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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공동체의 회복(어버이주일)
신명기 5:16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부모에 관한 글, 하나를 소개하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배철현 교수의 <어버이 날>에 관한 글입니다.
나는 부모를 통하지 않고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부모는 나를 만들기 위해 신이 정해 놓은 오묘한 창조행위에 동참하였다. 자손을 위해 매일매일 기도하시는 마음은 나를 지탱시키는 힘이다. 부모는 나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고 나의 기쁨은 자신의 기쁨처럼 여긴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마음이다. 내가 아플 때, 사람들은 나를 동정하지만, 자신들의 손해를 감수하고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내가 아플 때, 연민을 느낄 뿐만 아니라, 내 아픔을 자신이 지고 그 아픔을 덜어주려는 존재는 부모밖에는 없다. 내가 기쁠 때, 더 기뻐하는 존재는 부모다. 어버이날은 우리에게 그런 심성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라는 날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나도 부모가 되기 때문이다.
배철현의 매일묵상 “연민憐憫” 중에서
■ 지난 한 주간의 뉴스
지난 5월 7일(화) 아침 뉴스에, 오랫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30대 여성이 부모와 다툰 후, 부모 앞에서 분신해 결국 숨을 거뒀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이 일로 30대 여성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부모님은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팔에만 화상을 입은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전신 3도 화상이라 위중한 상태라고 합니다. 뉴스에서는 잠자던 딸이 부모가 시끄럽게 한다며 다툼이 일어난 후 딸이 홧김에 분신했다는 자극적인 내용만 다루고 끝납니다. 마침 어버이날을 앞둔 날이니 30대 여성은 ‘패륜적인 행동을 한 불효막심한 딸’로 각인됩니다. 대한민국의 뉴스는 대체로 조회 수나 시청률을 올리는 것에만 열중해서 자극적인 내용과 가십거리가 될만한 것들만 반복해서 전합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 집중취재를 한들,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해석하고 반복해서 재생산하며 여론을 호도합니다. 저는 제대로 된 뉴스라면, ‘어떤 일이 있었다’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원인과 그 사건이 뉴스가 된 의미도 충분히 다뤄져야 뉴스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가십거리, 사건’만 보도하는 뉴스에 길들어 있습니다.
이 뉴스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날, 2019년도 국가공무원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의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었습니다. 35세였던 이 여성은 수년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합격하지 못했고, 시인 등단도 준비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35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번번이 거절당합니다. 여성은 여성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민감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분신한 여성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방법 말고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이 여성의 마음에는 화가 가득했을 것이고, 분노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십 년이 넘는 시간을 이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며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그녀는 홀로 그 모든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녀를 지켜보는 부모의 입장도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가정의 달을 무색하게도 7천만 원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온 가족이 동반 자살한 사건, 친아버지에게는 폭행을 당하고, 의붓아버지에게는 성폭행을 당하고, 친어머니에게는 살해를 방조 당한 12세 소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라 뉴스에는 나오지 않지만 매년 12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고 있음에도 썩은 물과 기아로 진흙 쿠키를 먹는 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5초마다 한 명씩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 왜 이런 문제가 지속해서 발생할까?
여러분,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은 단순한 가족사이며, 개인사에 불과한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독일 신학자이며 목사인 마르틴 뉘밀러(1892년-1984년)가 쓴 유명한 시 일부입니다.
처음 그들이 유대인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 그들이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 …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를 위해 항변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남의 문제로 보고 넘길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은 신자본주의를 지배하고 있는 ‘맘몬의 질서’가 만들어낸 폭력임을 분명하게 봐야 합니다. 경쟁에서 실패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신자본주의 질서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저 남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언젠가 그것은 나의 문제가 될 것이고, 그런 문제에 내가 직면했을 때, 그들도 나처럼 무관심할 것입니다.
맘몬을 신으로 숭배하며 살게 하는 신자본주의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있는 위대한 존재성을 부정하게 합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않아도, 시인으로 등단하지 않아도 의미있는 다른 삶이 있는데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믿고 살아가게 합니다. 매사에 남과 비교하면서 좌절하고 혹은 우쭐대면서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하여 소중했던 가치들은 모두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게 하고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진 하늘 아래서, 인간 사이의 연대와 협력이 사라진 시대에서, 가족이 해체된 시대에서 아무런 이정표도 없이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 호모데우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882년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니체는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와 16세기 과학혁명 시대, 17세기의 계몽주의, 18세기의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 19세기의 실증주의와 다윈의 진화론 등이 등장하면서 인본주의 가치가 신처럼 숭배되는 시대를 보면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부당하게 억눌렸던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 즉 신본주의 시대가 갔습니다. 이제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면서 본격적으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 시대로 넘어갑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비로소 신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인간은 신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 대혁명 이후 230년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이 된 시대, 인간의 이성이 신으로 등극된 시대에 인간은 한껏 자유를 누렸을까요? 결론만 말씀드린다면, 인간의 이성이 신으로 등극한 이후, 자연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갈수록 무의미해졌습니다. 사회는 무한경쟁의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결국,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인간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삶과 지구를 한순간에 초토화시켜 버릴 정도가 되었고,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누구도 막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도 미세먼지와 플라스틱공해, 지구온난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석학들이 그냥 멸망의 길을 가는 행렬을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 해체된 가족 – 무한경쟁과 연결 지어서 다시
인간이 신이 된 시대, 무한경쟁 시대엔 어떤 가치들을 강조합니까? 1등이 되는 것, 더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 성공하는 것, 누군가를 밟고 올라 서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는 것을 성공으로 여깁니다. 독한 개인의 성공신화가 쏟아져 나오고 이러한 성공신화들을 보며 개인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고, 다그쳐야 합니다. 자존감은 물론 마음의 여유를 잃어갑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쉽게 자존감을 경쟁 사회 속에 빼앗기고, 타인을 돌볼 여유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수많은 사회의 문제들에, 이웃의 아픔에 ‘침묵’하게 됩니다. 현실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도 심각한 것 같지만, 지금 당장 여유가 없으니 관심 갖기도 어렵고 이웃의 편에 서기도 각박한 것이지요.
이것이 현실입니다. 다만, 이 현실이 나만을 생각하는 것에 대한 합리화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현실을 객관적으로 자각했으니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굴레에서 한 걸음 나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는 개인들이 늘어난 공동체야말로 타인의 일에 침묵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입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기만족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끕니다.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보수기독교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증명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치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해체된 가족, 공동체의 회복
이렇게 혈연의 가족까지도 해체되는 상황에서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쇠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북노회 지난 116회 회의록에 의하면 2018년 한해에만 300명이 넘는 교인이 줄었습니다. 2017년에는 500여 명이 줄었습니다. 해마다 저희 한남교회만 한 교회 3~4개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의 문제요, 기독교의 문제만이 아니라 타 종교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종교뿐 아닙니다. 구호단체들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공동체 혹은 가족성’을 갖는 것은 모두 해체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누가 이렇게 할까요?
연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서로의 문제를 나누고, 문제를 해결을 위해 함께 나서는 일을 꺼리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마치, 자신이 유토피아를 만들 능력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면서 개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저항하지 못하게 하려면 철저하게 개인주의화 시켜야 합니다. 이런 거짓과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 가족공동체의 회복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첫 번째 계명으로 ‘부모 공경’이라는 규례를 주셨습니다. 우선 ‘부모’의 일차적인 뜻은 ‘혈연적인 의미’로서의 부모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라는 말씀은 부모가 계신 모든 분께 복된 말씀입니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순종하시고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시고 나면, 추모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단지 혈연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확장된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확장된 의미로서 ’부모‘는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돕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태계도 그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내가 하루를 보내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수많은 직종에서 종사하는 수많은 이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일 매일을 이들 덕분에 살아가므로, 그들도 우리의 부모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두가 우리의 부모요, 감사의 대상이요, 공경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개인주의와 ‘신자본주의의 마몬’이 자리할 곳은 없습니다. 여러분을 돕는 이웃, 모두에게 감사하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가족공동체를 이뤄가는 첫걸음입니다. ”당신이 있어, 내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부모 되시는 분들은 자녀에게 모범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녀가 본 받고 싶어하는 부모가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성서는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으로 ‘주의 교훈과 훈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여,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누리게 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신앙의 유산은 말로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삶으로 물려줄 수 있습니다.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또 이웃으로 인해 도움받기도 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부모를 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자녀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언제나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도우셔서 바른길로 가게 하시고, 복된 길을 열어주십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대량생산 공장에서 똑같은 제품을 찍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그렇게 키우고 싶은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색깔, 재능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노력, 이 둘의 만나게 되면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할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가족공동체의 해체현상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가족공동체를 회복하려면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상실한 하나님을 회복해야 합니다. 상실한 하나님을 회복하는 공동체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한남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한남교회를 통해서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으시고, 한남교회에서 하나님의 한 가족 되심을 체험하십시오. 제직들은 한남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가족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힘쓰십시오. 교우들끼리 서로 감사하며, 가족처럼 사랑하십시오. 그리하여 가족공동체를 회복하십시오. 어버이 주일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족공동체’를 회복하라고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