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경주의 중심,
제헌절, 경주 근현대사를 찾아서.
월성중학교 3학년 3반 김민욱
제헌절을 사흘 남긴 일요일, 날씨는 조금 흐린 게 작년과 많이 비슷하다. 작년에 카메라가 고장 나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답사도 어중간하게 한 기분이 있어 다시 답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생각으로 페달을 밟는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제헌절 답사답게 법원으로 향한다. 경주 시내 안에 있는 법원은 상자형 건물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다. 현재의 법은 여기서 맡는다. 그렇다면 과거, 조선시대에는 어디서 재판과 집행을 맡았을까? 그곳으로 향한다.
(경주 법원.)
법원에서 한 블록 지나 소방서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여기가 예전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 동네는 아직 오래된 건물이 많이 남아있어서 앞에 있는 시내와 많이 대조된다. 거기서 조금 더 가자 '경주 문화원'이란 건물이 보인다. 문을 지나면 고즈넉한 건물과 늠름한 나무 두 그루와 몇몇 전각이 보인다. 여기는 옛날 경주 관아이다. 정확히 말하면 원님의 집무실인 내아다. 내아는 박물관으로 이용되면서 살아남았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꽤 눈에 띄는 건물인데 아직도 여기가 관아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한다. 현재 내아는 향토사료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경주 문화원 입구.)
(경주 문화원 안.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향토사료관으로 이용되는 옛 관아 내아다.)
향토사료관은 한 할아버지께서 지키고 계셨다. 작년에 왔을 때는 한 아주머니께서 계셨다. 구조는 별로 바뀐 것 같지 않다. 다만, 흉폭하기로 유명한 데라우치 총독이 직접 쓴 현판은 박물관 특별전 때문에 지금은 없었다. 내아 안에는 고사료와 경주읍성 모형, 비격진천뢰, 임진왜란 때 경주성 탈환전투에 대해 설명한 글이 있었다. 작지만, 이곳을 알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경주읍성 모형. 한 변의 길이는 약 600m로 그렇게 크지는 않다.)
(향토사료관 안.)
(비격진천뢰 모형.)
향토사료관 밖에는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와 구스타프 아돌프 스웨덴 황태자가 심은 전나무(구상나무라고도 하지만 확실한 건 모름.)가 있고 봉선화가 수줍은 듯 피어나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옮겨온 양무당, 옛날 성덕대왕신종이 걸려 있었던 종각 등이 남아있다. 경주하면 으레 신라 천년고도란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여기만큼은 조선시대 대도시였던 경주부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준다. 안내해주시고 도움 주셨던 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조용히 나온다.
(내아 앞 전나무. 일제강점기,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가 와서 심은 것이다.)
(은행나무. 수령은 약 500년이다. 이 관아의 내력을 말해준다.)
(지금 박물관으로 이전되기 전, 성덕대왕신종이 걸려 있었던 종각.)
다음으로 간 곳은 경주 경찰서. 현재 경주의 치안을 담당하는 곳이다. 이 서 안에는 멋진 석조물이 놓여있다. 탑신 일부가 정원에 있는데 미소가 거의 신라의 미소 급이다. 정말 아름답다. 경주는 관공서 건물이나 오래된 고택에 가면 곡 이런 보물들이 하나씩 숨이었다. 이런 걸 찾아 답사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경주 경찰서.)
(경찰서 내 석조물. 꽤 준수한 조각품이 정원에 서있다.)
(경찰서 앞 무궁화.)
그다음 장소는 옛 경주 교육청. 지금은 교육 삼락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여기 정원에도 여러 석조물이 꽤 있다. 그렇지만, 이게 목적은 아니고 이 건물 뒷길로 들어가면 묘하게 생긴 기와집이 나타난다. 여기는 경주 동경관으로 옛날 사신이나 귀빈을 접대하고 머무르게 하던 곳이다. 하지만 건물을 보면 단번에 어색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왼쪽은 맞배지붕인데 오른쪽은 팔작지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긴 이유는 원래 이 옆에 두 채의 건물이 더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두 건물은 없어지고 이 건물만 어정쩡하게 남은 것이다. 나중에 복원했으면 좋겠다.
(옛 경주 교육청. 지금은 경주 교육 삼락회로 쓰이고 있다.)
(삼락회 내 석조물들.)
(경주 동경관. 어색하게 양쪽 지붕 모양이 다르다.)
(원래 동경관 모습. 상당히 큰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옛 경주 교육청 옆으로 가면 조금 특이한 건물이 보인다. 신식 건물은 맞는데 분명 주변과 딱히 어울리지 않는 옛날 건물. 화랑 교육원이란 간판이 달린 묘한 서양식 건물은 경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야마구치 병원' 건물이다. 여기 야마구치 병원에 얽힌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당시 병원 원장이었던 '다나카 다카노부'는 경주읍성 내의 고물상으로부터 특이한 기와를 샀다. 사람이 살포시 웃고 있는 모양의 기와였는데 바로 이것이 지금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얼굴 무늬 수막새'다. 워낙에 특이해서 신문에도 실렸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 후 이 의사는 수막새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고 점점 잊혀 갔다. 하지만 박물관 관장이던 박일훈 관장은 이 유물을 찾기 위해 수소문한 끝에 기타큐슈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다카노부를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가 그 수막새를 그대로 갖고 있었고 평소 친분이 있던 '오사카 긴타로'를 통해 그를 설득했고 결국,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신라의 미소는 다시 경주에 와서 웃음 짓게 된 것이다. 조사를 따르면 이 수막새는 영묘사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흔쾌히 귀중한 유물을 기증한 다나카 다카노부와 미소를 찾기 위해 노력하신 박일훈 관장님께 감사인사를 드린다.
(구 야마구치 병원. 경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병원 앞 거리 끝에는 방사선 폐기물 관리공단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경주여중이 있던 자리로 더 오래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관료의 자제들만 다니던 소학교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이곳에 도착하자 갑자기 비가 내린다. 일단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린다. 한 20분 정도 지나자 비가 어느 정도 그쳤다. 그리고 천천히 앞에 조성된 정원을 거닌다. 자세히 보면 여러 유물이 존재한다. 먼저 예전 집경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정조 친필의 비석, 집경전구기비, 그리고 그 전각 앞에 세워져 있었던 하마비가 있다. 이 옆에는 집경전을 추측되는 돌건물이 세워져 있다. 집경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훼손되지 않도록 강원도로 피신했는데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경주 유지들이 돌아오라고 항의했고 위에서는 한 번 옮긴 것은 다시 옮기기 힘들다며 대신 집경전구기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실제 하마비 뒤로 건물 주춧돌로 보이는 석조물이 서 있다. 일부에서는 성문, 주전지 등으로 해석하기도 해서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확실하게 단정 짓기는 힘들다.
(구 경주여중. 현재는 경주 방사선 폐기물 관리공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집경전구기비. 이래 봬도 정조 친필이다.)
(하마비.)
(전각 터로 추측되는 주춧돌.)
(동경이. 여기서도 키우나 보다. 뒤의 개는 계속 죽은 새를 먹겠다며 씨름 중이다.)
(집경전지(주전지). 천장을 보면 당간지주 하나가 사용되어 있다.)
잠시 점심을 먹고 다시 돌아온다. 다음에 갈 곳은 '구 서경사'인데 잘 찾지를 못해서 조금 헤매다가 발견했다. 이 건물 역시 무척 특이하다. 바로 일반적인 절이 아닌 일본식 건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여기는 일본의 조동종이라는 불교 종파가 포교를 위해 세운 것이다. 후에 일본 패망 후 여러 용도로 쓰여 오다가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야마구치 병원도 그렇고 이 일대에는 일제강점기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일본식 사찰인 '구 서경사'.)
여기서 큰길을 지나 조금 다른 곳을 더 달린다. 얼마 가지 않아 집들에 둘러싸인 텃밭에 멈춘다. 지금은 별거 없는 곳이지만, 원래 여기는 경주 대표 문학가이자 우리나라 문학계의 거장이신 '김동리'선생의 생가터다. 김동리 선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무녀도'다. 경주 금장대를 배경으로 한 무녀도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우리나라 소설계의 최고 명작으로 꼽힌다. 안타깝게도 여기 있던 생가는 없어지고 세 집에 의해 나누어졌다. 경주시에서 이곳을 사서 김동리 문학관을 세우려 했으나 여기 주민분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최근 박목월 선생의 생가는 복원 중이라고 하던데 잘 되었으면 좋겠다.
(동리 생가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강진의 김영랑 생가처럼 복원되었으면 좋겠다.)
동리 생가에서 다시 큰길로 나와 명사마을로 향한다. 푸르지오나 현진, 이안같은 아파트가 생기기 전에는 경주에서 가장 좋기로 소문난 고급아파트였다. 그런데 여기가 옛날 조선시대 감옥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이곳은 원래 옥사가 있던 자리로 천주교 박해를 당한 신도들이 많이 잡혀 오곤 했다. 후에 문화중, 고등학교가 세워지고 다시 학교를 옮기면서 옥사터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원래는 여기다가 선간판을 세우려다가 주민들 반대로 무산되었다. 상당수는 거의 모르고 관리소 아저씨께서는 어렴풋이 아시는 듯했다. 옥사 터 위에 세워진 고급 아파트, 뭔가 묘하다.
(명사마을 입구.)
(명사마을 일대. 아파트는 낮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인다.)
(옥사 터로 추정되는 곳. 지금은 지압판을 만들어 공원처럼 꾸며놓았다.)
마지막으로 찾아갈 곳은 이 구시가지를 있게 해준 경주읍성이다. 한 변의 길이가 약 600m 정도 되는 경주읍성은 일제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남아있었으나 시가지 정비를 구실로 길을 내고 헐어 가버리는 바람에 없어졌다. 지금은 90m정도 구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경주시에서는 예산을 들어 일부 구간을 복원한다고 한다. 복원이 잘 되어 낙안읍성이나 해미읍성 같은 읍성이 되길 바란다.
(경주읍성. 현재 복원이 진행 중이다.)
(다른 성벽 쪽. 이렇게만 복원되었으면 좋겠다.)
답사를 마치고 박물관에 잠시 들른다. 데라우치 총독이 직접 쓴 현판을 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언제 와도 이곳 답사는 재미있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신라 유적에만 투자하지 말고 이런 조선시대나 근현대사에도 많은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시대 경주의 중심지, 구시가지 일대. 과거를 보면 현재를 알 수 있고 현재를 보면 미래를 볼 수 있다. 이 말이 가장 떠오르는 곳이었다.
-여정- (2013. 7. 14. 日)
경주 법원→ 경주 문화원(구 경주 관청 내아) → 경주 경찰서→ 경주 교육삼락회(구 경주 교육청)→ 동경관 → 화랑교육원(구 야마구치 병원)→ 경주 방사선 폐기물 관리공단(구 경주여중)→ 집경전구기비→ 하마비→ 주전지(집경전지)→ 구 서경사→ 동리 생가터→ 명사마을(옥사터)→ 경주읍성
새롭게 펼쳐라!
羅新
첫댓글 사진이 이상한 건 추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정 완료! 이제 잘 보이십니까?)
그래 왠지 사진이 한장도 안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