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의 처소
장모와 함께 살았다. 신혼 때 단칸방에서 고령의 장모가
세 살짜리 아들을 맡아 키우느라 늘 고생이 많았다. 삼십 대
중반에 피 끓는 젊음을 참지 못하여 잠자리에서 이불을 자주
들썩거렸다. 방 하나에 이불 하나 아기 하나 모두가 하나였다.
정월 열이렛날 장모의 생일이라 딸들 내외가 다 부산에 모였다.
장모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생활하니
가장 편안하다며 대구 큰딸에게 가지 않겠다고 한다.
장모는 막내 사위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향도 잊은 채 부산에서
살려고 한다. 여기가 내 집 같다면서 아주 편안하게 생각하면서
'김서방 우리 함께 살자' 한다. 무조건 좋으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장모는 막내 사위와 딸을 앞에 앉혀놓고 유언이라며 말했다.
"내가 어디서 죽던 제사는 너희들이 지내라"하고 강조했다.
대구에서 큰동서가 찾아와 함께 고향으로 가자고 해도 고개
저으면서 가지 않았다.
장모는 선비 같은 남자와 결혼하여 뒷바라지하느라고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살았다. 딸 넷을 두었지만, 한때는 아들 없는 죄로
식모처럼 살기도 했다. 고을에 유지였던 영감이 노병으로 별세하자
장모는 자유 찾았다고 좋아했다. 그것도 잠시 얼마의 기간이 흐르자
둘째 딸이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장모는 딸을 살려보겠다고 병원에서
수년 동안 고생했다. 그 당시는 보험이 없던 시절이라 그 많던 재산 다
치료비로 지급하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둘째는 암으로 자매들을 멀리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모는 오래도록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술과 담배 배웠고 끝까지 끊지 못했다.
실의에 빠진 장모는 어디에도 머물 만한 곳이 없었다. 딸들의 집으로
순서대로 다니며 살아보았으나 막내 사위만큼 만만한 곳이 없었다.
장모는 막내 사위 앞에서 손자 맡아 키울 테니 단칸방이라도 좋으니
함께 살면 어떻겠는지 물어보았다. 아내가 몸이 약해 아기 업고 가다가
힘에 겨워 넘어진 후로 고민하다 장모 부르라고 했다. 장모는 진작 부르지
않았냐 하면서 좋아서 빙그레 웃는다.
장모는 제자리 찾은 듯 십오 년을 함께 살았다. 열 번이나 이사해도
불평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잦은 이사로 이웃에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직장생활로 네 식구가 살았기에 저축이 없어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장모도 나이 이기지 못한 모양이다. 팔순이 되면서 병으로 눕게 되었다.
큰 사위가 찾아와 장례는 고향에서 치르자며 동서들과 합의하면서
장모는 대구로 가게 되었다. 택시 부른 날 장모는 억지로 차에 앉아
눈물을 닦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아내도 장모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고 덩달아 눈물을 흘린다. 내가 집이 있었더라면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텐데 대 이어 물려준 가난이 더더욱 서러움을 폭발시킨다.
아내는 힘없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눈물을 쏟아낸다. 나 역시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딸의 그 서러움 이해가 간다.
대구로 간 장모가 며칠이 지나자 큰동서가 임종을 앞두고 모두 불렀다.
장모는 모두 보면서 무거운 입을 겨우 열더니 제사는 막내가 지내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팔순 노인은 양력 팔월 초이틀 오후에
숨을 멈췄다. 장례 예식은 간소하게 치르자고 동서들과 합의했다. 시신을
화장하여 뼛가루는 고향의 산기슭에 묻었으나 혼백은 부산으로 가져왔다.
혼백을 가져온 아내는 거실에 내려놓고 울고 또 울었다.
벌 나비가 꽃을 찾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었다. 장모의 제삿날이
다가오자 준비에 바쁘게 움직였다. 아내와 함께 자갈치에서 제사 음식물을
준비했다. 싱싱하고 굵은 생선과 어패류, 문어 등 바다에서 갓 잡아 온 것으로
골랐다. 음력이 아닌 양력으로 제사 모시기로 동서들 내외가 만장일치로
합의했기 때문에 삼복의 더위라도 어쩔 수 없었다. 팔월 초하루 모두 부산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동서들이 한 곳에 모여 웅성거리니 사는 재미 느껴 기분이 좋았다.
아내와 함께 하루 전에 제사 준비 대충 해둔 상태였다. 동서와 처형들이 다 모이자
반가워 손을 잡고 인사 나누었다. 동서와 처형들은 막내 부부가 제사상 음식을
모두 준비한 노고에 과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매들은 수다 늘어놓고 웃음을 늘어놓을
시간이 없었다. 평소에 장모가 싱겁게 먹는다고 간을 거의 하지 않았다. 조미료
사용하지 않아 맛은 뒤떨어졌으나 정성을 쏟았다.
밤이 깊어지자 제사상을 차렸다. 지방마다 서로 다른 제사상을 차리는데 어디에
기분을 두어야 하는지 십 년이나 선배인 큰동서에게 물었다. 동서는 제주의 마음이라고
하면서 김 씨 집안의 행사에 따르도록 하자고 한다. 경순왕의 후손은 이렇게 차린다고
하면서 준비한 음식을 상에 올려놓았다. 조율이시 홍동백서 탕 포 등등 다양하게 차렸다.
제사 지낼 때 그냥 절만 했는데 이젠 제주가 되나 더 엄숙해지는 느낌이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모두 갑자기 엄숙한 분위기로 조용해졌다. 잠시 후 큰동서가
제사 지내는 방법을 일일이 가르쳐준다. 제주가 향을 피워 영혼을 부러 들인다.
집사가 따라준 술을 모사 그릇에 세 번씩 따르면서 제사는 엄숙히 진행되었다.
삼십 분이 정도의 시간이 흘러 마지막으로 방에서 나오는 나온 집사는 이승이라고
했다. 제사가 끝나자 지방과 축문을 향로 위에서 소각했다. 자매들은 철상하여 음복할
수 있도록 준비 서둘렀다.
제삿날 장모의 영혼이 받은 밥상 앞에 가족이 다 모였다. 준비하는 과정은 오래
걸렸으나 행사는 간단하게 끝났다.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 장모의 희소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외출이 없어 친구도 없었으며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힘들어했던 장모의
모습을 모두가 안쓰러워했다. 삶의 흐름이 남달라 외롭게 살아온 장모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머물 곳을 찾아 떠났다.
모두가 떠나고 혼자서 산마루에 올라 노송이 베풀어준 그늘에 앉았다.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에서 눈을 부시게 반짝거리는 윤슬은 감동을 주지만,
눈에서 사라진 장모의 슬픈 생각은 잊히지 않는다.
첫댓글 html로 하면 가로가 짧아 지고 세로가 길어지는데 그 방법을 잊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끼?. 좀 배우고 싶습니다..
남에일같지가 않습니다
읽으면서 가슴이 아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