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까 경(S35:103)Uddaka-sutta
3. "비구들이여, 웃다까 라마뿟따(*1)는 이렇게 공언하였다.
‘참으로 이것이 지혜의 달인(*2) 참으로 이것이 일체승자(*3)
참으로 이것이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이니 그는 [이것을] 파내버렸도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혜의 달인이 아니면서도 ‘나는 지혜의 달인이다.’라고 말하고,
일체승자가 아니면서도 ‘나는 일체승자다.’라고 말하고,
종기의 뿌리를 파내지 못했으면서도 ‘나의 종기의 뿌리는 파내어졌다.’라고 말한다.
(*1)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기 전에 만났던 두 번째 스승이었다.
(*2) “‘지혜의 달인(vedagū)’이라는 것은
‘나는 전적으로 지혜의 달인이다. 베다(Veda)라 불리는 지혜(ñāṇa)를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것(neyya)에 도달했다(gata).
혹은 베다에 도달했다. 증득했다, 나는 현자(paṇdita)이다.’라는 뜻이다.”(SA.ⅱ.386)
웃다까 라마뿟따가 바라문교 수행자였기 때문에 주석서는 vedagū를 위와 같이 해석했다.
그러나 vedagū는 불교에서 받아들여져서 아라한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그래서 지혜(veda)의 달인(gū)으로 옮겼다.
(*3) “‘일체승자(sabba-ji)'라는 것은 전적으로 모든 윤회(sabba-vaṭṭa)를 이기고 승리하여
나는 확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SA.ⅱ.386)
4. “비구들이여, 여기 바르게 말하는 비구가 그것을 말해야 한다.
‘참으로 이것이 지혜의 달인 참으로 이것이 일체승자
참으로 이것이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이니 그는 [이것을] 파내버렸도다.’라고”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지혜의 달인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지혜의 달인이다.”
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일체승자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안 뒤
취착 없이 해탈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일체승자다.”
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를 파내버리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서 종기라는 것은 이 몸을 두고 한 말이다.
그것은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4)
(*4) “여기서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를 통해서는 증장(vaḍḍhi)을 설하셨고,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를 통해서는 쇠퇴(parihāni)를 설하셨다.
이와 같이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몸의 증장과 쇠퇴와 생성과 부서짐을 설하셨다.” (SA.ⅱ.387)
비구들이여, 종기의 뿌리라는 것은 갈애를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비구의 갈애는 제거되었고 그 뿌리가 잘렸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를 파내버렸다.”
8. "비구들이여, 웃다까 라마뿟따는 이렇게 공언하였다.
‘참으로 이것이 지혜의 달인 참으로 이것이 일체승자
참으로 이것이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이니 그는 [이것을] 파내버렸도다.’
그러나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혜의 달인이 아니면서도 ‘나는 지혜의 달인이다.’라고 말하고,
일체승자가 아니면서도 ‘나는 일체승자다.’라고 말하고,
종기의 뿌리를 파내지 못했으면서도 ‘나의 종기의 뿌리는 파내어졌다.’라고 말한다.”
9. “비구들이여, 여기 바르게 말하는 비구가 그것을 말해야 한다.
‘참으로 이것이 지혜의 달인, 참으로 이것이 일체승자,
참으로 이것이 아직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이니 그는 [이것을] 파내버렸도다.’라고”
각묵스님 옮김 『상윳따니까야』 4권 233-236쪽
첫댓글 이 경을 보면 ... 육촉입처에서 지혜의 달인(vedagū)과 일체승자(sabba-ji)가 나오네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안 뒤 취착 없이 해탈한다.>
육촉을 제공하는 육근은 이 몸(身, 까야)에 붙어있는 문인데
여기서는 이 몸을 종기라고 하시고...
이 몸, 즉 종기의 뿌리를 갈애라고 하시니.... 이미 생긴 몸을 버릴 수는 없고....
이미 생긴 이몸을 잘 이용해서 지혜의 달인(vedagū)과 일체승자(sabba-ji)가 되어야할텐데요...
How???
@해맑은 How???
혹시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할 때 ...
내 입장에서 보는 邪見을 버리고
이치에 맞는 숙고, 마음과 대상을 모두 연기된 법으로 보는 눈... 正見으로서...
종기의 뿌리인 갈애를 소멸한다...???
Yāvatā, āvuso, channaṃ phassāyatanānaṃ gati tāvatā papañcassa gati;
yāvatā papañcassa gati tāvatā channaṃ phassāyatanānaṃ gati.
Channaṃ, āvuso, phassāyatanānaṃ asesavirāganirodhā papañcanirodho papañcavūpasamo’’ti.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있는 한 사량분별이 있고,
사량분별이 있는 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 없이 빛바래어 소멸할 때
사량분별이 소멸하고 사량분별이 가라앉습니다.
아~ 봄봄님! 고맙습니다.
육촉입처가 있는 한 사량분별(papañcassa gati)이 일어나네요...^^
사밋디 경(A9:14)에서는
사량분별의 초기 단계인 사유와 일으킨 생각(saṅkappavitakkā)은
Nāmarūp-ārammaṇā, 즉 명색을 대상으로 일어난다고 하는데요...
하여간 희론이건 사유이건 일으킨 생각이건
모두 명색, 즉 육근을 갖춘 이 몸[身]을 토대로 일어나네요.... ㅋㅋ
그러고보니 명색이 없는데 일어날 정신활동은 ?...
결코 일어날 일이 없겠지요... 그래서 식과 명색은 상호의존하는 담마?
@해맑은 녜. _()_
‘‘Arūpadhātuvepakkañca, ānanda, kammaṃ nābhavissa, api nu kho arūpabhav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Iti kho, ānanda, kammaṃ khettaṃ, viññāṇaṃ bījaṃ, taṇhā sneho.
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3. “아난다여, 무색계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색계의 존재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알음알이는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계박되어
@봄봄 paṇītāya dhātuyā viññāṇaṃ patiṭṭhitaṃ
evaṃ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i.
수승한 [무색]계에 알음알이를 확립한다.
이와 같이 내생에 다시 존재[再有]하게 된다.
...........
무색계 세상에 태어남에 대한 문제까지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봄봄 Ye ca ākāsānañcāyatane dhammā –
ākāsānañcāyatanasaññā ca cittekaggatā ca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tyāssa dhammā anupadavavatthitā honti.
"공무변처에는
공무변처의 인식(*空無邊處 想),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
감각접촉[觸], 느낌[受], 인식[想], 의도[思], 마음[心],
열의[欲], 결심[信解], 정진(*精進), 마음챙김[念], 평온[捨], 마음에 잡도리함[作意]의 법들이 있는바,
그는 이 법들을 차례대로 결정지었다.
Katamāni ca, bhikkhave, cha abhibhāyatanān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섯 가지 지배의 경지인가?
Idha, bhikkhave, bhikkhuno cakkhunā rūpaṃ disvā
nuppajjanti pāpakā akusalā sarasaṅkappā saṃyojaniyā.
여기 비구들이여, 눈으로 형색을 본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나지 않는다.
Veditabbametaṃ, bhikkhave, bhikkhunā – ‘abhibhūtametaṃ āyatanaṃ’.
Abhibhāyatanañhetaṃ vuttaṃ bhagavatāti
그러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지배의 경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밋디 경(A9:14)
“사밋디여,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사람에게 사유(saṅkappavitakkā)가 일어나는가?”
“존자시여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ārammaṇā]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사밋디여, 그러면 그것(saṅkappavitakkā)은 어느 곳에서 다양하게 되는가?”
“존자시여, 요소[界]들에서 다양하게 됩니다.”
“사밋디여, 그러면 그것(saṅkappavitakkā)은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
“존자시여, 마음챙김의 지배를 받습니다."
@해맑은 육촉입처의 대장인 마노(意, mano)에서 대상을 여리작의 + 사띠 확립 => 정견이 일어남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正定 ...욕계탈출 ...
팔정도는 苦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magga, 心路)... 육촉입처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
@해맑은 ㅎㅎㅎㅎㅎㅎㅎㅎㅎ ok!
지금 쓰고 있는 '(4)'번 글 내용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말을 하려고 <意(mano)와 法[=단수형, 심일경성과 관련 됨]>을 ........ '육촉입처'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점으로 ......... 강조한 것임.
욕계의 몸이건 색계의 몸이건 무색계의 몸이건 갈애의 종류에 따라 그 계의 몸을 받는다... 이것이 윤회....
욕계,색계,무색계의 갈애가 사라지면 당연 몸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삼계의 갈애를 해결한 아라한은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삼계의 종기는 몸이다... 몸의 뿌리는 갈애...갈애는 촉에서 나오고 각 촉입처의 멸은 갈애의 멸? 업, 알음알이,갈애중 하나만 없애도 될것 같은데요... 경의 설명에 의하면 여섯감각접촉의 장소의 멸은 알음알이의 멸아닌가요.. 육촉입처가 멸하면 업,갈애도 같이 없어질까요?. 경의 설명은 어떻게 나올까요.. 봄봄님 헬프미.... 갈애는 같이 없어질것으로 보이는데...업도???
갈애는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 결론은 무명을 멸해야 된다는 말.ㅋ
안이비설신의 정신은 과거의 업 , 지금 몸과 말과 마노로 짓는 업을 새로운 업이라 한다.
수행승들이여, 지금 신체나 언어나 정신으로 행위를 짓는다면, 그것은 새로운 업이다.
비구들이여, 몸의 업과 말의 업과 마노의 업이 소멸하여 해탈을 체득하는 것을 일러 업의 소멸이라 한다.
육촉입처의 멸은 업의 멸은 네버,네버 될수 없군요.. 삼업을 소멸하려면 결국 무명멸... 결론은 혜해탈 뿐...
@연기 구차제정 중략...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합니다.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통찰지를 통하여 해탈한 자'(혜해탈)라고 세존께서는 방편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합니다.
위와 동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경지가 있든지 간에,
그 방법대로 그 경지를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고 세존께서는 방편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연기 심해탈..
10.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어서 그 방법에 의하면 이 법들은 뜻도 하나이고 문자만 다릅니까?”
11. “존자시여, 탐욕은 한계를 짓는 것이고, 성냄은 한계를 짓는 것이고 어리석음은 한계를 짓는 것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이것들을 제거하였고 그 뿌리를 잘랐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었고 존재하지 않게 하였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습니다. 존자시여, 어떠한 무량한 마음의 해탈이 있더라도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그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은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연기 12. “존자시여, 탐욕은 무엇이 있는 것이고 성냄은 무엇이 있는 것이고 어리석음은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이것들을 제거하였고 그 뿌리를 잘랐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었고 존재하지 않게 하였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습니다. 존자시여, 어떠한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이 있더라도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그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은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연기 13. “존자시여, 탐욕은 표상을 만드는 것이고 성냄은 표상을 만드는 것이고 어리석음은 표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이것들을 제거하였고 그 뿌리를 잘랐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었고 존재하지 않게끔 하였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습니다. 존자시여, 어떠한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 있더라도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그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은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무명은 그 시작점도 알수 없다는데... 어떻게 멸하나... 부동의 심해탈은 탐진치가 공하다는데... 공한것을 어떻게 멸하남.. 한계를 짓지않는다. 무엇이든 없게 한다. 표상을 만들지 않는다. 이것보다는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한게 제일 이라는 말인데.. 부동의 심해탈을 해서 탐진치가 공한것일까.. 탐진치가 공한것을 알아 부동의 심해탈 한것일까.. 모든것이 공한데(생명을 조건으로 하는 어쩌구만 빼고) 생명은 100년도 못가니 이것도 공해질것이고 결론은 모든것이 공함을 아는것이 무명을 멸하는것??????
반야심경 말씀이 되네.. --;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照見 五蘊皆空 度 一切苦厄)
공함을 아는것과 체험하는것은 다른것일까 같은것일까... 조견이 아는것인가.. 체험하는것인가..
경에는 삼매를 통해서만 법을 볼수 있다고 했으니 삼매가 빛이요 삼매를 통해 비추어 보면 끝?.....
삼매에 대해 다시 찾아보니 봄봄님이 언급한 내용이 있네요..
선정이 유지 되지 않는 이유가.
"① 광명 ⑦ 지혜 에 대해서 [드디어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하고 이런 <법들에 대한 들뜸>에 意가 사로잡힘 "
전에 초선 경험을 올린적이 있죠... 희열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딱 저대로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하고 들뜸에 의가 사로잡힘 때문에 유지가 안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에도 한번 들어갔는데 역시 유지 안됨...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