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의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석야 신 웅 순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 중에 호미 메고
산전을 흩매다가 녹음에 누웠으니
목동이 우양을 몰아 잠든 나를 깨와다
김굉필(金宏弼, 1454,단종 2 ~ 1504,연산군 10)
소학 동자, 김굉필
“유학에 뜻을 두었다면『소학』부터 시작하라”
스승 김종직이 제자 김굉필에게 한 말이다. 그는 평생을 소학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그래서 그를 '소학동자'라 불렀다.
글을 읽었으나 여태껏 하늘의 뜻을 알지 못했는데
『소학』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후로 진심을 다해 사람 구실 하려하니
어찌 구차한 부귀영화를 부러워하겠는가.
業文猶未識天機(업문유미식천기)
小學書中悟昨非(소학서중오작비)
從此盡心供子職(종차진심공자직)
區區何用羨輕肥(구구하용선경비)
『소학(小學)』을 읽고서 쓴 시 「소학에 대한 독서기, 讀小學」이다.
김굉필은 성격이 호방하여 세사에 구속받기를 싫어했다. 젊어서는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피했다.
뒤늦게 소학에 입문하여 학문에 정진했다. 삼십에 이르러 소학 외의 책과 육경을 섭렵했다. 『소학』은 주희의 정치 철학서인 조선시대 국민교육 교과서다. 조선에서는 여덟 살이 면 누구든 소학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배움을 넘어 소학의 화신이 되고자 했다.
동갑내기 남효온은 그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김굉필은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다. 뛰어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었으니, 항상 의관을 정제했고, 부인 외는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매일 소학을 읽어 밤이 깊은 뒤라야 잠자리에 들었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나랏일을 물으면 언제나 소학이나 읽는 동자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 가라고 했다. ‘공부해도 오히려 천리를 알지 못했는데, 소학을 읽고 나서야 지난 잘못 깨달았네’라 고 시를 짓자, 점필재 선생이 ‘이것이 곧 성인이 될 수 있는 바탕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나이 삼십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다. 열심히 후진을 가르쳐 그 문하생이 모두 스승처럼 재주 가 높았고 행실이 도타웠다. 나이 들수록 도덕이 더욱 높아졌는데, 세상이 글러진 것을 알고는 재 주를 감추고 세상을 피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참판 이 되었으나 나라에 건의하는 일이 없자 시를 지어 비판했다. 선생도 역시 시를 지어 대답하였는 데, 대개 비판을 싫어하는 내용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벌어졌다.
김굉필은 소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현하려고 했다. 이런 실천적 자세를 스승인 김종직도 높이 평가했다. 김종직이 현실 정치에 있으면서 제대로 하지 못하자 제자인 김굉필이 비판했고, 결국 둘 사이가 벌어졌다. 소학으로 도덕과 행실을 갖춘 김굉필이니 높은 자리에 있는 김종직을 비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야 정치를 잘 모르니 이조참판인 당신은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 중에 호미 메고
산전을 흩매다가 녹음에 누웠으니
목동이 우양을 몰아 잠든 나를 깨와다
삿갓에 도롱이 입고 이슬비 내리는 중에 호미를 들고 산밭을 흩어 매다 비가 갠 후 나무 그늘에 누워있는데 목동들이 모는 소양의 울음 소리에 잠든 나를 깨우는구나.
그는 농군 같은 자유인으로 살기를 바랬다. 파쟁도 권모술수도 없는 평화로운 전원 생활을 꿈꾸었다. 그런 그가 벼슬에 몸 담았다가 사화에 얽혀드는 바람에 도학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무오사화(1498년)가 일어났다. 김종직 일파로 몰려 장 80대를 맞고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이 때 조광조를 만났다. 조광조는 영변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인근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만난 것이다. 김굉필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조광조의 나이는 17세였으며 이 때부터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가 되었다. 영남사림파의 학맥이 기호학파 학맥에 접목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유학의 맥은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졌다. 조광조는 김종직과는 달리 시문 위주보다 의리 실천을 중시했다. 그 제자들에 의해 훗날 조선의 개혁정치로 이어졌고 기호사림의 주축이 되었다.
어느날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을 찾았다. 연산군은 문득 폐비 윤씨 이야기를 꺼냈다.
임사홍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전하. 전하의 생모이신 폐비 윤씨께오선 엄 숙의와 정 숙의의 갖은 모함으로 사약을 받으셨나이다.”
임사홍에게 재기의 때가 온 것이다.
연산군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왕은 엄 숙이, 정 숙의를 즉석에서 쳐죽였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도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에서 죽음을 면한 선비들까지, 죽은 사람, 산사람 할 것 없이 전부 도륙해버렸다. 한명회, 정창손 등은 부관참시 당했으며, 무덤을 파고 뼈를 갈아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리는, 희대의 살인극 쇄골표풍까지 벌어졌다.
그 유명한 연산군 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1504년)이다. 무오사화가 훈구와 사림 간의 대립에서 생긴 것이라면 갑자사화는 궁중 중심과 구세력과의 충돌로 생긴 사건이었다.
그는 희천에서 다시 순천으로 이배되었다. 여기에서 갑자사화를 만나 1504년 윤필상, 한치영, 이극균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는 죽음 목전에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긴 수염을 입에 물고 천천히 말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어찌 이것까지 상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광해군 2년 그는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 희천의 상현서원, 순천의 옥천서원, 달성의 도동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이며 중종 때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가범』등이 있다.

소학당
(경상도 문화재자료 제 135,경남 합천군 가야면 매안3길 5(매안리)호,
한훤당 건물이 화재로 없어진 것을, 중종 원년(1506)에 김굉필, 정여창(1450∼1504)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당과 소학당을 세웠다. 숙종 22년(1696) 또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고쳐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달성 도동서원의 중정당
(사적 제 488 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 소재)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으로 소수서원·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 중의 하나이다)
평생을 소학동자로 소학을 실천했던 한훤당 김굉필.
그도 도학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화를 비껴가지는 못했다. 벼랑길을 걷는 것인지 우리들의 삶인지 모른다.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꿈과 행복이 있는 한 사람들은 그런 벼랑길도 마다하지 않고 걷는다. 그는 도학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의 사상은 한국 유학사의 맥이 되어 우리의 가야할 바른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시조로 보는 우리 문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