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 하 5;13-6;11. 헤브론을 떠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2022. 11. 13.
다윗은 유다의 왕으로 추대를 받았던 그리고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잊을 수 없는 곳이 헤브론입니다. 헤브론은 하나님께서 45년 동안 꿈과 비전을 내려놓지 않았던 갈렙의 요청에 응답하신 최고의 성지를 회복시킨 거룩하고 복된 땅입니다. 헤브론은 거룩함의 전통이 세워진 유다의 중심입니다. 쌍두마차의 끝이 어디이며 질서와 요청이 무엇이며 진정한 동료와 동행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 곳입니다. 그리고 이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이곳에서 기름 부음을 받 아야만 실제로 사역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사역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7년 6개월 동안 유다의 거룩함을 드러내며 세운 가장 빛난 사역이었습니다. 태도와 자세가 반듯했습니 다. 거짓이 없고 진실함으로 유다족속의 삶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은 통합 이 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전체 12지파를 이끄는 실제의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때까지 예루살렘을 거주하고 있던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고 그곳에 다윗 성인 시온 산성을 건축했습니 다. 5;9-12.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 을 둘러 쌓으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두 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 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시온 산성을 쌓으니까 점점 하는 것마다, 되는 일마 다 너무나 다 잘 풀리고 온전하게 해결이 되고 만들어져서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강성하니까? 사방에서 사절단이 옵니다. 그냥오지 않고 사람과 전문가와 건축 재료를 가지고 옵니다. 그 때에 다윗이 깨닫게 되는 귀한 내용이 여호와께서 다윗을 세우시고 지키시고 책임을 지신 이 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12지피와 통일의 중심과 거룩함의 상징인 예루살렘에서의 개인 다 윗의 활동의 내용이 나옵니다. 5;13-16.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 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 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랴다 와 엘리벨렛이었더라. 이 내용은 헤브론을 떠난 예루살렘에서의 내용입니다. 다윗의 시작은 언제나 하나님을 위하여 이었습니다. 다윗의 삶의 주제는 항상 하나님을 위하여입니다. 다윗 은 지금 이전에도 하나님께 묻고 살아 왔지만 지금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에도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언제나 어디서나 사람은 자세와 태도가 중요합니다. 자세와 태도가 사람의 길을 열어 놓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참으로 태도와 자세가 중요한데 이것들을 간과 하고 살아 갈 때가 너무 많고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아버지의 몇 마리 안 되는 양 무리를, 너 무 적어서 소홀히 해도 되는 그의 삶에서도 다윗은 성심을 다하고 성실하게 양을 목양 하면서 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긴 양으로 여기며, 목양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 는 믿음의 행동 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자기의 전체를 드려서 하나님께 충성 했습니다. 사무 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그 순간과 하나님의 영이 임재 한 이후에도 하나님을 위하 여 이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골리앗도 넘어뜨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아버지의 심부름 을 수행했습니다. 도망 다니는 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입니다. 망명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침을 흘리고 대문을 긁적거리고 미친 척 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위하여 라는 태도와 자세가 나의 미래를 바꾸어 놓 습니다. 나의 내일을 창대케 합니다. 나의 꿈과 소망과 비전을 이루어 놓습니다. 다윗의 태도 와 자세는 언제나 하나님을 위하여 입니다. 그런데 그런 태도와 자세를 지닌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은 다윗을 위험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내시고 끄집어 내셔서 그를 지금 통일 왕국의 왕 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자세가 이렇게 나를 바꾸어 놓고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자세가 이처럼 중요 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 습니까? 나의 꿈과 소망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달려왔던 그 자세 태 도가 계속 지속되던가요? 성공하기 전에는 이럴 수 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이런 자세와 태도를 유지 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가지고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자세와 태도를 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공 인생 이후에는 달라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 입니다. 성공하고 나면 이모로 저모로 나도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가고 뻣뻣하여 집니다. 그 래서 매사 지금까지 지녔던 자세와 태도가 흐트러집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단점입니다. 성공 이전과 성공이후가 다릅니다. 목표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는 신발 끈을 동여 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른 이후에는 끈을 풀고 느슨하게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의 태도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성공 인생이 되어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세와 태도가 변하지 않 았습니다. 다윗이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을 위하여 입니다. 그의 삶은 시종 일관 똑 같았습니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꿈을 꿀 때나 꿈을 이룬 다음이 똑 같습니다. 이 것 이 다윗이 성공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다윗의 장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시종일관, 하나님만 위하는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 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으신 영광 때문에 여러분의 미래가 다윗처럼 창대케 되고 다윗을 축복하신 것처럼 여러분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시작은 무엇입니까?
1. 통일 왕국이 된 이후의 다윗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통일 왕국의 왕이 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우선 합니까? 시온 성이러고 불리는 다윗 성을 회복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던 일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제일먼저 실행에 옮겼습니다. 자신과 자신을 보호하고 지켰 던 사람들을 위해서 잔치를 배설하고, 연회를 베푼 것이 아니라, 통일왕국의 왕이 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서 약속 하셨던 다윗 성이라고 부르는 시온 성을 여 부스 민족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려놓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시온 성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일로 시온성에 하나님이 계시게 되고 하나님이 다윗 의 다윗성에 함께 계심으로 다윗은 점점 강성한 나라와 민족과 사람이 되었습니다. 5:10절의 말씀은 이런 말씀이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한 모퉁이를 우선 하나님을 위해서 내어 놓으시면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게 되고 여러분의 삶의 한 모퉁이에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점점 강성하게 하시고 창대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통일 왕국의 왕이 된 이후에도 그 시작 이 하나님을 위하여 입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가 점점 다윗이 강성케 되는 이유가 됩니다. 여 러분, 점점 강성케 되는 일이 무엇을 통하여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려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있어야 합니다. 시종일관 하나님을 위하 여 라는 태도와 자세입니다. 그러면 점점 흥왕케 됩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다 윗이 점점 강성케 되니까 이웃의, 주변의 왕들이 다윗을 넘보지 못하고 도리어 다윗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다윗에게 조공을 받칩니다. 여러분, 내 자신이 영광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은 전 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이 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우하는가는 나의 선한 영향력도 있지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강성케 하시고 올려놓으신 하나님의 은 혜입니다. 5:11,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 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다윗이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두로 왕 히람이라는 사람이 사절 을 보내고, 집을 짓는 백향 목을 보내고, 목수를 보내고, 석공들을 보내고. 그래서 다윗을 위 하여 집을 지어 드렸답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다윗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하여 하시는 모든 것은 땅에 떨어져 없어지지 않습니다.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 는데 30, 60, 100, 1000배로 반드시 돌아옵니다. 공수표가 아니고, 헛수고가 아니고,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반드시 되갚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상상 할 수 없도록 갚으십니다. 그래 서 다윗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5:12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 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 간증하는데 하나님께서 축복 하여 주신 것을 다윗이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당신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 들을 높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이 것이 주신 복을 누리는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 것을 모르 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느 때에도 자기의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 인지 아십니까? 자기의 현재가 누구로부터 이루어 졌는지를 밝히 알면 변하지 않습니다. 배은 망덕이 왜 일어납니까? 자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모를 때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그렇 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첫 번째가 무엇 입니까? 자기의 현재의 모습 을 만드신 그 누군가를 알면 자기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를 세우신 분이 하 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을 높이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기본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을 아니라. 간단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람들이 버리기 쉽고, 잊어버리기 쉬운 것을 알고 지켜냅니다. 여러분! 얼마나 다윗이 위대 합니까? 그런데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이 것이 거추장스럽 고 존심 상하고 그래서 모른 척하는데 사람들은 이 것을 배반하고 배은망덕하고 자기를 몰라 준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주변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제가 늘 강조 하는 것이 있습 니다. 오늘 나를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게 하신 하나님과 사람을 잊지 마시고 늘 감사해야 합 니다. 왜요? 나의 자세와 태도가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더 많은 것으로 은혜 받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 내용은 언제나 어디서나 동일합니다. 배반하지 않고, 떠나지도 않 고, 뒤 돌아서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저와 같이 함께 동행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 는 모든 분들에게도 늘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삽니다. 물론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만 드시고, 그리고 실제로 땀을 흘리시고 헌신하시고 봉사하셨던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여러분을 평생 잊지 않을 것 입니다. 저도 다윗처럼 압니다. 높이신 것과 세 우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을 아니라. 간증하며 영광을 돌리며, 그래서 그 영광이 다시 나에게 되갚으시는 복된 하나님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 원을 드립니다.
2. 그런데 오늘 본문 시작과 함께 헤브론을 떠났고 예루살렘에서 큰 을 했습니다. 무슨 큰일 을 했나요? 5;13-16.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 죄송합니다. 처와 첩을 더 두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처와 처첩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 러나 5;13―16절은 자녀들의 이름이 자세히 나옵니다. 무엇을 의미하나요? 5;17―21절은 바알 부라심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나오고, 5;22―25절은 르바임 골짜기에서 뽕나무이야기가 나옵니 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첫 번째는 자녀 때문에 영광을 받는 다윗을 보고, 두 번째는 물을 흩음같이 대적들을 물리친 전쟁의 승리를 이야기 하고, 세 번째는 르바임 골짜기의 승리를 말 씀합니다. 왜 이런 내용이 등장을 하나요? 처와 처첩 때문에 다윗을 징계하시는 내용입니까? 분명히 다윗은 헤브론에 있을 때 보다는 좀 그렇습니다. 자제하고 절제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 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잘못 한 것을 묻어두고 자녀들의 이름을 등장시킵니다. 그 것도 자상하고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들의 이름을 몰라도 성경해석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녀들의 이름을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바알 브라심에서의 물을 흩음같이 대적들을 물리친 전쟁의 승리를 이야기 하 고, 세 번째는 르바임 골짜기의 승리를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은 ~~위하여, ~~알았다 는 태도와 자세 때문에, 이것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승승장구 하는 것을 봅니 다. 다윗이 하는 일마다 잘됩니다. 여러분, 안 되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접시 물에 코를 박는다고 합니다. 안 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안 되는데 그런데 다윗은 하는 것마다 잘됩니다. ~~ 위하여와 ~~을 알았다는 태도와 자세 때문입니다.
2-1. 자녀의 이름입니다. 여러분, 말씀하시고 있는 중요한 것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 러분, 자녀의 잘됨이 부모의 면류관 인줄로 믿습니다. 자녀가 잘되고 세상 가운데 이름을 기 록 할 수 있다는 것이 어디 그냥 되는 일입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자녀의 이름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왜 기록하여 놓았습니까? 다윗이 하는 것 마다 잘 된다는 말씀 입니다. 후에 귀가 얇은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머리를 들기도 합니다만, 다윗 은 자녀를 잘 키웠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을 누가 축복해 주셨나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녀 문제도 하나님께서 하셔야 자녀들이 부모의 면류관이 됩니다.
2-2. 두 번째는 블레셋의 대적들을 물을 흩듯이 대적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 묻습니다. 여기 물이 한 초롱 있습니다. 뿌리는 것 쉽습니까, 아니면 어렵습니까?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어린아이들도 합니다. 그런데 나를 향하여 다가오는 대적의 그 한사람도 버겁습니다. 힘으로 하면 이길 수도 있는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숨어서 말이나 퍼트리고 이야기 거리만 만들어 도 귀찮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강성한 블레셋 군대의 대적이니까 나보다 월등히 실력이 있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대적이 즐비한데 귀찮은 것이 아니고 무섭습니다. 괴로운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죽음이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적들을 물을 흩어 버 리는 것처럼 대적들을 물리쳤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바알부라심 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 렇게 할 수 있지요? ~~위하여, ~~아니라,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을 향하여 다가오 는 대적들이 바알브라심이 됩니다.
2-3. 세 번째는 르바임 골짜기의 뽕나무 사건입니다. 이것도 전쟁에서의 다윗의 승리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도 뒤에서 엄습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그 것도 뽕나무에서 거름 소리가 나 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앞서서 먼저 진두지휘하고 공격을 합니다. 하나 님께서 다 하시고 승리의 결과는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위하여, ~~아 니라.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태도와 자세가 시종일관 동일 하니까 하나님 께서 연속해서 다윗이 하는 것 마다 축복 하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자손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모든 것이 여러분들이 하시는 것마다 하나님 께서 쉽게 앞장서서 이루시고 만들어 가시고 그리고 아름다운 승리의 결과를 물 붓듯이 부으 심을 받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열심히 문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열심 때문에 간과하고 지나가는 내 용 속에 문제 제기입니다. 여러분, 모로 가도 서울만 가고 모로 가도 동경만 가면 되는 시절 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의미를 두고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 6장의 시작과 같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고 모로 가도 동경만 가면 된다는 것은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서울과 동경을 가는 길은 여러 가지 입니다. 그런데 바르게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 바르게 가는 길을 버리고 다른 길과 나쁜 길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용납되고 그 것이 ‘선’으로 인식되는 것을 볼 때가 있 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막야 될 일이 온 사회와 세대 속에 만연될 때, 인간성은 끝없이 축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래서입 니다. 과정이 악한데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비극이고 재앙입니다. 차라리 결과가 나쁘거나 없는 게 좋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결과도 중요하게 보시지만 이 보다는 더욱 과정을 물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원래 결과는 우리 몫이 아니라 하나님 몫 입니다. 과정을 더욱 중요하게 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반드시 올바르고 성실한 과 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과정을 더욱 중요하게 보시는 것을 생명으로 여겨야 하나님은 일을 이루시고 만드십니다. 지금 다윗이 나라가 기틀이 잡히고 안정이 되자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 렘으로 옮기기로 합니다. 이 것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한 다윗의 행동이고 생각입니다. 하나 님을 알기 때문에 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말씀 안에서 위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런 사실을 간과 합니다. 급한 마음에 사 울 왕 때부터 방치되어 있던 법궤가 내내 다윗의 마음에 걸려 애를 태웠습니다. 여러분, 하나 님 현현의 상징인 법궤를 그냥 옮길 수는 없었습니다. 다윗이 최선의 예우를 갖추고 이동을 시킵니다, 조그만 궤짝 하나 옮기는데 이스라엘군의 정예 3만 명을 호위병으로 동원합니다. 그러나 법궤를 옮기는 일은 무참히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하나님을 아 는 일이 왜 실패로 끝납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대로 하지 않았고, 또 거기에는 인 간의 교만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할 법궤를 수레로 옮긴 것은 웃사 와 아효의 생각이었지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다윗도 제상장인 그들의 권위에 쉽사리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열심히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법궤를 수도로 옮겨 오려던 1 차 계획은 하나님이 웃사를 치시면서 실패하고 맙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하여도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왜 호세아 선자자가 이스라엘 백성 들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공동체이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안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을 하나님을 말씀대로 알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실패를 합니 다. 오늘 다윗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만드시고 어려워도 그것 대로 시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하고 두 번째 는 우리의 교만을 경계하신 까닭이고 결국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말씀을 드립니다. 길은 사람들이 정말 자주 쓰는 흔한 말입니다. 이상하게 이 한 글 자의 단어가 마음에 와 닿고 참 좋습니다. 그 어감이 입에 착 감깁니다. 긴 세월 참 친구처럼 다정하게 긴 여운을 줍니다. 그런데 길이란 단어는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에움길이라는 길이 있습니다. 빙 둘러서 가는 멀고 굽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둘레를 빙 둘러싸다는 동사 에 우다 에서 나왔습니다. 지름길은 질러가서 가까운 길이고, 에움길은 에둘러 가서 먼 길입니다. 길은 순수 우리말입니다. 한자를 쓰기 전부터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길 이름에는 질러가 거나 넓은 길보다 돌아가거나 좁고 험한 길에 붙은 이름이 훨씬 많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 우리 인생의 여정이 길 아닙니까? 집 뒤편의 뒤안길과 마을의 좁은 골목길과 꼬불꼬 불한 논두렁 위로 난 논틀길과 거칠고 잡풀이 무성한 푸서릿 길과 좁고 호젓한 오솔길과 휘어 진 후밋길과 낮은 산비탈 기슭에 난 자드락길과 돌이 많이 깔린 돌너덜길과 사람의 자취가 거 의 없는 자욱 길과 강가나 바닷가 벼랑의 험한 벼룻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숫눈길을 아시나 요? 눈이 소복이 내린 뒤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그대의 첫 발자국을 기다리는 길입니 다. 길이라는 단어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참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사유 적입니다. 도로나 거 리가 주는 어감과는 완전 다릅니다. 길은 단순히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없다든지, 내 갈 길을 가야겠다는 표현에서 길은 삶에서의 방법이거나 삶 그 자체입니다. 이념적인 길의 표현인 도(道)라고 부르는 길이 있습니다. way 와 street은 다릅니다. 우리는 평생 길 위에 있습니다. 누구인가는 헤매고, 누구인가는 잘못된 길로 가고, 누구는 한 길을 묵묵히 갑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탄탄대로가 있으면 막다른 골목도 있습니다. 세상에 같은 길은 없습니다. 나만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프랭크 시내트라는 Yes, it was my way이었고 I did it my way라고 했습니 다. 동반과 동행자의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인가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로버트 프 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있습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 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여러분, 길은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도 존재하지만 떠나기 위해서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길을 간다는 말보다 길을 떠난다는 말이 낭 만적이고 애잔하고 결연합니다. 결국 우리는 길 위에서 길을 물으며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 이 곧 길이요, 우리의 발이 삶입니다. 입신양명의 길이거나, 고행의 길이거나, 득도의 길이거 나, 산티아고 길이거나, 바이칼 호수의 자작나무 숲길이거나, 동네 둘레길이거나 ~~, 지름길을 택할 것인가? 에움길로 돌아서 갈 것인가? 인생의 길은 결국은 속도와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 름길로 가면 일찍 이루겠지만 그만큼 삶에서 누락되고 생략되는 것이 많습니다. 에움길로 가 면 늦지만 많이 봅니다. 꽃구경도 하고, 새소리와 바람소리도 듣고, 동반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사람이 마음을 나누고 대화를 합니다. 여러분, 사랑도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사랑은 차표 한 장으로 쉽게 가는 지름길이 아니고, 수만 갈래의 에움길을 돌고 돌아서 이루는 것입니다. 그 래서 사랑의 신산함을 에움길로 묘사했는데,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 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여러분,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 AM THE WAY, I AM THE TRUTH, I AM THE LIFE. 예수님이 길이고 하나님이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길입니다. WAY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결과 때문에 에움길을 가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 습니다. 그러면 왜 이 유일한 길을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만드시고 어려워 도 그것대로 시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하고 두 번째는 우리의 교만을 경계하신 까닭이고 결국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 여러 과정들을 거치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말씀의 실천과 겸손입니 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잘못된 과정은 혹 결과가 좋더라 도 잠시일 뿐더러 그 결과 자체가 나의 인생의 WAY를 무너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르 고 성실한 과정은 돌아가는 것 같더라도 빠른 길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마련하신 법 칙대로 갈 것에 목매어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늦 고 미련한 길 같지만 정해진 과정 따라 가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결과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하시든지 하나 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 때문에 하시는 것도 말씀에 기초하여 하시면 여러분의 미래는 열려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