액,
항아리에 담근 매실액기스, 봉동 생강, 마늘, 쪽파, 사과, 양파, 거칠게 갈고
포실포실 감자익혀 갈아넣고
보리밥갈아 국물 넉넉하게 붓고 열무김치를 담근다.
기억 속 어린시절
마당 들마루에서 머리만 잘라 담근 시원한 열무김치 쭈욱 쭉 찟어
국수에 말고 고명얹어 모기쫓는 쑥불 앞에서 한 입 먹다보면
고래실 밭 김매시고 돌아오신 엄니도 옷자락 흙을 탁탁 터시면서
:내도 한 그릇 말아라" 하신다.
컴컴한 허공에서 들려온 엄니 목소리가 따뜻하다.
생일이 음력으로 5월12일인 나는 생일이 되면 하지감자를 깍는다.
누가 먼저 감자껍질을 깍는 시합을 동생들과 벌인다.
달팽이 놋수저로 뻑뻑 긁다보면 뾰얀 전분이 머리고 얼굴이고 마구튀어
얼룩덜룩이다. 서로 마주보며 그 모습에 배를 잡고 웃는다.
가마솥 깡보리밥 위에 깍은 감자를 수북히 얹고, 부지깽이로 불을 지핀다.
고실고실 하지감자 맛있지라.
장마가 시작되면 들판 가득 긴 대마 잎파리를 치고, 가마솥에 찌고
껍질벗겨, 잇빨로 잘게 쪼개, 잿물에, 담근다.
할머님의 달덩이같은 무릅에 비벼 삼베꾸러미에 감는다
호롱불아래 베틀이 철컥 철커덕, 삼베 북이 쓰윽 쓰윽 지나가며 베를 짠다.
나는 베틀아래 편안하게 배를 깔고 몽땅연필에 침을 뭍혀 아라비아 숫자를 쓴다
오른쪽부터 1,2,3,4,5,6,7,8,9,10
할아버님 붓글씨 따라 日今是芽生木萬
베를 짜시던 무서운 어머님의 천둥소리가 얼핏 풋잠을 깨운다
"엠병할 놈의 가시네, 썩을 년의 가시내, 호랑이 물어갈 놈의 가시네야"
"할베의 한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지만
신식 핵교에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거란다"
"몰 배우는게야 핵교에선"
'엄니 무서워' 다리가 후들거린다
지리산 마지막골 가난한 화전민의 큰딸은 으레
9남매의 큰며느리인 울 엄니의 스트레스 화통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꼬리를 감고, 한 발자국 밖도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동생들 업고 안고 돌보느라 국민학교조차 못가본 깨복쟁이 친구
툴툴이집으로 도망을 친다
"엄니 미워"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엄니가 92세로 터밭에서 호미들고 김매시다 돌아 가신 후였다.
울다울다 지쳐 바라 본 민들레 꽃씨가 바람에 흩어질때
가슴을 열고
엄니가 제일 사랑한 자식이 될 것을 약속해 봅니다.
첫댓글 우리 어머니 감사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바쁘다고 52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나요?
아버지께서 45세때에 하늘나라 가셔서 바로 뒤따라 가셨나요?
김윤수
네~~
주면주는데로 양양 대니 ㅎㅎ아들땜시 안줄수도 음꾸
우리 박여사 고향이 그동네 진안 이니 그맛도 울박여사님 김치맛일거란 ㅎㅎ
37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를 떠올립니다.
어머니 생각 · 4(비몽사몽非夢似夢)
------------------------- 박 민 순
어젯밤
꿈인지 생시인지
어머니 뵙고
바보천치처럼
온종일
어머니 찾아 헤맸다.
어째 이리 정감있는 글이 올라왔을꼬 한편의 고향 드라마 보는 듯합니다 김치 맛 만큼 입 맛 도는 글입니다.
열무얼갈이 김치를 또 담글때가 되어
은근히 부담스러웠는데
저도 빨리 담궈야겠네요
요즘 감자도 참 맛있어요
감자깍는칼이 없었다면 불편했을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