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산의 자연환경 / 권옥란 서산 지역은 대부분의 산지가 심층 풍화를 받아 남동부 일대에 높이 400~600m 내외의 산으로 이루어진 가야산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서산시 팔봉면의 팔봉산[362m], 부석면의 도비산[352m]과 같은 높이가 낮은 산들이 형성되어 있다. 즉, 낮은 구릉 형태의 침식 평탄면과 해안 지방의 간석지를 개척하여 만들어진 평야가 주를 이루어 대부분 저평한 형태를 띠고 있다. 서산시 음암면과 운산면 일대의 은봉산 남서 사면에는 산록 완사면이 넓게 나타나며, 정당이·마산이·중곡·상전·가좌리 등의 취락과 취락 사이의 완사면은 작은 하천에 의해 개석 되고 있다. 완사면의 전면에는 완사면과 높이가 같은 구릉들이 연속적으로 넓게 분포하고 있다. 서산 지역의 대표적인 하천은 시내에서 가장 큰 용장천과 시의 중앙을 흐르는 대교천이 있으며, 대교천은 해미천과 만나 간월호로 유입된다. 또한, 청지천은 서산의 남동 측 외곽에서 발원하여 북동 측 방향에서 정남 측 방향으로 흐르며, 서산 지역을 통과하는 석림천이 남동 측 방향으로 흘러 청지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서산시의 북동쪽에는 잠홍저수지가 있고 남서쪽에는 풍전저수지가 비교적 대규모로 존재하고 있으며, 서산 시내의 남동 측에는 중앙지(中央池)라는 소규모의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서산 지역은 하천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충적지가 협소하게 발달되어 있으며, 하천 퇴적물의 층후도 얇게 나타난다. 서산의 해안 지역에서는 웅도를 비롯한 4개의 유인도와 많은 무인도가 있다. 태안반도의 서단부에는 파랑의 침식을 직접 받아 해식애와 백사장이 발달하여 있으며, 모래의 일부는 후빙기의 해면 상승과 더불어 외해에서 육지 쪽으로 밀려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빈은 구성 물질에 따라 모래로 이루어진 모래 해빈과 자갈로 이루어진 자갈 해빈으로 나눌 수 있다. 자갈 해빈의 자갈은 주로 헤드랜드에서 가까운 부분 또는 작은 만입의 사빈에서 많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자갈의 크기는 헤드랜드에 가까울수록 크고 모가 나 있으며, 헤드랜드에서 멀어지거나 만입의 중앙에 가까울수록 작고 원마도가 높다. 그리고 같은 형태의 폐쇄적인 만입에서는 헤드랜드와 헤드랜드 사이의 간격이 넓어질수록 자갈의 양은 적어지고 크기가 작아진다.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에는 바람에 의해 해빈의 모래가 내륙으로 날아와 쌓이면서 형성된 해안 사구를 볼 수 있다. 독곶리 사구는 과거에 50m 내외의 구릉을 경계로 A지역과 B지역으로 나뉘었으나, A지역의 사구는 대부분이 평탄화되어 농지로 이용되고 있다. 반면 B지역은 현재 인공림에 의해 점차 고정화되어 가고 있다. 서산 지역에서 파식의 영향을 적게 받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만에는 간석지가 발달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가로림만의 간석지를 들 수 있다. 가로림만 간석지는 만으로 유입되는 하천이 거의 없어서 대부분이 조류에 의해 운반·퇴적된 점토와 실트 등의 세립 물질로 이루어진 혼성·점토질 갯벌이다. 근래에는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비롯하여 간석지에 대한 간척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큰 규모의 간척지가 많이 조성되고 있다. #기후 2010년 기준 서산 지역 연평균 기온은 11.7℃ 내외이고, 강수량은 2,141.8㎜ 내외로 2009년 1,074.3㎜보다 약 1,000㎜나 증가하였다. 이는 2010년 8월 서해안을 강타한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인한 증가이다. 습도는 인근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해양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여름과 겨울에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서산은 기단의 영향을 받아 봄과 여름에 남서풍이 우세하고 겨울에는 시베리아기단의 영향으로 북풍이 분다. 연중 평균 풍속은 23㎧로 타 지역에 비하여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해안 지방이 내륙 지방보다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토양 서산시의 토양은 다양한 특성은 대표적으로 전북통, 송정통, 예산통, 지산통 등이 있다. 전북통은 일반적으로 비옥도와 배수가 양호하여 주로 논으로 이용되고 있는 반면, 송정통은 비옥도와 유기물 함량이 매우 낮다. 예산통은 비옥도와 유기물의 함량이 낮은 편으로 경사진 구릉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대부분 개간하여 밭과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산통은 대부분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토양으로, 골짜기 사이에 분포하고 있어 배수가 불량하며 비옥도는 보통이다. 참고문헌 『우리 고장 충남』(충청남도교육위원회, 1988) 권혁재, 『한국지리-각 지방의 자연과 생활』(법문사, 1995)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서산시청: 『2011 통계로 보는 서산시 모습』(http://www.seosan.go.kr/) 서산디지털문화대전:(http://seosan.grandculture.net) 2.서산의 역사 #구석기 시대 서산 지역에서 확인된 구석기 시대 유적은 주로 유물 산포지의 형태로 확인되었다. 석남동 구석기 유적, 일람리 구석기 유적, 도당리 구석기 유적, 대로리 주거지 유적 등이 있는데, 정밀한 발굴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지만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밀개, 긁개, 격지, 찌르개 등이 발견되었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매우 적은 수로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의 해안 변에서부터 내륙 깊숙한 곳인 음암면 도당리에 이르기까지 유적은 서산 전역이 구석기인들의 활동 무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 시대 서산 지역에서 확인된 신석기 시대 유적은 대산리 신석기 유적, 웅도리 조개더미, 대죽리 조개더미, 서산 휴암리 선사 유적지, 기지리 유적 등이 있다. 최근 서산시 해미면 기지리 유적에서 신석기 시대 주거지가 조사됨으로써 서산 지역의 신석기 시대 문화상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청동기 시대 서산 지역에서 확인되는 청동기 시대 유적은 주거지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분묘와 패총, 그리고 유물 출토지로 크게 구분된다. 최근 주거지의 경우 세장방형의 청동기 시대 전기 유적에서부터 원형과 장방형의 후기 유적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인 발전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확인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은 서산시 해미면 휴암리·기지리, 음암면 부장리·유계리, 갈산리 유적, 대산읍 대로리 유적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자료의 증가를 기초로 하여 서해안 지역 청동기 시대 문화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초기 철기 시대 서산 지역에서는 그동안 초기 철기 시대 유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예천동 유적에서 토광묘 2기와 옹관묘 1기가 조사되어 그 실상이 알려지게 되면서 서산 지역의 초기 철기 시대 문화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조사된 토광묘는 목관을 사용한 것으로 내부에서는 검파두식(劍把頭飾), 덧띠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옹관묘는 우각형파수부호(牛角形把手附壺)와 아가리[口緣部]에 점토띠가 돌려진 옹을 이용해 옆으로 뉘어서 안치한 합구식(合口式)이다. #백제시대 한성 시대 백제는 부여·고구려 출신의 유·이민과 마한 지역의 토착민들이 결합하여 한강 유역에서 건국하였다. 『삼국지(三國志)』 한조(韓條)를 보면, 당시 서산 지역에는 치리국국(致利鞠國) 내지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이라는 소국 세력이 있었고, 백제 중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대로리 명지 고분과 기지리 고분군 등에서 출토된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와 철제환두도(鐵製環頭刀)는 당시 백제 중앙과 서산 지역이 교류했고, 태안반도 일원은 한강 유역에서 남해안 일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해상 교통로 상의 요지에 위치하였다. 만과 곶이 발달하여 해안선이 복잡하고, 해류와 조수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워 토착 세력이 아니고서는 수로를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백제는 서산 지역의 토착 세력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충청남도 서해안 일대, 더 나아가 남해안 일대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고 여겨진다. 백제 중앙과 서산 지역 간의 정치적인 상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웅진 시대는 475년 한성 함락으로 백제는 웅진[현재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백제의 해상을 통한 고구려의 군사 활동 방비를 위해 해안 지역에 부성산성(富城山城)을 비롯한 다수의 관방 유적이 축조되었다. 서산 지역은 백제의 한강 유역 상실로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새로운 거점으로 부상하였다. 교통로를 가장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서산 지역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태안반도 서북 지역으로부터 덕적도로 북상하여 경기만에서 기존의 항로를 이용하거나 덕적도에서 서해 공해상으로 진출한 후 서해를 횡단하는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비 시대는 538년 백제는 다시 사비[지금의 충청남도 부여]로 천도하였다. 사비 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당항성을 거점으로 중국과 통교하면서 백제의 새로운 경쟁자로 부상하였다. 대중국 항로의 확보도 필요로 남양만의 대척점에 있는 태안반도 일원의 서산 지역이 계속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비 시대에는 서산 지역이 신라의 해양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사비 시대 서산 지역에는 당시 도읍지였던 사비 지역을 제외한 지역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과 서산 보원사지[사적 제316호]등의 불교 건축물이 조성되었다. 이는 서산 지역이 백제의 남천 이후 대중국 교섭의 창구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선도 지역이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고려 시대 서산 지역은 부성군(富城郡)을 중심으로 지곡현(地谷縣), 정해현(貞海縣), 여미현(餘美縣), 고구현(高丘縣)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해안의 드나듬이 심한 서산 지역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많은 군현이 설치된 것이다. 고려 시대 서산은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의 후원으로 보원사의 거찰이 중창되어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다. 서산 보원사는 화엄 10찰에 꼽힐 정도로 융성하였고 탄문에 의해 화엄종 입장에서 선종 사상을 융합하려는 사상 경향을 보였다. 그 외에도 서산의 불교문화를 주목할 수 있게 만들 만한 각종 불교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고려 시대 서산의 중심지는 부성군이었다. 부성군은 백제의 기군(基郡)으로 신라 때 부성으로 이름을 바꾸어 고려로 이어졌으며 12세기 고려 인종 때에는 부성에 현령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1182년(명종 12) 민란이 일어나 현령과 현위가 지역민들에 의하여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하극상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징계 조치로 행정 구역이 폐지되었다. 이후 14세기 서산 출신 인물로 공신호를 받은 정인경(鄭仁卿)이 행정 구역 복원 운동을 전개하여 1284년(충렬왕 10) 부성현이었던 서산이 ‘서산군(瑞山郡)’으로, 현에서 군 혹은 목으로의 승격과 함께 부성이 서산(瑞山) 혹은 서주(瑞州)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고려 시대 서산은 고려 13조창의 하나인 영풍창(永豊倉)이 소재했으며, 운하를 굴착하여 천수만과 가로림만의 남북 바다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에 서산이 수운 교통의 핵심 중 하나였고, 충청남도에 조창은 서산 영풍창이 유일했다는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한편, 운하 공사는 지반 재질 등의 이유로 고려 시대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조선 시대까지 공사가 이어졌다. 이 운하 공사가 계속 이어진 이유는 태안의 험한 바닷길에 많은 배가 침몰되어 큰 피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남쪽에서 고려의 개경으로 조운과 물자를 운반할 때 이용하던 항로가 서산 태안을 잇는 교통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 시기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는 서산 지역은 서로 독립적인 행정 구역이었던 서산군과 해미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서산군은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 통일 신라 때 부성군(富城郡), 고려에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서주목(瑞州牧)-서령부(瑞寧府)-지서주사(知瑞州事)를 거쳐 조선조인 1413년(태종 13) 서산군(瑞山郡)으로 고쳐졌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여지도서(輿地圖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서산 지역의 호수(戶數)와 남녀 인구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선 전기부터 서산군 지곡 지역의 은광 발견과 관련된 기록이 확인된다. 이 은광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서도 개발되었고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개발이 지속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서산군은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며 간전(墾田)이 7,283결, 토의(土宜)는 벼·기장·피·조·보리·메밀·모시·삼·칠, 토공(土貢)은 시우쇠·지초·잡깃[雜羽]·족제비털·여우가죽·삵괭이가죽·표범가죽·참가사리[細毛]·황각(黃角)·숭어·민어·홍어·상어·큰새우[大蝦], 약재(藥材)는 병풍나물뿌리[防風]·오징어 뼈, 토물(土物)은 굴[石花]·낙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어량(魚梁)이 10개소, 염소(鹽所)가 1개소, 철장(鐵場)이 1개소, 자기소(磁器所)가 1개소, 도기소(陶器所)가 1개소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현대 개항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서산 지역의 근현대사는 개항기,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의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 볼 수 있다. 개항기는 1876년 개항 이후 궁벽했던 서산에도 개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되었다. 국가 권력의 해체 과정에서 관료들의 수탈과 약탈이 빈번했고, 대외 무역의 확대에 힘입어 만석꾼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다. 19세기 들어 서산·태안 지역에는 천주교와 더불어 동학의 교세가 상당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1868년 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들이 희생되고 1894년 농민 전쟁 때 많은 동학교도들이 희생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서산·태안 농민이 중심이 된 예포 농민군은 목소 전투, 승전목 전투, 예산산성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성 전투, 매현 전투 등을 치렀다. 1894년 10월 28일과 29일 양일간 전개된 홍주성 전투는 공주 우금티 전투에 버금가는 큰 전투였다. 내포 지역 동학 농민 전쟁은 서산에 소재한 해미성 전투와 매현 전투를 끝으로 종말을 고하였다. 한일 병합 이후 1914년 군·면 폐합 때 서산군은 서산군·태안군·해미군을 통합한 충청남도 최대의 군으로 발전하였다. 개항기 서산의 지역 경제를 이끌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제염업이었다. 서산 지역의 대지주들은 대부분 소금을 굽거나 판매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1906년 안면도에 설립된 광영학교(廣英學校)를 비롯하여 서산 읍내의 풍전신숙(豊田新塾)과 서령학교(瑞寧學校), 태안의 화양학교 등은 서산 지역 반일 운동, 반봉건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 강점기는 1914년 군·면 폐합 이전 시기 서산군은 일제는 군·면 폐합을 단행하여 관할 구역 내에 20개의 면을 거느린 충청남도 최대의 행정 군을 형성하였다. 1917년 서산 지역 행정 구역 통폐합은 일단락되고 1989년 태안군이 서산군에서 떨어져나가 독립하는 시기까지 그 틀이 유지되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태안과 해미는 일제 강점기 서산군의 한 면으로 전락하였다. 포구가 발달하여 전근대 시기부터 인천, 군산 등지와의 교통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1920년대 중반 서산 지역에서 가장 번성했고, 1928년경부터 명천포에는 예산환(禮山丸)과 녹도환(鹿島丸)이 인천을 정기 운항하고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인천 지역에는 서산·태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1930년 서산 주민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바닷가 마을에 어업,염업 노동자가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교통업 인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약간 많은 것은 특별히 교통이 발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해운업[여객선] 종사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개항기 만석꾼으로 성장한 서산 대지주들은 산미 증식 계획 등 일제 강점기의 지주 중심 농업 정책에 편승하여 성장을 거듭하였다. 1920년대에 전개된 서산 지역의 청년 운동은 ‘해방’ 공간에서 전개된 자주적 통일 민족 국가 수립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에 해방과 더불어 서산 지역도 커다란 정치적 변화에 직면하였다.1946년 10월 말 서산에서도 토지의 균등 분배, 쌀의 공정한 분배, 미소공동위원회의 조속한 재개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소요 사태를 야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익 단체로는 독립촉성협의회(獨立促成協議會) 서산지부와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과 같은 우익 청년 단체가 유명하였다. 1948년 8월과 9월 결국 남북한에는 각각 ‘상대의 절멸’[북진 통일, 국토 완정]을 공언하는 분단 정부가 수립되었다. 해방 공간의 좌우 갈등은 6·25 전쟁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전쟁 이후 서산 주민들의 삶은 크게 발전되지 않았던 이유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정책이 서울~대전~대구~부산을 잇는 ‘경부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산 지역은 경제 개발이 실시되는 시기 아무런 개발 혜택도 누리지 못하였다. 다만 천수만과 가로림만 인근의 바다와 개펄과 염전에 의지하여 고단한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1960~1970년대에도 개간 간척이 많이 이루어졌으나 천수만을 가로막는 서산AB지구방조제의 건설은 규모에 있어서건, 산업이나 생태적인 의미에 있어서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공사였다. 천수만에 서산AB지구방조제가 건설되고 드넓은 간척지에 현대 농장이 들어선 것은 서산 역사상 일대 사건이었다. 그 결과 천수만 일대는 쌀 주산지임과 동시에 철새 도래지가 되었다. 이후 이른바 ‘서해안 시대’를 표방하며 정부가 서해안고속국도를 건설하고, 또 이와 더불어 많은 방조제와 도로, 항구와 공단이 들어서면서 서산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이민영 편, 『서산군지』(중앙인쇄소, 1927)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서산디지털문화대전:(http://seosan.grandculture.net)
서산 마애삼존불상 권옥란 *국보 제 84호 *지정 연도 1962년 12월 20일 *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 *이칭/별칭 서산 마애삼존불상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불상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발견계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은 바위에 새겨진 마애 여래 삼존상으로, ‘백제의 미소’로 불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산신령과 산신령의 두 부인으로 보고 건방지게 앉아 있는 둘째 부인에게 첫째 부인이 돌을 던지려고 하는 형상이라고 해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주민의 신고로 1959년 학계에 알려지면서 얼마 되지 않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10m가 넘는 거대한 암벽의 동면을 깎아 만들었다. 본존과 우 협시 보살은 입상이고 좌 협시 보살은 반가 사유상으로 특이한 구도를 갖고 있다. 본존의 여래 입상은 얼굴에 해맑고 온화한 모습을 띠고 있다. 좌 협시의 반가 사유상은 한 손을 얼굴에 대고 생각하면서 입술과 볼에 웃음을 띠고 있다. 우 협시는 보배로운 구슬인 보주(寶珠)를 양손으로 감싸고 있는 보살 입상으로 좋은 일이 있는 듯 수수한 웃음을 띠고 있다. 본존의 손 모양, 즉 수인(手印)은 왼손을 아래로 하여 손바닥을 보이는 여원인으로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모습이다. 손바닥을 자세히 보면 엄지와 검지, 중지를 펴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구부린 형태로 삼국 시대에만 보이는 형태이다. 오른손은 선서하는 모습으로 들어 올인 시무외인(施無畏印)으로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손 모양이다. 우 협시는 의자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접어 올리고 생각에 잠겨 있는 반가 사유상이다. 반가 사유상은 보통 출가하기 전의 싯다르타나 도솔천의 미륵보살을 나타낸다고 한다. 본 삼존불의 반가 사유상은 부처의 협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미륵보살반가 사유상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좌 협시는 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상으로 두 손으로 보주를 받들고 있어 봉보주보살이라고 불린다. #특징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백제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마애 삼존불로 조각 솜씨가 뛰어나면서 구도 측면에서 독특한 불상이다. 본존이 입상임에도 불구하고 좌 협시로 앉아 있는 미륵보살을 배치한 것은 다른 불상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서산과 태안은 공주와 부여에서 서해안을 통해 중국과 교류할 때 중요한 지역으로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중국의 발달된 불교문화와 백제의 법화 신앙의 전통을 이은 불상이다. 백제의 예술성과 창조성이 잘 드러나 있다. #의의와 평가 삼존불은 보통 가운데 부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보살상이 배치되는 형식인데, 부처와 보살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배치된다. 예를 들어 아미타 삼존불의 경우 아미타 부처를 중심으로 양쪽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배치된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의 경우 가운데 부처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어떤 구도에 의한 삼존불인지 알기가 어렵다. 다만 좌 협시 보살이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란 점을 매개로 하여 유추할 수는 있다. 미륵보살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처는 석가불이다. 석가가 죽을 때 미륵보살에게 미래에 부처가 될 수기(授記)를 주면서 미래의 중생을 제도하기를 부탁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삼존불의 가운데 부처는 석가불일 가능성이 높다. 본존이 현세를 상징하는 석가불이고, 좌 협시가 미래를 상징하는 미륵보살이라면 우 협시인 봉보주보살은 과거를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로 볼 수 있다.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인 연등불의 전신(前身)으로 석가의 전신인 선혜보살이 머리카락을 땅에 펼쳐서 연등불에 공경을 표한 바가 있다. 이 일로 연등불은 선혜보살에게 장차 부처가 되리란 수기를 준 적이 있다. 이는 『법화경(法華經)』의 수기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삼존불은 과거~현재~미래를 상징한다. 시간을 초월하여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부처의 자비와 중생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다. 이와 달리 우 협시의 봉보주보살은 7세기를 전후하여 백제, 중국, 일본에만 보이는 형식으로 보통 관음보살을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교과서 속 국보 따라잡기』-이치/ 박상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창작과 비평사/ 유홍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