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원 姜震遠 (1881 ~ 1921)】 "조계산을 중심으로 승주·순천·곡성 등지에서 의병 활동"
갑오년 이래로 왜적이 창궐하여
나라 형세가 위급해지고
종사(宗社)가 무너지는 것을 통탄하였으며,
선조의 위대한 업적을 추모하고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한 지가 여러 차례였다.
밤새도록 통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이제 의거를 일으킨
대강의 전말을 좌와 같이 적는다.
1881년 7월 30일 전라남도 승주군(昇州郡) 쌍암면(雙岩面) 두월리(斗月里, 현 전남 순천시 승주읍 두월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형원(亨遠), 호는 성산(聖山)이다. 이명으로 강진원(姜振遠)·강승우(姜承宇)·강승우(姜勝宇)·강승지(姜承旨)·강여명(姜汝明)·강의연(姜義淵)·강형오(姜亨吾)·강형오(姜炯吾)가 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서당에 나아가 손오병서(孫吳兵書) 등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906년 26세 때 직접 서당을 열어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8월 1일 해산하면서 서울에서 시위대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 세력과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전라도 지역에서도 임실의 강재천(姜在天), 광양의 백낙구(白樂九), 남원의 양한규(梁漢奎), 운봉의 박봉양(朴鳳陽), 창평의 고광순(高光洵), 능주의 양회일(梁會一), 순천의 조규하(趙圭夏), 순창의 양윤숙(楊允淑) 등이 봉기하였다. 이런 시대 상황과 지역 분위기에 동참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운영 중이던 서당을 정리하고 의병 전쟁에 투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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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강진원장군 순의비(전남 순천) [판형2] |
1908년 같은 승주에 살고 있던 김명거(金明巨)·김화삼(金化三)·권덕윤(權德允)·김병학(金炳學)과 곡성에 거주하던 김양화(金良化)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의병부대를 출범하고자 승주를 중심으로 의병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더불어 전투력 확보 차원에서 무기 구입에 매진하였다. 또한, 일본군 수비대의 의병 탄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의병부대의 편성과 출범 시기를 논의하는 비밀 회의를 거듭 진행하였다. 이처럼 치밀한 준비 단계를 거쳐 드디어 1908년 6월 승주에서 의병부대를 출범하였다. 출범 직후 의병부대를 이끌고 승주의 조계산(曹溪山)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의병부대의 근거지로 만들고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승주에서 의병 봉기 소식은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 결과 7월에는 죽음을 맹세한 결사동지(決死同志) 33명이 조계산으로 찾아와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조계산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본군의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려고 연합 의병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임실군수(任實郡守)를 지냈으며, 인근의 순천에서 봉기하여 보성·곡성 등지에서 활약하던 조규하 의병부대와 연합하였다. 조규하 의병부대의 40여 명과 연합 의병을 결성하면서 의병 전술에서도 변화를 도모하여 전남 동부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부대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연합 의병 결성 후 8월에 곡성군 석곡면(石谷面) 조지촌(鳥枝村)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첫 전투를 전개하였다. 치열하게 전개된 몇 번의 전투 중에 안타깝게도 조규하 의병장이 곡성 선주산(仙住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선주산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았지만 곧바로 목사동(木寺洞)으로 진격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피해를 준 후 8월 25일에 곡성의 통명산(通明山)으로 이동하여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9월 23일에 다시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10월 초에는 남해 장도(樟島)에서 해전(海戰)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다각도로 공격해 피해를 주었다. 10월 5일에는 전남 고흥군 과역면(過驛面) 과역리 시장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고 무기 등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곧 일본군 수비대의 반격에 직면하였다.
과역에서 패한 일본군 수비대는 대대적인 정찰을 통해 의진이 여수 화양면 원포리(遠浦里)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10월 9일 일본군 수비대는 원포리에 주둔한 의병부대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이겨내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다. 원포리 전투에서 패한 후 승주의 쌍암면으로 회군(回軍)하였다.
승주에서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여 본대와 예하 부대로 재편한 후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부하들로 하여금 예하 부대를 이끌고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지시한 후 본대를 이끌고 승주·곡성·화순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 일대에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교란하거나 격파함으로써 전라도 동남부 일대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이러한 유격전을 통한 의병 활동은 1909년에도 계속해서 이어져 1909년 1월부터 4월까지 승주의 서정(西亭) 병참소를 습격하는 등 승주·곡성·화순 일대에서 지속해서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다.
4월 이후부터는 북상하여 남원 방면으로 진격을 도모하였다. 남원 방면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곡성 부근 섬진강의 지류인 압록강(鴨綠江)에서 일본군 병참소를 습격하였다. 압록강 일본군 병참소를 공격한 이후 곡성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와 연합 의병을 꾸리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4월 말 곡성의 서순일(徐淳一) 의병부대와 연합 의병을 결성하여 총 240명 정도의 대규모 의병부대로 확대 편성하였다. 연합 의병 결성 후 5월에 곡성 석곡면(石谷面) 석곡리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석곡리 전투에 패한 이후 다시 승주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승주로 돌아와 승주 서면 당천리(堂川里)의 색천사정(索川社亭)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의병부대의 상황은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6월 11일 일본군의 밀정이던 김원학(金源學)의 안내로 일본군 구례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여 퇴각하였다. 당시 일제는 의병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려고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의병이 큰 피해를 입었고, 의병 활동도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색천사정 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의병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순천 쌍암면 고산도부리(高山嶋不里)에 잠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는 의병장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진행하며 추적해 왔다. 이를 피해 8월 중순 남해의 통영 연내도(蓮內島)까지 가서 피신하였다.
얼마 후 다시 승주로 돌아와 소규모로 의병 활동을 재개하였다. 하지만 곧 일본군 수비대의 정찰 활동으로 그 위치가 파악되어 순천 쌍암면 내동(內洞)에 주둔하고 있을 때 쌍암장헌병파견대(雙岩場憲兵派遣隊)에서 파견한 헌병 2명, 헌병보조원 4명이 밤을 틈타 기습하였다. 그러나 이미 광주가도(光州街道)를 경유하여 접치(接峙) 방면으로 이동한 후였다. 이후에도 일본군 수비대는 지속적인 추적과 정찰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신태휴(申泰休)·박우섭(朴禹燮) 등 부하들이 체포되었다. 부하들의 체포를 계기로 일본군 수비대의 추적은 더욱 강화되었다.
여수 율촌면(栗村面) 죽림리(竹林里)에 주둔하고 있을 때도 그 위치가 일본군 수비대에 노출되어 기습 공격을 받았다. 다행히 일본군 수비대 공격 직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라서 피해는 없었다. 이후 9월 28일 여수 율촌면 내청대리(內靑大里)에서 부하 30명을 이끌고 주둔 중이었다. 이때 여수 방면으로 정찰을 나온 일본군 순천수비대에게 주둔지가 발각되어 기습 공격을 당하였다. 최선을 다해 항전하였지만 이겨내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11월까지 소규모로 활동하였으나 그 활동이 두드러진 것이 없어 일본군의 정찰 보고에 둔찬잠복(遁竄潛伏)하고 있다고 표현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부대원이었던 조혜택(趙惠宅)·오용기(吳龍基) 등이 의병부대를 이탈하여 숨어 있다가 일본군 헌병대에 자수하는 등 부대원들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의병부대를 지탱할 수 있는 동력이 없어진 상태에서 1909년 12월경 부대가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의병부대를 해체한 후 승주의 두모리 오성산(五聖山, 순천시 주암면 행정리)의 외딴 동굴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오성산 동굴에서 10여 년을 은거하다가 1921년 7월 16일 은신처가 발각되어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쌍암헌병대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순천헌병대로 이송되었으나 1921년 7월 19일에 자결함으로써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