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이고 대담한 악상의 소나타
이 가운데 [템페스트(Tempest)] 즉 ‘폭풍’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17번 소나타는 베토벤의 모든 작품 가운데
손꼽히는 걸작 가운데 하나로서, 베토벤 사후 본격적으로 펼쳐질 낭만주의 시대에 대한 일종의 선지자적인
기념비라고 말할 수 있다. 어두움을 에너지 삼아 점차 증폭되는 강력한 힘과 액자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듯한
회화적인 색채감, 너무도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스토리-텔링적인 성격 등등, 이 작품에 드러나는 음악적,
비음악적 요소 모두는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 모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 ‘템페스트’라는 제목은 세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토벤의 비서이자 제자인 안톤 쉰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어느 날, 체르니의 집회장에서
선생님이 연주한 Op.31 No.2와 Op.57이 준 깊은 인상을 말씀드렸는데, 마침 선생님 기분이 썩 좋으셔서
이들 소나타는 어떻게 건반을 쳐야 하는가를 여쭈어보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점이라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어보게나’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복선적이고 다층적인 성격의 작품을 통해 베토벤은 당시의 복잡하고 참담했던 심경을 얼마간이나마
드러내놓고 싶어 했던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는데, 사실 스토리-텔링보다는 새로운 음악 구조를 통해
베토벤은 더 많은 감정표현과 더 높은 성취감을 투영해내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똑같이 비극 장르에 속하는 소나타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에너지는 폭발적이라기
보다는 소멸적이라는 점 또한 이 작품만의 특징이다. 23번 소나타 ‘열정’에서의 그 외향적인 발산과
직접적으로 비교하자면 이 [템페스트] 소나타는 내향적인 수렴이 강하게
드러남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이 곡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템페스트(폭풍)'를
원작으로 작곡 되었다
대범하면서도 독창적인 제1악장 Largo-Allegro에서 나타나는 주제 그 자체가 형식을
자유롭게 만들어가는 모습이 바로 이 소나타가 갖고 있는 위대한 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1악장의 첫부분.... 아르페지오의 화음이 라르고로 고요히 울려 퍼질때... 과연... 어떤 멜로디가
그 다음을 흘러갈 것인가... 하는 궁금함이 있게 마련인데.. 다급하고 긴박한 8분음표의 진행이..
그야말로 가히 환상적이다.. 그리고 다시 라르고의 아르페지오와... 알레그로... 아다지오...
참으로 변화 무쌍한 분위기.. 이번에도 이런 멜로디가.. 라는 기대와는 전혀 부응이 되지 않는...
상상을 뒤엎는 악장이다. 연주자의 입장에선.. 특히 라르고 부분을 연주할때... 아마도 고도의
응축이 필요 하겠지... 고요한 상태에서... 순식간에 몰아갈 긴박감을 위하여.. 페르마타된 마지막
한음을 혼신을 다하며 누르며.. 모든힘과 마음을 모으는 순간들이 있어야 하겠지... 연주자의 그런
느낌이 듣는 이들에게도 살아있는 음 하나 하나로 다가가리라... 그렇게 터져나오는 멜로디가
힘있고 단단하게 밟아 올라가... 환상적으로.. 어둡게.. 주제를 몰아간다. 1악장에서 그런 부분이
자주 나타난다.... 고요한 순간에 응축되어 분사하는 음률은... 더욱이 황홀할 뿐이다...
제2악장 Adagio는 B플랫 장조로서 겉으로는 대단히 낭만적이지만 실제로는 혼란 전의 고요와 같은
이중적인 위압감을 전달한다. Op.31 가운데 가장 당시 베토벤의 심경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아다지오 악장은 따스하면서도 신성한 자비를 구원하는 듯한 간절한 기도가 담겨 있다.
제2악장 역시... 고요한 아르페지오로 시작한다... 이 부분을 듣고 있노라면... 자꾸만.. 제 2주제를
그리워 하고 기다리게 된다... 제1주제도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계속 아쉬움이
남는다... 둥둥둥... 때리는 듯한... 왼손의 반주를 바탕으로 멜로디가 조용히 고조되면서... 드디어
나타나는 제2주제... 그건... 마치 평화로움에 다다른... 눈물겨운 환희와도 같다.. 지금도 이 멜로디가
지나가는데... 음... 너무 짧다.. 아쉬워라..... 마음속으로... 또다시 제2주제를 불러본다...
마지막 제3악장 Allegretto는 짙은 안개 속을 빠르게 질주하는 듯한 양손의 펼친화음 음형으로 시작한다.
‘엘리제를 위하여’ 도입부와 같은 까닭 모를 비애감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는 이 주제선율을 슬픔의
질주로 표현할 것인지 아니면 모순된 것들의 덜그럭거림으로 표현할지는 해석가의 통찰력이 필요한
대목이지만, 체르니가 설명한 바대로 이 론도 악장의 리듬은 철갑옷을 입은 한 영웅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을 뒤집을 만한 이견을 제시하긴 힘들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선의 마음을 유지하는 천사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악이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었지만, 베토벤은 이러한 이분법적, 구원적 사고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고립된 개인’과 ‘절대 고독’이라는 화두를 피아노 소나타 [템페스트]에 담아냈다.
제3악장.... 이 곡에서 간간히 베어져 나오는 슬픔이..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으로.. 마구 달려올 때가 있다...
어느때는 잔잔하게.. 어느때는 거센 파도로... 마음을 적시어 오지만... 역시.. 듣는것보다는 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절망으로 치닫는 슬픔을 마음껏 껴안을 수도 있고..... 거침없이 몰아가는 소용돌이 속으로
원없이 달려갈 수가있고... 또한.. 자신을 두드리고 일어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시도 할 수가 있으니까.....
[루돌프 브후빈더]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특히 베토벤 작품이 주요 레퍼토리로, 탁월한 해석력이 돋보인다.
현존하는 최고의 베토벤 해석가로 불리는 루돌프 부흐빈더는 1951년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입학하면서 신동으로 화제를 모았다. 입학 전부터 모차르트에 견줄 만한
천재로 알려진 부흐빈더는 빈 국립음대 역사상 최연소 합격자로 뜨거운 관심을 모았으며,
이 기록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부흐빈더의 핵심 레퍼토리는 베토벤의 음악이다. 서른두 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서 베토벤의 자필 악보는 물론이고 출판되어 있는 거의 모든 악보들을
수집해 서른다섯 종 이상의 악보를 보유한 후, 각각의 판본들을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