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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지곤
-- -- 상육(上六) 효
-- -- 육오(六五)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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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오(六五) 공자부께서의 象曰
전편에 육오 효사는 黃裳(황상) 이면 元吉(원길) 이니라
라고 괘사 를 소개하였읍니다.
하지만 전편에 해당 효사를 공자께서 이르신 말씀도 포함하여 소개 하여야 했으나
이번 편에 꼭 소개할 명제를 다루기 위하여 따로 오늘 육오 의 象曰(상을 말씀하신) 이신 공자부
께서 이르신 내용을 소개 하기 위하여 따로 분류하여 오늘 소개합니다,
육오 효 의 공자님 말씀에 대하여
象曰(공자부께서 가로사되)
"黃裳元吉 은 文在中也 이니라"
황상원길 문재중야
누런 치마이니 크게 길하다 함은 문체(아름다운광채) 가 안에 들어있음이니라.
견햬)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목적은 삶의 정체적인 본질에 대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 의문은 풀고자 할때 실제적으로 인생의 고통을 수반하는 정체와 연결된 생노병사 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삶의 자체에서 느낍니다.
이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본분사로 여기는 것이 불교 공부와 수행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인간의 태어난 가장 인간적인 싯달타는 이미 2,500년전에 이 의문과 회의감을 해결하기 위하여 6년의 뼈를 깎는 수행과
함께 긍극적인 진리를 보고 이와 함축하여 지구권 생명들의 생노병사를 모두 해결하여 인간들에게 이 진리를 설파하셨읍니다.
"생노병사를 해결했다". 입니다.
쉽게말하자면 만물의 생명성품들에게 놓여진 죽음이라는 것은 원래 본질이 아니며 죽음자체가 없는 까닭을 보았으니
삶을 잘못 알고 보고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하여 49 년간 이 진리를 말씀하신 석가모니 세존을
교주로하여 불교라는 종교를 2.500 년 후에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들이 지금 만난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목적은 석가모니 세존께서 설파하신 진리의 교리를
믿고 이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고. 긍극적 진리의 생노병사에 걸린 우리들의 각기 주어진 명제를
반드시 해결하여야 하는 것이 본분사를 해결하는 것이 불교 공부나 수행의 목적입니다.
수행이 결여되어 생노병사를 해결 하지 못했다고 하여도 이러한 사실을 의미있게 이해하게
되면 시간의 장애없이 언젠가는 해탈하는 사실을 전제하는 까닭이므로 손해 볼 것도 없읍니다.
몸을 지니고 태어난다면 벨꼴을 다 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저도 인생의 측면에 대하여 겪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의하여 벨에 벨꼴을 다 보는
부정적인 시야로서 확산된 인생의 고난기가 있었읍니다.
그것은 결국적으로 본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많은 교훈을 얻는 기반으로도 작용되었다는 사실에는 반론이 없읍니다.
그런데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중에 가장 위대한 대장부이며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서 이를 해결한 분이
라고 한다면
4 대 성인이 있읍니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마호멧 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현실에서 이미 시대가 어긋나 이러한 분들을 만나지 못했읍니다.
위대한 성인이신 예수님 탄신을 목격하지 못한것이나, 부처님생존시 뵙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또 우리들의
문화권에 절절한 영향을 주신 성인의 공부자 이신 공자님 도 뵙지 못한 아쉬움은
사무칠 정도로 한편으로는 억울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자좌를 하셨지만
공부자님께서는 기린의 긴 목을 들어 멀리를 보신 분으로 표상됩니다.
공자님의 출현에는 기린이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가셨지만 다행하게도 위대한 경전을 남기셨읍니다.
성경, 불경, 역경 그리고 우리들이 경험하지못한 중동권의 마호멧교주의 꾸란경 등...
하지만 자세하게 분류 해 본다면
성경과 꾸란경은 같은 하나에서 분파된 교리이므로 하나로 쳐야 합니다.
그리고 불경은 인도의 힌두니즘인 바라문교에서 독립한 교리가 됩니다.
하지만 불경 역시 힌드니즘 문화에 대하여 어느정도 불식할 수가 없는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진리안의 기틀을 불교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 실체적인 나름대로 확증의 확보는 힌드니즘의 공간과 시간을 논하는 경전에서 본 경험이 있어 그 영향이 크게 작용받은 것도 있읍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말씀은 하나로 함축하는 의미로서 즙을 짜 내야 좀더 명확하고 확고함은
만날 수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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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유일하게 중화권의 진리의 선구자 공자께서 역경이라는 위대한 경전을 인본을 위주로 하여
세상에 내 놓으신 것이 주역입니다..
여기에서 또 중요한 것을 살필것이 있는데 힌드니즘의 교주는 역시 기독 성경의 하나님처럼
힌드니즘도 성경처럼 하나님이 교주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말씀을 계승한 인간이 없는 것이 역시 힌두교의 특징입니다.
유태교 역시 하나님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고있지요
결국 신이 교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명권 의 지구권속들 중에 민속적인 종교로 외연을 확장하지 못한 특징이 있읍니다. 결국 성경으로 친다면 구약성서 이상은 더 출현하지 않은 원본을 고수하는 입장은
또한 유태교과 힌두교 가 유일합니다.
인도의 사상은 타민족들 과 우리민족은 다르다 입니다, 신의 자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역시 배타교입니다.
힌드니즘도 유태인의 유태교 처럼 배타교의 특징을 지닙니다.
타민족을 배척하는 특징이 있지요
하지만 주역의 상을 공부함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인간의 명제로서만
진리를 논해보자 이것입니다.
" 黃裳元吉 은 文在中也 이니라.
황상원길 문재중야
이 문장에 공자님께서 진리를 설파한 본질이 다 들어가 있읍니다.
이를 이해하시면 불교의 수행자 들도 空 의 개념, 無 의 개념, 오온의 공함을 보는 개념 등의
이치를 전부 이해하고 체험의 수행과정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져 있읍니다.
물론 보는자만 보이고 보이지 않으면 보지 못할 따름입니다, 이를 전제하고 소개합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수행자들이 늘 하는 말을 보면
"그냥 무신 텅빔을 보았다" , 이러한 애매모호한 추정의 소치로서 부처님의 진리안을
논해서야 되겠읍니까? 간화선으로 툭 터지든지 해야 할 목록을 그렇게 마음대로
이야기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나라 유마거사 김기추 옹 께서 펴신 책을 보게되면 견성의 자리를 확보하셧는데
모든 세계가 금국물이라 하셨읍니다.
천만에요, 그렇다면 금국물을 본 자는 또 누구입니까? 금국물이 따로 있고 보는자가 따로 있다면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가 아닌까딹입니다.
말 작난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렇게 말 할 것입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잘나고 다 안다면 이 사회의 전반에 나타내서 객관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면 될 일이지
왜 노다박 요런 카페에서 노닥거리는지 이해가 아니간다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읍니까?
사실 그렇지 않읍니다, 이 세계의 문명과 문화 그리고 지식의 정도는 이미 고정관념에 푹 절어 있어서
지식인이라는 생명성품들, 과학자라는 생명성품들, 종교적이라는 생명성품들 죄다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바벨탑만 수두룩 한 것입니다.
오로지 진리를 깨칠 수 있는 대상자들은 무엇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대중들 에서 우담바라는
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역역시 유학자의 학리로서 논하는 대상은 아닙니다.
오로지 성인의 뜻을 바로보는 관점의 위대한 제자들만 이 심정을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부를 위해서 전언하는 소개글이니 오해하지 마시고 참고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자의 심정은 학리로 대변할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가 운운해서는 필요충분하지 않고 난해하기 때문에 접근을 꺼리게 만든 것이지요.
알고보면 상당히 쉽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안은 항상 소박한 대중들이나 인연으로 출발하는 계기를 지녀야 합니다.
경험치 못한 사실의 충격점으로 고정관념을 단박에 깰 수 있는 순박함이 필요합니다.
성인들은 늘 이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찾아 다녔다는 사실입니다. - 합장. 아멘,-
전세계에서 성인의 오롯한 진리를 볼 수 있는 자 는 대부분 서민에서 나옵니다.
절대 지위와 특권 단체 에서 는 이미 나올 수 가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미 타락되어있기때문입니다, 말세가 맞읍니다.
이러한 소식은 성인들께서 이미 다 펼쳐 놓았읍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진리안은 우리들이 평소 인연해진 소박함과 양심의 본위를
늘 유지하는 우리들처럼 보편적인 심성을 지닌 분 들에게 진리는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단 한분이라도 잃어버린 양이라 할지라도 그 분을 만나야 하는 것이 성인의 말씀을
전하는 포교자의 도리이며 회향자가 할 일입니다.
시끌벅적한 자리에는 절대 성인들께서 오시지 않읍니다.
공자님의 文在中也 는 진리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말씀이십니다.
文(문) 은 둥근 달을 인용하여 생긴 문자인 글을 의미하는 진리의 표상
이고
在(재) 는 土를 안고 출현한 생명의 운동됨을 坤의 입장에서 하늘
소식을 계승받은 같음을 의미하는 천지교역의 善함이며 (성선설 은 여기서나옴)
中(중) 은 공자의 인본의 주체 중용을 드러내고 펼치는 모습으로서
美 를 드러내는 아름다음의 요체를 中 이라 합니다.
文在中也 라!!!
"황상원길은 땅의 중간에 문체가 (글의 진리) 아름답게 드러나는
광체 가 있음을 말 함이니라."
이를 진 선 미 라 하는 것이며 세가지를 합치면 仁 이고 仁 의
운동은 中用 이니 이를 누런치마인 광명의 빛이 드러나고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용을 다른 언어로 비유한다면 마음자리를 말 합니다.
빛이라는 광명이 초점을 드러내고 발산하게되면 원이 됩니다.
생겨나는 것은 전부 원의 운동인데 중이 한복판에 있는데 누런 광명의 색체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명이 중심점을 이루고 확산하게 되면 둥근 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광명을 보는 우리 들의 눈동자나 모든 생명의 눈동자는 원으로 구성됩니다.
눈동자의 안질을 자세하게 보게되면 45 도 각도로 분화되어 직방으로 그 선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한계점을 지닌 원율을 구성하는 것이 눈동자 가 됩니다.
광명의 확산은 늘 45 도로 확산되어 삼각형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삼각형은 물질이 생겨나면 원운동을 삼각형의 균형의 45 도 각도로 벌려 직방하여 빛이 운동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5 도 각도로 물체를 만들어 바다에 띠어도 침몰하지 않읍니다.
공간을 보존하는 체가 45 도 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전부 45 도 각도로 벌려지며 생명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읍니다.
구약성서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르기를 배를 만들때 창문을 45 각도로 만들고
배를 만들때 45 도 각도로 만들라 명합니다.
45 도는 O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말씀이십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타가 돌아가는 것은 힘의 백터가 항상 삼각형을 이룹니다.
삼각형을 이루어야 원으로 회전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동력의 항상성은 항상 삼각의 백터량과 그 구조에 의한다 입니다.
사람이 외부의 어떤 공격이나 공격우려가 있으면 항상 팔을 삼각형으로 만들어
방어를 하고 후굴자세나 전굴자세는 항상 삼각형으로 균형을 잡읍니다.
그때 그때마다 생명의 의지를 인지하고 상황에 따라 취하는 균형의 자세입니다.
이를 그때 그때 중심을 잡아나가는 생명운동 현상을 中 이라 합니다
계속 우주공간이 팽창하는 것은 45 도 각도로 벌려지는데 빛의 운동으로 발생한 개체수가
더욱더 많이 생겨나므로서 그만큼 공간은 희석시켜 범위를 넓혀야
개체발생의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에 팽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공간도 균형을 잡고 중심을 잡으려고 하고
사람도 늘 생명유지를 위해 균형을 잡으려고 합니다.
나무나 풀이나 모든 동식물 역시 항상 45 도로 긴장미를 지니면서
생명균형을 잡고 살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원운동입니다.
건건한 乾 의 무시무종으로 中 을 이행하기 때문입니다.
몸안의 오온인 신경줄은 전부 45 도 와 유사한 각도로 온 몸에 퍼져 있읍니다.
나무가지도 그러하고 고기도 보게되면 늘 지느러미가 갈라져 있음인데
45 도 각도로 갈라져 있읍니다, 아니면 유사한 각도를 잡아야 합니다.
이는 중심을 잡아야만 모든 생명은 유지할 수 있고 방향을 잡고 진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보수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생명운동이며
中 이 하는 일이요, 이 中 의 중심의지가 바로 마음의 본원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생노병사가 없음을 드러내는 자리가
中 이며 중심입니다.
그런데 만물의 소이는 양 중 음 으로 세가지를 달고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음양오행법으로 土 는 짝인 10 이 아니고
십일 이기 때문에 (十+一) 늘 변화해야합니다, 홀 은 짝을 지향하는
변화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11 면 보살이라 이름합니다.
이러한 中 을 논하는 에너지 관련 의 물리학계에서는 물체보존의법칙이라 하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 하는
영원한 보수성의 원칙을 발견한 것과 다름이 없읍니다.
이 中 은 재중(在中) 이란 땅 복판에 누런색으로 (광명의 화려함을 드러내는 것이 안에 있음) 있어 황상(黃裳)입니다.
치마는 바지와도 같은데 바지는 45 도 각도로 갈라져야 합니다.
다리가 삼각운동을 하기 때문에 터 주어야 하지요.
발가락은 45 도 각도로 갈라집니다.
손가락도 45 도 각도로 보편적으로 갈라집니다.
이 모두가 원운동을 하기 위한 생태적 유지본능의 진화과정입니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45 도 와 유사한 삼각형의 회전운동을 합니다.
이러한 의지를 중이라하고 중용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결국 공자부께서 말씀하신 "문재중야"(文在中也)는 중용을 의미하시고 중용은 마음자리의 본질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진선미 세가지로 삼재로서 하늘과 땅은 교역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신 글입니다.
중용은 결국 O 입니다, 영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변명이나 합리화 역시 중용의 의지입니다, 변명도 합리화 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 은 원래 음양이 없듯이 선과악이 없는 고유한 중심으로 균형을 잡으려는 그때 그때 의지입니다.
이를 불성이라 하고 O 이라 하며 中 이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영원한 생명운동의 보수의지를 견지하는 의지운동을 말 합니다.
불성은 영원합니다, 영원성의 보수적의지 관점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사람이 죽어도 죽은과정은 받아들이지만 죽음이 아닙니다.
온 공간에 주어진 균형의 일환으로 죽음도 어떠한 상황의 양태에서 직면된 것에 대해
중심을 잡아 가는 과정일 뿐이지요. 죽음이후도 일을 해야 합니다, 중심을 잡으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생노병사가 있을 수 가 없는 본질의 체는 中 이라는 사실이지요.
그러므로 만세상 삼천대천세계는 전부 스스로 균형을 잡으려는 中 의 본원적 의지로서
영원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이 모든 중은 개별적이며 전체적이며 중간적이며 부분적이며 뭉텅구리 우주 모두에
적용되는 의지의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공간은 압축되고 진공되어 그 의미를 中 을 잡고 행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죽어도 죽음을 끝낼 수 도 없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음에 대한 균형을 잡는 中 은 영원한 보수성이다 이를 참고하시고
공부를 하시면 많은 이해가 되리라고 믿읍니다.
그러므로 계율의 첮째는 " 산 생명을 죽이지 말라" 입니다.
살려고 하는 의지는 영원함인데 이를 인위적으로 죽이는 관점에서
반연하여 죽음을 당하는 균형을 대칭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덕목을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 죽이면 니도 죽임을 당한다라는 반연의 윤리덕목입니다,
이를 인과응보에 의한 윤회를 말함과 같은 원칙을 의미합니다, 中 이 하는 것입니다.
이 中 은 음양에 의하여 휘둘릴 수 도 있고 선악에 휘둘릴 수 도 있으며
돌지않고 적적부동하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도 있읍니다.
음양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며 열반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살아지니려고, 균형을 잡고 중심을 잡으려는 키를 놓치지 않고 영원하게
살아지니는 생명성품이 변화 할 뿐인데 이 생명을 스스로 죽이려 하고 살성을 지닌다면
작용반작용에 의하여 반연됨은 확실한 균형을 잡아내야 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변화무쌍하기도 하고 적적부동하기도 합니다.
마찰계수가 없으면 진아이고
마찰계수가 있으면 자아 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지가 우측으로 좀 쳐졌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뿌리의 기운중에 우축으로 좀 처진것을 균형잡는 뿌리는 좌측으로
뿌리를 동시에 기운이 뻗어내립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중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무도 자아가 있읍니다.
공간도 식물도 나무도 동물도 벌레도 모든 처처의 생명은 전부 얼굴이 있고 머리갸 있으며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자존감을 지니고 의지를 행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쳐내야 합니다.
모든 마음의 의지는 물질계로 드러난다 합시다.
그렇게 되면 지면과 가지사이는 정학하게 45 도 각도와 유사성을 가지게 되고 본원적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읍니다.
그러므로 중생무리는 항상 무리입니다, 45 도 각도로 운동하는 유사성의 무리로 일어나는 것을
중생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모두다 中 을 가진다 입니다.
만상은 그러하다는 것을 중용이라 공자부께서 여실하게 말씀 하시고 계시는 것이
중지곤 육오 효사의 상을 "황상원길은 문재중야" 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말로 이해하려하는 백성들에게 기나긴 세월에 사서삼경을
집필하시고 끝없이 백성을 제도하신분이 공자부이십니다.
단 한말씀인 중용 을 위해서입니다. 생명의 본질 틀은 中 입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고 늙어 가는 것도 공간과 균형을 잡으려는 생명본원의 운동입니다.
영원한 보수성이 없으면 늙지도 않읍니다.
인구문제 사람과 사람문제 사람과 세상문제 공간과 시간문제에 따라 각기 그 균형을
만들어가며 그 과정에 충실한 것을 생노병사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이에 석가모니께서도 중도를 창안하시고 중관하라 하셨고
불세출의 용수존자는 중관 학을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모든 생명들은 경계를 하든 화합을 하든 일체를 향하든지간에
도둑질을 하던지 착한일을 하던지 그와 같은 반연하는 균형을 유지하려는
본성을 지니기 때문에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균형의 궁극적인 본원의 진리는 바로 O 의 운동인 것입니다.
주역 64 괘상에서 중천건과 중지곤의 두 효는 바로 이러한 메세지를 담읍니다.
무엇보다고 중천건은 모든 주역괘상 63 괘에 전부 반영된다는 사실입니다.
중천건은 휘어지며 무시무종인 원의 작용을 乾 이라 하고 건건하고 굳세고
원형이정 하므로
중지곤 괘상의 육오효에서
황상원길이라 으뜸 元 을 곤도에 반영하는 것이며
이 곤도의 땅의 소식 안에는 중간에 영원한 광채인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내는 中 의 생명의 균형을 잡은 영원한 보수성이
하늘이 乾 소식을 내포한다 라고 해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부의 중용말씀은 이처럼 중지곤의 육오 효의 괘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말씀은 어떤분이 말씀하셔도 항상 하나로 귀착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견성을 할때 텅빔을 본다 라고 하는 것은 애매 모호한 말을 추구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텅빔을 보는자는 또 하나 생겨나서 이중성을 도모함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항상 中 입니다.
원효대사의 중도가 바로 이 사상이며
사도바울의 성해가 바로 이 지점을 항상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항상 죄를 받는다 함은
마치 나무가지가 우측으로 처저 일어나면 그 뿌리는 반대 방향으로 뻗어 균형을 유지함과
같음을 주지의 사실로 이해해야 함과 같읍니다,
주역은 항상 중용을 취하는 정도를 천지교류 중정지교 라 한다는 것을 이해하시고
나머지 62 괘상을 공부해야 합니다.
다음에 계속하여 상육 효사를 소개 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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