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진산 '인왕산'을 오르다
오르기 쉬우면서도 조망 일품의 명산
기차바위, 범바위, 선바위 등 유명
오랜만에 인왕산을 올랐다. 마지막으로 인왕산에 올랐던 때는 2008년 8월. 벌써 14년 전의 기억이다. 그때는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혜화문-와룡공원-말바위 쉼터-숙정문-청운대-북악산(백악산) 정상-창의문(자하문) 코스를 탄 후, 이어 인왕산까지 종주하고 사직공원으로 내려갔었다. 종주코스 전체 약 5시간 걸렸던 것 같다.
필자가 등산과 여행을 좋아해서 전국의 유명 산들은 꽤 많이 돌아다닌 편인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작 서울 도심에 있는 가장 가까운 인왕산은 자주 오르지못했다.
어쨋든 이번엔 홍제동 개미마을을 돌아본 후 그곳에서 기차바위-인왕산 정상-범바위-국사당 선바위-독립문역 코스를 택했다. 소요시간은 가볍게 약 2시간 30분 정도.
개미마을은 인왕산의 중턱 쯤에 위치한 달동네다. 따라서 이곳에서부터 인왕산을 오르는 것이 정상까지 가장 완만하고 빠른 코스일 것 같다.
개미마을은 홍제역 2번 출구에서 7번 마을버스를 타면 마을 제일 높은 곳이 종점이다. 마을 오르는 버스 길이 꽤 가파르다. 버스종점 우측으로 등산로 안내판이 보인다.
개미마을에서 기차바위까지는 820m거리. 개미마을에서 약 100m쯤 가면 약간 가파른 돌계단을 만난다.
돌계단 끝은 1차 능선갈림길이다. 우측은 홍제역 방향, 좌측은 인왕산둘레길 중 무악재 하늘다리 갈림길 가는 방향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고 조금 더 가면 다시 이정표를 만난다. 기차바위 400m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후부터는 길을 잘못 잡을 염려가 없다. 기차바위 방향으로 계속 오르면 된다.
중간에 계단길을 세 번인가 만나지만 대부분 소나무숲길이다. 숲이 울창하고 거의 평지숲길이어서 산책하기에 좋다. 누워 있는 소나무도 만나고 S자로 굽은 소나무, 뿌리를 온통 드러낸 소나무도 볼 수 있다. 중간중간 나뭇가지 사이로 기차바위도 보이고 인왕산 정상도 시야에 들어온다.
약 30분 정도 소나무숲길을 오르면 기차바위 능선에 이른다. 기차바위는 거대한 암벽능선인데 기차 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능선 위에는 잔설이 많이 남아 있어 미끄럽다. 좌우는 깎아지른 절벽이지만 안전난간이 있어 위험하지는 않다. 겨울시즌에는 바위가 얼거나 눈이 있을 경우 위험하기 때문에 아이젠을 신고 오르는 게 좋다. 난간을 잡고 조심해서 올라야 한다.
기차바위 능선에 서면 전망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북한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특히 북악산 성곽길과 자하문 그리고 청와대 주변까지 선명하게 시야에 잡힌다.
기차바위 상단에 이르면 다시 전망포인트. 인왕산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기차바위 상단에서 8분 정도 다시 소나무숲길을 걸으면 성곽 아래에 이르고, 가파른 철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성곽길이다. 창의문에서도 성곽을 따라 인왕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기차바위 능선과 만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기차바위에서 이곳 성곽까지는 260m, 좌측 창의문은 1.4km. 우측 안산 무악재하늘다리까지는 1.6km 거리이다.
성곽길에 서면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남산도 보인다.
인왕산 정상을 정면으로 올려다보면서 성곽길을 걷는다. 성곽 틈 사이로 북한산 능선을 훔쳐보기도 한다.
기차바위능선과 창의문성곽길이 만나는 삼거리에서 약 14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인왕산 정상이다. 인왕산 정상은 338.2m.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바위산이라 산세가 우람하고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도심에 솟아 있는 산이기 때문에 서울시내가 사방으로 내려다보인다. 북쪽으로는 북한산과 북악산, 남쪽으로는 남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산 정상에는 타포니 형태의 움푹 패인 암석이 솟아 있어 정상다운 모습을 더하고 있다.
인왕산은 풍수적으로 보면 조산(祖山)인 북한산에서 주산(主山)인 북악산으로 연결되며 좌청룡인 낙산, 우백호인 인왕산의 형상을 이룬다. 그래서인지 이 산에는 옛부터 호랑이가 많이 살고 있어 태종 5년에는 경복궁 내정까지 들이 닥쳤고, 연산군 11년에는 종묘에 침입하는 등 민가의 피해도 많았다고 한다.
인왕산은 조선조 태종 때는 서봉, 서산으로 불렸으나 광해군 때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사찰이 있어 인왕산(仁王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하면서 인왕산의 가운데 왕(王)자를 일본이 조선의 왕을 누른다는 뜻에서 일(日)자를 덧붙여 인왕산(仁旺山)으로 고쳤으나, 조선조 후기의 화가인 정선(鄭敾)이나 강희언(姜熙彦)의 인왕산 산수화에는 仁王山으로 되어 있을 뿐더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仁王山으로 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현재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아 仁王山으로 부르고 있다.
인왕산 정상에서 잠시 한양도성의 역사와 의미를 생각해본 후 성곽을 따라 범바위 쪽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범바위까지는 450m 거리. 하산길에 내려다보는 범바위능선이 절경이다. S자 모양으로 하얗게 구부러진 성곽능선이 금상첨화다. 아마도 인왕산 등산코스 중 범바위능선 조망이 가장 아름다울 것 같다. 하산 초입 우측에 불쑥 솟아 있는 전망바위도 앙증맞다.
서울 도심 속 그리 높지않은 산에서 이처럼 멋진 경관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서울시민의 행운이다.
범바위에 올라 뒤를 돌아본다. 인왕산 정상에서 범바위까지 지나온 인왕산 성곽길도 웅장하고 아름답다.
범바위는 일몰촬영 포인트로도 유명하다. 인왕산 정상에서 450m 정도 내려온 지점이다. 마침 필자 일행의 하산시간이 일몰시간과 맞아 운좋게 일몰 장면 한 컷을 건질 수가 있었다. 사람이 볼록한 바위에 걸터앉아 있으니 해가 지는 장면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범바위에서 10분 정도 성곽을 따라 더 내려가다 보면 우측으로 철계단으로 이어진 갈림길이 나온다. 이정표에는 무악동 등산로 입구라고 쓰여 있다. 숲에 길 표시나 흔적이 없어 길 찾기가 싶지않지만 어쨌든 인왕사 쪽으로 숲길을 찾아가다 보면 범바위 능선에 있는 달팽이바위도 보이고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얼굴바위도 볼 수 있다.
또, 해골 모양의 바위도 만날 수 있다. 거대한 바위 하나가 마치 벌집처럼 파여 있다. 이런 형태의 바위를 지질학적으로는 ‘타포니(Tafoni)’라고 부르는 것 같다. 타포니는 암석의 측면에 벌집처럼 파인 구멍들을 이르는 말이다. 아뭇튼 해안 타포니로는 고성 능파대, 수우도 해골바위, 육지에서는 진안 마이산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곳 인왕산에도 타포니 현상의 해골바위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해골바위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인왕사 및 국사당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특히 ‘선바위’가 유명하다. 이곳 선바위 역시 타포니 모양의 해골바위 형태이다. 인왕사 소개자료에 의하면, 이곳 해골바위나 선바위는 약 1억5천만년 전에 생성된 지형으로 추정된다.
인왕산 선바위(禪岩)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長衫)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 바위는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부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하여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불린다.
옛문헌에는 조선 태조 때 한양으로 천도할 무렵 선바위에 관한 설화도 있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 수 있게 설계하려 했으나,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면 불교가 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태조를 설득하여 결국 도성 밖에 두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선바위 아래 국사당 안에는 중요민속자료 제 17호로 지정된 '무신도'가 걸려 있으며, 지금도 이곳 국사당을 무대로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 같은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인왕산은 예로부터 기(氣)가 세기로 유명한 산이다. 그래서인지 선바위 주변에는 지금도 무속신앙이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 계곡 곳곳에는 대낮에도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드리는 무속인들이 적지않다.(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