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암호를 묻는 병사에게 "대대장을 찾아왔오 대대장을 찾아왔소" | ||
| ||
김동문 논설위원, kdm0003@never.com | ||
| ||
무장한 폭도들이 나를 유신 언론인으로 지칭하며 "죽인다" 는 협박전화는 왜 했을까?
5.16 군사혁명 이후로 생겨난 유신독재와 군사정권 타도를 부르짖는 재야 정치권과 민주화 투쟁을 일삼는 운동권들을 나는 직업 대모꾼과 사회 불만세력으로 여겨 평소에도 그들을 경멸해 왔고, 따라서 5.16 혁명으로 가난과 부정부패를 척결한 박정희 대통령을 항상 존경해 왔다. 그런 나를 그들은 유신 잔당이며 유신 언론인으로 단정한 모양이다. 그시절, 나는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기 이전, 내게는 전쟁 유자녀라는 꼬리표와 함께 가난과 굶주림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5백원하던 월사금(수업료)을 못내고 학교에서 쫓겨도 났고 점심때면 도시락이 없어 학교 우물로 배고픔을 달래기도 하던 시절, 중학 3학년 되던 해인 1960년 5.16 군사 혁명을 맞았다. 혁명정부가 드러서면서 부터 그 동안 걸인 취급 받아오던 6.25전쟁 유자녀와 미망인이신 우리 어머니에게 밀기울 죽과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몇 푼의 연금이 정부로부터 지급되었다.
당시에 항상 꺼림직 했던 원호 대상자라는 명칭도 혁명정부가 들어 서면서 부터는 우리를 버젓하게"국가 유공자"로 불러주었다.대해주었다.그레서 나는 이런 연유로 혁명정부가 좋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해왔었다. 군복을 벋고 대통령에 당선되던 2년 후 1964년, 나는 군에 입대하고 만기제대 4개월을 앞둔 1966년 월남전에 지원했다. 경상북도 영천에서 군 복무중 110원 받던 봉급을 열다섯 배가되는 15,000원을 준다고 하니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며 서둘러 월남전에 자원을 했다. 3.8선을 경계에 둔 강원도 화천 옴리라는 월남전 교육장에서 6주의 강 훈련을 받으면서 오직 부모형제의 원수인 김일성 괴수의 표적을 향해 사격훈련을 했고 유격 훈련과 HID북파공작원들이 받던 실전훈련등 6주의 강 훈련을 견디어냈다. 6주의 강훈련이 끝나고 1966년 9월 부산항 3부두에서 국군의장대의 "아리랑"연주를 끝으로 머나먼 이국의 땅 월남을 향해 미군수송선(12000톤)골든호는 1500명의 맹호, 청룡, 십자성, 백마)전투부대 1진으로 평화의 십자군의 이름으로 월남으로 떠났다.떠났다.
이 차장과 이웃집에서 피난 온 처녀(0다방주인)에게 월남 참전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듯 새벽 동이 떠오른다. 20일 아침 6시 새벽부터 읍내 도로에는 붉은 색 머리띠에 "계엄철폐"란 머리띠에 복면을 한 폭도들이 어제 탈취한 총기로 무장을 하고 버스 차창 밖으로 각목과 총기를 휘두르며 광주-목포간 신의주 1호선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오전8시께 보급소 손 총무가 사무실로 들어선다. 손 총무의 안내로 군부대로 피신하기위해 자전거 와 남루한 점퍼 차림으로 갈아입고 출발을 서두는데 이 차장이 전화 수화기를 건네준다. 지역 유지며 교회 장로인 윤선배의 음성이다. 나주에서 규모가 큰 정부양곡 도정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선배는 공장에 총을 든 폭도들이 찾아와 쌀 가마들을 일부 털어 갔고 선배도 피신을 해야 하겠다며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나는 예비군부대 인근지점을 알려주며 그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후 자전거를 타고 이 차장과 기약 없는 작별을 나눴다. 어제밤 부터 부대 정문 쪽은 이미 폭도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대대장의 전언을 받은 터라 나는 후문 쪽 2킬로를 돌아 보산리 맛 재 방향으로 진로를 잡았다. 잿등 이라 불리는 빈촌부락(금성동)을 지나 농로 가장자리 외딴곳에 위치한 도축장 앞에서 나와 손총무는 자전거를 멈췄다.도축장 앞 농로 쪽은 대형트럭(주황색)이 도로를 차단한체 무장한 장정 6~7명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 아마 군부대 후문 쪽을 경계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막다른 길에서 되돌아 설 수도 없게 되고 담벼락에 몸을 숨긴체 지방사람 여부를 확인 해보니 트럭 꽁무니에 '영암 시민 군'이란 표식이 붙어있다.
허름한 점퍼에 노동자 차림으로 위장했으니 무작정 지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우리 두 사람은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다행히 정지신호가 없어 속도를 내고 폭 1미터가 되는 농로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빠져나갔다. 산등성 어귀 안 모씨 양돈장 앞에 이르자 자전거를 팽개치고 논두렁에 털썩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약속한 윤 선배를 기다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다.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손 총무에게 우리 가족과 이 차장 가족을 돌보아 달라고 당부한 후 그가 자전거를 타고 무사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부대를 향해 마구 뛰었다. 부대후문 200여 미터지점에 이르자 초병이 몸을 숨기고 M16소총을 겨눈 체 암호를 묻는다. 두 손을 번쩍 들고 대대장의 이름을 외쳤다. 대대장은 광산군 평동면 출신으로 향토사단 00연대 나주 예비군대대 지휘관을 맡고있는 정소령이다. 그와는 2년 전 내가 나주군 방위위원으로 위촉받아 예비군 지원업무를 하던중 그와 교분을 나눴는데 그는 4살 연상인 나를 친형처럼 대하며 형제애를 나누는 사이다. 거총 자세로 암호를 묻는 초병에게 "정 소령 찾아왔소. 대대장을 불러주시오" 두 손을 들고 힘껏 외쳐댔다. 수분이 흐르고 초병의 연락을 받았는지 정 소령이 나를 알아보고 손짓한다. 부대 정문에 들어서자 현역병 3-4명이 무장을 하고 블록 담 철조망 사이로 낮은 포복자세로 엎드려 경계 태세를 취하고있다. |
|
첫댓글 저에게 1963년에 출판된 한국군사혁명사가 있습니다. 무척 두껍고 무겁고 뱡대한 자료가 수록된 책입니다. 아마 지금은 그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귀중한 사료랍니다. 감히 읽을 엄두를 못내고 대충 몇페이지 보았는데, 대한민국 경제건국기의 한 행 한 행이 너무도 감탄스럽습니다. 제가 광주사태 자료 공개를 할 수 있을 때 언제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이런 희귀 자료들을 공개하려 합니다. 그런데,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원호 대상자라는 명칭을 국가 유공자라는 말로 바꾸었는지는 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의 희미한 기억으로 초딩 시절 원호라는 단어를 종종 들었었는데
그리고 보니 언젠가부터 그 단어가 점점 사라져 전혀 사용되지 않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후보의 당선이 1963년 10월이었고, 그 이듬해 1964년 1월 취임하셨으므로 박정희 후보의 당선 이듬해에 군에 입대하신 것이네요.
1964년9월 광주사태 당시 제31예비사단(정웅소장) 광주훈련소 창설군번잉 2101-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거주지 훈련소에 입영하였나 보네요. 창설군번이면 바로잡기님이 31사의 산 역사이시기도 하시군요. 저도 신기하게 제 군번을 여태껏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논산군번은 8자리 수인데도 여태 거억이 되네요.
광주-목포간 신의주 1호선 도로가 강진 갈 때도 이용되는가요? 22일 00:05에 완도 경찰서가 파괴된데 이어, 06:04에 강진 경찰서거 파괴되었고, 12:12에 함평 경찰서 점거되었으며, 14:58에 목포 경찰서 무기고 피복 창고가 피탈되었고, 17:37에 해남 경찰서가 점령되었고, 18:40에 화순 예비군 중대 무기가 탈취당하였습니다.
6주 훈련을 마치고 경상북도 영천 00탄약사로 자대 배치 받고 근무중 만기제대 4개월을 남기고 1966년9월 월남전에 지원서를 냈을때 야당인 김영삼과 김대중이 합작으로 파월 반대 국회농성을 하던때라 당시 영호남 지역감정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지만 김영삼(경남 거제, 김대중 전남 신안)두사람의 민주팔이 사이비 정치인들이 파월반대 농성을 펴는 바람에 당시에는 영호남 지역감정이 수구러 들기도 했습니다.
양김씨가 고속도로 건설 반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파월 반대 국회농성도 했었었군요. 저도 오늘 처음 듣네요.
나주에서도 쌀 가마니를 약탈해 갔군요. 시민군에 의한 약탈 사례 몇가지를 제가 인용해 드리면
증 언 자:김지호(남)
며칠인지 기억은 없는데, 광주역 앞에서 낫을 실은 경상도 소속 트럭이 전소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순복음교회와 광주역 사이에 있는 가스차(Ml6이 들어 있었음)를 시민군이 도청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윤기권
한번은 시외버스 한대가 지나가자 시위대측에서 붙잡아 "시위하는 데 쓰자"고 했다.
5월 18일 박정열. 함께 투석 전을 하다 현대극장 쪽에 있는 주유소로 가서 화염병을 만들자고 하였다. 전경들 과 싸움을 하는 중에 화염병이 모자랐다. 주유소 주인에게 석유 좀 달라고 하였 더니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제가 광주예비사단 창설군번일때 논산훈련소 의 입대동기 군번은 1131로 나갔습니다.
제 군번은 1256으로 나가는데, 1960년대 중반에는 1131로 나갔었군요.
사정을 해도 주지 않아 석유를 주지 않으면 불지르 겠다고 시민들과 다그쳤더니 휘발유통 세 개를 내놓았다.
26일 <시청 직원에게 민방위 방송차량인 포니차에 스피커 4개가 있어 그것 을 달라고 하였더니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함께 간 2명이 총을 들이대고 `지 금 광주에 계엄군이 들어와 쑥밭을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판인데 차를 내주지 않 으면 잡아 가둬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시청 직원이 기겁을 하여 차량 열쇠를 주며 민방위 방송차를 가져가라고 하여 그 차를 가져왔다.>
19일
김태찬
내가 평소에 운전을 할 줄 알았는데 지금 중흥교회 앞 정미소 자리에 (당시에는 건물이 없었다) 차가 한 대 있어서 주인에겐 미안했지만
그 차를 끌고 나왔다.
강대정
그러다가 화정동에 있는 현 중앙병원 부근으로 갔는데 상무대 소령의 인솔하에 1개 중대 정도의 군인들이 광주시내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시민들은 서부시장 앞에서 그들을 차단하고 식사 좀 하고 가라고 하였다. 군인들이 거절하며 그냥 가려고 하자, 시민들은 그러면 지프차를 놔두고 걸어서 가라고 했다.
황강주
우리가 무등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아직도 흩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고 8톤 트럭이 불타고 있었다. 경남 차량이었다. 나는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저 차에 왜 불이 붙었습니까?"
"경상도 차기 때문이오."
일전에 알려드린데로 서남부 11개시군의 관문은(광주로 들어가는 도로망)나주-광주간-목포를 경유한 신의주1호 국도 하나뿐입니다.
제가 한국 지명에 약하답니다. 열차로 여행할 때 신의주 지명을 종종 들어 한수 이북 지명으로 착각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 지명으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신의주1호 국도 명칭이 조금 헷갈립니다. 남한에도 신의주가 있었던가요?
신의주1호국도는 지명이 아니고 도로명으로 구분되는 지도의 도로망 표시명칭입니다
우리는 광주고속터미널 앞으로 갔다. 20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시민들은 차를 내주라는 요구를 하고 있고 광주고속 경비원은 차가 30대 이상이나 나가 있는 상태에서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설득하고 있었다.
윤석진
우리가 맨 먼저 간 곳은 중앙고속터미널이었다. 터미널홈에 차 몇 대가 세워져 있었지만 키를 모두 뽑아가버린 상태였다. 사람들이 터미널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나왔다. "시위차량이 부족하니 그레이하운드를 좀 내주시오." "차를 줄 수 없소." 그 말을 들은 1백여 명의 흥분한 사람들이 세워놓은 차에 달라붙어 밀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 꿈쩍도 하지
시민군의 약탈 사례는 100%인정이 갑니다, 이유는 약탈장소 및 지명과 도로등이 (광주지역)30년전 전남 광주시 행정구역 당시 사용하던 지명이군요
않았다. 그러자 중앙고속 건물 안으로 들어가 회사기물과 기타 시설물들을 모두 부숴버렸다. 그곳에서 나와 백 미터 정도 위로 올라가니까 25톤 타이탄트럭들이 주차해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몇 사람이 붙어서 타이탄트럭을 밀어붙이니가 시동이 걸렸다. 그때마다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끌고 나갔다. 일부 사람들이 광주고속터미널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한쪽에서 터미널에는 차가 없고 금호고등학교 가는 곳에 있는 정비공장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즉시 우리는 정비공장으로 몰려갔다.과장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나와 두말하지 않고 차를 골고 가라고 했다.
시민군에 의한 약탈 사례를 몇 개만 인용해도 이렇게 많답니다.
역사학도님-간행물과 체험수기 등 도서 출판으로 수익을 창출, 각종 홍보비및 단체 운영비로 정부가 인정하고 개입할때까지는 성금이나 자체사업으로 이어나가야 하는데 출판에 관련 좋은 의견이 계시면 알려주세요
진실규명의 우선순위는 논리 대결입니다. 이론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홍보입니다. 이론이 정립되기 전에 홍보부타 하나요? 일단 이론이 정립되면 홍보는 수월해집니다. 홍보로 진실이 규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행여나 엉성한 주장으로 홍보하다가 오히려 역공격을 당하면 역효과 아닌가요? 진실을 위한 싸움은 치밀하고 단단한 논리로 5.18쪽 주장을 무너뜨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성금이 전부 홍보비로 쓰이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홍보비를 절약하여 간행물과 체험수기 등 도서 출판에 우선순위를 두셔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무엇이 사실인지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5.18의 진실인지 밝혀지면 그 진실은 저절로 베스트셀러가 될 것입니다.
지금 무엇이 홍보 대상인가요? 간행물과 체험수기마저 없으면 무엇을 홍보한다는 말인가요?
먼저, 이론을 세운 후에 독자들이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집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내용이 완성되면 그 다음에는 보다 많은 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좋은 글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대중적이고 흥미위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무엇이 진실인지 역사논리의 뼈대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내용이 완성된 다음에는 얼마든지 보다 흥미를 끄는 좋은 글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란 상당히 방대한 작업입니다. 홍보에 시간을 낭비하면 결코 그 작업을 하지 못합니다. 광주사태 30주년 되는 금년에는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이론적 작업이 상당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지금 홍보로 허송세월할 겨를이 있을까요?
홍보는 홍보 대상이 정해졌을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5.18 이론도서나 증언자료들이 출판되면 홍보할 대상도 생기며, 홍보해야 할 이유도 분명하겠지요.
지금 현실은 성금을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운 형편입니다, 때문에 우선 젊은세대들이 읽기 편하고 접근하기 쉬운 수기들을 소설체나 타큐형식으로 발간 (예를들면 본인의 체험수기를 읽기쉽게 제편집하여 책자발행비용은 제가 부담하고 책자판매에서 얻어진 수익은 전액 본인이 성금형식으로 (애국운동)기부하는 방법을 구상해 봅니다.
한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집필 작업을 시작하시되 전액 기부하시겠다는 의사에 대하여는 지금 제가 뭐라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바로잡기님 본인이 5.18 희생자이십니다.
저는 8년의 세월을 왜곡 조작된 광주사태의 진실규명을 위해 독립신문(대표 신혜식)의 전신 안티 DJ시절부터 젊은 우익 젊은 애국자 신혜식군의 용기에 머리가 숙여져 진상규명, 바로잡기, 진실규명이란 필명으로 수기를 발표하고 김대중정권에 갖은 핍박도 받아왔지만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글들을 기고해 오면서 단 한차례도 제가 5.18의 희생자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살날보다는 생을 마감하는 날이 짧기에 조작, 왜곡된 폭동의 현장을 기록으로나마 남겨 후손들이나마 광주사태의 진실을 알려주려고 몸부림 칠 뿐입니다.
광주사태의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단지 제 분야의 진로가 막히는 문제뿐만 아니라 신변에 위험을 느끼는 문제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붓을 든 때가 2003년 초였습니다. 2002년 가을 겨울의 반미촛불시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깜짝 놀랄 일이 많았습니다. 오마이의 김 아무개 기자가 앙마라는 필명으로 자작극을 벌인 것을 폭로하는데 제가 한 역할을 했었는데, 그 무렵 오씨 성을 가진 한 대표적 광주운동권 사이트 게시판에는 2003년을 통일원년으로 삼자, 제야의 종 촛불시위 때 백만 명 동원하여 통일 원년 삼자라는 글들이 자주 올라왔었습니다. 그래서 오마이 김기보 기자가 앙마라는 필명으로
오마이에 글을 올리는 자작극으로 반미촛불시위를 선동한다는 사실을 서둘러 폭로했었습니다. 제가 촛불을 끄는데 발벗고 나서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서버를 일본에 둔 북한 사이트에서 행군하는 북한군의 군화 사이트를 크게 들려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처음으로 알았고, 북한에서 한총련 등 남한의 전위조직들을 총동원하여 반미촛불시위를 선동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적화통일 당하여 신변이 위험해지는 것보다는 광주사태의 진실을 말하다가 위험해지는 것이 낫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리고 적화통일 사이트들에서 5.18 정신을 말하기에 적화통일을 막으려면
5.18 논리를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혹시 육사 총동문 게시판에 두 편의 수기를 올리신 적이 있으신지요. 2002년경에 어느 분이 거기 올리신 글을 제가 2003년에 보았습니다. 지박사님과 배성관 기자, 지박사님과 한은경간의 다툼이 그곳에 벌어져 방문했다가 보았는데, 훗날 생각해 보니 바로잡기님의 글이었습니다.
역사학도님과 저와의 인연은 아마도 필연적인 인연 같군요, 2002년 가을 월남전의 전우 강태공(고인 강태규)님이 천리길 제향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유는 지박이 광주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면서요, 제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도울수있는 것은 동료와 함께 그를 면회하는 일과 그를위해 법적 증언을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강전우에게 빛바랜 원고지 200여매(광주사태의 진실을 규명한다)를 손에 쥐어준 것입니다
시스템 게시판에서 그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때 필명도 바로잡기님이셨던가요?
그 빚바랜 원고지를 받아든 강태공전우와 저는 얼싸안고 피울음을 쏟았고요, 그가 원고지를 가져간 후 시스템클럽이란 곳에 올려놓은 모양입니다. 그시절 저는 콤맹이었고요,
학도님이 말씀하신 육사동문회 홈페이지에 도 강태공전우가 올려놓았습니다.
이후 강태공전우의 제안으로 "인터넷 전우회"가 태동했고 "월남전과 한국"사이트를 비롯 "배인전인터넷동호회"를 출범 인터넷사이트에 광주사태의 진실을 규명하자는 나홀로 메아리를 외쳤고요 그시절 역사학도님을 뵙게 된것입니다,
강태공 전우도 광주사태 진실규명의 선구자이셨군요. 그런데 아깝게도 2~3년 활동하시다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분 전우가 그분을 추모하는 글을 시스템 게시판에 올린 글을 읽어 보았었습니다.
그때 기억하시지요, 지박이 역사학도님 ,바로잡기, 정우익,세사람에게 역사책을 만들자고 제안 자신의 홈피에 공지한 사실을 기억하시는지요?
네, 기억합니다.
강태공전우의 부음소식을 받고- 전선..또전선..피울음이 솟도록 너를 저주한다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너! 네가 있기에 우린 달려왔노라 월남땅 이국만리 열대의 정글속으로 평화의 십자군의 이름으로..
이거 놀라운 사실이군요. 트럭 꽁무니에 '영암 시민군'이란 표식이 붙어있었군요. '진도 시민군' 명찰에 이어 트럭 꽁무니에 붙은 '영암 시민군' 표식! 이것은 전남 서남부 전지역에 걸쳐 시민군이 조직되었다는 또 하나의 명백한 물증입니다.
전남 영암에 거주하는 김봉수가 김대중의 사조직인 깡패조직이었습니다.
광주민중항쟁 주제 단편시리즈<5>/이명한의 '저격수'(월간예향, 1989. 7)를 읽어보니 거기에도 시민군 표지가 언급되어 있네요.
한 슈퍼마켓 앞에 트럭 한 대가 멈춰 있었다. 시민군이라는 표지를 앞세우고 옆으로는 갖가지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차였다. 그는 음료수나 빵을 시민들로부터 선물 받아 싣고 있는 그 트럭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시내를 빠짐없이 고루고루 누비고 돌아다니는 차량이니까 그 위에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아들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놈의 차량은 백운동을 지나더니 곧바로 광목간 도로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이 단편 소설에는 X X읍으로 간다고만 언급되어 있는데, 백운동을 지나더니 곧바로 광목간 도로로 빠져나가면 어느 읍일까요? 소설 문맥으로 목포 인근 지역이라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백운동을 빠져 나와 광-목간 도로로 접어들면 바로 신의주 국도1호선인 첫읍이 나주읍입니다
백운동에서나주읍까지 22키로거리며 나주읍에서 영암읍까지가 24키로 거리입니다
이 소설에도 차체를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 옆에는 열 댓 살쯤 되어 보이는 아마 중학생인 듯한 소년이 차체를 열심히 두들기며 외쳐대고 있었다. >
붉은 색 머리띠를 두른 복면무장폭도를 보셨다고 하였는데, 이 소설에도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른 한 청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어디로 간단가?"
송달수씨는 얼떨결에 물었다.
" X X로 갑니다. "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른 한 청년이 대답했다.
"뭣하러 간단가?"
"우리도 모르겠어요."
<목포까지 내려가려다 말고 트럭은 방향을 바꾸어 되돌아가기로 했다. 초록빛 제방 사이로 영산강이 희고 긴 띠를 이루며 흘러가고 있는 것이 내려다 보였다. 지금쯤 다른 한 무리의 시위대가 그곳에 도착했을 영암의 월출산이 흰 안개 속에 아스라이 솟아 있었다.> 라는 문장으로 보아 이 트럭에 탄 무장폭도들이 영암시민군 중 한 무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523.html 중반 이하에 있는 증언입니다. 트럭에 시민군 표식이 붙어있는 것이며, 영암이란 지명 표시 등으로 볼 때 바로잡기님이 보신 바로 그 시민군이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이 소설은 영암시민군의 실제 경험담을
씌어진 소설 같은데 한번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