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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알아두기 地名의 유래
펼침과 기쁨 추천 0 조회 220 10.11.10 19: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북악산[北岳山] 

 


서울 북쪽 경복궁의 진산[鎭山]'인 북악산의 원래이름은 북악[北岳],백학산[白鶴山]인데

인왕산·북한산·낙산·남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고,

서울 분지를 둘러 싸는 자연 요새의 하나로 기반암은 화강암이며.

이 山'을 中心으로 서울 북쪽의 성벽이 축조되었다.

 높이 342m.

 

 

北漢山城 사적 162호 - 대서문

 

 

1395年[태조 5年]에 시축한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의 기점으로서,

 북악산에서 낙산·남산·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쌓았다.

 

 

 

from :  행복이머무는카페'에서 모셔온 자료.

 

정도전[鄭道傳,1342年,충혜왕 3年~1398年,태조 7년 :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

성저[城底]를 측정한 뒤,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따라 97구로 나누고,

 북악산의 정상에서부터 각 구마다 순서대로 번호를 동쪽으로 붙여 나가면서

97번째 글자인 조[弔]'字에서 다시 북악산에 이르도록 했다.

 

 

 

도담삼봉[島潭三峯, 충북 단양군에 있는 명승지]'에 있는 정도전 동상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어 일반인의 등산이 금지되었다.

서쪽 인왕산과의 안부에

 자하문[紫霞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검정 근처에 있으며,창의문:彰義門, 北門'이라고도 불림]'이 있으며,

 남동쪽 기슭에 삼청 터널과 삼청공원이 있다.


 

 

西.北쪽 門 - 창의문[彰義門] 

 

 

일제[日帝]때 부터 現在의 북악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학[鶴]은 우리나라 사람이 고귀하고 신성시 여기는 동물의 하나로

 옛날에는 높은벼슬에 오른사람의 옷 등에 그 문양[文樣]을 새겨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을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면서

民族의 자존심과 氣를 꺾으려는 의도로

북한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고,

山이름도 북악산이라는 전혀 의미없는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이 산이 백학산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북한산의 초고봉인 백운대[白雲臺]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백운대 : 서울 北部'와 경기도 고양시 사이에 있는 산봉우리.

북한산의 최고봉으로, 화강암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는 836m

서울의 지형이 풍수지리학으로 볼 때 구름속의 鶴인 운학[雲鶴]의 형상임을 말하는 것이다.

 

 

 

백운대-뒷편은 인수봉 : 강릉간호학교 동문회강릉간호학교 동문회'에서 모셔온 자료.


 

구름도 흰색이고,

학도 흰색이며,

북한산의 산세도 흰바위로 되어있어

의미상 조화를 맞춘것이라 하겠다.

 

 

 



청운동[靑雲洞]

겸제 정선[謙齊 鄭敾]'의 청풍계

 

 

 

청운효자동의 '청운'이란 이름은 청운 초등학교 뒤쪽의 청풍계[淸風溪 : 맑은 바람의 계곡]'라는

계곡의 청'字와 백운동[白雲洞:흰 구름마을]'의 운'字를 따서 지었다.

청풍계와 백운동은 인왕산의 맑은 바람, 맑은 물'과 함께

흰 구름으로 덮여 있는 자연환경에서 유래하였다.

 

조선初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彷]'지역이었다.

1914年 경성부 백운동,청풍동, 박정동[朴井洞], 신교[新橋]의 각 일부를 合쳐

청운동[淸雲洞]이라고 하였고,

1936年 청운정[淸雲町]'으로 바뀌었다.

1943年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1946年 종래의 행정구역을 우리말로 개칭하여

다시 청운동'이 되었다.

 

효자'란 이름은 선조때 학자 '조원'의 아들 희철 형제'라는 효자가 났다!'하여

쌍효잣골 또는 한자명으로 효곡'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효자동'이라고 하였다.

 

 

박노수 가옥

박노수 가옥[朴魯壽 家屋] :조선 후기 문신이였던 친일파 윤덕영이 그의 딸을 爲하여 1938年 건립한 이층집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68-2번지
[옥인1길 22번지]

 


북악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백운동[白雲洞]과 청풍계천[淸風溪川]이 합쳐진 이름으로

청운동은 푸른구름이란 의미로 백운동과 함께 신성함을 의미하며

백학산의 鶴을 상징하기위한 地名이다.

 

 

경복궁을 옆에 끼고 인왕산 자락에 나지막이 자리한 종로구 청운효자동은

요즘 부쩍 따스해진 봄 햇살을 맞으며 산책하기 좋은 대표적인 동네다.

실핏줄처럼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소소하지만,

 멋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慶福宮 近景 

 

 

경복궁 건너편에 있는 한옥 밀집지역인 북촌이 깔끔하게 단장된 느낌이라면

이곳에서는 서민들의 일상적 모습을 날것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최근 도심 산책자들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조선시대 중인들과 왕의 시중을 드는 내시들이 많이 살았던 이곳은

군사정권 시절에는 특히 청와대 인근 경비가 삼엄해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과 성장이 느렸다.

 덕분에 이곳은 아직도 1970~80年代 서울 골목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낡은 한옥과 좁은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이어진

종로구 청운효자동은 도심에서 느낄수 없는 고즈녁함이 묻어난다.

최근 동네를 걸어서 한바퀴 도는 골목길 관광코스가 만들어졌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현재 행정동인 청운효자동은

효자동·창성동·통인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청운동·신교동·궁정동 등 9개 법정동을 포괄한다.

 이 동네의 멋과 정취를 소개하기 위해 종로구[구청장 김충용]

최근 이 동네를 한바퀴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동네 골목길 관광 코스'를 만들었다.

골목마다 이야깃거리 풍성

"청운효자동 골목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스며 있는 忠'과 孝'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요.

" 골목길 관광 코스를 만든 정연수 종로구청 관광사업과 주무관의 말이다.

이 코스는 포인트마다 역사적 사실과 이야깃거리가 가득해 '정신문화 여행길'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동네 골목길 관광 코스는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만나는 '보안여관'에서 시작된다.

총 19개 포인트로 이뤄진 코스를 모두 둘러보는 데 3時間 정도 걸린다.

왼쪽으로는 인왕산,

북쪽으로는 북악산이 버티고 있는 청운효자동 골목길은 거리 전체가 고즈넉함에 싸여 있다.

골목여행길 출발지인 보안여관은 80年 가까이 자리를 지켜온 건물로

광복 以後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작가, 예술인들이 장기 투숙하던 곳이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주고객이었고 경호원 가족의 면회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실험적인 예술 전시공간으로 바뀌었다.

 

보안여관에서 시작된 코스는

창성동 골목길, 효자동의 유래를 알려주는 쌍홍문 터,

 헌법 제정에 큰 기여를 한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1894 ~1956] 선생의 옛집,

청와대 사랑채, 옛 궁정동 안가였던 무궁화동산 등을 거쳐

인근에 살던 윤동주[尹東柱·1917~1945]가 詩狀을 떠올리며 걸었던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이른다.



 

 

 

청운공원에 조성된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는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낮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골목길 풍경에 멀리 남산이 삐쭉 얼굴을 내민다.

언덕을 내려오면 조선 인조 때 재상이었던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 풍경에 감탄해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을 새긴 바위가 등장하고,

지금은 초등학교로 변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의 집터와 시비를 만날 수 있다.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1867 ~1932] 선생을 기리는 우당 기념관을 들러

 다시 꼬불꼬불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1층은 벽돌로,

2층은 나무로 만든 독특한 구조의 집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동양화가 박노수[朴魯壽·1927~]氏의 집이다.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철거 중인 옥인 시범아파트로 들어서면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 1759]의 '장동팔경첩' 그림에 나오는 '기린교'를 볼 수 있다.

김선희 종로구청 문화공보과 주무관은 "유서깊은 다리가 지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시민아파트 자리에 공원이 들어서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새단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네명소인 백호정[白虎亭]도 볼만한데,

백호정 약수터에서 인왕산 호랑이가 물을 마신 후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1930年代에 지어져 한국 산천을 독자적인 화풍으로 그려낸 동양화가

이상범[李象範·1897~1972]이 살았던 집도 골목길 여행코스에 포함돼 있다.

갤러리와 카페 거리

경복궁이 옆에 있어 층수 제한과 건물 개축 규제가 엄격한 효자동은

조용함과 여유로움이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커피 한잔을 즐기거나 예술작품을 감상하러 발걸음을 한다.

효자동 거리 곳곳에는 상업성보다는 실험적인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숨어 있고,

따뜻한 커피 한잔을 할 수 있는 작은 카페들이 많다.

'카페 고희'나 '두오모', '마르코의 다락방' 같은 커피숍들이 유명하다.

 최근 2~3年 사이 번잡해진 삼청동을 벗어나 효자동 골목 곳곳으로 갤러리와 카페가 많이 몰리고 있다.

청와대 사랑채 옆에 있는 '사랑방 손 칼국수'는 청와대 경호실 사람들이 찾는 맛집으로 유명하다.

출출할 땐 통인시장에서 파는 기름떡볶이도 별미다.

종로구는 "미로처럼 얽혀 있는 청운효자동 골목길에 있는

맛집과 명소들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안내표지판을 설치하고,

자원봉사자들이 골목길 곳곳을 안내하는 '골목길 코스체험'도 도입할 계획"이라며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어 4개 국어로 표기되는 표지판 35개가 세워지면

청운효자동을 찾는 사람들은 각 명소에 얽힌 이야기와 주변 맛집 등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발췌 / 조선일보  김성민기자

 


수송동[壽松洞] 

 

 

각황사[曹溪寺]:일제 강점기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불교 사찰- 現조계사'의 전신이며,

 1910年 지금의 조계사 근처에 창건된 각황사[覺皇寺]'

 

 

洞 이름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중부 8방 가운데 하나인 수진방[壽進坊]의 수동[壽洞]과

 송현[松峴]의 <수>자와 <송>자를 合하여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1396年 북부 관광방과 중부 수진방이 수송동 지역이었으며,

1894年 북서관광방 중학계 중학동·송현, 중서수진방 수진궁계 수동 등이 포함되었다.

1914年 3月 중부 송현·박동·중학동·사복동·괴정동 등이 수송동 지역으로 개편되었으며,

4月 수송동이 되었다.

1915年 경성부 수송동이 되었으며, 1936年 수송정[壽松町]이 되었다.

 1943年 경성부 종로구에 편입되어 종로구 수송정이 되었으며,

1946年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이 되었다.

1949年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천연기념물 제9호<백송> -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경복궁 바로 아래에 위치하며 수송이란 이름이 생기게 된 이유는 일제때
수동[壽洞]과 송현[松峴]이 合쳐진 이름인데

수동은 숲을 의미하는 것이고,

송현은 지금의 경복궁과 안국동 사이에 있는 야트막한 고개를 말하는 것으로

소나무가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鶴을 상징하는 地名이다.

 


송월동[松月洞]

 

 


송정동과 월암동이 합쳐져 생긴 이름으로

송정[松停]은 소나무 숲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로 학을 상징하는 말이고,

월암[月岩]은 하늘의 달과 함께 북악산의 산세가 바위로 이루어져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북악산의 옛이름이 백학산임을 생각할때 소나무와 달과 학이 서로 밀접한 관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洞.

 법정동인 송월동은 행정동인 교남동에서 관할한다.

송월동은 북쪽으로 홍파동,

서쪽으로 교남동,

 남쪽으로 평동,

 동쪽으로 세종로등이 接한다.

 

 

1900年代'의 서울 

 


송현동[松峴洞]


경복궁과 안국동 사이에 위치한 야트막한 고개 이름에 근거한 것으로

솔고개[松峴], 또는 소나무숲에 나타난다는 의미[松顯]의 두가지로 해석할수 있으며

鶴을 상징하는 것이다.

 

 

 

수선전도[김정호가 만들었다고 추정] 中 북촌 부분 

 

오른 쪽으로 경복궁, 왼쪽으로 창덕궁, 북쪽으로 북악산과 응봉이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물 줄기들이 여럿 있다.

경복궁 왼쪽 삼청동 물줄기가 가장 굵다.

[청계천 발원은 삼청동이 아니라 창의문 아래 샘으로 보고 있다.]

이 삼청동 물은 중학천 [미 대사관 뒤쪽] 로 이어져 모전교에서

청계천으로 들어간다. 필자 어릴 때는 삼청동 개울과 중학천을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버렸다.

안동, 안국방이라고 쓴 곳에서 또 물줄기가 나오니 이 물은 인사동을

가로 지른다. 지금 인사동 안국동 쪽 입구에 그 표석이 있다.

또 가회방, 원동 쪽에도 물줄기들이 있다.

북촌은 위로 산, 좌우로 언덕 그 사이로 개울을 끼고 있는 마을이었다.

 

이제 동네를 살펴 본다.

경복궁 옆 사간원[司諫院]에서 지금 사간동[司諫洞] 洞 이름이 나왔고

그 위에 소격서[昭格署]가 있었으니 삼청동[三淸洞]의 어원이 된다.

소격서는 도교를 위한 시설로 삼청동의 삼청이란

도교의 상청[上淸],

태청[太淸],

옥청[玉淸]을 말한다.

 

다시 사간원 아래 쪽에 십자교[十字橋]라고 있으니 현재 동십자각 어름이다.

십자교 오른 쪽에 송현[松峴]이란 한국일보 부근 송현동이다.

 

송현에서 2시 방향 안국방[安國坊]은 안국동이요,

안국방 정동 쪽에 있는 회동[灰洞]이란 지금 재동이다.

회동 위 가회방[嘉會坊]은 그대로 가회동이고

회동 오른 쪽 제생방[濟生坊]은 발음이

 게생방으로 바뀌다가 계동이 되었다.

다시 제생방에서 1시 방향 창덕궁 경추문 글씨 옆에

원동[苑洞]이라고 쓰여 있으니 현재 원서동이다.

 

 


경운동[慶雲洞]

잔치 또는 즐거운 모임을 경연[慶筵]이라 부르는데

경운은 잔치가 벌어진 장소가 구름속이란 말로

구름속에서 학들이 노래부른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시도민속자료 제15호 [종로구]

 

1930年代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개량한옥으로,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건축가 박길용[1898∼1943]'이 설계했다고 전한다.

경운동 66-8번지에 있던 정순주 가옥과 같은 평면으로 정순주 가옥은 이 집의 뒷채에 해당한다.

원래 건축주가 두 아들에게 한 채씩 주기 위하여 지은 집이라고 한다.

 

네모반듯한 집터 동쪽에 대문이 있고, 앞마당으로 들어가면 남향으로 H자형의 건물이 있다.

중심축에 부엌·대청·건넌방·사랑방이 있고,

부엌의 앞쪽으로 안방,

 뒤쪽으로 뒷방이 있다.

반칸 너비의 툇마루를 두어 동선을 연결하였다.

사랑방의 앞쪽에는 누마루를, 뒷쪽에는 현관마루를 두었다.

건넌방은 상당히 큰 방으로 꾸며 사랑방 구실을 하고,

현관마루와 연결되는 사랑방은 응접실 용도로 사용하도록 설계한 듯하다.

마당 남쪽 담장 밑에는 작은 화단을 가꾸어 놓았다.

 

현관과 화장실·목욕탕을 내부에 두고 이들을 연결하는 긴 복도를 둔 점과

유리창을 단 점 등은 이 시기 개량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며,

주택의 변천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서동[苑西洞]

새의 둥지가 있는 동산이라는 의미인

원소동[園巢洞]의 발음이 변화된 것으로 학의 둥지를 말하는 것이다.

 

 

시도민속자료 제13호 [종로구],원서동-백홍범가옥[苑西洞 白鴻範 家屋]

 

 

근래에 지은 안채와 별채인 한식 목조기와집 한채, 동남쪽에 떨어진 작은 방 한채로 구성된 집이다.

별채는 남쪽을 향하여 대청마루와 건넌방이 있고, 안방은 대청 남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부엌은 안방 남쪽에 있다.

대청은 3칸이고 앞·뒷면에 모두 유리문이 있으며

건넌방은 동쪽에 반칸 마루를 두어 출입문을 달아 샛문에 통하도록 하였다.

건물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서남쪽에는 정원이 있다.

한국 소형 주택의 전형적인 요소를 비교적 잘 지니고 있으나

현대수법이 각부에 사용된 것은 근래에 보수하면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봉익동[鳳翼洞]

창경궁과 종묘앞에 위치한 곳이며,

 이곳은 북악산의 내청룡이 되는 곳으로 학의 날개를 상징하는 것이다.

 

 


중학동[中學洞]

경복궁 앞쪽에 위치하며 鶴을 상징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中'의 의미는 이곳이 대궐의 앞부분으로 서울의 중심을 상징한다는 의미,

또는 경복궁의 主山'인 북악산과 남산 아래에 있는 남학동의 중간지점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수 있으며 한자로는 中鶴洞으로 고쳐써야 옳다고 본다.

필운동[弼雲洞]

仁旺山 아래 위치한 곳으로 인왕산의 별칭인 필운산[弼雲山]에 근거한 것이며,

 구름과 짝이 된다는 뜻으로 학과 구름의 밀접한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곳의 옛이름이 소나무골 또는 송목동[松木洞]으로 불리운 것도

소나무가 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창동[北倉洞], 남창동[南倉洞]

소공동과 명동, 회현동, 봉래동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새가 노래한다는 의미인 창동[唱洞]의 한자표현이 잘못된 것이다.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누각동[樓閣洞]이 분리되어 생긴 이름이며,

 누각은 높은곳에 있는 방을 말하는 것으로 새의 둥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곳의예전 이름인 소나무골은 鶴이 사는 집을 말하는 것이며,

수성동[水聲洞]은 숲속에서 나는 새의 울음소리를 말하는 것으로

樹聲洞의 한자표기가 잘못된 것이다.



신문로[新門路] = 새문안길


소공동과 수송동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새의 노래소리가 들려온다는 의미로 여기에서 말하는 새는 학을 지칭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문이란 말은 이곳의 예전 이름인 새문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4대문 서쪽 정문 - 돈의문[敦義門] 

 

 

 

신문로1가의 洞名'은 서대문[西大門]의 속칭이 새문'이므로

 이를 한자로 옮겨 적은데서 유래된다.

 신문로라는 지명은 길가 서쪽 언덕위에 도성[都成]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서대문은 原名이 돈의문이었으며,

또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됨에 따라서 서전문[西箭門], 신문[新門], 새문으로도 불렸다.

1914年 서대문정이 형성되기 前에도 이 부근에는 신문내라는 동리가 있었으며,

그 곳을 새문안 그 지역내에 있는 교회를 새문안교회로 부르는 것도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문로1가는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번잡한 곳에 속하였다.

 따라서 여러부락이 合쳐져서 신문로1가를 형성하였는데

 세종로와 신문로1가에 걸쳐있는 마을을 동령동[東嶺洞]

혹은 동령골이라 했는데 동쪽에 황토마루가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광화문빌딩[舊 국제극장]일대가 해당된다.

 

 

 

 1957年 9月 28日 개관했던 국제극장

 

 


원동[園洞]은 동산[東山]

혹은 동산말이라고 하는데

 동령동에서 이어지는 곳으로 얕으막한 함춘원[含春苑]의 동산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비변삿골은 신문로2가 59번지에 비변사가 있었기 때문이며 새문안길을 따라 구세군회관이 있는 곳까지였다.

신문로1가 169번지에는 선공감[繕工監]이 있었으므로

주변의 부락을 선공동 혹은 선공감골이라 하였고,

 43번지 일대는 염정동[廉井洞],

 혹은 염정골·염정수골이라 불렀는데,

 철종의 가짜 외숙 염정수[廉井洙]가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새방골은 전 세종로 동사무소가 있던 일대로 관기[官妓]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방골·하방교 또는 아랫방골이라 부르는 곳은

신문로1가와 세종로에 걸쳐있는 마을인데 「수선전도[首善全圖]」와 「

서울지도」에 교량 표시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희궁에서 가까운 순서로 하방교[下芳橋],중방교[中芳橋],상방교[上芳橋]로 생각되며,

 다리의 부근 부락을 아랫방골·중방골·웃방골이라 하였다.

 

 

-정동길-

 

 

 

동산말 동쪽에는 우물이 있다 해서 우물골 혹은 정동[井洞]이라 불렀으며

염정숫골 서쪽의 마을은 창림정동[昌林井洞]으로 불렀다.

당주동과 이어지는 세종문화회관 사잇길을 야주개·야주현 혹은 애주갯골로,

새문안길 남쪽으로 신문로1가와 2가 사이에 형성된 부락은 오궁동[五宮洞]으로 불렸다.

러시아영사관 東北방향으로 久러시아영사관 일부 부지도 포함되었으나 ,

지금은 빼곡하게 민가가 들어서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새문안교회 동쪽에서 당주동에 걸쳐있는 마을은

관청 납품용 메주를 쑤는 곳이 있다해서 붙여진 메주가맛골·훈조동[燻造洞]이 있었다.

 

 

 

부민관[府民館 or 京城府民館, 일제 강점기 경성에 의해 운영된 부립<府立>의 다목적 홀이다]등록문화재 11호 

 


 

 

신문로2가 23번지에 있었던 다리를 송교[宋橋],

옛前 경기여고를 들어가는 골목입구에 백목전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놓여있던 석교를 백목전다리[白木橋]라 하였다.

현재의 신문로1가는 東으로 세종로와

 南으로 중구 정동, 서쪽은 신문로2가,

北쪽에 당주동이 있으며

洞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새문안길이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신영동[新榮洞]


북악산의 뒷편에 위치한 곳으로 북악산이 학의 나는 모습이라 할때

신영은 학의 그림자 즉 새의 그림자라는 의미이다.


가회동[嘉會洞]

새의 둥지를 상징하는 원서동과 인접한 곳으로

 새들이 모여 노래한다는 의미로 歌會洞으로 고쳐서야 한다.

한성부[漢城府] 18세기 무렵 지도 


낙원동[樂園洞]


이곳은 구름속에서 鶴이 노래잔치가 벌어졌다는 의미인 경운동과 인접한 곳으로

무릉도원[武陵桃園], 즉, 낙원[樂園]을 의미하는 것이며,

 낙원은 항상 즐거움과 노래가 끊이지 않는 곳이고,

 이곳에는 이름에 어울리게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 상점으로 유명한 곳이다.


남학동[南鶴洞]

남산 아래에 위치하며 남산은 북악산의 안산[案山]이 되며,

 북악산과 마주하고 있는 형상으로 북악산과는 음양[陰陽]의 관계로,

 남쪽에 있는 鶴이라는 방향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소공동[小公洞]

구름가운데 있는 운학[雲鶴]을 상징하는 것으로

새의 둥지가 높은 나무위에 있다는 의미가 되어 巢空洞으로 써야하며,

 이곳에는 소공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높은 건물에서 잠을 자는 호텔이 가장 밀집된 곳이기도 하다.


익선동[翼善洞]

 

 


학이 날개를 부채살 같이 펼치고 날아가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자표기도 翼扇洞으로 고쳐써야 한다.


익선이란 지명은 중부 정선방에 있던 익랑골에서 연유한다.
여기서 정선방이란 당시 사용하던 행정구역 이름이다.

Or,

착한 일은 많이 할수록 더욱 좋다는 익선동[益善洞]

 

 

 

 

 

조선 전기에는 한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관할지역이었으며,

1894年[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 개편 때는

돈령동[敦寧洞], 한동[漢洞], 익동[益洞], 누동[樓洞], 궁동[宮洞], 이동 등이

익선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年 4月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돈령동, 궁동, 익동, 이동, 한동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익선동이 되었으며,

같은 해 9月 출장소 제도 신설로 경성부 북부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36年 4月 동명이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됨에 따라 익선정이 되었으며,

 1943年 4月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 익선정이 되었다.

1946年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이- 동[洞]으로 바뀔 때 익선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익선동은 행정동인 종로1·2·3·4街洞 관할下에 있다.

 

 
봉래동[蓬萊洞]  

사적  제284호 - 서울驛舍 : 서울 중구  봉래동2가 122

1922∼192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재가 혼합된 벽돌식 역 건물이다.

1층은 르네상스 궁전건축 기법으로 처리하고,

1층 윗부분과 2층은 붉은 벽돌로 쌓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장식하여 마감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여객전용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봉래라는 말을 생각하면 가장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 금강산[金剛山]의 여름이름인 봉래산일 것이다.

이것은 금강산의 최고봉 이름이 비로봉[飛鷺峰]으로

백로[白鷺]가 날아간다는 의미에 근거한 것이며, 이곳은 남산과 인접한 곳으로

남산이 학의 날개라 할 때 학이 날아왔다는 의미로 해석을 할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봉래라는 한자표기는 쑥봉과 쑥내라는 글자로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름이라 할수 있다.

서울역사

 

서울역사[驛舍, 사적 제284호]

중구 봉래동 2가 122번지에 있다.
한국에 처음 철도가 놓여진 것은 광무 3年[1899] 4月로,

일본인 회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착공했던 인천과 노량진간에 놓여진 철로였다.

지금의 서울역사는 1922年 6月에 착공되어 1925年 9月에 준공된 것이다.


남 산[南 山]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 경계에 있는 南山

이 262m. 목멱산·인경산·마뫼 등으로도 불렸으며, 기반암은 화강암이다.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때에 이 산들의 능선을 따라 도성을 축성했으나 현재는 성곽의 일부만 남아 있다.

산 중턱 아래와 위는 각각 완경사와 급경사를 이루며,

 소나무·아카시아 등이 이루는 수림경관이 훌륭하다.

수도 서울의 중앙에 위치하여 산정에서는 사방으로 펼쳐진 서울의 시가지를 둘러볼 수 있다.

서울 타워를 비롯한 다양한 휴식공간과 도서관 등 여러 공공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총면적 2,971㎢의 산 일대가 시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남산은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가치분만 아니라

서울시민의 휴식공간으로서도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남산이라는 이름은 경복궁의 主山'이 북악산이라 불리는데 對하여

 그 위치가 대궐의 남쪽에 있다하여 그렇게 부른 듯 싶다.

 

남산에서 바라다 본 남산골 한옥마을 전경 

그런데 이 남산을 전에는 목멱산[木覓山], 또는 잠두봉[蠶頭峰]으로 불렀다 한다.

그 中 첫번째, 목멱이란 말의 의미는 차마 눈뜨고 똑바로 쳐다볼수 없다는 의미인데

이러한 이름도 풍수지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그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남산 타워, 서울시 남산 

 
풍수지리학으로 볼 때 남산은 경복궁[景福宮]의 안산[案山]이 되며,

 안산의 의미는 안내를 하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안내라는 말을 생각할 때 쉬운豫로

우리가 어느 낯선곳에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는 일반적으로 안내자가 있고

여행자는 안내자를 쳐다보며 안내와 지시를 받아야

실수나 사고없이 여행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며

 이렇게 볼 때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은 조산인 북한산이 아닌

그 이전의 산줄기를 타고 남산을 만나기 위해 긴 여행을 하여 이곳까지 도착한 것이며,

이렇게 볼때 남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팔각정, 서울시 남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 

 


경복궁에서 남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그 모양이 옛날 임금님이 대관식[戴冠式]때 쓰는 모자 모양으로 형태는 사각[四角]이며

앞뒤에 주렴이 달려있는 형상인 모자를 말하는데,

 이러한 것을 풍수지리학에서는 통천관[通天冠]이라고 부른다.

즉 남산은 임금을 상징하는 산이되며

엣날에는 임금님의 얼굴 즉 용안[龍顔]

일반사람이 똑바로 쳐다볼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은듯 싶다.

 

 

 

남산에 있는 봉수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 서울 중구 예장동 


 

우리가 역사극을 보더라도 임금님이 행차를 하면

백성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며

대궐에서도 신하가 임금과 대면할때는 임금님 앞에서 옆을 향해 앉는것을 볼 수 있다.

목멱[目覓]이란 말은 이렇듯 지엄한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 ,다르게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한 豫는 북악산의 세가 흙이나 나무가 거의 없는 바위로암 되어있어

사람으로 말하자면 벌거벗은 알몸의 형상이 된다.

즉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는데 신하가 감히 똑바로 쳐다볼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두번째 이름인 잠두봉[蠶頭峰]

남산을 마포나 여의도 방향에서 바라보면 누에의 머리와 닮았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생긴듯 싶다.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仁慶山]이었으나

조선初 태조가 1394年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온 뒤에

남쪽에 있는 山이므로 ‘남산’으로 지칭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이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고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리고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다.

 

 

한양도성 지도 : 양정고등학교 교사 김 병수 블로그'에서 모셔온 자료.

 

 

의로움을 돈독히 하라는 돈의동[敦義洞],

어질게 살고 의리를 지키라는 인의동[仁義洞],

예의와 지혜로움을 기리는 예지동[禮智洞],

열심히 농사 즉 생업에 힘쓰라는 권농동[勸農洞],

말 그대로 파라다이스를 표현한 낙원동[樂園洞],

임금의 상징인 용이 누워있다는 와룡동[臥龍洞-즉 종묘가 가까이 있음을 나타내고],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선업을 쌓아서 내세를 기약하라는 적선동[積善洞],

나라가 평안해지길 기원하는 안국동[安國洞],

맑고 맛있는 우물물이 샘솟는다는 훈정동

[薰井洞 - 現在, 그 샘터가 종묘공원 안에 있는데 서울 시내 우물물은 경수<硬水>가 많고

먹을 만한 샘물이 적어서 이 동네에서는 이 물을 음용하였다],

부모에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라는 효제동[孝悌洞],

나라에 충성하고 주위에 신의를 지킬 것을 기원하는 충신동[忠信洞],

인륜지도<人倫之道>를 밝히는 학문의 전당이 자리 잡은 명륜동[明倫洞],

어질게 살기를 숭상하라는 숭인동[崇仁洞],

많은 덕을 베풀어 세상을 교화<敎化> 시키라는 혜화동[惠化洞],

봉황의 날개 형상인 봉익동

[鳳翼洞 - 이 봉익동은 봉황이 알을 품는 날개를 의미하여 세상의 현금이 흘러드는 지명이다.

이러한 동네가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종로 귀금속 상가 밀집 지역이다]

-from: 태극마크 감정원에서-

 

 

운현궁[雲峴宮]: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生父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서, 고종이 탄생하여 즉위하기 전 12살까지 살았던 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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