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교과서.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선택한 책인데 서평을 쓰려니.. 어렵다. 숨은그림찾기 처럼 몇 가지 상징을 해석하는 일, 작품성을 따지는 일 말고 다른 할 일은 없을까 -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회적 가치나 정치, 권력과 생존, 이런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은 '도너츠의 구멍이 공백이냐 존재냐"를 따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쓸데없는 일일수도 있다는 얘기.
예전에 봤을 때는 상징에 대한 해석과 정치에 대한 표현에 대해 저으기 흥분했었는데, 다시 보니 느낌이 많이
다르다. 해석보다는 이 책을 넘어서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들고 집단적 의식의 흐름이나
선과 악이 혼재된 인간의 본질적 모습이 통제 가능한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이번엔 좀 쓸데없이 진지해 보자.
'가벼운 책읽기'에 안어울리게... ^^
1954년에 씌여진 이 소설은 내가 거리낌없이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는 작품이다. 1954년 이라면 2차대전이 끝난지 10년 쯤 된 시점이고 그에 대한 평가와 결과가 눈에 드러날 무렵이다. 사회 시스템이나 이데올로기가 원인이 아닌,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야만성의 문제를 주제로 다룬 이 소설은 시대가 바뀌거나 환경이 달라져도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 집단적 본성에 촛점을 맞춘다. 동물적 성질은 정직하지만 착하지는
않다던가 ... 본성에 내재된 악(惡)을 극명하게 보여주려한 작가의 의도는 훌륭하지만, 그대로라면 인간 세상은
희망이 보이지 않고 어두침침할 수밖에 없다.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은 처음엔 서로 돕고 협조하면서 구조를 받기 위한 행동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원시적인 야만성을 드러내고 두 세력으로 나뉘어 충돌하게 된다.
두 명의 정치적 카리스마. 구조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합리적이고 신중한 랠프와 사냥을 강조하는 정열적이고 충동적인 잭이 등장한다. 경험과 감정, 성향이 다른 둘은 서로 각자의 세력을 구축하는데 고립된 상황에서의 '생존'의 문제는 대부분의 소년들을 잭의 둘레에 사냥을 위해 모이게 만든다.
구조를 위해 불을 피우는 것을 (문명 사회로의 회귀) 강조하는 랠프는 고립된 섬에서 사냥(생존)을 우선시하는
잭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원시적 형태의 권력은 1차적으로 생존과 직결되는 가치를 토대로 형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경(지식과 문명)을 쓰고 천식을 앓는 피기는 육체노동을 싫어하는 지식인의 성격을 대표하고, 사이먼은 지혜와 진실을 밝히려하다 죽어가는 순교자의 성격을 띤다.
안경이나 연기와 같이 상징이 부과된 도구로 '소라'가 등장을 하는데 여기서 소라는 '권위'의 상징이다. 사람을
모으고 발언권을 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라의 소유권자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하지만 결국 소라는 깨지게
되고 일정한 양식이나 합법성에 대한 약속은 무효화된다.
또 하나, 여기서 상당히 주목을 끄는 인물은 '잭'이다. 소라를 가진 랠프를 물리치고 많은 아이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한 그는 어떻게 자기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을까 ? 여기서 잭의 정치적 기술을 살펴보자면, 맨
먼저 먹을 것에 대한 문제를 멧돼지 사냥으로 해결하면서 많은 아이들을 사냥 패거리로 모이게 만들고, 얼굴을
피와 재로 장식하면서 수치심과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된다. 마스크의 역할은 일종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유니폼처럼 말이다. 아, 타 간의 구별을 통해 잭이 가지는 권력체계가 공고화된다. 또 하나는
짐승의 존재를 부각시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가진 체제를 정당화 해 나가는 것. 어디서 많이 보던 수법인데 이것은 실제 잭이 가진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준다.
가치가 없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을테고, 사회적 가치의 분배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정치 현상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윌리엄 골딩의 해석대로라면 (사회나 문명의 결함이 인간성의 파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 원죄와도 같은 악한 성질 때문이라고 본다면, 모든 전쟁과 파괴와 살육의 원인이 '인간이라는 이유' 그 '존재' 자체에 있다면...)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지 않은가 ?
작가의 판단이 일부 옳다고 보지만 그것은 인간이 가진 여러 측면 중 하나를 천착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싶다.
선과 악이 혼재된 인간의 모습에서 '선'만, 혹은 '악'만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가 ?
또 이 작품과 반대편에 서 있는 작품들, 즉 사회나 문명, 이데올로기의 결함이 인간을 파괴한다고 주장하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에( 진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나는 무척 감동하기도 한다.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은 1955년에 씌여진 아서 밀러의 '크루서블'( The Crucible) ,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간 메카시즘을 청교도 사회의 마녀사냥에 빗대어 비판한 책이다. 이 책으로 아서밀러는 감옥에 가게
되지만 후세의 평가는 그에게 손을 들어준다.
파리대왕이나 크루서블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것 중 하나는 '집단적 의식의 흐름'이다. 작건 크건 우리는 조직에 대한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집단적 의식의 흐름이 광기로 흘러가는 그 순간을.
생각이 과거의 경험이나 역사에서 현재로 옮아오니 조금은 감정적인 생각이 든다. 조직이니, 집단이니 하는 말들이 의미있었던 시대에서 그 속에 파묻혔던 개인의 시대로 옮아온 것 처럼 보이지만 상대적 개념인 두 시대를
관통하는 권력과 조직은 좀 더 세련된 모습으로 중층화 되어간다는 느낌이다. 물론 전체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한국정치의 모습은 절대 불가사의한 미스테리로 남아있지만..
어쨋거나 '파리대왕'을 보면서 우리 안의 추악한 면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면 반대로 '파리대왕'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수용하는데 있어서도 적극적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의 흐름이 상징 해석으로부터 이 책을 넘어서는 방법까지 흘러갔다. 뾰족한 답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 있는 그대로 모습을 인정하고 교육하고 단련해야 된다. 내지는 수도하고 정진해야 된다. 그럴 수 있을까 ? 그런 종류의 문제인가 ? 과연 ?
종교, 휴머니즘에 대한 마지막 기대,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까지 생각이 뻗치니 골치 아파지기 시작한다. 이쯤해서 마무리 했으면 좋겠고... 아직은 횡설수설, 중구난방인 생각이 좀 정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누가 정리해 주면 더 좋고.... (2001/8/28)
이상, 별 재미없는 얘기였습니다. 내년 대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얘기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을까요 ? 에... 저는
정치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에(?) 텔레토비를 보는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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