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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당신의 영혼은 강건합니까?
성경 본문 : 요한3서 1장 1절-4절
설교 자 : 박 한서 목사 <2020년 10월 11일 주일 오전>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에게는 12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 특별히 사랑을 받았던 제자로
<요한>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2제자 중 <요한>의 나이를 정확히 가름할 수는 없지만
젊은 편에 속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12제자 중 가장 장수한 사람입니다.
<요한3서>를 기록할 때만 해도 그의 나이가 거의
90세가 넘어가는 고령이었습니다.
<요한>은 평생 복음을 위해 사역하면서
많은 영적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특별히 <요한>에게
언제나 감사와 기쁨을 주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이오>라는 사람입니다.
<요한3서>에는 <요한>이
<가이오>에게 쓴 짧은 편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가이오>를 생각할 때면 얼마나 축복하고 싶었던지
그는 편지 서두에서부터 축복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3서> 1장 2절 말씀에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현대 말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혼이 강건해지기를 바라노라.
육신이 건강하기를 원하노라.
범사에 형통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행복한 인생을 만들기 위한
절대 요인으로 여길 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요한>이 <가이오>에게 축복하고 싶었던 내용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축복하고
싶어 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붙들어 주시길 원하시는구나!
내 영혼이 잘되길 원하시는구나! 내 육신이 강건하길 원하시는구나!
내가 원하는 범사의 모든 일 들이 형통하길 <하나님>이 원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건강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도 건강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길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통하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또 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명심 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네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말의 뉘앙스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혼이 잘되는 사람이 육신도 건강하고
범사에 형통하기를 원하시지, 영혼이 병든 사람이
만사형통하여 세상에서 자신만만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단 영혼이 잘될 때
다른 것들도 함께 잘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축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영혼의 강건함을 항상 소망하고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영혼이란 무엇일까요?
<창세기> 2장 7절 말씀에 보면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서
몸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생령이 되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사람이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짐승에겐 영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신과 결합된 영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형상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말씀은
육신과 영혼을 잘 비교해서 설명해 놓은 대표적인 성경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몸은 죽을 수 있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비시켜
우리의 존재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마음', '정신'이라는 단어와 번갈아 사용하고 있음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가리키는 만큼
그 표현이 다양해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이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자아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가득 찰 수 있는 내면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찬양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지성소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갈망하는 우리 내면의 자아입니다.
<시편> 42편 1절 말씀을 보면,
이러한 영혼의 갈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 이다."
<하나님>을 찾아 갈망하는 내면의 자아,
이것이 바로 영혼인 것입니다.
어떤 때는 엄청난 에너지가 분출되는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심오한 고통과 고통,
갈증과 갈급함을 느끼면서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러한 영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영혼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오직 육신이나 육신의 건강,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과 성공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몸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이상
여기에 관심을 쏟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육신의 건강에 쏟는 관심의 10분의 1이라도
영혼에 쏟는다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아마도 달라질 것입니다.
가끔 실내스포츠를 즐기는 스포렉스에 가보면 젊은 여성들이
열심히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것을 볼 때면
'참 오래 살겠다. 건강하겠다“ 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 몸에 좋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몬도가네' 식성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이 건강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쏟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밤낮없이 씨름하면서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혼 없는 존재처럼 보일 정도로 영혼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누가복음> 12장 말씀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그는 젊고 건강했습니다.
게다가 하는 일마다 잘되어 재산이 점점 불어났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다른 사람보다도 2-3 배 많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나중에는 쌓아놓을 창고가 없을 정도로 곡식이 넘쳐 났습니다.
가끔 창고 안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9절- 20절 말씀에서
19절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할 정도로 부유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영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 영혼아" 라고 스스로 말하긴 했지만
정작 영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먹고 마시고 즐기면
영혼이 저절로 잘 될 줄로 알았습니다.
몸을 잘 위하면 영혼은 절로 따라올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0절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될 인간이 영혼을 무시하고 살면
나중에 어리석은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이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본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만나는 내면의 처소이지만,
죄로 인해서 병들고 부패하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형편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자
<하나님>께서 <예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우리의 망가진 영혼의 기능을 다시금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우리 존재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영혼이 병들었던지,
영혼이 휘청거리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육신적으로 만 잘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영혼이 병들면 모든 존재마저 흔들리고 맙니다.
이것을 느끼지 못하면 그는 중생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영혼이 제대로 기능 하여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우리의 존재가 행복해질 수 있고,
우리의 삶이 정상궤도를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항상 강건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살기 때문에 때로는
영혼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강건한가?
내 영혼이 잘되고 있는가?'를 한 번씩
진단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 3가지 부분에서 진단해봅시다.
첫 번째로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면 내 영혼이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 영혼에 지금 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낼 때 그들은 <하나님>과 매일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가장 큰 즐거움이요, 행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다가오는 소리만 들리면 어린아이처럼 달려가
그 품에 안기곤 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용납하자마자, 영혼이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을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거니시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무 밑에 숨어버렸습니다.
영혼이 건강하지를 못하면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난 이 증세가
우리에게도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합니까?
주일 아침 우리가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모든 불편을 무릎 쓰고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모인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너무나 좋키 때문에
성령의 감동함을 받아서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예배를 사모합니다.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말씀을 펴 놓고
<하나님>의 음성을 조용히 묵상하며 듣는 것을 기뻐합니다.
항상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눕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 믿는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즐거워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단둘이 있기를 굉장히 거북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긴 하지만 억지로 성경 1장 정도 읽는 정도입니다.
기도를 하긴 하지만 억지로 한 5분 정도 눈 감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빈정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혼자 계시는 방에 집어넣고 한 30분 정도 지나면
아마 기절하고 나올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것이 겁나는 정도가 되면
우리의 영혼에 이상이 생겼다는 증거입니다.
영혼이 건강하면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을 항상 사모하게 됩니다.
다음은 약간 극단적인 예 이긴 하지만
한번 우리 자신과 비교해 보십시오.
<영국> 목사님들이 모인 수련회에서
한 <중국> 목사님이 하신 간증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주 부유한 집안의 자녀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목사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행복을
다 포기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목사로서, 지하교회 지도자로서 일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강제 노동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8년간 복역한 후
풀려나게 되었는데 몸이 너무 건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18년을 복역한
목사님이 어떻게 이렇게 몸이 좋으세요?"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은 대답했습니다.
"강제 노동수용소는 정말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곳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건강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죠."
그러면서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공산주의자들의 눈에는 가시처럼 미운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힘든 일만 떠맡겼습니다. 한번은 그를 끌어다가 혼자
인분을 퍼내는 일을 시켰습니다.
수용소에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인분을 전부 퍼서 모아놓는
가로, 세로 각각 2m 가 되는 큰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인분이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기 때문에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산당 지도자들이 그 목사님에게 이런 일을 시킨 것입니다.
그곳은 냄새가 너무 고약 하기 때문에 멀리 서 그가 일하는 모습만
구경할 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곳이야 말로 기가 막힌 장소였습니다.
왜냐 하면 방안에 있을 때나 밖에서 노동할 때는 찬송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 역시 마음속으로만 되뇔 뿐
입에는 한마디도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분 웅덩이에서 혼자만 일하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평소 암기해 두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외웠습니다.
그리고는 그 일을 여러 해 동안 했습니다. 나중에는 자원까지 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 인분 웅덩이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은혜를
나누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이 여러 해 동안 날마다 부른 찬송가가 있습니다.
<마일스>(C. A. Miles)가 지은 찬송가 442장입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로 시작하는 이 찬송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의 행복과 기쁨을 노래한 찬송입니다.
그 찬송을 끊임없이 부르면서 행복해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아름다운 행복을 맛보고 살았기 때문에
강제 노동수용소에서도 육신의 건강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도 이런 영혼의 강건함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함께 있는 그 시간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사람, 그는 영혼이 건강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귀찮아서 적당히 때우고, 할 수 있는 대로
멀리 도망하려는 사람은 심각한 병에 걸려있는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로 건강하고 형통할 때 내 마음이 세상으로
기울어 있진 않은지 진단해 보십시오.
대 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세상에 태어나 한 생을 건강하게 삽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목표한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고,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여러 가지 형통함을 맛보면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몸도 건강하고,
가정도 평안하고, 하는 일마다 형통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젊고 건강하고 형통할 때 내 마음이
세상으로 기울어 있지 않은지 잘 살펴보십시오.
열의 아홉은 그렇게 될 확률이 굉장히 많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에는
<하나님> 없으면 못살 것처럼 매달렸습니다.
내가 가난할 때는 세상에 정 주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내 일이 제대로 안 될 때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기쁨이요, 소망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건강하고 형통하자 세상 사는 재미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점점 세상으로 마음이 기울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형식적으로 때우고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을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투자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세상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영혼에 이상이 생겼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상하게도 우리 영혼은 고난보다는 형통에 아주 약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할 때는 영혼이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내가 형통하게 되면 영혼이 그냥 죽어 버리고 맙니다.
그만큼 형통할 때는 영혼의 위기를 맞이할 때가
많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인지 <디모데전서> 6장 10절 이하에 보면,
돈을 많이 벌고 세상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돈은 벌면 벌수록 돈을 더 사모하게 되고, 나중에는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보다 재물에 소망을 두는
타락한 인간이 되기 쉽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건강하고 출세하고 돈을 모으면 그만큼 더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내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알리는
이상 신호가 켜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욥>처럼 영혼이 강건하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욥>은 고대에서 가장 큰 부자로 젊고 건강했습니다.
많은 자녀들을 낳는 복을 받았고 가정도 행복했습니다.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욥>이 그러한 형통을 누리면서도 영혼이 강건한
사람이었기에 조금도 그 영혼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욥기> 31장 24절-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24절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25절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 하였다면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 하였던가?“
그는 영혼이 건강하기 때문에 세상에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은혜가 있을 때 우리의 건강도, 물질의 축복도 복이 되는 것이지
영혼이 병들면 무엇을 받아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내 영혼이 강건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세상을 살아갈 동안 풍랑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간혹 태어나면서부터 무덤에 이를 때까지
풍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영적으로 소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때를 따라 인생의 풍랑을
만나게 해 주시는 것을 봅니다. 풍랑은 위기입니다.
위기란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위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모 밑에서 자라다가 20대 중반쯤 되면
이제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단계로 접어듭니다.
그래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만족할 만큼
월급을 받고, 해마다 월급이 올라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의 출세 가도가 확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 대로의 꿈과 이상을 가지고 열심히 뜁니다.
결혼을 하면서 우리의 결혼 생활은
절대 권태도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 하는 병이 있어도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20대, 30대를
열심히 뛰면서 앞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40대 중반을 넘어 가보십시오.
들려 오는 소식들 대부분이 우울하고 슬픈 소식들입니다.
어떤 친구는 이혼했고, 어떤 친구는 자녀가 교통사고가 나서
장애아가 되고, 어떤 친구는 상처를 당하고, 어떤 친구는
부도를 냈다는 소식 등등.
저도 40대, 50대를 보내면서
교회 안이나 주변에 아는 사람들로부터,
동창들로 부터 들려 오는 소문들을 보면 이런저런
풍랑을 만나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60대-70대 가 넘어가면은 외롭고, 차갑고,
무서운 인생의 계절인 겨울을 앞에 놓고 저마다 불안해합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인생의 풍랑인 것입니다.
영혼이 강건하지 못하면
이런 풍랑을 만났을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물에 빠져서 소리치는 사람처럼 자기 힘을 가누지를 못합니다.
낙담하고 불안해하며 술독에 빠집니다. 자포자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건강하면 이런 위기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보면
내 영혼이 어느 정도 수준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트>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책을 통해서 <요트>가 어떤 것인가를 보았습니다.
오래 전 <마이클 플랜트>라고 하는 <요트> 경주자가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횡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이미 세계 일주의 경력이 있을 만큼 <요트> 경주에 있어서는
베테랑이었습니다.
<코요테>라고 하는 중형급 <요트>를 제작했습니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날렵한 몸체를 가진
아주 멋진 요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최신 무전 장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단독 <대서양> 횡단을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이 실패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미국>을 떠난 지
11일 만에 그 <요트>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수색대가 여러 날 수색한 결과, <포르투갈>에서 남쪽으로 720km 떨어진
바다 가운데 이 <요트>가 뒤집힌 채 떠다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수색대가 배에 접근해보니 항해사 <플랜트>는 이미 실종되고 없었습니다.
우리는 <요트>가 뒤집어 저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트>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뒤집혀
떠다닌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수색대원들이 자세히 조사해보니, 중심을 잡기 위해
<요트>의 수면 아래 용골 부분에 4톤짜리 중량을 매다는데
그것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바위에 부딪친 것도 아닌데,
어디로 갔는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플랜트>가 너무 자기 기술과 힘만 믿고 배를 만들 때부터
수면 위에 있는 보이는 부분은 굉장히 신경을 썼지만
수면 아래에 있는 이 용골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쓴 것 같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수면 위의 부분들,
곧 날렵한 몸체, 바람을 가득 안고 터질 듯이 팽팽하게 뻗쳐있는 돛,
최신 장비로 만든 무선 통신 기기 등에는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잘 만들었지만 그렇지 않는 수면 아래 용골 부분은 등한히 했던 것입니다.
풍랑이 없는 바다를 항해할 때는 아무 이상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풍랑이 불어
배가 파도를 타면서 요동하자 밑에 있는 용골 부분에
문제가 생겨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배는 뒤집히고
조종사는 실종 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평소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육신의 건강, 젊음,
우리가 하는 일의 형통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성을 쏟지만,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의 내 영혼에는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내 영혼이 육신의 건강보다도 더 무거워야 합니다.
내 영혼이 이 세상의 형통 보다도 더 무게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인생 풍랑을 만났을 때, 뒤집어 졌다가도 다시 제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영혼이 강건하면 어떤 풍랑을 만나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영혼이 강건하지 못하면 불어 닥친 파도에 넘어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IMF 이후 교회 안에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가정에 많이 있었습니다.
평소 자신만만하여 교회도 잘 안 다니고, 어쩌다가 부인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왔던 남편들이 한번 풍랑을 만나 뒤집어 지자 못 일어났습니다.
어떤 남편은 술독에 빠져 날마다 밤낮없이 술에 취하고,
어떤 남편은 누워서 끙끙 앓고, 어떤 남편은 집 밖으로 다니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낙담했었습니다.
이럴 때 누가 그런 남편들을 붙들어 주었습니까?
믿음 좋은 아내들이 붙들어 주었습니다.
똑같이 풍랑을 만났지만,
아내의 영혼은 강건했기에 남편을 붙들고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남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가정에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남편을 격려하고 그 영혼을 흔들어
깨어나도록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믿음 좋은 중고등부 어린 자녀들이 실망하고 있는
아빠에게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거예요." 위로하면서 오히려
아빠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왜냐 하면 믿음 좋은 자녀들의 영혼이 강건하기 때문에
위기에서 그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또 우리는 <코로나19> 라는 전염병으로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건강합니까?
<하나님>을 정말 즐거워하세요?
아무리 세상적인 일들이 힘들어도 잘 되어도
마음이 세상으로 기울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까?
풍랑을 만났을 때 뒤집어 졌다가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
그런 은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영혼은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영혼의 강건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수면 위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시적인 건강은 언제 없어질지 모릅니다.
내가 아무리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영혼의 건강, 내 영혼의 안전함입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강건하기 위해
다음 3가지를 꼭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9절 말씀입니다.
9절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여기에서 마음은 영혼을 가리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내가 내 몸을 잘 관리한다고 해서 내 영혼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의 영혼의 영양분을 보충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기도하십시오.
<에베소서> 3장16절 말씀입니다.
16절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우리의 속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를 사모하고 부지런히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십시오.
그럴 때 내 영혼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둘째, 순종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드나들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순종은 내 영혼의 근육과 같습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이
붙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
내 영혼에 근육이 붙어 힘이 생겨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인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왜 그 영혼이 잘된다고 <요한>이 칭찬했을까요?
그가 진리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무전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전도자들이 찾아오면 먹이고 재우고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가이오>는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 전도자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순종해야 내 영혼이 강건해집니다. 순종을 하지않는 사람은
절대로 그 영혼이 강건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힘을 빼고, 우리로 하여금
실패하도록 만들고자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과 악령들이 수시로 우리를 시험하고 공격합니다.
우리는 이 영적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말씀입니다.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유혹을 받을 때마다 넘어져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과 맞서 싸워 이기는 것이 영혼이 강건한 사람입니다.
앞서 3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영혼의 강건함을 위해서
첫째 은혜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는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이 항상 강건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영혼의 강건함을 보고
이렇게 말씀할 것입니다.
<요한3서> 1장 2절 말씀에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 모두가 받아 누릴 수 있길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