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語(일본어)의 뿌리가 고대 한국어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야마토 言葉 語源辭典(언엽 어원사전)」이 최근 한 한국인의 손에 의해 발간됐다.
지은이는 朴炳植(박병식·72)씨. 이미 「야마토의 起源과 古代 朝鮮語」, 「日本語의 悲劇」, 「萬葉集 枕詞(만엽집 침사)」, 「日本語의 發見」, 「야마토 渡來王朝의 秘密」 등 지난 20여년 간 일본어의 뿌리를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역사와 일본어의 문제점을 파헤친 20여 종의 일본 관련 서적을 펴낸 일본 전문가다.
야마토 어원사전은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900여 쪽의 사전 형식으로 정리한 것.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 古語가 어떻게 태어났는가,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뀌었는가를 설명함과 동시에 그것이 오늘날 일본어로 변화하는 과정을 1000여개의 한자말에서 추출한 「음운변화 법칙」을 통해 풀이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간하겠다는 출판사가 없어서 서울에 있는 「도서출판 바나리」에 의뢰해 펴냈다고 한다.
전문적으로 언어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朴씨가 일본어의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이었다. 자신이 운영하던 건설회사가 부도난 후, 미국으로 피신한 그는 자살까지 생각하다가 후세에 빛날 업적을 한 가지 남겨야겠다는 결심 하에, 어려서부터 흥미가 있던 언어학, 특히 일본어에 대해 穿搾(천착)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때는 잘 나가던 上場 건설회사의 社主 朴씨의 인생행로는 일제시대, 6ㆍ25 전쟁 등을 몸으로 겪어야 했던 여느 70代와 마찬가지로 파란만장했다. 함북 鏡城(경성)에서 朴今石(박금석ㆍ작고)씨와 尹順樂(윤순락ㆍ생사미상)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성진(현재의 金策市) 의학전문학교 3년 재학중이던 1948년 자유를 찾아 단신 월남했다.
6ㆍ25 전쟁 때, 자진 입대해 대구 팔공산에서 한 달 동안 훈련을 받고 미군 통역으로 인천 상륙작전에 투입돼 원주까지 북진하던 중, 적의 반격을 받아 죽을 고비도 넘겼다. 학업을 중단하고 도로 포장 등 건설업에 투신한 그는 1960년대에 이미 직원수 350명이 넘는 「石樂産業(석락산업)」의 社主(사주)가 될 만큼 크게 성공했다.
1972년, 해외건설 쪽으로 눈을 돌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항만 준설공사를 많이 따냈다. 영어에 능통해서 사우디 왕자들과 교분이 깊었다고 한다. 당시 건설부 장관이던 金載圭(김재규)가 『당신이 애국자요. 대통령에게 말해서 훈장을 주겠소』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3억 달러짜리 준설공사를 따낸 1970년대 말, 그에게 악몽이 찾아들었다. 이 공사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우디 왕자가 朴炳植씨를 지명해서 주기로 한 것으로, 석락산업의 기업 규모에 비해 3억 달러라면 엄청난 물량이었다. 朴씨의 석락산업은 준설선 1척과 보조선 2~3척으로 이루어진 시가 100억원이 넘는 2개 선단을 갖추고 있었다.
공사 수주 뉴스는 곧 국내에 전해졌다. 서울의 본사에서 사우디로 전화가 걸려왔다.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인 H社의 L사장이 찾아와 동업을 요청하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귀국해서 건설부 장관을 만났더니, 『석락산업은 그 공사를 못 한다. H社에 넘겨라』고 했다. 朴씨는 『H社는 준설선도 없고 항만 준설 경험도 없다』고 대들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앞서 만나자고 찾아왔던 H社의 L사장, C회장은 이쪽에서 만나자고 해도 만나 주지 않았다.
입찰일이 다가와 하는 수 없이 다시 사우디로 날아갔다. 당시 대사는 柳陽洙씨였다.
공사 수주 내막을 아는 柳씨는 『이 공사는 당연히 朴炳植이가 해야 한다』며, 건설부 장관에게 4~5차례나 전화를 걸었으나 끝내 통화를 하지 못했다. 柳대사는 朴씨에게 『미안하다. 이 이상은 나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은행의 보증을 받지 못해 공사 수주도 물거품이 된데다, 당국의 미운 털이 박힌 그에게 금융기관들은 만기가 돌아오는 대출을 연장해 주지 않아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일본까지 돌아왔다가 『입국하면 감옥에 간다』는 친지의 말을 듣고 미국으로 도피한 그는 술로 날을 지샜다.
폐인이 되다시피한 어느 날, 그는 문득 「아무것도 남긴 것 없이 죽을 수 없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어에 관심을 돌린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朴씨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일본어 실력이 유창했다. 중국어 통역이었던 朴씨의 아버지는 『어학은 어려서부터 해야 한다』며 일본 고단샤(講談社)에서 발간한 「유년 클럽」이라는 책을 사다 줬다. 그 책으로 일본어를 마스터했던 것이다. 朴씨의 아버지는 朴씨가 중학교에 진학하자, 이번엔 영어책을 사다줬다. 그때 한 영어공부로 6·25 전쟁 때 미군 통역을 했고, 사우디 왕자와 교분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어를 공부하며 그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했다. 일본어가 경상도의 방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경상남도 지방에 있었던 가야국의 국민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나라를 세웠다면 틀림없이 경남지방의 방언이 일본말에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추리한 것이다.
맨 처음 일본어에 나타난 우리말의 흔적은 「하나, 둘, 셋」 셈하는 數詞에서부터 찾기 시작됐다. 우리말의 하나에서 열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히도츠, 후다츠, 미츠, 요츠, 이츠츠, 무츠, 나나츠, 야츠, 고고노츠, 도오」 등이다. 이것을 뒤의 어미는 빼고, 어간만을 이어서 「히 후 미 요 이 무 나나 야 고고노 도오」로 써놓고, 경상도식으로 읽으면 「히후미요, 이 무나나야, 고고 노 도오」가 되고, 표준말로 읽으면 「히후미야, 이 못난이야, 그것 나 다오」라는 외설적인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언어학자들에게 보였더니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론적인 뒷받침이 안 돼 있어 학문적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는 평을 들었다. 콜롬비아 대학의 한 언어학 교수는 『당신의 연구는 귀중한 것이다. 하지만 경상도 방언이 일본어의 語源이라는 증거를 대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말과 일본말을 비교해 보려니까 난관이 생겼다. 일본의 경우, 「古事記(고사기)」나 「日本書紀(일본서기)」 등 8세기에 쓰여진 문헌이 있으나, 우리는 最古(최고)의 역사서라고 해봐야 13세기에 나온 「三國史記(삼국사기)」밖에 없었다. 동시대의 말을 비교하기 불가능하게 돼 있는 것이다.
지금 가야족은 슬프다.
그러다 漢字(한자)에 생각이 미쳤다. 한국, 일본의 한자 발음을 서로 비교해 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古문헌을 살펴보면 한자는 기원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일본에는 3~4세기 경에 들어갔다. 한자의 수효는 5만 자가 넘지만 발음은 몇 가지 안 된다. 예컨대 「가」라는 글자를 보면 「家, 佳, 街, 可」 등 수십개가 있지만 발음은 「가」 하나다. 그런 식으로 비교해서 한일 兩 국어의 음운변화 법칙을 찾아 나갔다.
그러면서 틈틈이 자신이 연구한 일본어의 뿌리와 관련된 내용을 일본어로 펴냈다. 최초의 작품은 「지금 가야족은 슬프다」. 비매품으로 출판된 이 책은 일본은 가야족이 개척한 나라인데, 현재 일본인 후손들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의 나라(奈良)縣은 경남 고령지방에 있던 우가야(上伽倻), 시마네(島根)縣은 경남 함안지방에 있던 아라가야(지금도 시마네縣 사람들은 자기 고장을 「아다가야」라고 부른다)가 옮겨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있으니 슬픈 일이라는 얘기다.
平安(헤이안)시대에 만들어진 五十音圖(오십음도)에 따라 일본어의 발음이 지금처럼 고정, 한정돼 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는 「日本語의 悲劇」, 일본 고대사의 비밀을 풀이한 「日本原記」는 20만 권 가까이 팔려 나가는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었다.
그의 작품이 일본 지식인들의 눈길을 끌게 되면서 옛날 이즈모(出雲)國이 있던 시마네(島根)縣 소재 시마네 대학의 요청으로 이 대학에서 5년 간 한일고대사, 국제문화론을 가르쳤다.
朴炳植씨의 연구에 따르면 「日本書紀」에 백제 멸망 후(7세기), 일본 조정은 백제의 지식인 44명을 부여에서 데려다 차관급, 국장급 공무원으로 임명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았다면, 조정의 요직에 백제인을 앉힐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중국어 통역이 배석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신라나 백제 사신이 왔을 때, 통역이 배석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황실과 신라 백제는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日本書紀」, 「古事記」, 「萬葉集」 등은 이두식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에 우리 방식으로 해석해야 의미가 통한다는 얘기다.
그러던 것이 平安시대(8~12세기)에 들어와 가나(假名)가 만들어지면서 일본어에서는 모음의 수효가 8개에서 5개로 37.5% 줄어 버렸고, 우리는 15세기에 와서 한글을 창제함으로써 모음수가 8개에서 21개(복합모음 포함)로 162.5% 늘었기 때문에 나라(奈良)시대까지만 해도 사실상 같은 말이었던 兩 국어는 오늘날에 와서 거의 다른 말처럼 느껴지게 됐다는 것이 朴씨의 해석이다.
첫댓글 에~~고어지러버요,,좋은말맞죠...
공부 많이 해야겠네요`~ㅎㅎ 시간없어서 다는 못읽었는데`~좋은자료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