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미녀 2. 이튿날 오후, 윤형사는 산뜻한 외출복을 입고 어깨에 흰색 핸드백을 걸치고 유여사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권의원은 임시국회에 나가 있었다. 응접실은 에어콘이 작동되고 있어서 시원ㅎ다. 윤형사는 대문에서 응접실로 걸어들어오는 동안 정원의 흙을 살펴보았지만 객토를 한 흔적은 발견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지가 2백 평이 넘는 큰 집을 한눈에 조사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상황을 봐가면서 집 주위를 거닐어 볼 생각이었다. "정원이 참 잘 가꾸어져있군요." 윤형사는 들고온 수박 한 통을 유여사에게 주면서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정원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연못에도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고요......" 윤형사는 부러운 듯한 시선으로 정원을 한번 휙 훑어보고는 화채를 들고 들어오는 가정부를 의식하면서 유여사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나요?" 유여사는 화채와 쥬스를 윤형사 앞에 똑바로 놓아주면서 근심섞인 얼굴로 물었다. "성주라양의 실종이 겹치는 바람에 시일이 좀 걸리고 있어요. 그렇지만 곧 범인이 잡히겠지요." 윤형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화채를 두 숟가락 떠먹었다. "화채가 참 시원하네요." 윤형사는 두 숟가락 더 떠먹고는 입에 든 수박씨를 손바닥으로 받쳐서 뱉아내고 손수건으로 입술을 살짝 훔쳤다. "처음부터 여사님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긴 좀 그런데요......." 윤형사는 일부러 말에 뜸을 들였다. 그러자 유여사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라고 윤형사의 마음을 신경써주었다. "회장님도 별장에서 느끼셨겠지만, 독살당한 보혜양의 옆자리에 앉아 계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셨는데, 지금의 상황은 더욱 불리하게 되셨어요." 윤형사는 진실한 목소리와 안타까운 눈빛으로 유여사를 바라보았다. 비록 계산된 태도였지만 유여사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의심을 받을만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요. 런데 더욱 불리해졌다는건 무슨 뜻이지요?" "그래서 회장님에게 질문을 드리는거니까 오해없으시기 바래요." "물론이예요." 유여사는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인품이 고결하다는 인상마저 느껴지는 그런 품위있는 태도였다. "윤보혜양이 여비서로부터 칵테일 잔을 받고 최초로 마시는 것을 보셨는지요?" "칵테일을 마시고 쓰러지기 전에요?" "네, 그때는 칵테일이 반 가량 남았었지요." "그랬던가요?" 유여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하기로는...... 보혜양이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만은 생각나는데...... 같이 앉아있던 김아나운서님과 나비향양이 춤을 추러 나가고 나서 혼자 있기가 뭣해서 테이블을 옮겼거든요." "그때 칵테일 잔은 한 잔만 들고 옮기셨나요?" "여러 번 수사관들에게 한 얘기지만, 그때 마침 연박사님이 잔을 비웠기 때문에 내 잔과 함께 양손에 두 잔을 들고 윤보혜양 옆 의자에 앉았지요.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잔을 내 앞에 놓고......, 아니지, 아니군요. 내 칵테일 잔을 연박사님에게 줬는지 나비향 잔을 줬는지 기억을 못하겠군요. 양손에 들고 있어서 누구거라는 개념이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렸나봐요. 그전까지 나는 내 칵테일 잔에 입을 대지 않았으니까요." "나비향양의 칵테일 잔도 마찬가지였나요?" "그럼요. 나비향양도 입 한번 대지 않았어요. 김아나운서님이 춤을 청했기에 마실 시간이 없었던 거였죠. 그게 전부예요." "그럼 나비향양의 잔은 회장님의 의사대로 들고 오신건가요?" "내 의사대로라니요? 아, 연박사님이 칵테일을 찾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어요. 그런데 내 쪽 테이블에 있는 칵테일을 보고는 그 칵테일 좀 집어달라고 부탁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두 잔의 칵테일을 들고 테이블을 옮기게 된 거예요." "아, 네...... 그럼 그때까지는 보혜양이 칵테일을 마셨는지 그대로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시겠군요." "글쎄요. 내가 테이블을 옮겨와 보혜양 옆에 앉았을 때는 칵테일 잔이 조금 비어있는 걸로 생각되었어요. 왜냐하면 연박사님이 칵테일을 찾을 때 보혜양이 지기 칵테일을 양보할 수도 있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거든요. 아마 자기가 반쯤 마신 칵테일 잔을 연박사님에게 준다는 건 대단한 실례였기 때문에 모른 척 하고 있었기 않았나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러면 연박사님이 처음 마신 빈 잔은 그때까지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겠네요?" "그렇죠. 그렇지만 난 춤을 추고 있는 홀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잔이 없어진 걸 몰랐어요." "회장님 말씀대로라면 잔을 치운 사람은 연박사님이겠군요?" "연박사님이요?" 유여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긴 한데......, 연, 연박사님이 빈 잔을 뭣하러 치웠을까요? 그대로 놔두면 여비서가 어련히 알아서 치웠을라고요." 윤형사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회장님이 치우시지 않으셨다면 연박사님밖에 치울 사람이 없는데, 그 전에 테이블로 다가온 사람은 없었죠?" "없었어요. 올 사람이 없었죠." "그때 여비서는 주방에 있었을까요?" "아마 주방에 있었을거예요. 확인하건데 보혜양이 칵테일을 마시고 쓰러지기 전까지 테이블에 있었던 사람은 나와 연박사님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뭐가요?" 윤형사는 의도적으로 크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 경찰에서 병원장실로 연박사님을 찾아뵙고 그날의 사정을 청취했는데 회장님의 말씀과 상치되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네요." "그래요?" 유여사는 불쾌한 기색으로 윤형사를 보았다. "연박사님은 회장님이 들고오셨다고 하더군요. 집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연박사님이 그래요?" 유여사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연박사님이 착각하셨을거예요. 그날 분명히 나한테 그 칵테일 좀 달라고 해서 내가 집어다주었어요." "그리고 연박사님 말씀은 회장님이 양손에 칵테일을 들고 오신 건 사실인데, 한 잔은 반잔이 든 칵테일이었고 다른 손에 들린 칵테일은 처음 그대로 잔이 채워져 있었다고 진술할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유여사는 궤변이란 듯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누가 착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분명히 테이블을 옮기기 전까지 잔에다 입 한번 갖다대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연박사님과 대질심문인가 뭔가를 해봐야겠어요. 이러다가 내가 누명을 쓰는거나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런 말 하는 건 도리에 벗어나는 일 같지만 잔을 숨긴건 연박사 말고 그 누가 있겠어요. 이건 한 살짜리도 눈치챌 만한 일이지요. 안 그래요, 윤형사?" 유여사는 어느새 침착함을 잃고 궁지에 몰린 쥐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윤형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간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안위부터 생각한다는 이기주의적인 심리가 그대로 들어맞고 있었다. 그녀가 타인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염려해서 품위를 되찾기 전데 "테이블의 비밀"을 밝혀낼 필요성이 있었다. "사실은 저도 회장님과 같은 생각이예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진술이 다른 점은, 연박사님은 자기 앞에 놓인 빈 잔이 보혜양이 쓰러지기 직전에 없어졌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고 했어요. 그때는 단순히 누가 치운 걸로 알고 있었는데 후에 테이블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정신이 멍해지더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연박사 말은 내가 감췄다는 얘긴가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구한테 죄를 뒤집어 씌울려고 그래.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속이 시커먼 사람이군." 유여사는 쥬스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거친 숨을 훅 내뿜으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연박사님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나요?" "알고 지내긴요. 강여사와 내가 녹미회 회원인 것이 오늘날 이런 악연이 된 거지요." "의원님과는 중매결혼하셨나요?" "그렇게 됐어요." 유여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건 실례가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의원님과 강여사는 결혼 전에 가까운 사이였다는 소문이 있던데......" 윤형사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 유여사의 눈치를 살폈다. 순간적으로 유여사의 눈빛에서 질투심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모르지만 모르는 사이는 아니였어요. 내가 알기론 결혼까지 오고 갔다는 말도 있지만 직업상의 관계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유여사는 가늘게 떨리고 있는 눈꺼풀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본래의 품위있는 자세로 돌아오려는양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앉은 자세를 고쳤다. "혹시 회장님한테 누군가가 협박같은 거 해오지 않았습니까?" "협박이요? 나한테 왜 그런 전화가 옵니까?" 유여사는 오히려 반문하듯 말했다. "아, 아니예요. 혹시 장난 전화 같은게 오지 않았나 해서요." 윤형사는 말꼬리를 돌리면서 보일듯 말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집이 참 시원하고 크네요." 윤형사는 부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회장님, 제가 질문드렸던 건 신경쓰지 마세요. 다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거든요." "참, 그래도 그렇지요. 연박사 그 사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하네요. 마치 내가 잔을 훔친 것처럼 뒤집어 띄우다니, 허, 참......" 유여사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뭐, 연박사님이 착각하셨겠지요. 정말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오해도 다 풀렸는데요, 뭐. 그건 그렇고 이 집 꽤 비싸겠지요? 아마 저는 죽을 때까지 이런 집에서 잠 한번 자보지 못할 거예요." "......집이 큰 대신 그만큼 불편한 것도 많아요. 잠시도 쉴 틈이 없고 고독하기까지 해요." 유여사가 본래의 미소로 돌아오면서 품위있게 말했다. "회장님, 집 한번 구경해봐도 될까요?" 윤형사가 소녀처럼 웃으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세요. 넓기만 하지 구경할 건 없어요." 윤형사는 구두를 신고 정원으로 내려왔다. 정원의 나뭇잎을 손으로 만져보고 잔디를 한 포기 잡았다가 놓으면서 땅 모양을 살펴보았다. 뒤따라오려는 유여사를 만류하고 이층 양옥 뒤의 채소밭과 담장 밑까지 현미경으로 보듯이 세밀히 훑어보았지만 달라보이는 흙은 없었다. "채소도 직접 재배해 잡수시나보지요?" 응접실로 다시 돌아와 앉은 윤형사는 이마와 콧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명랑하게 물었다. "무공해 배추를 직접 길러서 먹으니까 참 좋더군요. 고추하고 상치도 있지요." "큰크리트 도시에서 푸른 야채를 보니까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아요. 회장님, 이만 가보겠어요. 수사에 협조해주셔서 고마왔어요. 안녕히 계세요." 윤형사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마중나오려는 유여사를 만류하고 골목길을 지나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시경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윤형사는 지나왔던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여사와 연박사의 진술중 누가 거짓이고 누가 진실일까? 그러나 그 진위 여부를 가리기 전에 빈 칵테일 잔을 왜 감췄는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독살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빈 잔을 감춰야만 했을까? ......만약에 빈 잔이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었다면? 그렇다면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해진다. 연박사가 두 잔의 칵테일을 마신 걸로 된다. 그러나 그 빈 잔이 없어짐으로 해서 변명의 구실이 생겨났다. 그걸 내가 뭣하러 치우겠냐고. 그럼에도 지금으로서는 그런 변명은 궁색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하다. 빈잔을 독살 도구로 이용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무슨 트릭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범인은 어차피 둘 중의 한명인데. 연박사와 유여사의 대질신문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칵테일 잔을 마신건 연박사다. 단지 지금의 차이점은 칵테일을 유여사 스스로 들고 왔느냐 연박사가 부탁을 해서 가져왔느냐 하는 엇갈린 진술만이 문제인데, 그럼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윤형사는 앞에 선 버스에 올라타면서 괜히 헛걸음만 한 것 같아 울적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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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12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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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추억
08.05.12 13:54
첫댓글
흥미진진하네요~ 성주라는 납치된 걸까요? 아님 자작극? 자작극을 벌일 필연성은 없어 보이는데...
미혜
08.05.27 09:31
잼나게 잘봤읍니다~!
김성갑
17.11.20 18:18
감사
고바우영감
21.08.10 13:43
♡ 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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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흥미진진하네요~ 성주라는 납치된 걸까요? 아님 자작극? 자작극을 벌일 필연성은 없어 보이는데...
잼나게 잘봤읍니다~!
감사
♡ 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