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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1코린 4,1-5
복 음 : 루카 5,33-39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사를 하는데, 누군가가 저만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빤히 보시는 것입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 곧바로 제의 방 거울을 봤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더군요.
성당 입구에서 인사하는데, 저만 바라봤던 자매님이 제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15년 전 갑곶성지에서 신부님을 처음 봤었는데, 어떻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세요?
저는 이렇게 많이 늙었는데, 신부님은 하나도 늙지 않으셨어요.”
늙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 역시 늙고 있습니다.
주름의 깊이는 더 깊어졌고, 피부의 탄력도 없어졌으며, 검버섯도 보입니다.
젊어 보이는 부분은 제 또래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다는 것뿐입니다.
그 밖에도 늙음의 징후는 많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매님은 저를 예전과 똑같다고 생각하실까요?
자기 자신과 저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은 많이 늙었는데, 저는 늙고 있지 않고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비교는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게 합니다.
비교하지 않는 곳에서만 제대로 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이렇게 물으면서 그들은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신심 행위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열심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노력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하지 못한 사람을 신심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는 맞고 남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신앙생활은 인간 생활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영성적인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러 오셨지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새 옷과 새 부대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새 세대에는 새 기분으로,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심정은 예수님께서 새 세대를 열면서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헌 옷에 새 천을 대고 기워보아도 옷은 더 찢어지기만 할 뿐,
헌 것(율법 시대)은 폐기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이 임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율법을 빌미로 각종 외부적인 형식으로 경직된 종교가 아니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풀어 나아가는 개방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비교하는 마음으로 인해 새로운 나라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남과의 비교는 절대 금지입니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기
-꼰대가 되지 맙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시편37,5-6)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새것과 헌 것”을 주제로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예수님께 시비를 걸듯 이의를 제기하는 참 고루해 보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순간 “꼰대”라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주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꼰대가 될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젊은 꼰대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꼰대와 멘토,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이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야말로 영원한 멘토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봤습니다.
꼰대 6하원칙에 의하면 꼰대는
“1. 내가 누군 줄 알아? 2. 네가 뭘 안다고, 3. 어디 감히,
4. 왕년에, 우리 나이 때엔, 5. 어떻게 나한테, 6.내가 그걸 왜?” 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자라합니다.
꼰대 방지 10계명도 재미있습니다.
1.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2. “고맙다” “수고했다”고 자주 말하라.
3. 오만하지 마라.
4. 칭찬에 인색하지 마라.
5. 능동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라.
6. 강요, 협박등 강압적 태도를 자제하라.
7. 매사 솔선수범하라.
8. 젊은 세대의 문화에 민감하라.
9. 자기계발에 힘쓰라.
10. 진짜 꼰대가 되라.
진짜 꼰대는 본인의 뚜렷한 소신과 철학이 저절로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이다.
참 재미있습니다. 어제는 참 귀한 자매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짐이 되는 선물은 사양하는 편이지만,
어제의 원숙한 노년의 요셉 성인상 그림은 고맙게 받았습니다.
하루 2-3시간, 6개월 걸려 그린 그림이라는 설명에 놀랐습니다.
탕자를 맞이하는 자비하신 노년의 아버지 모습의 렘브란트 그림과 짝을 이루는 성 요셉의 그림에,
“아, 나도 이제 자비하신 할아버지 나이에 도달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림의 이런 자비로운 노년의 어른들을 두고 꼰대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제부터 10월4일까지의 창조 시기 바치기 시작한 기도문도 참 좋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시의적절한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섬세한 조치에 다시 감탄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가톨릭의 힘이며 자랑일 것입니다.
철저한 생태적 회개를 바탕한 고백은 물론이고 다음 부분만 잘 명심하여 기도를 바치면
꼰대 예방에도 좋겠다 싶어 인용합니다.
참고로 어제 피조물의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주제는
“피조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였습니다.
“올해 창조 시기에 청하오니, 불타는 떨기나무에서처럼,
꺼지지 않는 주님 성령의 불로 저희를 불러 주소서.
저희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소서.
저희의 귀를 열고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자기 내면만 향하던 시선을 돌리게 하소서.
주님의 피조물을 관상하고,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각 피조물의 목소리를 듣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이 거룩한 땅을 조심스럽게 걷는 법을 배우는 저희를 주님의 은총으로 비추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한마디로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학인이, 주님의 형제가 되어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며
겸손히 배워 실천하면서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비로소 꼰대로 부터의 탈출이 가능하겠습니다.
꼰대가 아닌 꽃대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예수님이자 바오로 사도입니다.
꼰대에 버금가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이의 제기에
주님은 흥분하지 않고 이들의 무분별의 무지를 일깨우십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분별의 지혜로 단식의 때 단식하라는 충고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계율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축제의 때, 왜 축제 인생을 자초하여 고해 인생으로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새것과 헌것의 비유를 통해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하십니다.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꿰매는, 헌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어리석은 꼰대 짓으로 매사 웃음거리가 되지 말고,
늘 깨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도록 새 부대의 마음으로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새삼 노년의 지혜에 해당한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말고,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조언도 생각납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마음의 부대가 되도록 깨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이 종래의 관행에 익숙해진 우리의 보수적인 집착의 경향이 얼마나 바꾸기 힘든지,
그리하여 꼰대의 처지를 이해해야 함을 또 배우게 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무시할 수 없는 인간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새 부대의 마음으로 새 포도주의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이런 겸손한 노년의 분들은 저절로 젊은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새삼 꼰대는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가 87세 노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꼰대라고 하겠는지요!
교황님의 정신의 젊음, 마음의 젊음은 어느 젊은이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정신 역시 복음의 예수님처럼 젊고 자유롭고 당당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늘 주님 앞에서, 그 책임을 다한 결과의 확신일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나도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늘 주님 앞에서, 세상 잣대가 아닌 주님 사랑의 잣대로 분별하여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고 자비로운, 자유로운 삶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였을까?”가 참 좋은 분별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런 분별의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은 어려울 때 피신처가 되신다.”(시편37;27,39).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하는 신부님을 위한 송별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자동차로 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기쁜 마음으로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교구 사제모임을 하면서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하기도 한 것이 있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제가 나이가 많은 선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침실을 가장 좋은 침실로 정해 줍니다.
식사 준비나 설거지를 하려 해도 후배 신부님들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배려해 주는 후배 신부님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전에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배는 말은 적게 하고, 지갑은 자주 열어야 한다.”
선배들의 말을 실천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늘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들과 대화하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아날로그 세대인 저는 디지털 세대인 후배들의 능력에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마술사와 같이 손가락 움직임 몇 번으로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만들어 내는 것을 봅니다.
5년간의 소임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돌아가는 신부님께 수고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아 있는 사제들도 소임을 잘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은 매주 미사 후에 친교를 하고 있습니다.
친교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친교를 위한 비용입니다.
생일, 기일, 백일, 졸업, 연도와 같이 애경사가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친교의 비용을 내어놓습니다.
늘 2달 정도는 친교 신청이 밀려 있습니다.
저도 곧 어머니의 기일이기에 친교를 신청했습니다. 음식 준비입니다.
국수, 비빔밥, 떡, 빵, 김밥과 같이 다양한 음식을 마련합니다.
본당 성모회의 임원들이 매주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차림입니다.
친교실 창고에는 의자와 접이식 탁자가 있습니다.
일찍 오는 분들이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습니다.
저도 일찍 성당에 가면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저보다 일찍 오는 교우들이 먼저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곤 합니다.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은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모회에서는 탁자에 식탁보를 깔고 그 위에 꽃병을 놓습니다.
그러면 친교실은 아름다운 연회장으로 모습이 바뀝니다.
각종 야채가 들어간 비빔밥, 시원한 오이냉국, 후식으로 빨간 수박이 준비된 나눔은
부러울 것 하나도 없는 친교의 시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오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부대는 선배를 배려하는 후배들의 따뜻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부대는 매주 친교를 위해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는 봉사자들의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마음과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한 사람은 모두 새 부대를 준비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 포도주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우리들의 ‘성실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새 포도주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새 포도주는 무엇인지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으냐?”(루카 5,3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새로운 때’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단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새 시대’가 온 까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새 부대’란 ‘변화된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착한 강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날드 롤하이저)를 들려드립니다.
큰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강에서 세 사람이 떠내려왔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심하게 부상을 입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아이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강에서 건져내어 죽은 사람은 정성껏 매장해 주고,
부상 당한 사람은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어린아이는 돌볼 가정에 의탁 했습니다.
이 마을에 이런 사건들이 수년 동안 지속되자 사람들은
떠내려오는 사람들을 잘 건져낼 방법을 고안하고, 그들을 잘 돌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런 자선 행위에 자부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무도 강 상류에 올라가 거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왜 사람들이 이렇게 죽거나 다쳐서 떠내려오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착한 마을 사람들처럼 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이해대로라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불의한 사회적 환경에 대하여
교회가 갈등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저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떠내려오는 이들만 도우면 될 테니까요.
만약 교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환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그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식별하며,
이 땅에 정의와 평화, 사랑과 공동선, 인간과 생명이 존중되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요한 7,7)
브라질의 헬더 카마라 대주교는 이런 체험을 전해줍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왜 가난한 이들이 굶주리는가를 물으면 그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카마라 대주교의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왜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다치고 아픈지,
왜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가난한 이들이 많아지는지,
왜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착취되는지, 그 원인을 묻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면
‘빨갱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우리의 현실과 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와 사랑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자살행위다.”(272항)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주님!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 당신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잔이 되어 당신의 사랑을 건네주게 하소서
이 나라 이 땅이 신랑을 맞이한 혼인 잔치가 되게 하소서!
오순도순 모여 사랑 가득 채운 술잔을 쳐들게 하소서!
사랑과 웃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로 번지게 하소서!
아멘.
단식의 정신
조욱현 토마스 신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보고,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33절)
유다인 중에는 진정 열심히 단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는데,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단식하고 그 외는 먹을 것을 다 먹었다.
재를 지키는 것을 모두 드러내어 남에게 과시했고,
그에 대한 대가를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희생과 단식이 하느님 앞에 죄에 대해 속죄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무엇인가 함께 하는 사랑의 정이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단식하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지 않는 재는 지키지 않은 것과도 같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34절)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을 혼인 잔치의 기간으로, 그리고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제자들을 손님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며 잔치의 주관자들이고,
잔칫상에 앉을 이들을 부르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단식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배불리 먹기 때문이다(요한 6,53 참조).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35절)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신 날,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날,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라고 하신 날이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36.37절)
형식적인 율법에 매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항상 새로운 자세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마음,
즉 이전의 내가 아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묵은 나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을 수가 없다.
이제 진정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하여 그분의 말씀을 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묵은 포도주는 달고, 새 포도주는 떫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가 이번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마지막 주간 토요일까지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줄곧 루카복음을 봉독하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의 모든 부분을 연이어 듣지는 못한다.
이 말은 평일미가에 제공된 복음을 읽고 한정된 부분만으로
복음의 참뜻을 깨우치려 들면 무리가 생긴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도는 늘 복음의 참뜻을 위협한다.
한정된 어느 한 단락의 복음만 가지고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된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예수께서 공들여 설파한 복음 전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복음사가들의 편집 의도를 곡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사의 그날 복음으로 제공된 부분의 앞뒤 문맥을 함께 살펴야 하며,
진정한 信者라면 ‘매일미사’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신구약 합본성서를 늘 곁에 두고 빠진 부분을 함께 읽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이 그렇다.
매일 미사 책에 실려 있는 오늘 복음의 시작은
“그 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
성서의 원문에는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라고 되어 있다.
어느 표현이 복음의 앞뒤 문맥을 더 잘 말해주는가?
두말할 것 없이 성서 원문이다.
따라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무슨 말씀을 듣고
예수께 반론을 제기하는 지는 앞부분을 살펴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권위 있는 가르침과 기적 행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명성이 순식간에
나자렛과 가파르나움을 넘어 사마리아와 유다 지방 일대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4,37. 44; 5,15)
급기야 이를 확인하고 감찰할 양으로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파견된 것이다.(5,17)
그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반감을 가지고(5,21),
못마땅하게 여겨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으며(5,30)
오늘은 복음에서와 같이 단식문제로 예수께 시비를 걸고 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을 묵상한다면 잘 이해할 수 있겠고,
좋은 결론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단락으로 구성된 오늘 복음은 단식에 관한 말씀과
옷과 포도주를 소재로 한 이중 비유를 담고 있다.
물론 후반부의 이중 비유는 전반부의 단식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이해해도 좋다.
오늘 담론은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보아도 타당하다.
斷食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다.
구약성서와 유다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모순이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일은 기쁨으로 가득 찬 잔치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단식의 날이 오게 될 것인즉,
예수께서 더 이상 그들 곁에 계시지 않을 때가 바로 그때가 될 것이다.(33-35절)
‘새 옷과 헌 옷,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 새 부대와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 층 더 또렷하게 밝혀준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이제 헌 것은 가고, 새 것이 도래한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 없는 일이다.
묵은 포도주는 달고, 새 포도주는 떫기 마련이다.
여기서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론 불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당장은 맛이 좀 떫고 불편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법칙을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