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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진원의 글에 대한 몇가지 생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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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채진원의 "북한 레짐의 불안정성의 기원과 참주정"이라는 글에 대해 권복규 교수가 이견의 글을 보내왔다. 관련 글로 올리기에는 나름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반론일뿐더러 글의 분량도 소논문 분량이어서 따로 독립된 글로 올리기로 했다. 앞으로 본 연구소에서 올린 글에 대해서 이견이나 반론이 있으면 합리적 논증과 주장으로 정리해서 보내주면 언제든지 게시할 계획이다. 활발한 토론과 참여가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북한 레짐의 불안정성 기원과 참주정”이라는 채진원 선생님의 글을 읽었다. 짧은 시간에 몇가지 이견을 댓글로 달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애초의 뜻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아 채선생님의 글에 나타난 몇 가지 요지를 중심으로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
북한 레짐의 불안정성 기원과 참주정(tyrann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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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평도 포격 이후 먼저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태로 숨진 희생자와 유가족분들 그리고 부상자들께 심심한 조의와 위로를 표하며, 부디 추가 희생자와 확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사태가 한반도 평화와 공존의 기회를 모색하는 몸에 쓴 약으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필자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북한의 리더십이 왜 이러한 극단적인 대외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인 대외행동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해답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필자는 이러한 북한의 대외행동(behavior)은 북한의 독특한 레짐(regime; 政體), 즉 참주정(僭主政: tyranny)이라는 정치체제(regime)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실성이 있고 또한 그렇게 보는 것이 북한의 추후 행동을 예측하는 데에도 그 유용성이 크다고 판단하여 필자의 의견을 소개한다. 2. 좋은 레짐(regime; 政體)과 시민들의 행복한 삶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좋은 레짐(regime; 政體) 즉, 좋은 정치체제 혹은 좋은 정부형태(good government)를 갖는 것은 인류의 오랜 희망이자, 당대 정치의 사활적인 문제였다. 동양에서의 군주들은 대체로 폭군(暴君)보다는 성군(聖君)이 되기를 희망했으며, 백성들은 좋은 성군을 만나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을 평생 행복으로 생각했다. 동양에서 성군적 리더십이 부족한 왕들은 항상 역성혁명론에 의거하여 반정과 정권교체의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는 부패없이 타락하지 않고 보다 영원한 정치체제 혹은 정부형태를 갈구하였다. 플라톤은 ‘좋은 레짐’을 가질 때만이 시민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좋은 레짐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플라톤은 좋은 레짐을 추구하기 위하여 나쁜 레짐과의 비교논의를 시작했다. 그는 레짐의 유형을 지배자의 종류(1인 지배, 소수지배, 다수지배)와 통치의 목적(공익추구, 사익추구)에 따라 3 X 2 테이블로 유형화하여 군주정(monarchy: 두 종류 kingship 또는 despotism), 귀족정(aristocracy), 민주정(democracy), 그리고 각각의 레짐에 대당하는 부패로 타락한 레짐으로, 참주정(tyranny), 과두정(oligarchy), 중우정(ochlocracy)로 분류하였다. 플라톤은 가장 이상적인 좋은 레짐으로 철인왕이 통치하는 ‘군주정’을 지지하였고, 가장 타락한 레짐으로 참주정(tyranny)을 꼽았다. 플라톤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러한 레짐문제를 정치의 중요한 문제로 삼았다. 그는 레짐의 유형을 플라톤과 조금은 다르게, 지배자의 수에 따라 각각 군주정, 귀족정, 혼합정(polity)으로 그리고 그것에 대당하는 타락한 레짐형태로, 참주정(tyranny), 과두정(oligarchy), 민주정(democracy)로 분류하였다. 그가 이상적으로 보고 있는 좋은 레짐은 귀족정과 민주정을 혼합시켜 놓은 ‘혼합정’(polity)이었다. 그가 혼합정을 지지했던 이유는 ‘순수한 단일정체’(pure regime)만을 지향했을 경우, 부자만을 대변하는 ‘과두정’으로, 빈자만을 대변하는 ‘민주정’으로 쏠리게 되어, 정체의 균형을 잃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산술적인 평등을 강조하는 ‘민주정’과 자격 및 능력에 따른 비례평등을 강조하는 ‘귀족정’이 결국 부자들과 빈자들의 갈등으로 치달아 그 사회를 불안과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단일정체를 견제하고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중산층이 중심이 되는 ‘혼합정’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스의 레짐에 대한 문제의식을 적극 수용하고, 역사서술방식에 적용하여, ‘정치체제 순환론’(Anaclyosis: 아니키클로시스)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역사의 보편적 법칙으로, 정치체제의 변화과정은 결국 군주정→ 귀족정→ 과두정→ 참주정→ 민주정→ 중우정→ 참주정→ 군주정으로 순환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정체의 흥망성쇠를 막기 위해서는 군주정과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이 혼합된 정체인 ‘공화정’(republic: mixed political body)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가 공화정을 채택하여 번영을 구가한 것은 역사의 발전이라고 보았다. 특히, 그는 단일정체의 부패와 몰락은 근본적으로 ‘지배권의 세습권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하였다. 즉, 능력과 자질을 검증받지 못한 자가 세습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여 지배자의 사적 이익을 추구할 경우, 불평등한 권력분배방식에 대한 불만과 문제제기로 정치체제가 몰락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문제의식은 르네상스시기 마키아벨리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고대 로마가 오랫동안 번창할 수 있었던 배경을 공화정 정체의 성격에서 찾았다.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에서 당시 피렌체 공화국의 번영을 위해 공화정을 강화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미국의 건국자들, 워싱턴, 아담스, 매디슨, 제퍼슨 등에게도 이어져 삼권분립과 양원제 그리고 연방과 지방이 분리되면서도 견제와 균형으로 유지되는 최초의 민주공화국 정체를 탄생시키는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의 민주공화국적 정체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토크빌은 미국의 건국자들이 미국적인 정체를 고안하게 된 배경에는 ‘다수의 전횡’ 혹은 '다수의 참주정'(tyrnny of majority)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평하였다. 최근 레짐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에게도 전수되었다. 그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불문하고, 그리스인의 계급투쟁은 어느 한쪽이 승리할 때까지 계속되어 승자가 패자를 복속시켜야만 비로소 끝났는데, 계급투쟁에서 평민쪽이 이기면 평민의 독재체제인 민주정이 되고, 귀족이 반격하여 성공을 거두면 귀족정이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한동안은 격렬하게 싸우더라도 결국에는 공존공영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로마인의 성향이었다라고 이해하고 있다. 즉, 로마 공화국의 경우, 통령(consul)이나 독재관(dictator)은 군주의 긍정적 부분을, 원로원은 귀족정의 긍정적 부분을, 민회는 민주정의 긍정적 부분을 공화국의 정부 안에서 혼합하였다는 것이다. 3. ‘폭정의 전초기지’와 ‘레짐 체인지’ 및 ‘민주주의 확산론’의 교훈 9.11 테러이후 미국의 부시대통령과 네오콘들은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 of tyranny) 혹은 불량정권(rouge regime)으로 낙인찍었고,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혹은 ‘민주주의의 확산’을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군사적 선제공격과 물리적 압박도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부시 대통령과 네오콘들의 생각은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일방주의와 패권주의로 받아 들여졌다. 그들은 전세계에서 불어 닥친 반미주의와 반전여론 앞에서 결국 실패하고 실각하고 말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과정에서 북한의 리더십은 사실상 대미 대항력과 핵무기개발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폭정의 전초기지’ 혹은 ‘불량정권’, ‘레짐 체인지’ 혹은 ‘민주주의의 확산’ 등에서 드러난 부시정권의 일방주의적인 태도는 북한 리더십이 체제위협에 대한 효과적이고도 극단적인 방법으로 핵무기를 만들어 저항하도록 하는 상호구성주의적인 메커니즘과 명분으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메커니즘과 명분에서 발생하는 상호불신은 북한이 핵무기 개발과 보유가 처음에는 체제위협에 대한 ‘협상용’에서 점차로 ‘공격용’으로 어떻게 현실화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부시대통령과 네오콘들은 실패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폭정의 전초기지 혹은 불량정권, 레짐 체인지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매우 독단적인 인식과 행동들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즉, 이러한 인식과 행동들은 일방적이고, 이분법적이고 매우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생활과 마음속의 습속으로 생각해 온 민주공화국의 모국인 미국의 가치들과 충돌하는 것들이다. 특히, ‘민주주의 확산론’은 은연중에 ‘민주대 반민주 구도’를 형성하고, 민주주의와 민주정을 추상화 혹은 신비화시킴으로써 다른 정체보다도 과도하게 우월한 체제라는 이데올로기를 양산한다. 이로써 다른 정체의 특성을 과도하게 폄하하거나 격하시킴으로써 다른 정체를 무시하거나 다른 정체와의 비교할 수 없도록 하는 독단주의에 빠진다. 하지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우스, 마키아벨리 등이 연구하고 설명해왔던, 레짐은 무려 7가지의 종류가 있다. 민주정은 그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특히, 성찰적 대안으로 채택되었던 ‘공화정’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 혹은 민주정체는 많은 의의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많은 정체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공화정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정체는 중우정과 파퓰리즘에 빠질 가능성 그리고 그것이 만연할 때 참주의 등장 가능성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다른 군주정, 귀족정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안한 체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최장집 교수가 제기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라는 화두처럼 지나치게 민주대 반민주 구도 혹은 노동이 없는 민주주주의와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라는 시각으로 민주주의만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서 이것을 신비화하거나 추상화하여 민주화 이후를 걱정한 것 같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민주화 이후 민주정이 중우정으로 빠지고 중우정으로 빠질 경우 참주정이 다시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놓치고 만다. 미국적인 민주주의 레짐이 좋다고 해서, 상대국들을 이분법적으로 적과 동지 혹은 선과 악으로 구분해 놓고, 일방적으로 미국적인 레짐으로 상대국의 레짐을 바꿀 것을 강요하거나 바꾸겠다고 압박하는 것은 폭력과 같은 것으로서 민주공화국의 모국인 민주적인 레짐과 부합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한 것은 ‘참주정체’에서나 가능한 리더십이다. 어쨌든, 부시와 네오콘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과 행동들은 민주공화국의 모국인 미국에서도 9.11과 같은 매우 극한 상황속에서 언제든지 참주정체 또는 참주적 리더십이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아마도,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인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어떻게 히틀러 같은 참주가 등장하여 공화국을 해체시켰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민주적인 레짐에서 출발한 이승만 체제가 어떻게 데스포티즘(전제정/폭정)이 전락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승만이 물러난 뒤 민주당 정권하에서도 박정희 같은 참주와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 같은 참주체제가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설명해주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이러한 앞선 사례들은 민주화된 민주주의 한국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참주가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민주정을 완벽한 체제라고 미화하는 관점, 민주정을 다른 정체 특히 공화정과 비교 논의하지 않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민주정을 완벽한 체제라고 미화할 경우, 선거를 통해 당선된 이승만체제가 어떻게 데스포티즘(전제정/폭정)으로 전락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민주대 반민주 구도하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가지는 이중성의 문제 즉, 쿠테타와 폭압에도 불구하고 그가 했던 경제개발정책과 새마을 운동, 부패청산 등의 파퓰리즘 정책이 왜 지금까지 많은 서민들한테 지지를 받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민주대 비민주의 대립구도에서 오는 극단적인 시각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4. tyranny는 폭정(despotism)인가? 참주정인가? 참주정의 특징은? tyranny는 부시 대통령과 네오콘들이 이른바 북한 등의 불량국가들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명 tyranny를 ‘폭정’이나 ‘전제정’으로 번역하여 인식할 경우, 그 대처방식은 레짐 체인지와 민주주의 확산론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을 ‘참주정’으로 번역하여 사용할 경우 보다 점진적이고 온건한 대처방안과 리더십이 나올 수밖에 없다. tyranny는 군주정(monarch)의 한 형태로서 왕정(kingship)의 타락형태인 폭군정/전제정(despotism)과 같이,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어 지배되는 ‘1인 지배체제’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모든 참주가 처음부터 폭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다. tyranny와 군주정 및 폭군정/전제정과의 가장 큰 차이는 왕정과 폭군정/전제정이 성군이냐 폭군이냐는 차이는 있지만 엄연한 '합법적인 1인 지배체제'라는 점이고, tyranny는 성군적 참주냐, 폭군적 참주냐를 떠나 ‘비합법적인 1인 지배체제’라는 점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좋은 선정을 폈던 참주도 있고, 선정을 펴다가 폭정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 참주정은 전기 참주와 후기 참주로 구분된다. 전기 참주는 대체로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가는 과도기에 등장한 참주로서 귀족중의 일부가 평민들의 지지를 등에 없고 귀족을 타도하여 권력을 잡고 그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친서민적인 파퓰리즘적인 정책을 펴다가 폭군정/전제정(despotism)으로 전락하거나 세습을 물려받다가 몰락한 참주들을 말한다. 이에 비해 후기 참주들은 대체로 민주정이 중우정으로 타락하는 혼란한 과정에서 군사적 능력과 참주적 선동능력으로 권력을 찬탈하여 폭압적인 반서민 정책을 추구하다고 몰락한 참주들을 말한다. 전기 참주의 예로는 기원전 561년에 빈농층을 포함한 평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참주가 된, 아테네의 장군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가 유명하다. 그는 민중에게 선정을 베푼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그에게 반대하는 귀족을 추방하고 상공업을 장려하고 시민의 세금부담을 감소시켰으며, 소농들에게 농사자금을 대부하는 등 농업을 장려하고 농민을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로마의 삼두체제 중 유일하게 평민들로 지지를 받았던 줄리어스 시저의 경우도, 당시 귀족세력인 원로원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하층민들을 위한 파퓰리즘 정책(빗 탕감, 무료 곡물제공, 공공사업으로 빈민, 실업자 구제 등)과 선동정치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이후 1년 연임의 집정관을 폐지하고 종신총통제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아울러 참주가 폭정으로 갔던 사례는 히틀러가 선거를 통해 노동자의 절대적인 지지하에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제국의 총통이 된 경우이다. 그렇다면 참주정의 성격과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대체로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가는 과도기에 평민들의 지지를 통해 군사적 능력을 통해 ‘비합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둘째, 그래서 그들의 통치방식은 정통성(legitimacy)와 합법(legality)적인 통치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카리스마 리더십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셋째, 이러한 카리스마 리더십의 확보와 유지는 군사적 능력과 파퓰리즘의 정책 그리고 이것들이 동원된 사업성과에 의존하고 이것을 끊임없이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다. 넷째, 이러한 비합적이고 비적법한 카리스마적 통치가 검증도 없이 세습될 경우 대체로 더욱 폭압적인 정체로 전락하거나 이것에 대한 반발로 몰락했다는 점이다. 정통성이 없는 참주정체제에서 세습은 참주정체의 한계가 근본적으로 노출시킨다. 때문에, 참주들은 자신들의 정적들과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폭력과 억압기제들을 동원하게 되면서, 점차 폭군정/전제정(despotism)으로 전락하게 된다. 5. 북한 공화국의 이념과 3대 세습의 딜레마 그리고 참주정의 행태들 그렇다면 북한의 레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헌법에 나와 있는 북한의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다. 만약 북한의 레짐이 군주정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라 한다면, 3대 세습의 문제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공화정의 특징은 다양성과 경쟁 및 선거라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리더십이 선출되고 운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북한은 형식적으로만 민주공화국이고, 실질적인 내용으로는 민주적인 이러한 사정을 볼 때, 북한의 레짐은 참주정의 형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이 전기 참주의 모습이라면, 세습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김정일은 전기 참주에서 후기 참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현재 세습중인 김정은 점차 후기 참주의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측된다. 전기 참주의 카리스마는 후기 참주들에게 세습으로 전수되거나 유전되기 않기 때문에, 참주정에서의 세습문제는 정말 불안하다. 이것은 마치 대중의 인기를 받던 연예인이 인기를 받지 못하게 될 때 우울증과 조울증을 번갈아 걸리면서 히스테리와 발작을 일으키다가 끝내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극단적인 자살까지 감행하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김정일과 김정은 이러한 불안함을 무엇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돌파하려고 하겠는가? 그것은 김정일과 김정은도 김일성과 같이 군사적인 능력과 경제적인 파퓰리즘 동원능력에서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김정일과 김정은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통성문제에 시달리기 때문에 이 문제를 김일성과 같은 카리스마에 의존하고, 그것을 과장하여 보여줌으로써 돌파할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북한 경제가 극도로 어렵다는 점에서 경제적인 파퓰리즘 정책에서 김정일은 실패했다. 그래서 그가 끝까지 붙잡고 있는 부분은 군사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그의 지위는 주석이 아닌 국방위원장이다. 그가 ‘국가주석’이라는 타이틀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정통성이 없이 세습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조건하에서 군사적인 카리스마를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노출되는 미국의 체제위협 속에서 핵무기 개발과 벼랑 끝 전술을 통해 저항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군사적인 카리스마를 인정받고 싶어 했고, 그것은 선군정치와 유훈정치를 통해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김정은이다. 그는 아직 어리고, 김일성과 김정일과 다르게 어느 하나도 검증받지 못했다. 아마도 최근 북한에서 수 천개의 경수로를 공개하여 제3차 핵위기를 조성하고, 연평도를 포격한 것은 김정은의 군사적 카리스마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대외적 퍼포먼스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김정일의 건강이 우려되는 상황속에서 충분한 후계구도를 구축하지 못한 2-3대 참주체제의 불안정성은 김정은을 미치게 만들 것이다. 김정은의 후계구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 것이며, 이에 따라 김정은은 더 극적인 군사적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불안정성과 히스테리를 극복하려고 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2-3대 참주체제의 불안정은 더 많은 그리고 더 극단적인 군사적인 퍼포먼스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긴장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극한 상황으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 6. 실마리, 박정희식 경제개발 모델 지원으로 민주정체로의 이행토대를 구축 이렇듯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미국의 위협도 어느 정도 있지만 많은 부분 참주정체제 자체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 2-3대 참주체제의 불안정이 야기하는 극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여러 가지 다양한 안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러 선택지 중에서, 다음의 것들은 제외할 필요가 있다. 즉, 앞에서 언급했듯이, 적어도 부시와 네오콘들이 했던 강압적 대응과 민주주의 확산론과 같은 것은 북한을 더욱 자극하고 중국이라는 강력한 지렛대가 있기 때문에 현실성이 떨어진다. 군사적인 방법과 강압적인 방법을 제외하고 나면 남아있는 선택지는 ‘현상유지’와 ‘점진적인 링컨은 노예제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같이 살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또한 그는 수 천년 간 이어온 노예제를 단번에 근본적으로 폐지하겠다는 사람들과도 같이 살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점진적인 개선안을 선택했다. 마찬가지로 참주체제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주체제를 단숨에 근본적으로 혁파하겠다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양다리를 걸칠 수밖에 없다. 참주체제의 의의와 한계를 직시하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박정희 참주체제의 의의와 한계를 ‘민주정’의 관점이 아닌 ‘공화정’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즉, 참주정의 긍정성(특히, 전기 참주의 경우)은 매우 작지만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가는 과도기(이행기)에 등장한 체제로서, 평민들의 지지를 입고, 귀족들을 타파하고, 친서민적인 정책을 폈던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한계로는 정통성과 적법성이 없이 카리스마에 의존하다가 세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폭정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참주중에는 경제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여 그 동력으로 서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권력을 유지한 참주도 있다. 대표적인 참주가 박정희 참주다. 그는 박정희식 경제개발 모델을 창시하였다. 이것을 통해 그는 자신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권력을 장기화하려다 전제정과 폭정으로 전락했다. 또한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참주도 있다. 그 역시 친서민정책으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 3선연임제한을 폐지하였다. 어쨌든, 북한의 2-3대 참주들은 지금 무척 불안하다. 이들은 미국과 한국으로부터의 자신의 ‘카리스마’를 인정받고 싶어한다. 참주들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안과 히스테리 발작이라는 증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고, 잘못하다간 주변국과의 극단적인 동반자살을 꿈꿀 수 있다. 정신적인 질환이 있는 사람들에겐 보다 진지하고 친절한 전문의의 상담이 필요하다. 참주정의 의의와 한계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가진 참주정의 한계를 더 이상 군사적인 카리스마가 아니라 경제적인 카리스마를 통해 해결하도록 일정 이해하고 지원하며 협력할 필요가 있다. 민주공화정이라는 레짐은 단시간에 등장하지 않았다. 장기적인 시간속에서 좌충우돌의 레짐 사이클을 겪으면서 성찰적 레짐 테제로 등장하였다. 참주정은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가는 과도기에 등장했었고, 민주정 이후 중우정으로 타락하는 과정에서 참주정이 또 등장했다. 그것의 반복 과정에서 대안적 테제로 공화정이 등장했다. 이러한 이행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참주정에서 민주정으로 가는 이행기를 적극 지원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마치, 박정희 참주의 결과로 한국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그 결과로 중산층이 성장하여, 이 중산층이 다시 참주체제를 무너뜨려 민주화의 밑거름이 된 것 같은 이치이다. 북한의 2-3대 참주들의 군사적인 카리스마를 경제적인 카리스마로 이행하도록 돕는 문제는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민주적 이행의 토대를 내생적으로 돕는 다는 점에서, 여러 측면에서 부시와 네오콘의 방법과 현상유지 정책보다는 많은 이득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인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