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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안에서의 자유 2:1~5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복음의 보편성 2:6~10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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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은 이방에 전한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에 제시했습니다. 그가 헬라인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받게 하지 않은 것은 거짓 형제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가 항상 성도들 안에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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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안에서의 자유 2:1~5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소중합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일을 언급합니다. 이를 예루살렘 교회 부조 건으로 보기도 하고(행 11:28~30), 예루살렘 공의회 건으로 보기도 하는데(행 15장), 대체로 후자를 지지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설명했고, 유력한 지도자들에게는 따로 설명하며 그들과 협력하길 원했습니다(2절). 거짓 교사들은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복음 안에 있는 자유를 제한하고 다시 율법의 종이 되게 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굴복하지 않은 바울처럼, 성도는 복음 안에서 얻은 자유를 끝까지 지켜 내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거짓 교사들이 헬라인 디도에게 강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복음 안에서 얻게 된 자유는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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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보편성 2:6~10
복음은 사람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시고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기에, 그들이 전하는 복음도 동일합니다. 예루살렘의 유력한(유명한) 사도인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도 바울이 받은 하나님 은혜를 알고,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9절)란 바울을 모태로부터 택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 주신 은혜를 뜻합니다(1:15~16; 고전 15:10).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가난한 자들은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행 11:28~30). 이러한 당부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 더 깊은 묵상
하나님은 베드로와 바울을 각각 어떠한 사도로 부르셨나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임을 인정하고 복음을 위해 내가 동역할 이는 누구인가요?
오늘의 기도
주님, 제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 계시의 말씀 앞에 제 삶을 세우길 원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부르심을 존중하고 복음의 진리를 선명하게 하는 일에 넉넉한 마음으로 협력하게 하소서. 복음의 부요함을 이웃에게 전하고 나누는 사명자의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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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서 주신 계시를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고, 다른 복음에 잠시도 굴복하지 말고, 맡겨 주신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길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순종하며 발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긴 간구하고, 그분의 뜻과 계획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가자
거짓 복음, 다른 복음에 결코 강요받고,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바로 서기 위해 더 열심히 배우고, 익히도록 하자
우리에게 맡겨 주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더 많은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충실한 삶을 살아가자
갈라디아서 2:1~10 같은 복음, 다른 역할
구원교리에 대한 생각들이 서로 달랐던 것 같다.
유대교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받는 다고 생각하고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전했는데
갈라디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지?
믿음 + 행위(율법의 준수나, 할례등등)로 구원을 받는지? 헷갈려하고 있었다.
이 문제 때문에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의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또 자기의 사도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에게서 난 것도 배운 것도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난 복음을 이야기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을 하였고 부름심을 받아서 사역을 한다고
택함을 입은 것과 부르심과 회심에 대한 간증을 했었다.
오늘 본문은 14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1)
누구와 같이 올라 갔는가?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1)
왜 예루살렘에 올라 갔는가?
1.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2)
2. 내가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확인받기 위해서 이다.(2)
유명한 자들에게 제출하여 검증을 받은 모양이다.(2)
유명한 자들이란? 기둥같이 여기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다.(9)
왜 이렇게 검증을 받았을까?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하기 위함이다.(2)
이렇게 서로 검증을 한다면 교파와 교단이 분리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검증의 한 모델이 소개되고 있다. 디도이다.
헬라인 디도는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했다.(3)
유대인인 디모데는 할례를 받게했다.(행16:3)
그러나 헬라인인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았다.(3)
왜 그랬을까?
바울의 위선적인 행동인가?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은 할례를 반대한 것도 아니였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게 한 것이다.
유대인을 향하여 복음의 문이 열려 있도록 하기 위해서 행한 일이다.
디도의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은 헬라인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다.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한 것이다. .
할례문제는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의 표현대로 라면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기 위함이다.(5)
이렇게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에서 만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의 사이에
복음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을 서로 확인한다.(6)
예수님으로 부터 직접 배웠던 예수님의 제자들인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도
사도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이(6) 특별히 더 가르쳐야 할 것은 없었다.
다만 서로 확인한 사항은 있다.
역할의 분담이다.
베드로는 할례자에게(7) 할례자의 사도로(8)
바울은 무할례자에게(7) 이방인의 사도로(8)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음은 베드로에게나 바울에게나
비교할수는 없겠지만 나에게도 동일한 복음이다.
베드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나
바울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나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은 능력을 행하신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2절 바울은 계시를 따라 14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사도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을 나누었지만 ‘사적으로’ 하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께 받은 복음을 확신했고 그 후로 오랫동안 그 복음으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역해왔기에 따로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거짓 형제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사도들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게 하여 복음을 위한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에 도움이 된다면 물러나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했습니다.
나는 내가 배우고 믿고 전하고 있는 복음에 대해 확신하고 있습니까?
3~5절 바울이 ‘헬라인’ 디도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간 것은 분쟁을 선동하려는 것이 아니라 ‘차별 없는’ 복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은 것은 이제 몸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 즉 믿음만으로 충분한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외의 것이 구원의 전제가 되는 순간, 십자가가 허문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그렇게 바울은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거짓 형제들의 요구에 굴복하지도 이용당하지도 않았습니다. 배려도 중요하지만 진리 아닌 것에 대한 관용은 타협이 될 수 있습니다.
꼭 지켜야 할 복음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6~10절 예루살렘 지도자들도 바울의 사역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바울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참 진리 앞에서 타인을 바꾸려고 하기보다 자신들이 변하려고 하였습니다. “단 하나의 복음” 안에서 서로의 역할과 은사만 다를 뿐입니다. 복음의 ‘중심’에 대해서 양보해서는 안 되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협력해야 합니다.
주께서 내 기대와 지식과 경험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실 때 나는 잘 수용합니까? 거짓 진리와 타협하지 않되, 새롭게 열어가시는 주님의 역사에는 열린 마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기도
진리에 순종하고, 권위를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지혜를 주소서.
바울은 두 번째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곳 유력자들도 인정해 주었다고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14년만에 예루살렘을 재방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지고 혼란케 하므로 논쟁을 했는데, 안디옥 교회에서 그 문제에 대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유권해석을 듣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보냈을 때를 말한다.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예루살렘 교회 중심인물인 야고보와 베드로, 요한 등을 만났었다.
하나님께서 사방에 믿음의 사람들을 일으키사 교회를 세워나가실 때 영적 질서를 위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와 통제를 받도록 하셨는데 저들은 그런 일에도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에 당시 교회들로부터 유력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이야기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유력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존경받고 있었다.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바울의 보고를 듣고 율법 문제를 심의할 때 고넬료 가정에 대한 베드로의 보고를 들은 후 이방인에게 율법준수라는 멍에를 지우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는 것으로 마무리했었다.
이때 베드로에게는 유대인을 위한 사역자로,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사역자로 삼은 것을 인정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정당성과 신분의 보장을 위해 유력한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했다는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순수성을 공격했지만 바울은 타협을 거부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복음의 진리에 대한 도전은 있게 마련이다.
우리도 복음을 변질시키는 무기력한 종교인이 되지 말고 복음을 타협하지 않는 능력있는 신앙인으로 자라가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말씀요약
바울과 바나바는 디도와 예루살렘에 갔을 때, 헬라인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에게 복종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은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음을 인정했습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디도의 무할례(2:1~5)
진리는 절대적이며 비타협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문제에는 유연하게 대처해야겠지만,
복음의 본질과 관련해서는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4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이방 선교의 열매인 디도와 함께했습니다. 많은 유대인 성도가 할례받지 않은 디
도와 교제하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디모데에게 할례받게 했던 바울은(행 16:1~3),
디도에게만은 끝까지 할례받지 않게 합니다. 만약 디도에게 할례를 행한다면,
이방인 성도도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디도의 할례는 복음의 본질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이라면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사수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바울은 왜 디도에게 끝까지 할례받지 않게 했을까요?
- 적용 질문: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극복해야 할 습관이나 전통은 무엇인가요?
베드로와 바울의 역할 분담(2:6~10)
연합은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 속에 맺어지는 통일성입니다. 각기 다른 은사는 더욱 풍성한
사역의 열매를 맺게 하는 통로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이방 선교 보고를 듣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임을 인정했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계속 이방인 사역에 집중하고,
베드로는 유대인 사역에 집중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적절한 역할 분담을 통해 각자에게
주어진 사역 대상에 집중함으로 주님의 지상 명령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편협한 분파주의적 사고는 하나님 나라 동역자를 적으로 여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진정한 은혜를 경험했다면 사역의 종류나 방식이 달라도 복음 안에서 기꺼이 ‘친교의 악수’를 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바울은 이방인에게 간 까닭은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내 은사와 개성을 고려해 특별히 집중해야 할 사역 영역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복음과 관련해 비본질적인 면에서는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을 허락하시고, 본
질적인 면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올곧음을 주소서.
주님이 제게 주신 은사와 재능으로 공동체를 잘 섬겨 주님 나라를 견고히 세워 가게 하소서.
1.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바울(1-5절)
바울 사도가 십사 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행한 이방인 선교가 잘못 오해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서 자신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올라갔습니다. 이방 가운데 전파한 복음에 대하여 사도들 앞에 설명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행동하였습니다.
타협이나 굴복이 아니라 복음의 더 큰 발전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복음의 대상자는 다르지만 한 복음임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전해진 복음이 다른 요소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직 참된 구원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묵상하기
참된 구원의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고 있는가?
2. 은사를 인정합시다.
몸에 있는 지체들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합니다. 서로 다른 지체들이 한 몸을 유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도 각자의 은사가 모여 온전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서로의 다른 역할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는 동역자입니다.
바울 사도는 베드로가 할례자에게로 가고 자신은 이방인에게로 가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서로의 복음 대상은 다르지만 한 하나님을 세우는 일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 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택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원하고 우리들은 서로의 은사들을 인정하며 함께 세워져 가는 믿음의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과 은사를 복음을 위하여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은사나 역할을 인정하고 함께 이루어 갈 수 있는 믿음의 성숙이 요구됩니다.
묵상하기
다른 사람의 은사를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고 사는가?
당시 갈라디아 교회들 뿐만 아니라 주께로 돌아온 대부분의 이방인 교회들은 할례 문제 때문에 십자가 복음의 순수성이 크게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로부터 온 거짓 교사들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고 가르쳐서 십자가 복음의 원수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행15:1)
그렇다면 그 거짓 교사들은 왜 그런 걸까요? 할례를 앞세워 자기들이 아주 손쉽게 그들의 주인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처럼 결코 직접 이방인들에게 가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어렵게 개척해 놓은 교회들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할례가 뭔지도 모르는 교인들에게 선생 노릇하면서 아직 연약한 영혼들을 쉽게 도둑질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갈라디아인들은 그들을 받아들인 걸까요? 매우 유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매우 권위 있고 유명한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추천서를 가지고 다니며 바울이 전한 복음을 폄하했던 것입니다
또한 갈라디아 성도들은 자기들에 복음을 전해 준 바울이야말로 베드로와 같은 진짜 유력한 사도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6~8)
그래서 바울은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공적으로 파송한 자들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행15:24~25)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보낸 적 없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와서 많은 영혼을 도둑질하여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온갖 거짓 복음과 다른 복음을 가지고 와서 자기를 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풍성하게 되어서 그들에게 한시도 복종하지 않고, 오직 우리 영혼을 죄 가운데서 구원할 십자가 복음만 따르기 원합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갈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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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의 인생을 향해 외치시고 변함없이 그 진리에 거하도록 초청하시는 그 놀라운 뜻을 높여드리는 발걸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고,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상 가운데 주님을 바로 증거하는 예수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가정과 사역위에 기름 부어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아버지께서 풍성하게 채워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모든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이 여기시고, 아버지의 은혜와 치유의 손길을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버지의 그 사랑과 은혜에 머무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 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