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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37-40
돌들의 소리
(눅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눅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눅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눅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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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의 안목을 눈여겨봐야 하고
귀담아 두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의견을 들어보세요.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만 영광돌리고
그 어느 누구도 그 하나님의 영광에 견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치 못하겠노라”
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논쟁은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이끌면서
결국에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만 부를 수 있는 호칭이고
다른 이들을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것은
모든 다른 이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그냥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이 아니면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과 아버지 관계에는
그 누구도 가입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0:30에 나오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니라”라는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5:17-19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일’로 고정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지 않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바로 이런 말씀들은
인간들이 기존에 알고 있는 하나님은
모두 우상숭배에 해당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벌이시는 일말고,
인간들이 하나님이라는 관념에 염두에 두면서
일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경쟁시키고 비교시키시는 방식으로
아버지 자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만나시고 대화하시고
인간들을 상대하십니다.
여기에 인간의 대표자의 자격으로 등장한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관은
인간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하나님관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흔히 언급되는 ‘인격적인 신’,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인간들 자신을 모델로 해서
재구성해낸 하나님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우리 인간이 아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하나로 엮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과 예수님 어느 한 쪽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서 뭐가 나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 하나님상과
일치시킬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 자체가
거짓된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면서도
동시에 그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은
모두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구성된
세계라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없더라도 돌만 있더라도
얼마든지 그 돌들로
예수님을 ‘주’시라고
찬양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이 세상이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유입되는 힘으로만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길 가의 백성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도 예수님으로부터 유입되는 힘입니다.
단순히 사람의 능력이라고
보지 말라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호칭이
무리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비해 바리새인은
나름대로 ‘권력의 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 권력으로
자신의 안정적인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이
이스라엘 모든 역사의 오류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의 이름’만 의지하면서
구원을 희망한 자들은
이방민족들의 전쟁 무기와
늘 비교되곤 했습니다.
역대하 20:15, 17을 보게 되면,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압과 암몬 자손의 연합군이
유다 나라를 침공했을 때,
여호사밧과 야하시엘 제사장이
고백한 신앙입니다.
여기서 ‘주의 이름’으로 승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당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보이고자 하시는 겁니다.
역대하 14:9-11에 보면,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방민족이 앞장 세우는
군사력과 강력한 무기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채택할 수 밖에 없는 사항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은
바로 이런 인간들의 전쟁방식은
‘주의 이름’으로 일하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서도 모세는 지팡이들고
산 위로 올라갑니다.
지팡이의 높낮이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됩니다.
이것은 바로 의도적으로
인간의 구원방식을 기피하시려는
‘주의 이름’의 구원방식입니다.
이 모든 능력의 원천은
어디서 나올까요?
바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 손으로 잡아죽이는 그 현장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즉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와 거룩과 믿음과 천국과 구원의 능력은
모두 ‘약속된 분’의 죽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 일을 인간을 통해서 실시하므로서
‘예수님 죽음’ 이라는 하나님의 일에
모든 인간이 관여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아버지마저 관여하십니다.
즉 ‘죽는 하나님’에서 나오는 의가
우리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뭔가 가지므로서
자신을 구원하려는 악마적 심보에 대항해서,
참으로 구원될 자는
더 이상 자기에게 신경쓰지 않고
‘주의 이름’만 의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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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강-눅19장 37절-40절(돌들의 소리)120219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9장 37절에서 40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29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9:37-40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 대목은 우리 보기에는 마치 우리 자신과 관련없는 일처럼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2천 년 전의 한때의 일처럼 우리 실생활과 연관 없다고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역에 가면 대구대학교 조감도가 있어요. 대구대학의 본부는 여기, 정문은 여기 이런 식으로 한 눈에 다 조감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요. 대구대학생 같으면 그 넓은 서울에서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 자기 대학의 조감도 있는 곳에 관심을 둔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자신이 대구대학의 학생이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이 자기 대학조감도에 대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한다든지 훼손을 하게 되면 대구대학 학생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자기와 관련되어 있으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행위 자체가 이 세상의 조감도를 만드는 행위에 착수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과 거기에 배치되어 있는 여러 무리들, 오늘 본문의 경우에 40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이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그 일을 대신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길가의 돌이 왜 거기 있는지 모르잖아요. 돌들, 암석들이 왜 거기 있을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것은 자연의 일부고 풍화작용이나 퇴적작용에 의해서 그렇다고 하지요.
진화론에 의하면 처음 지구가 형성될 때 마그마가 응결되어서 그렇다, 그렇게 밖에 못 본다는 말이지요. 과학자들이 기껏 그렇게 보는 거지요. 주님 뜻은 이거예요. 사람들이 어떠할지라도 이 예수, 나에 대해서 찬양할 자들이 인간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돌만 있어도 충분하게 나의 주되심을 찬양할 재료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사람들의 가치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영광 돌리고 찬양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이 땅에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돌이 왜 있는지 우리는 이유를 모르지만 돌들로도 주님 오심을 찬양할 수 있는 영역이 유입되면 충분하게 돌들로도 주님에게 찬양하고 영광 돌릴 수 있는 피조물들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서울역에 있는 대구대학교조감도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시 보게 하고 현실이 무엇이며 진짜로 세상이라는 것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이 조감도를 통해서 짧은 이 중심의 일을 통해서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예를 든 거처럼 대구대 학생이 서울역에 붙어 있는 자기 대학의 조감도를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는 것처럼 참으로 우리가 신자이며 주의 백성이고 천국에 합류할 사람 같으면 이렇게 예수님 중심으로 나타나는 사건과 사태에 대해서 그것을 나보다 더 중심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 있는 이 나, 나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중심인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일하는 그곳이 바로 진짜 세상의 중심입니다, 라고 동의하는 겁니다.
나를 건드려도 나는 가만있겠지만 우리 예수님 건드리면 나는 참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게 바로 돌이에요. 그게 바로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돌 같은 존재, 돌 같은 인간이 되는 겁니다. 성경 구절이 나오면 마치 옛날 전설의 고향의 이야기같은 지나간 에피소드처럼 그렇게 슬쩍 잊으려는 경향들이 있는데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 중심 아니고 내 중심으로 살다보니 예수님 중심 조감도 아니고 내 중심이 조감도를 만들고 펼쳐가기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타고나면서 그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기에 너나 나나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 38절에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라는 외침과 고백이 서슴없이 나온다는 것은 그들 자체의 능력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부터 유입된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지난주일 오전에 설교했듯이 나귀새끼가 임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쓰시겠다 할 때 서슴없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주의 유입된 힘이 그 상황을 만든 겁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힘은 어디서 유입된 겁니까? 혼자서 용쓰고 발악하고 ‘왜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냐.’고 주님 닦달내면서 나는 살려고 했는데 주님이 왜 평생 보탬이 안 되느냐고 짜증내고 원망하는 그것은 조감도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중심점이 예수님 중심인데 엉뚱하게 주의 힘이 아닌 죄의 힘에서 나온 엉뚱한 발상 때문에 내 중심의 조감도로 하니까 우리는 주님마저 원수로 하는 처지에 있지 않는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물론 인간들이 자기중심으로 생각한다는 이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어쩔 수없는 것인데 그런 가운데서도 이렇게 돌멩이 하나를 가지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그 현장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신 겁니다.39절에 보면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선생이여, 당신들의 제자들을 책망 좀 해달라고 했다고요. 누가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 점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돼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사람보고 도리어 ‘저들은 찬양의 대상조차 제대로 분간 못하는 무지막지한 인간들이다.’ 라고 하면서 ‘선생이 되었으면 제자들이 너무 오버하는 것에 대해서 무지 몽매한 백성들이 함부로 발설하는 것에 대해서 심하게 나무라야 된다.’고 바리새인중 몇이 예수님에게 요구를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의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세계가 따로 조감되어 있는 것이 있어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 오직 모든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만 받아야지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그만그만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들 눈에는 예수님이 한낱 주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의 스승이나 교주 혹은 보통 인간의 이름으로 보였다는 말이지요.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그들의 사명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야지 그 영광을 인간 쪽으로 돌리면 안 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화를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을 철떡 같이 믿고 있는 그들이 보니 예수님과 사람들이 그들 보기에 큰일 날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38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되어 있단 말이지요. 사람의 이름이라고 할 때 대통령 이름만 해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온다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하늘에 계셔야 될 하나님이 하늘에 안계시고 사람들 속에 합류하시는데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그 당사자가 당신입니다, 라는 그 이야기가 바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거예요. 제가 신학하면서 늘 느낀 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늘 위를 보고 ‘하나님은 위에 계시다.’고 그렇게 알고 있었거든요. 위에 계신 줄 알았는데 만약에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게 된다면 거리가 좁혀지게 된 거지요.
하늘에 거리를 멀리 두고 보다가 가까이 오게 된 경우입니다. 늘 먼 발치에서만 보던 연예인이 가까이 다가와서 악수라도 하게 된다면 일생일대에 영광으로 알겠지요. 일본 어느 백화점에 고객을 위한 최고의 상품이 뭐냐, 한국의 연예인과 악수하는 권리를 하나 줘요. 쉽게 해서 2백만원어치 물건 살 때 악수 한 번 할 수 있는 표를 한 장 주는 식인 거예요. 어떤 사람은 6백만원어치 상품 사는 거예요. 악수를 세 번 하기 위해서. 멀리 있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손으로 악수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목적과 이유가 한꺼번에 실현된 거잖아요.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보고 싶어 한다면 멀리 있는 하나님일경우에는 모호합니다. 그런데 가까이 오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인생에 대해서 따로 염려할 것이 일체 없게 됩니다. 인생이 망하든 곤두박질을 치든 거기에 대해서 일체 더 이상 염려할 문제는 남아 있지 않아요. 심 봤다 하는 것처럼 모호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지는 그 접점의 순간, 그 순간이 온다면 우리 입에서는 더 이상 자기 자랑이라든지 자기과시, 내가 이만큼 성공했다든지 나 이 만큼 똑똑하고 훌륭하다는 자기생각은 자진해서 접어버립니다.
자진해서 접고 주님 최고! 주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최고! 모든 세상은 주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나는 거기에 내 몸을 맡깁니다, 그것을 끝이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능력이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쏟아지는, 주의 이름에서 쏟아지는 그 관계에서 능력이 오는데 그 관계를 주님과 돌, 돌과 주님의 소통하는 능력이라는 겁니다. 주님과 나귀새끼, 이런 관계,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오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내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 보고 난 뒤에, 주님은 나의 구세주고 나의 모든 인생은 이제 염려할 것도 없고 내 문제는 다 해결되었고 내 모든 것은 그 분에게 맡겼고 나는 그 분의백성이고 그분은 나의 왕이다, 라는 관계가 수립된 것은 우리의 자생적인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돌일 경우에 주어지는 능력, 돌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돌보다 더 또라이같은 존재에요. 돌은 능력이 임하면 되는데 우리는 돌보다 더 괴물 같은 마귀에게 속한 존재이기에 주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가 솔직하게 고백할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 수준으로, 나 자신의 일생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 안할 정도로 주님에게 매료되고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찬양하는 그 자리에 그러한 신분, 입장이 된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 그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왔기에 우리 자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치 돌멩이가 입을 열어서 찬양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 돌멩이보고 ‘옛날부터 그랬어.’ 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냥 돌인데,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그냥 이리 저리 굴러다니는 돌에 불과한 거잖아요. 그냥 돌에 불과한데 주의 능력이 임하면 주를 찬양한다 그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다는 말이지요. 우리도 나만 생각하고 나 아픈 것은 손톱만큼만 건드려도 와락 성질내면서 달려들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자신인데 우리 자신의 터진 입을 통해서 ‘주님, 저는 더 이상 나는 생각 안 하렵니다. 주님 만난 것으로 족합니다. 나는 주님의 팬입니다.’ 이렇게 될 것같으면 이것은 보통 주의 능력이 임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으로 자기백성을 뽑아내기 위해서 평소에 그런 식으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바리새인은 따로 안정적인 권력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바리새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들어보고 우리 생각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일단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을 찾아온 적이 없다고 보는 겁니다. 예수라는 이단이 있었지만 그것은 가짜고 진짜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 땅에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없다면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뭐냐, 인간이 유일하게 실천에 옮길수 있는, 인간의 행함, 인간 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 종교적인 수완과 방법을 이 지상의 사람들의 한 생각으로 뭉치는 겁니다.
제 이야기 잘 들어야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의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계모임 하듯이 모으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드릴 돈 따로 있고 내 쓸 돈 따로 있는데 하나님께 드릴돈은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지요,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따로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 나머지 10의 아홉은 십의 1을 드렸다는 그 마음 때문에 마음껏 써도 된다는 거지요. 그렇게 계약했다는 겁니다. 우선 몇 가지를 해야 되는데 우선 하나님의 그 구원하심에 대해서 믿어야 되고 그 다음에 믿는사람 답게 행함을 추가해줘야 돼요.
그 행함을 추가하되 그 행함에 미진하다 싶으면 회개하고 다시 한 번 행함을 추가해서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고 집단을 형성하는데 그 형성된 집단에는 질서가 있어야 되는데 질서를 위해서는 권력이 있어야 돼요. 사람들의 질서를 잡아주는 안정적인 권력공동체가 있으면 거기서 하늘과 거래하고 협약을 맺는 식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겁니다. 가만 바리새인들 소리를 들어보면 뭐가 빠졌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요소는 다 빠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 오셔도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고상한 것과 거룩스러운 것은 다 끄집어내는 거지요. 착한 것이라고 불리우는 것들, 아름답다 하는 것들 다 끄집어냅니다. 최고의 음악, 최고의 건축, 최고의 미술, 재주들을 다 끌어내서 모아놓으면 하나님께서 가상하다고 그 사람들만 데리러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인간들 속에서 누가누가 더 잘하나, 누가 더 선한가, 그것만 남는 거지요. 그 작업을 바리새인들이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해 온 겁니다. 사람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기껏 그 정도가 한계에요.
돌멩이가 입을 열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자기 자신이 돌이라는 신분을 잊고 그저 주의 이름을 찬양한다는 이것이 돌멩이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부터의 목적이었다는 예수님의 뜻은 여기에 없어요. 없고 그저 어떻게 그것을 학습과 노력에 의해서 끄집어내는가에 몰두하는 것, 그렇게 하려면 누군가 방법과 지식과 계략을 이야기해야 되고 그 지식을 되풀이해서 모방하고 흉내 내서 영광 돌리는 집단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반길 것이고 영접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생각입니다. 일종의 민주주의지요. 인격적인 대우, 인간들끼리의 생각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침투를 해서 뭐라고 이야기하셨는지를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미리 당부합니다만 그들은 뭐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이 지상의 인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그 논조에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섞어보면 이것이 얼마나 큰 충돌이 일어나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이 만약 하나님과 동등이라면 구태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하늘만 쳐다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 찾기 위해서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은 무엇을 거부하는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보낸 이 지상에 오신 하나님을 외면할 경우에만 하나님을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냐, 자기하고 하나님하고 그야말로 동등 되고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일을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이 보고 싶으냐? 아들 보고 하나님 봐라. 만약 아들을 안 본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애초에 있지도 않은 하나님이다.’ 그런 뜻이라는 말입니다.
아들을 통해서만 모든 일을 하는데 왜 자꾸 눈앞에 가까이 있는 아들 말씀은 안 듣고 자꾸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만 쳐다보느냐 이 말이지요. 마귀가 그 짓 했고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말입니다. 마귀는 알고 있거든요. 진짜 하나님은 이 땅에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그 하나님으로만, 진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서만 일한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느냐, 마귀는 알고 있는데 인간은 모르고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 하는 일이 아버지 일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할 것은 뭐냐, 우리가 일을 해서 영광 돌리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일하셔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 일에 동참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 라고 믿는 겁니다.
평소에 내가 하는 일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었고 예수님 하시는 일이 유일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그것이 나에게 도달하고 유입된 예수님의 일의 연장이라 그 말입니다. 아, 세상에 이렇게 친절해도!!! 내가 생각해도 친절해요.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할 때에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했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포기하라, 그 말입니다.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결국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한 건수 할 수 있습니다.’ 자기 행함을 유지할 수 있는 가짜 하나님인 반면 우리 눈앞에 등장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위한 돌멩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라고 수용하는 것이 된다 그 말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무슨 짓을 하지, 라고 돌아볼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그저 내가 못한 것을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 하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양하면 그것이 한 평생 진짜배기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본인이 모든 일을 아들에게만 일임했어요. 다 끝난 일입니다. 우리가 뭘 하고 싶어서 환장해도 좀 참으세요. 그것 접으세요. 하나님께서는 아들만을 통해서,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우리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아버지와 아들 둘 사이에서만 일을 끝내고 우리는 그저 무상으로 나중에 성령, 아들의 영이 오게 되면 그냥 구경삼아 ‘아, 이런 일이 있었네. 이걸 몰랐네.’ 하고 참여하게 되고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죄인의 이름으로.
구약에서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이것을 뭐라고 오해했느냐하면 자신들이 행할 수 있는 행함 가운데서 어떤 문장 하나를 외우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라는 문장을 외우면 그것이 주의 이름인줄 알고 있어요. 예수 이름으로라고 갖다 붙이면 그것으로 기도응답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나무아미타불 주문 외우듯이 주문을 천번 만번 외우게 되면 신비한 효과가 있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것이 인간들이 하는 전부에요. 인간들이 하는 것이 그것밖에 더 됩니까? 바리새인들은 여호와 이름을 부름으로써 나같이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다 모이라고 해놓고는 그것으로 집단을 유지해서 권력단체화해서 그 안에서 안정권을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미 종교적인 힘으로 하나의 권력화된 그것이 국가정체성이니까, 그 국가의 권력이 거기서 나오니까 무서워하지요.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모인 그 단체가 힘 꽤나 쓴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예수여, 제자들이 망발을 하고 있는데 그냥 두고 보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안정적인 힘과 권위와 권력이 있어서 우리 말 안들으면 어떤 손해를 당할지 모르니까 주의를 주세요. 주의 이름으로 책망하는 우리의 힘이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이런 것 가지고 평소에 사람들을 압박해 왔다는 말이지요.
오늘날 기존 교인들이 교회를 어떤 권력, 안정적인 권력단체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가면 로마법 지켜야 된다고 하듯이 교회 오면 교회 법 지켜서 뭔가 정신적인 안정을 얻으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믿음은 없고 선배들 흉내만 내는 거예요. 비로소 교회에서 바른 복음 이야기하면 뭐라고 합니까? ‘네가 누구 믿고 그런 소리 하느냐.’고 하지요. 저희들은 이미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인데 믿는 구석이 뭐냐, 교회법이고 교회 질서고 교회 권위고, 이것이 그들이 믿는 구석인데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니까요.
그런데 언제 돌멩이가 교회 법 지켰습니까? 돌멩이는 주의 능력이 임하면 주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나라가 돌멩이까지 관리하고 있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할 때 구약부터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 보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성경 거의 안보지 싶어요. 시편 54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하지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너희는 군사의 힘 또는 말의 힘이나 그런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이 등장하는 그 시점에서 세상 사람들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권력의 힘과 대비시키느냐 하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할 때에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을 때 무엇의 힘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감 잡아야 돼요. 기존의 우리는 바리새인의, 인간의 모임에서 구성된 힘, 국가의 힘이지요, 그것을 우리의 생활의 안정적인 방패막이로 삼는 것이 평소에 버릇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부자가 돈의 힘을 의지하듯이 우리가 평소에 인간적으로 의지할 만한 것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돌멩이는 안 그렇다 그 말입니다.
돌멩이는 있는 그대로의 돌멩이에요. 그리고 그 있는 그대로의 돌멩이는 주의 능력이 임하면 오직 내가 있는 그 자체도 주의 이름으로, 바로 아들 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찬양한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구약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가 있는데 여러 가지 역사가운데서 여호사밧이라는 왕이 있어요. 그 왕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 암몬과 모압의 연합군이 쳐들어옵니다. 그때 여호사밧이 뭐라고 하느냐, 역대하 20장 12절에서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호와의 신이 야하시엘이라는 제사장에게 임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번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합니다. 17절에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고 하지요. 그러면 뭘 하느냐, 지금 모압과 암몬 연합군과의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뭘 이야기하려고 하느냐하면, 이스라엘은 항상 자기가 돌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리고 ‘모압과 암몬의 막대한 군대가 쳐들어온다 할찌라도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지 너희에게 속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 너희들이 나서서 처리할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싸울 것이 없고 뭐하느냐, 그냥 찬양하는 거예요.
찬양이라는 것은 언제 하느냐하면 이미 모든 전쟁이 완료된 후에나 할 수 있는 것이 찬양이거든요. 야구나 축구나 기분 좋아서 신나할 때가 언제입니까? 다 게임이 끝났을 때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 이렇게 되잖아요. 처음에는 파이팅, 파이팅, 이렇게 하지만 끝나면 이겼다, 이겼다, 하잖아요. 이겼다는 그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그럴 때 모압과 암몬 군대는 엄청나게 패배합니다. 역대하 20장 25절에 “여호사밧과 그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취할쌔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는 고로 각기 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취하고.”라고 합니다.
이것이 여호사밧 왕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역대하 14장에 보면 아사왕이 나오는데 구스는 지금의 이디오피아이지요. 구스의 어떤 장군이 나와요. 9절에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 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군대 백만이라고 하니 중공군 생각나지요. 그 때에 아사가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11절에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의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구약에서 사나이답게 칼이면 칼, 이렇게 붙어야 되는데 맨 날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거예요.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나오지요. 아말렉이 쳐들어왔을 때 모세가 하는 일이 뭡니까? 모세가 적진에 가서 설쳐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산위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들었는데 지팡이가 내려오면 산 밑에서 전쟁하는 여호수아가 지고 지팡이가 올라가면 여호수아가 이기고 그렇게 하지요. 얼마나 특이합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서만 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을 이 세상에 완전히 깔아 놓았어요.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이 세상 속에 자기 아들, 주의 이름을 보냄으로 말미암아 평소에 인간들이 어디에 종속되어서 어떤 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수하고 지키려고 하는지 그것을 까발리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특수한 나라, 특수한 집단, 특수한 백성들 주의 이름만 의지하는 사람을 그때 그때마다 발생시킨 거예요. 붙어라 누가 이기는지, 그리고 진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한 번 붙어보라는 거지요. 인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이기는지,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이기는지 한 번 보라는 말이지요.
제가 방금 유다의 아사왕과 여호사밧 왕을 예로 들었는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사왕 참 훌륭하고 여호사밧 참 믿음좋고……, 믿음은 저래야 돼. 그러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 하는 자체가 내가 보기에 굉장히 수상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는데 마치 여호사밧이나 아사가 주의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을 몰아가는 것은 인간에게서 주의 일이 나올수 있다고 자꾸 우기는 거예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아사와 여호사밧의 말년을 여호와를 버리는 말년으로 만들어요.
이 세상에 주님 같은 분은 주님밖에 없도록, 어떤 인간도 주님 같은 인간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사밧이나 아사나 젊을 때 주의 이름 의지했지만 주님 주신 계획을 감당하고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육의 층이에요. 믿는 것 같지만 결국 본성으로 돌아오는 이것이 육의 층에서 일어나는 육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성령이 임한 사람은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하다는 뜻이 그런 뜻이에요. 이것은 성령이 임해야 되는데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힘으로 한때 주님 의지한다는 식으로 효과를 봐도 얼마 안가면 다시 본색 돌아옵니다. ‘역시 나는 주의 일을 했어. 나는 잘났어.’ 이렇게 된다 그 말입니다.
엘리야도 예레미야도 다 마찬가지여서 어떤 인간도 신앙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기껏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돋보이고 싶어하고 자기자신을 구축하고 싶은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 인간 이것 참 문제 큽니다. 자꾸 예수 그리스도 하는 일을 방해하고 나도 따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독자적으로 내세우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기도하니까 땅 값이 올라서 뭐가 어쨌다고 하는 등, 그런 것은 굉장히 수상해요.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이렇게 코가 있는데 사람은 코가 있다고 하지 않고 나는 코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눈이 있다고 보지 않고 눈을 갖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사람은 뭘 갖고 있을 때만 자기 것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갖고 있다, 예수님을 갖고 있다, 나에게 예수님이 있다, 이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갖고 있다. 나에게 하나님이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갖고 있다. 나에게 성령이 계시다가 아니라 성령을 갖고 있다. 자꾸 자기를 주체, 주인공으로 삼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 말이지요. 왜 그래야 됩니까? 그래야 남이 못하고 나만 따로 할 수 있는 행함을 자기행함이라고 추스를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마귀적입니다. 기어이 찬양을 자기찬양으로 돌리기 위한 악마의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거든요. 모든 믿는 사람의 모델, 조상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돌멩이를 통해서, 그냥 돌멩이로 합시다, 아브라함돌멩이를 통해서 믿음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보여줍니다. 믿음이 어디서 나오는가, 단지 아들이 죽는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들을 죽이는 거기에 합류하면서 믿음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죽었다’가 아니라 이삭을 네가 잡아라, 하지요. 네 아들 이삭을 네 손으로 죽이라, 그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이삭이라는 아들의 죽음에 이삭도 죽게 되고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는 자리에 가담하게 되는 겁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런 네 자를 반복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믿음은 내용이 있어야 돼요. 믿습니다, 그것 자체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믿습니다!’ ‘뭘?’ 그러면 말도 못하고. 믿습니다, 여기에 연거푸 믿습니다를 집어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초코렛 선물을 받았는데 그 안에 초코렛이라고 쓰여 있는 글자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초코렛이 아니라 그냥 글자일 뿐이지요. 믿습니다, 이걸 잔뜩 모아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 아니고 내용이 있어야 돼요.
그 믿음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내용이 뭐냐, 아버지로서 아들의 죽음이고 그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는 자로 가담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아버지든 아들이든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에 모두 다 가담하는 거예요. 그 죽음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죽음의 가해자로서 거기에 끼어들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인 분으로 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우리 손으로 예수님을 죽게 만들어서 모든 인간과 모든 천사와 그리고 하나님 자신마저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 천국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믿음 소망 사랑이 나오는데 우리는 멀쩡하게 ‘내가 살아 있다.’ 이렇게 간주해서 살아 있는 내가 무슨 솜씨를 부릴 것인가, 이런 내 살아 있음을 근거로 가지고 믿음 소망 사랑을 다 튀어나오게 하려고 하니까 이것이 바로 악마가 마지막 저항하면서 발악하는 모습입니다. 악마는 자기가 이미 심판받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심판받기는 싫어해요. 버티는 겁니다. 피조물로서 버티는 그 마지막 최고의 솜씨와 재주는 마귀가 다 갖고 있어요. 이렇게 버티면 버틸 때까지 다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마귀가 다 보여주는 겁니다. ‘살아 있으면서 잘할게요.’ 이것은 마귀의 음성입니다. ‘네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합류해버리면 너는 더 이상 독자적으로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새롭게 이 땅에 태어났어야 했으며 만들어져야 했으며 인간으로 살아야 된다.’는 사실을, 예수그리스도와 연계해서 아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의 나라와 싸움할 때에, 주의 이름으로 나가는데 그때에 언약궤를 들고 나갑니다. 언약궤라 하는 것은 피가 묻혀 있어요. 그 피가 뭐냐,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이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 피를 앞장세워서 이 피 흘린 이것으로 인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거룩과 의가 이 피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방민족들은 언약궤가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도 없습니다. 기껏 나오는 것은 자기들의 거룩적인 힘, 자기들끼리 모은 인간적인 힘의 뭉치, 안정적인 결합력, 단결력, 결심, 오기, 고집, 자존심들, 그런 것들만 잔뜩 뭉쳐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도 아니고 소망도 믿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방해하는 이유가 교회가 바리새인처럼 인간적인 힘들을 모아놓고 그것을 거룩이라고 그것을 하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자꾸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주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기 교회 집단의 이름, 교회의 명예, 자기 자신의 명예, 자기가 소속된 단체의 명예인 동시에 거기에 소속된 나 자신의 자존심, 그동안 행한 것, 주의 일 한 것, 하나님의 일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 그런 것을 폐기처분 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계속해서 관심 갖고 집착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날 현대 바리새인입니다. ‘선생이여 책망하소서. 저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될 영광을 우리보기에 인간으로밖에 안 보이는 저 사람에게 다 돌립니까?’라고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만 섬깁니다.’ 하나님만 섬긴다는 이 말이 마귀의 말일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만 섬겼던 욥의 친구들이 마귀에 속한 존재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입만 열면 하나님의 영광인데. ‘우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죄를 다스리자, 하는 것은 마귀들의 생각이고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밖에 없는 곤고한 존재인 것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 이 노출의 힘, ‘나는 내 고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노출시키는 그 힘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너를 구원하는 의고 주의 이름으로 된 의고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에게서 유입된 구원의 능력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 그 말은 뭡니까? 더 이상 ‘내 행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 안하겠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잘해도 죄고 못해도 죄인데 그것을 가지고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잖아요. 그것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다 그 말이지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다 되었습니다. 나는 돌멩이에 불과하고 세상에, 나는 돌멩이에 불과한 것을 알게 해주시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입을 벌려서 ‘주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마감시킬 것이고 완수할 것입니다.’ 라는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