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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한 2서의 말씀 4-9
선택받은 부인이여,
4 그대의 자녀들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5 부인, 이제 내가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6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는 속이는 자며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8 여러분은 우리가 일하여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9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 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루카 17,37)
<오늘의 말·샘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그날에, 나는 어떤 사람?>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루카 17,26)
‘사람의 아들의 날?’
모든 것이 끝장나는 종말의 날?
모든 이가 심판받는 심판의 날?
모든 것이 구원되는 구원의 날?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날?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얘기하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야말로 주님의 날이라고.
사람의 아들로 오신 분이 주인님으로 오실 날이라고.
그러면 그날은 나의 날이 아니지요.
그리고 종들인 우리 날이 아닙니다.
주인님을 생각지 않고 하던 행위는 그만 중단해야 합니다.
주인님을 쏙 빼놓고 갖는 관계는 모두 중단되어야 합니다.
루카 복음은 12장과 16장에서 각기 집사의 비유 얘기가 나옵니다.
집사는 종 가운데서도 주인의 재산과 가솔들을 돌보는 종입니다.
그런데 집안을 맡기고 떠났던 주인님이 돌아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하고 있었으면 상을 받고 잘못하고 있었으면 벌을 받겠지요.
그러나 잘하고 있었건 잘못하고 있었건, 일단 주인님 없이 하던 모든 일은 끝납니다.
그래서 주인님이 오시는 그날은 일단은 우리의 모든 일이 다 끝나는 날입니다.
그러니 잘하고 있었건 잘못하고 있었건 어쨌거나 그날은 끝나는 날입니다.
그러나 살아온 삶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소풍이 끝나는 날일 수도, 힘들고 힘든 여정이 끝나는 날일 수도, 떨어지기 힘든 손을 끝으로 놓는 날일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것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언제 어디에서든 반드시 온다>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기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죄악이 있는 곳에 심판이 있게 마련이고, 심판이 있는 것은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곳에서’ 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기의 모습을 거울 들여다보듯 비춰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 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최양업 토마스)
지금은 참과 거짓이 구별되지 않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은 없습니다.
올바른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멘."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왜 내 주위엔 유독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들만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 나옵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에 집착하는 사람이었고, 물속에 빠진 이들은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세상 것과 하느님 것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늘로 가고 땅에 집착하는 사람은 땅으로 갑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 노아의 홍수와 비슷한 내용으로 롯의 아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으로 상징되는 소돔에 두고 온 것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유황불로 온 소돔 땅이 멸망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지 말라고 하시는 명을 어기고 뒤를 돌아봅니다.
그렇게 되자 소금기둥이 되어버려 더 이상 천사의 인도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만으로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는 이유는 목숨을 지켜줄 이가 옆에 없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다시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집착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이는 심판의 기준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뜻입니다.
같이 침상에 있어도, 같이 맷돌질해도, 행위로는 그 사람을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자신을 지켜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세상 것에 집착하느냐, 다 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하느냐가 결정됩니다.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독수리는 시체를 뜯어먹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독수리를 부르는 존재는 시체 자체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 독수리는 달려들 수 없습니다.
자칫 자신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왜 내 주위엔 나에게 도움 되는 사람은 없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만 있을까?”라고 한탄합니다.
안타깝지만 그 이유는 자신이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퀸의 보컬 싱어, 프레디 머큐리는 명성을 얻자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팀원들을 저버리고 혼자 솔로 앨범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만나고 있는 이들이 그를 병들게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자신이 잘못 가고 있었음을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썩었다. 그래서 주위에 날파리들이 많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있습니다.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있다면 사람들은 또 돌을 던집니다.
그 집에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내가 강해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던지는 상처들이 금방 치유되고 있음을 보고는 그 안에 강한 주인을 모시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미움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그 사람 안에 사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어서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오드리 햅번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나이도 많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던 배우 멜 페러란 사람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남편의 재기를 위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남편을 위한 배역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남편의 촬영장에 나타나 허드렛일하며 남편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흥행 보증수표였던 그녀는 남편이 출연하는 별로 인기도 없는 영화에 동반 출연하여 흥행에 성공하게 합니다.
물론 남편이 연출한 형편없는 영화에 함께 출연하여 최초로 흥행에 참패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겐 오래전부터 다른 여인이 있었습니다.
오드리 햅번은 남편의 불륜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이혼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임신하여 남편을 잡아두려 했지만, 남편이 자녀를 원하지도 않고 결국 영화를 찍다가 낙마하여 유산되고 맙니다.
그런 아내를 돌보지도 않고 오직 돈과 재산만을 바라는 남편과의 결혼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14년 만에 이혼하고 맙니다.
둘째 남편은 이탈리아 의사였습니다.
그녀는 여행 중 우연히 만난 그 사람과 또 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남자도 역시 바람둥이였습니다.
남편의 바람피우는 현장을 신문에서 보고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던 오드리 헵번의 결혼생활은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왜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원만치 못했던 것일까요?
바람둥이만 남편으로 맞아들였던 것일까요?
남편들의 책임도 있겠지만 오드리 헵번 역시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녀에겐 ‘배고픔’이란 게 있었습니다.
그녀가 6살 되던 해 아버지가 가정부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딸에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라며 집을 나가버립니다.
그 이후로 오드리 헵번은 아버지를 만나지 못합니다.
오드리 햅번은 나치 시절에 길거리에서 음식을 주워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부재는 엄청난 상처였습니다.
그러니 생존을 위해 세상 것에 얽매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고 달려드는 독수리 떼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녀의 부와 명성, 아름다운 여성성을 노렸습니다.
그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매인 끈을 끊으려고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수도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자기가 쓰려고 얼마간을 남겨 숨겨 두었습니다.
그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그의 행위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진정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마을로 내려가, 고기를 조금 사서 그대의 벗은 몸에 달아매고 다시 이곳으로 오게나.”
그는 스승의 지시대로 자기의 몸에 고기를 달고 산길을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몸에 달린 고기는 흔들거리며 냄새를 풍겼습니다.
냄새를 맡은 들개와 새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고기를 노리고 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는 들개들과 새들에게 대항하며 도망쳤으나 그것들은 끝까지 따라붙었습니다.
들개들과 새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그는 많은 상처를 입었고 너무나 지쳐버렸습니다.
이내 그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달린 고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차 없이 그 고기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짐승들은 자신에게서 떨어졌고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가 돌아와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보이자,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돈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마귀가 이처럼 공격한다네.
모든 것을 벗어버린 진정한 빈 몸이 되게나.”
오드리 햅번은 두 번의 결혼 실패를 두고 더는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자신에게 초콜릿과 식량원조를 해 주었던 미군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유니세프의 홍보대사를 자처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이가 된 것입니다.
노아가 배를 만들어 동물들을 태우게 되는 삶으로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존이 아닌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서 사니 더는 그녀에게 파리떼가 몰려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좋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내 안에 주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러면 주위에 점점 천상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드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안 좋은 이들에게 둘러싸이는 이유는 내가 그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늘로 올라야 합니다.
그 방법은 내 안에 하늘에서 오신 분을 모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상처가 금방 치유되는 사람을 보면 두려워합니다.
이 믿음은 누구도 나에게 돌을 함부로 던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수시로 확인합시다!>
로마 유학 시절, 나폴리를 거쳐 폼페이로 소풍을 자주 갔었습니다.
구 도시 유적지의 역사가 흥미롭기도 했지만, 폐허 사이를 산책하고 있노라면 아주 좋은 하루 피정이 되곤 했습니다.
자주 가다 보니 나중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폼페이 가이드 역할도 몇 번 했었습니다.
폼페이는 대도시 나폴리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도시는 한때 잘 나가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기원후 79년경 발생한 베수비오 화산의 강력한 폭발로 인해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매몰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폼페이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먹고 마시고, 웃고 즐기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엄청난 화산재에 순식간에 파묻혀버렸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정지되어버렸습니다.
일하다가, 잠자다가, 식사를 하다가, 고기를 자르다가, 별의 별 짓을 다 하다가 그 상태 그대로 멈춰 화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죄와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도 폼페이와 흡사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계명을 무시하며,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머리 위로, 주님께서는 엄청난 양의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습니다.
얼마나 강력했던지 사람은 물론 모든 가축들, 생명체들이 순식간에 녹아버려 형체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소돔과 고모라 시민들은 단체로 제삿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단 그 도시 안에 유일한 의인이었던 롯과 그 가족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탓에 살아서 빠져나왔습니다.
일말의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있던 롯의 아내는 자꾸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정(不淨)한 도시, 타락한 도시, 짐승들의 도시, 죽음의 도시에서는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입니다.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에 갔었는데, 비릿한 냄새가 진동한다면, 비정상 집단이라고 여겨진다면,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빨리 빠져나와서 주님께서 운행하시는 생명의 배, 구원의 배 위로 재빠르게 승선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인간 존재 자체가 늘 나약하고 부족하기에 언제나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우리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탄 배는 자주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 전후좌우로 심하게 요동칩니다.
높은 파도와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는 늘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겠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안전한 배에 올라타 있는지, 집단적 멸망을 향해 가는 죽음의 배에 타고 있는지 말입니다.
주님께서 늘 거처하시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지, 환락과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고 있는지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멸망과 죽음의 사이비 종교로 빠져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을 유혹하는 요즘 집단들의 특징은 대단한 고단수라는 것입니다.
던지는 미끼가 얼마나 달콤한지 모릅니다.
어쩌다 실수로 덜컥 미끼를 무는 순간, 그걸로 우리의 영혼과 정신, 우리의 인생 전체가 끝장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기지도 않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나름 가방끈 길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그래도 한때 잘 나갔다며 으쓱대는 사람들, 썩은 동아줄인줄도 모르고 끝까지 잡고 있는 사람들, 빨리 그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길로 돌아서길 희망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평온한 일상생활도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1)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는 인간 세상의 ‘평온한 일상생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평온한 일상생활에 만족하면서 방심하고 자만심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늘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입니다.
그런 일들 자체가 죄는 아닌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하고 평온한 일상생활이 사람을 방심하게 만들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바로 그 방심과 자만심이 죄로 이어집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노아 때 사람들과 롯 때의 소돔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살면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던 모습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1테살 5,2-3)
그렇다고 해서 항상 두려워하고, 겁먹고, 긴장한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1테살 5,8-9)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평소에 꾸준히 흔들림 없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 그것이 ‘늘 깨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종말과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사람들은 흔히 “오늘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일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인류의 종말이든지 개인의 임종이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2)
“세간을 꺼내러 내려가지 마라. 뒤로 돌아서지 마라.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라는 말씀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5-17)
여기서 ‘지나가다’는 ‘허무하게 사라지다’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소유하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만 원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도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경우에 ‘어리석음’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는 “현세적인 것들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는 “허무한 것들은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들한테 발목을 잡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3)
한 침상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인데, 예수님께서는 “부부라고 해도 심판 때에 갈라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에는 ‘무임승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은 사람이, 또는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배우자 덕분에 공짜로 구원받는 일은 없습니다.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이거나 시어머니와 며느리거나 자매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하느님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되지 않고, 모두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식구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도 회개와 신앙생활은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당사자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신앙생활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식구들의 간절한 기도를 무력화시키는 일이 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려고 하셔도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거부해서 못 받게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여정 - 늘 깨어 준비하며 새로 시작하는 삶>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름침을 따라 사는 이들!”
(시편 119,1)
옛 어른의 지혜를 나눕니다.
“당장의 욕망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라.”
<다산>
진리와 사랑에 대한 청정욕(淸淨慾)은 언제든 좋습니다.
어제 기도에 둘을 추가했습니다.
‘주님, 제 인생 자체가 당신의 길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 자체가 당신의 진리가 되게 하소서.’
이런 거룩한 욕망은 언제든 주님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군자는 도를 얻으면 즐거워하고, 소인은 욕망을 얻으면 즐거워한다.”
<예기>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는 논어에 나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믿는 자들은 진리를 깨달아 알 때 기뻐합니다.
진리는 영원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새롭습니다.
무려 여기서 27년 전 ‘하루’ 란 시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높이 깨어있던 불암산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맨 먼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한다
떠오르는 해를 안고 하루를 시작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친다”
<1997.12.2.>
이런 거룩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하루의 삶을 희구하며 한결같은 산을 닮고자 하는 여기 정주수도자들입니다.
더 하나의 ‘소망’이란 시도 나누고 싶습니다.
“차가운 날씨
청정해서 좋다
맑고 깨끗하다
살짝 덮인 회색 구름 사이에서
쏟아지는 햇빛
온유해서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청정(淸淨)과 온유(溫柔)를 겸할수 있다면 좋겠다”
<1997,12,2>
어제 아랫집 수녀원 87세 고령의 수녀님과 나눈 덕담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어려운 내적처지에도 한결같이 하루하루 아름답게 가을 단풍처럼 사시는 분입니다.
아름다운 만추의 단풍을 배경한 집무실앞 제 사진을 보내 드렸습니다.
“와 신부님, 멋지십니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계절이 서둘러 떠나보내기가 아쉽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을 단풍이 흡사 수녀님 노년의 아름다움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만추의 단풍처럼 아름다운 가을인생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행복하겠는지요!
14년전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얻은 ‘삶의 여정’에 대한 큰 깨달음입니다.
우리 삶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또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는가에 대한 확인 점검입니다.
저로 하면 오후 4:30분, 계절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얼마나 많이 인용하여 나눴는지 모릅니다.
이런 확인 점검이 오직 한번뿐인 선물인생을 깨어 하루하루 날마다 낭비함이 없이 거품이나 허영, 환상이 걷힌 맑고 투명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종말교훈이 더욱 이런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사람이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전개 상황이 심히 우려됩니다.
진리를 까맣게 잊고 욕망 충족의 삶을 살다가 물과 불로 멸망한 경우입니다.
물과 불 다음은 무엇일지 정말 깨어 종말론적 무욕의 초연한 삶을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과거에 연연하여 집착하여 뒤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집착에서 벗어나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지혜로운 종말론적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더욱 우리를 깨어 살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외관상 똑같은 환경이었지만 내적 삶의 태도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아마도 깨어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천국의 내적 삶을 살았던 자는 구원이지만, 그렇지 못했던 자는 구원에서 탈락됨을 봅니다.
새삼 장소가 아닌 내적 삶의 자세가 구원의 관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재1독서 요한 2서는 참 짧고 오늘로서 끝나지만 종말론적 삶을 살려는 자들에게는 좋은 도움이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가 사랑이요 사랑이 진리입니다.
비상한 삶이 아니라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는 말도 있듯이 서로 사랑할 때 진리와 사랑이 하나되는 삶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진리와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2요한 3)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산보 중에 한국에서 카톡이 왔습니다.
이름을 보니 31년 전, 보좌 신부로 있을 때 알던 청년입니다.
달라스에서 12시면 한국은 새벽 2시입니다.
당시에 청년 활동하던 자매와 결혼했습니다.
큰 애가 27살이라고 하니,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전화했고, 우리는 예전의 추억을 나누었습니다.
늦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 생각이 나서 문자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본당에 청년은 100명이 넘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도 200명이 넘었습니다.
교사회, 성가대, 청년연합회, 레지오, 청년성서 공부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열정, 패기, 도전, 모험, 낭만이 넘치던 시간이었습니다.
어른들과 성서 공부도 했고, 전 신자가 함께 가족 캠프도 갔습니다.
저는 2년 동안 본당 신부님을 3분이나 모시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사제관에서 짐을 세 번이나 옮기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2층을 사용했는데, 새로 오신 신부님이 2층을 사용하겠다고 해서 1층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또 새로 오신 신부님이 1층을 사용하겠다고 해서 다시 2층으로 옮겼습니다.
덕분에 필요 없던 짐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30년이 지났는데, 저를 잊지 않고 연락해 주니 고마웠습니다.
내년에 한국 가면 그때 그 시간의 추억으로 여행을 가보려 합니다.
며칠 전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을 읽었습니다.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제자들이 선생님과 선생님의 아들을 초대해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지식만 가르쳐주지 않고,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학생 중에 1명이 문제를 자주 일으켰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한 번만 더 문제를 일으키면 퇴학시키겠다고 했습니다.
학생은 마음을 잡고 학교를 잘 다니나 했더니, 다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담임 선생님을 불러서 퇴학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가 저의 부덕함입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에도 문제를 일으키면 제가 교사를 그만두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선생님이 무릎까지 꿇고 간절히 부탁하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와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진실한 모습과, 선생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던 학생도 눈물 흘리면서 선생님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고, 물의를 일으키던 학생도 무사히 졸업했다고 합니다.
그런 학생들이 20년이 지난 후에도 선생님을 찾아왔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의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는 노아와 롯의 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길입니다.
권위와 독선의 길입니다.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전쟁, 폭력, 기아, 가난, 난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온다고 해도 두려운 것 없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 보전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일치의 삶을 사는 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밭’에 하느님께서는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지구라는 별’입니다.
지구라는 넓은 밭에도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랑은 같은 말 같습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멀리하면서 선보다 악을 행하는 것에 동조했기 때문>
1955년 사회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는 ‘동조 실험’을 했습니다.
여덟 명의 대학생을 모았는데, 한 명만 피실험자이고 나머지 일곱 명은 미리 고용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리 고용된 일곱 명에게 ‘잘못된 답’을 고르게 했습니다.
명백히 틀린 답인데도 이 일곱 명은 이 답이 맞다면서 잘못된 답을 지지했습니다.
그때 피실험자 한 명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답을 혼자서 말했을까요?
아니면 다른 일곱 명과 함께 틀린 답을 선택했을까요?
피실험자의 75% 이상이 일곱 명의 생각에 동조했습니다.
즉 같이 잘못된 답을 지지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주변 그룹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따르고, 나중에는 잘못된 것조차 모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과연 세상 안에서만 있을까요?
교회 내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종종 목소리 큰 사람에 묻혀서 잘못된 것을 같이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개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또 반영되지도 않게 됩니다.
그 결과 공동체 자체가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다수의 의견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공동체는 단순히 의견 모으는 곳이 아닙니다.
함께 주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곳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 목소리만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
겸손의 마음, 사랑의 마음만이 공동체를 아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오답에 동조했던, 예수님을 반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의 날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옛날의 일을 예로 들어주십니다.
먼저, 노아 때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은 모두 멸망하고 맙니다.
다음으로 롯 때의 일입니다.
이때의 사람들도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지만,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두 멸망했습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은 왜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다수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을 멀리하면서 선보다 악을 행하는 것에 동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 당시보다도 더 심한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서 악의 길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도래할 마지막 때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때도 여전히 물질에 집착하여 제 목숨만 살리려 하면 오히려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우리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겸손과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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