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기 사납게 쏟아지는 빗방울 보이나요
저 신나게 튀어오르는 물의 분열증
창밖을 서성이며 호시탐탐 안을 노려보는 형형색색의 눈동자들
깨어지고 다시 손잡기놀이 하며 소리 지르고 웃고 울고 발악하는 한바탕 술래잡기
수없이 얼굴 바꾸며 쏟아지고 지워지는 지구의 상상
나였는데 다시 보니 당신이었고 또 그였으며 이젠 그녀였는데 알고 보니 다 나더라
아니 다 당신이더라 하는 물기 어린 장난말
저기 찌라시 같은 내가 보이네요
그래요 우리는 애초부터 과대광고였어요
- 베로니카 中 / 박채림

심장으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겠지만,
당신에게 일생 동안, 단 한순간만이라도 붙들리고 싶더라도
당신의 문이, 마음이 열리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날아오르는 새는 얼마나 무거운지 어떤 무게가 중력을 거스르는지
우리는 가볍게 사랑하자 기분이 좋아서 나는 너한테 오늘도 지고 내일도 져야지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겨울 코트엔 온통 깃털이 묻고
공중에서 죽어가는 새는 중력을 거절하지 않네
우리는 죽은 새처럼 말이 없네
나는 너를 공기처럼 껴안아야지 헐거워져서 팔이 빠지고, 헐거워져서 다리가 빠져야지
나는 나를 줄줄 흘리고 다녀야지 나는 조심 같은 건 할 수 없고
나는 노력 같은 건 할 수 없네 오늘은 내내 어제 오전 같고 어제 오후 같고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오늘은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
러나 오늘은 발자국이 생기기에 얼마나 좋은 날인지
사람들은 전부 발자국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네 춥다 춥다 그러면서 땅만 보며 걸어 다니네
눈 내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데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났다
우리는 눈 내리는 소리처럼 말하자 나는 너한테 안 들리는 소리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를 두 손에 보듬고 걸어가야지
- 새의 위치 / 김행숙

사랑의 그림을 보는 건 공짜지만, 사랑이라는 그림을 가지는 건 그렇지 않다.
사랑을 받았다면 모든 걸 비워야 할 때가 온다. 사랑을 할 때도 마찬가지.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메리제인
우리는 요코하마에 가본 적 없지
누구보다 요코하마를 잘 알기 때문에
메리제인 가슴은 어딨니
우리는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고
누구보다 빨리 블루스를 익혔지
요코하마의 거지들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너는 걸었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
항구의 불빛이 너의 머리색을
다르게 바꾸어놓을 때까지
우리는 어느 해보다 자주 웃었고
누구보다 불행에 관한 한 열성적이었다고
메리제인 말했지
빨고 만지고 핥아도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슬픔이 지나간 얼굴로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요코하마
- 메리제인 요코하마 / 황병승

그래 꽃을 던지렴
웃는 얼굴로
아프게 맞아 줄게
꽃으로 멍들어 더 이상
질투하지 않게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그래 꽃을 던지렴
웃는 얼굴로
향기에 취해
그 사람 다시 그리워하게
힘껏 내게 꽃을 던지렴
- 그래, 꽃을 던지렴 / 최반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넘쳐 보이지만, 지금 당장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금이 가 보인다.
넘치는 것은 사랑 때문이며 금이 간 것도 사랑 때문일 텐데 그 차이는 적도와 북극만큼 거리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매화꽃이 뿌려진 시골길을
그대와 나란히 걸었다
하늘은 눈썹아래 내려앉아
황토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갈대 잎 간질이는 바람소리
남은 햇살과 함께 능선을 넘고
작은 오솔길 둘만의 그림자가 가고 있었다
작은 손, 손 안에 넣고서
가볍게 숨차는 고갯길 넘어
고갯길 다음 고갯길 또 고갯길
매화꽃도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날은 다리도 아프지 않았다
- 어젯밤 꿈에 / 변형규

이 계절 몇 사람이 온 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 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 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 당신이라는 제국 / 이병률

가끔 아주 가끔
물에 잠긴 그림자를 길어 올리듯이
나는 옛날 노래를 들어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
가끔 아주 가끔
이마를 짚고 뒤를 봐
죽은 사람이 말을 걸듯이
가끔, 아주 가끔
가끔 아주 가끔
죽은 사람이 말을 걸듯이
이마를 짚고 뒤를 봐
가끔 아주 가끔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
나는 옛날 노래를 들어
물에 잠긴 그림자를 길어 올리듯이
가끔 아주 가끔
나는 옛날 노래를 들어
이마를 짚고 뒤를 봐
- 옛날 생각 / 이능표

아, 어떻게 저렇게 고요하고도 벅차게 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이 집에서 나는 평생 가슴에 지닐 그림 한 장을 완성하고 말았습니다.
아주 귀한 그림을 얻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나이가 여든둘인지, 여든하나인지 잘 모른다고 말하며 웃습니다.
할머니의 나이를 물어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으니
할아버지 당신의 나이를 물었더라도 잘 모른다고 대답했겠지요.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아무것도 셈하지 않고, 무엇도 바라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
살다보면 사랑도 그렇게 완성될 겁니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미리 무덤을 팝니다 미리 나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을 비는 일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한 너의 오열도 오열 끝의 오한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의 지복도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궁극이 폐허입니다
한 세기가 지나갈 때마다 한 삽씩 뜨거운 땅을 파고 이 별의 핵 지대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너를 만나길 지나치게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 안에 들어가 미리 누워봅니다
생각보다 깊고 아득합니다 그렇지만 무섭고 춥습니다
너는 내 귀에 대고 거짓말 좀 잘 해주실래요 너무나 진짜 같은 완벽한 거짓말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찾듯 거짓말 덕분에 이 우주는 겨우 응석을 멈춥니다
어지럽습니다 체한 걸까요 손을 넣어 토하려다 손을 들고 질문합니다 여긴 왜 이렇게 추운가요
너는 여기로 올 때에 좀 조심해서 와주실래요
뒤를 밟는 별들과 오다 만난 유성우들은 제발 좀 따돌리고 너 혼자 유령처럼 와주실래요
내 몸은 너무 오래 개기월식을 살아온 지구 뒤편의 달,
싸늘하게 식었을 뿐 새가 가지를 털고 날아만 가도 요란을 떠는, 풍화도 침식도 없는 그늘입니다
뜨거운 속엣것이 고스란히 보존된 광대한 고요란 말입니다 춥습니다
칼을 들어 한 가지 표정을 새기느라 또 한 세기를 보냈습니다
나를 비출 거울이 없었으므로 아마도 난자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보았습니다 한 가지 표정이기를 바랍니다
피를 너무 흘려 몸이 좀 싸늘합니다
냉기 가득한 살갗에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가 반가워 죽겠습니다
쥐똥나무 꽃향기가 지독해서 귀를 틀어막고 누워 있습니다
이 꽃이 지고 나면 이 별에는 더위가 시작될 겁니다
너는 지금 간신히 내 몸속에 도착해 있습니다 해수의 밀도는 낮아집니다
간빙기를 끝내는 소리가 지구 바깥에서 우렁찹니다
깊은 땅속이 먼저 뜨거워지고 빙산은 모든 것을 묵인하고 버티려다
쩍쩍 갈라져 천둥 같은 울음을 보냅니다
눈물이 이토록 범람하면 지형이 곧 바귈 겁니다
내 몸에서 거대한 얼음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서로 부딪쳐 얼음 멍이 들고 있습니다 무정할 수는 없는 순간입니다
-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 김소연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었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온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한 땅의 열매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둥근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 수박 / 허수경

심장으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겠지만,
당신에게 일생 동안, 단 한순간만이라도 붙들리고 싶더라도 당신의 문이,
마음이 열리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출처 : http://cafe.daum.net/ok1221/6yIR/1114429?svc=cafefavorite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