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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IX1n4HoblWk?si=Y6nSOPj-E8U-y93d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함 2:11~14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이신칭의 은혜 2:15~21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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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안디옥에서 할례자들을 두려워해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고 외식한 베드로를 바울이 책망합니다.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에, 이제 자신은 믿음 안에서 산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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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함 2:11~14
복음의 진리는 결코 타협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자 이방인과 식사하던 자리를 떠났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은 유대의 정결법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을 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과거 고넬료 사건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차별 없이 한 가족이 됨을 경험했습니다(행 10장). 그럼에도 그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해 외식했고, 그 결과 바나바까지 외식(위선)에 빠지게 했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자, 바울은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복음대로 살기 위해서는 복음이 아닌 것과 타협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안디옥에 이른 베드로를 바울이 강하게 책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성경 말씀대로 살기 위해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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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은혜 2:15~21
모든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집니다. 이 ‘이신칭의’ 진리가 베드로의 외식이 드러나는 문맥에서 선포됨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의미와 더불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 없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교회론적’ 의미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신칭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20절).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를 떠난 것은 다시 율법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요, 하나님 은혜를 헛되게 하는 일이며,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21절).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성도는 차별하지 않고 하나 되는 삶을 추구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이신칭의는 구원론적으로, 교회론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요?
내가 버려야 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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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 되는 유일한 길
유대인들은 죄 사함을 얻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날마다 피비린내가 났고, 유월절 같은 절기 때는 동물의 피가 강같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달라졌습니까? 유대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의인이 되는 길이라 여겼기에 ‘율법 준수 경연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대회를 가증스럽게 여기셨습니다. “너희가 가져오는 제물은 냄새도 맡기 역겹다. 입술로는 내 이야기를 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천리만리 떨어져 있구나.”라며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재고 계셨습니다. 때가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이 더는 지켜지지 않으면 하나님 자신이 죽겠다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것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의 구덩이에서 건지셔서 그리스도의 옷으로 의의 새 옷을 입혀 주셨기에, 이제 그 옷을 입고는 다시 진흙탕 속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탕자처럼 돼지와 사료를 나누어 먹던 그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등을 떠밀어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받았다는 믿음, 의로워졌다는 믿음, 하나님이 나를 덫에서 빼내 주셨다는 믿음이 있어야 예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 외에 죄인이 의롭게 될 길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자만이 참된 회복을 경험합니다.
왜 구원인가? / 조정민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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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갈라디아서 2장 16절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의롭게 되는 것과 의롭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의롭게 사는 것은 행위가 따라야 하지만,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충분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성도가 의롭게 살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를 보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올바른 가이드다. - 웨슬리 D. 트레이시
오늘의 기도
주님, 사람의 시선과 세상의 비난이 두려워서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거나 적당히 타협했던 제 모습을 회개합니다. 행위로는 조금도 의로워질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짐을 기억하며 위선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만 드러내는 인생 되게 하소서.
우리가 거짓 복음에 현혹되지 말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걸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길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거짓 복음에 현혹되지 말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알고, 더 많은 이들에게 이 진리를 함께 나누기 위해 노력하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면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실히 살아가자
오늘의 말씀요약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이 오자 두려워해 물러갔습니다.
이에 바울은 게바의 외식을 책망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육체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복음의 계승과 전달입니다. 즉, 교회는 복음이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지키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을 보고
자리를 피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위선적 행동을 책망했습니다. 자칫 사도 간의 충돌로
초대교회에 파란이 일 우려가 있었지만 중요한 사안이기에 이를 감수하고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율법을 위해 은혜를 폐하면 복음의 존립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공격은 참을지라도,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행위는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 묵상 질문: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 적용 질문: 버려야 할, 복음을 가리는 ‘위선’은 무엇인가요?
갈라디아서 2:11~21 십자가를 믿음으로 사는 것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확인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 갔었다.
예루살렘에서 전파하는 복음과 안디옥에서 전파하는 복음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서로 확인했다.
오늘은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11)
감히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다.(11)
왜 책망을 하고 있는가?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12)
안디옥의 이방인들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12)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식사하다 말고 떠나 물러 가버렸다.(12)
베드로가 떠나자 바나바도 함께 슬적 일어나 떠나버렸다.(13)
왜 그랬을까?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유대전통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거룩하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죄인들과 함께 하면 자신들도 더럽혀 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 현재에도 이방인과하 함께 사진찍기를 거부하는 유대인을 경험한 적이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아무튼 이 장면을 보고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한다고 책망한다.(14)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 답게 살지 아니한다고 책망한다.(14)
베드로가 왜 이런 실수를 했는지 궁금하다.
사실 이방인과 가장 먼저 식사를 했던 사람도 베드로 였다.
하나님이 환상을 통하여 큰 보자기에 각 종 짐승들을 보여주고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음성을 세번이나 들려 주셨고
고넬료를 방문해서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내가 속되다 하지 않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말씀도 전하고 식사도 함께 했었다. (행10장)
그런데 오늘은 왜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것인가?
성경은 그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 갔다고 한다.(12)
내 안에도 이런 두려움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태도들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주의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던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슬그머니 피해버렸다.
바나바도 베드로의 외식에 영향을 받아서 함게 자리를 떠났다.(13)
베드로가 범했던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내 안에도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하는 경우도 있고
비난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외식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여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 내어 주옵소서.
바울이 베드로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누군가 실수를 할 수가 있다.
이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가?
바울처럼 베드로도 없는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일이 옳은가?
책망할 일이 있을 때 어덯게 하는 것이 좋은지 성령님 지혜를 주옵소서.
특히 자녀들에게 어떻게 교육하고 훈육해야 하는지 도와 주옵소서.
내 힘으로 어떻게 감당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님 도와 주옵소서
헛되이 믿지 않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15:2) 그러나 다른 복음을 믿는 헛되이 믿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은 뭘까요? 다른 복음은 항상 껍데기의 모양을 바꿔 왔기 때문에 겉을 보아서는 알 수 없고 그 본질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12:43)
사람의 영광은 두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에게서 인정 받으려는 욕구이고, 둘째는 사람에게서 비방 받지 않으려는 욕구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있었을 때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는데, 그때 사도 야고보가 파송한 유대인들이 갑자기 오자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급히 떠나 물러간 것입니다
할례자들에게서 왜 무할례자들과 함께 식사했느냐고 비방 받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때 다른 유대인들은 물론 심지어 바나바마저도 그들의 외식에 휩쓸렸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위는 할례가 복음보다 더 특별한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크게 책망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2:14)
우리가 할례와 같은 종교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갈2:16)
그러므로 오직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주와 연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주와 연합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 받게 된 진리만 굳세게 붙들기 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19~20)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통한 바울의 선언은 단순히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만난 한 사람의 변화를 고백하는 간증만으로 표현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완전한 죽음과 완전한 용서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완전한 버림과 완전한 변화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태우지 못하고, 버리지 못한 이들이 다시 과거를 끄집어내고, 향수하는 것입니다. 그가 유대 사람인 것, 바리새인으로 권세를 가졌던 것, 자신의 영향력이 무시하지 못할 것이었던 것들, 그리고 그가 율법이라는 칼을 들고 죽이고, 정죄하며 가두고, 쉬지 않고 핍박했던 것들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한 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복음의 진수,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깊이 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의 향수를 붙들고 할례와 율법에 매달린다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자들로서 결코 안전하지도 않고, 두려움과 고난의 위기에 쉽게 뒤집혀버리게 될 것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도록(21절)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도록 하며, 결코 변화될 수 없고 훼손될 수 없는 그 살아있는 복음이 갈라디아 교인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르기까지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믿음이 되도록 그의 인생 전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세상의 파도와 때론 종교적인 열심들이 밀려올지라도, 오직 믿음으로 허락된 구원과 칭의를 목소리 높여 증거하고 지켜내는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사람을 의식하다가 실패한 베드로
알면서 믿음대로 행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삶 속에서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복음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위대한 사도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에서는 큰 실수를 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과 격이 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야고보사도가 보낸 유대인들을 보는 순간 위선에 빠집니다. 마치 자신이 이방인들과 식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물러가게 됩니다. 얼마나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믿음의 행위가 차이가 나는지 보여 줍니다. 베드로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믿음대로 산다는 것은 결단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사람들을 의식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적은 없는가?
2. 두 가지의 용기
바울 사도는 베드로에 비하여 나이나 위치를 볼 때 감히 베드로에게 책망을 할 수 있는 인간적 상황은 안됩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과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지식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도 그들을 바로 세우는 일에 실패하게 됩니다. 회개가 없는 곳에는 용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책망을 받음으로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위대함은 자신보다 늦게 사도 바울 사도의 바른 책망을 듣고 전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바울이 지적하는 내용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는 지혜로움을 가졌습니다.
바울 사도의 용기와 함께 베드로의 수용하는 용기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큼을 느낍니다.
묵상하기
나는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일에 익숙한가?
3.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바울 사도의 영적인 몸부림이 담긴 내용입니다. 구원은 값 없이 받았지만 생명보다 귀한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는 구원에 대한 자신의 고백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기까지 구원을 이루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생명보다 귀한 은혜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떠나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땅 가운데 살고 있지만 천국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받은 은혜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합니다. 은혜 이전의 자신은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묵상하기
그리스도안에 죽은 자로서의 삶을 살기에 힘쓰는가?
4. 내가 이제 사는 것은?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답을 줍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만이 느끼는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나의 편리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생활은 이익이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믿음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혹시 신앙생활을 나의 삶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신앙생활은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항상 내가 어느 곳에 처하든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내 삶의 이유가 주님을 위한 삶임을 인정하며 사는가?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1~14절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지만(9절), 복음에 따라 처신하지 않은 베드로를 향해서는 공개적인 면박도 서슴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그들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 받은 복음이고, 복음이 훼손되어도 관용해야 할 상황은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두려워 이방인과의 교제를 회피한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의 진리보다 평판을 더 중요하게 여긴 위선입니다. 그의 외식은 복음의 본질을 희석했고 또 다른 외식을 낳았습니다. 나는 믿는 대로 살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믿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 적은 없습니까?
15,16절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도 없고 ‘의의 소망’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멸망의 길에 놓인 인류가 구원받을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입니다. 또 율법의 행위는 차별을 두지만(12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마서 3장 22절)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허문 차별의 장벽을 우리 손으로 다시 쌓지 말아야 합니다.
17,18절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죄를 짓도록 조장한다는 비난에 대해 반박합니다. 그런 비난은 그리스도를 죄의 구속자에서 조성자로 폄훼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강조는 할례나 절기, 음식법과 같은 율법(의 행위)의 무가치함을 드러내는 것이지 방종을 허용하거나 순종의 요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이유로 죄 짓는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19~21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단지 신분의 변화만 가져오는 일이 아닙니다. 내 소속을 바꾸고 주인을 바꾸는 일입니다. 과거의 죄뿐 아니라 죄를 지은 나도 주와 함께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전의 내가 죽은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옛 자아가 살아나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길만이 내가 살고 남도 살리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일들이 율법의 의무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저의 식탁에 어려운 이웃을 초대하여 복음을 나누게 하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악을 십자가의 보혈로 덮으시고, 변화될 수 없었던 우리의 인생을
예수를 서로 드러내는 데 선택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사탄은 세상을 통해 여전히 멈추지 않는 위협으로
예수 그리스를 드러내는 것을 반복적으로 방해하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복된 소식과 우리를 향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증인 된 삶을 결코 내려놓지 않고 담대하게 증거하는 복된 길 걸어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가정과 사역위에 기름 부어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아버지께서 풍성하게 채워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모든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을 긍휼이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에 하고, 오직 아버지만을 두려워하는
그러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 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