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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회암사는 19세기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봉선사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 '檜巖寺'조의 연혁을 보면 1821년(순조 21) 광주에 사는 이응준(李應竣)이라는 자가 술사(術士)인 조대진(趙大鎭)의 이곳으로 선친의 묘를 옮기면 번성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법당 자리로 선친의 묘를 옮기기 위해 지공과 무학의 부도와 탑비를 헐고 깨뜨려버렸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1828년(순조 28) 부도와 탑비를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을 겪고 난 후 인근 사찰의 대중들은 모여 삼화상(三和尙)의 부도와 탑비를 수호할 가람을 건립하고, 옛 회암사의 명맥을 잇는다는 의미로 회암사라 했다고 한다. |
요사와 강당을 겸하는 건물로 보인다. |
조사당으로 진공화상(指空和尙), 나옹화상(懶翁和尙), 무학화상(無學和尙) 즉 삼화상(三和尙)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
삼성각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된 지공화상 부도비로 좌측은 1821년 훼손 후에 1828년에 새로 만든 부도비고 우측은 기존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다. 뒤로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인 지공화상 부도와 석등이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다. 회암사에 서 있는 이 부도는 회암사를 창건한 인도인 승려 지공선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많이 사용된 양식으로, 모든 부재가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은 3단으로 올렸는데 그 중 가운데받침돌만 배가 볼록하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탑신(塔身)은 둥근 공모양이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선이 두툼하며 처마의 각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머리장식들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석등은 모든 부재가 4각으로, 3단을 이루는 받침돌 위에 등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과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화사석은 앞뒷면 2곳에만 창을 내었고, 지붕돌은 부도에서와 같이 윗면의 네 모서리선이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두 작품 모두 1372년(공민왕 21년)에 세운 것이다. |
서천국 제납박타존자 지공화상(西天國 提納薄陀尊者 指空和尙)(?~1363)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禪賢)이다. 가섭(迦葉)으로부터 108세라고 한다. 인도의 동북지방 갠지즈강 유역에 위치했던 마가다국 만왕(滿王)의 왕자로 태어나 8세 때 중동부 인도에 위치한 나란다사 율현(律賢)에서 출가하였다. 19세때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의 보명(普明)에게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왔다.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나옹화상 부도와 석등으로 지공화상의 부도와 석등 뒷쪽으로 계단을 따라 오르면 있다. 보세존자 나옹화상은 여주 신륵사의 조사당 뒷편에 가면 자세히 알 수 있다. |
고려국 공민왕사 나옹화상(高麗國 恭愍王師 懶翁和尙)(1320∼1376)
고려말의 고승. 혜근(彗勤)이라고도 쓴다. 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상을 느끼고, 문경 공덕산 묘적암(妙寂 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회암사에서 4년에 걸친 대불사를 마치고 주석(住錫:승려가 지팡이를 세워놓고 머물렀다는 뜻)하여 문수회를 벌였는데, 그의 명망을 듣고 중장불사에 너무 많은 백성이 시주에 참여하느라 절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이인임 일파는 산문을 막고 그들을 돌려보냈으나 밀려드는 군중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문수회를 금지시켰으나 나옹화상은 그대로 강행하였다. 결국 이인임 일파는 공민왕의 왕사인 나옹화상을 ‘법력에 매료된 부녀자들이 일손을 멈추고 길이 막힐 지경으로 회암사에 모여들어 생업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을 이유로 왕명으로 밀양의 영원사로 유배를 떠나도록 하였다.
나옹화상은 이 무렵 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열반문을 통하여 길을 떠나 7일만에 여주에 도착하여 신륵사에 머물다가 입적한 것이다. |
조선국 태조왕사 무학화상(朝鮮國 太祖王師 無學和尙)(1327∼1405)
삼기(三岐:합천군 삼가면)출신으로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5) 소지(小止)에게 출가하였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며 부도암에 머물다가 1346년(충목왕 2) "능엄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된 무학화상 부도비로 1821년 훼손 후에 지공화상 부도비와 동일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塔)
종 목 : 보물 제388호 수 량 : 면적 1기 소 유 자 : 회암사 관 리 자 : 회암사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탑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 놓이고 탑신(塔身)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부분에는 목조건축을 흉내낸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돌 하나만 올려놓아 간소화된 형태를 보인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탑은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도 가지런하다. 무학대사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문화재청>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앞 쌍사자 석등(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塔 앞 雙獅子 石燈)
종 목 : 보물 제389호 수 량 : 면적 1기 소 유 자 : 회암사 관 리 자 : 회암사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指空)이 창건한 사찰로, 그 제자인 나옹(懶翁)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 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하나로 붙여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받침돌은 쌍사자를 두어 신라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쌍사자는 가슴과 배가 서로 붙어 입체감이 없고 엉덩이가 밑에 닿아 부자연스럽다. 윗받침돌에는 8개의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혀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2개의 석재를 좌 우에 놓아 그 간격으로 생긴 2개의 공간이 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두꺼우며 처마밑이 반원모양으로 들려 있고, 경사면은 네 귀퉁이가 두툼하게 도드라져 뚜렷이 표현되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근 돌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있다. 기본형이 4각인 형태로 삼국시대이래 고유의 8각 석등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보물 제656호)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문화재청>. |
쌍사자 석등을 보고 나와 집사람은 웃었다. 우리집 햄스터는 먹이를 주면, 우리에게서 뺐을려고 그것을 물고 두발로 지탱하면서 용을 쓰는데, 그모습이 쌍사자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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