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은혜 놀라와
2024년 10월 13일 요 8:1-11
1.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자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처분을 물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간음죄에 대한 처벌의 방법을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지요. 몰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찾아내고자 시험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사형을 인정하게 되면 평소에 사랑과 용서를 가르쳤던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에 위배되며, 또한 이러한 사사로운 사형 선언은 당시 현행법이던 로마법에도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식민 상황에 처해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독자적인 사형 판결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 여인을 살려주라고 하면 이것은 율법을, 하나님의 계명을 드러내놓고 위반하는 것이 되지요. 때문에 이들의 질문은 죽이라고 할 수도 없고, 살리라고 할 수도 없는 예수님에게는 매우 곤란한 시험거리였습니다.
이 곤란한 질문 앞에서 예수께서는 한참 동안을 잠잠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당시 현장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끌려와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진 여자는 아마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채를 늘어뜨린 채 곧 이어질 돌팔매를 예상하며 넋이 나가 있었을 겁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덫을 쳐놓고 몰래 숨어서 걸리기만 바라는 사냥꾼처럼 야비하게 예수를 고소할 구실만 찾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은 금방 처형당할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안타까움, 측은한 마음이라고는 없고 오직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후 벌어질 광경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하필이면 이 순간에 예수께서는 왜 땅바닥에 글을 쓰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민망하여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땅바닥을 보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온 여인, 그녀를 빌미로 예수를 걸어 넘어뜨리려는 백성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기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살기등등하게 현장에서 즉결처형을 요구하는 군중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시간을 좀 지체시켰을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아무튼 다그치는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일어나신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 8:7입니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다시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형식으로 보면, ‘돌을 던져라’ 했으니 율법을 준수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함으로 이들의 잘못된 태도를 정정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2.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누가 누구를 돌로 친다는 겁니까? 우리가 빠지기 쉬운 과오는 우리 스스로가 저지르기 쉬운 그런 잘못을 타인에게서 볼 때 그것을 비판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정죄와 비판에 능하지만, 그러나 사실 인간사의 많은 경우에 정죄와 비판이 실제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강한 처벌이 강한 범죄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처벌의 범죄 예방효과에 대해서는 이견도 많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경우엔 정죄와 비판이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다만 새로운 기회만이 필요하다고 여기신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스스로의 죄악을, 스스로 인정하고 뼈저리게 뉘우침으로서만이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님이기에 이와 같이 하신 것이 아닐까요?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지혜로운 노인에게 두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한 여인은 점잖은 부인이었고, 다른 한 여인은 큰 죄를 저지른 여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인생에 대한 가르침을 달라고 하자, 지혜로운 노인은 이 두 여인에게 각자 가서 돌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이에 큰 죄를 지은 여인은 자신의 큰 죄 만큼이나 큰 돌을 하나 끙끙대며 들고 왔습니다. 점잖은 부인은 가벼운 작은 돌들을 두 손 가득 주워왔습니다. 지혜로운 노인은 다시 그 돌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무거운 돌을 지고 온 여인은 비록 힘들지만, 끙끙대면서 다시 그 돌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돌들을 주워온 여인은 그 돌들이 도대체 어디서 주워온 것인지를 알지 못하여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지혜로운 노인이 말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뼈저리게 후회하고 뉘우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고 자잘한 잘못만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구원받기 힘든 법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 두 여인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내가 훌륭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별 잘못 없이 살아왔잖아?’하는 마음이라면 구원의 길에서 좀 멀리 있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잘못된 것에 대해 뼈저리게 뉘우치며 고통 받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은 구원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요?
3. 그 은혜 놀라와
이제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10-11절입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도대체 이 여자는 유죄인가요, 무죄인가요? 예수께서는 이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무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여자의 행위는 분명한 범행이며, 유죄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의 판결은 무엇입니까? ‘네가 한 행위는 분명한 죄지만, 그러나 나는 너를 죄 있다고 하지 않겠다. 그러니 가서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짓지 말라’는 처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여자의 사건을 안쓰러운 마음과 한편으론 다행스런 마음으로 듣고 있습니다만, 사실 성경이 이 여자의 사건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바로 이 여자와 같은 처지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여자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비록 간음은 아닐지라도 엄중한 율법의 잣대를 들여다 댈 때 누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판결을 유보하십니다. 정죄의 판결이 아니라 기회를 주십니다. 새로운 삶의 출발 기회입니다. 물론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서 다시 간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새로운 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당장 처벌을 하는 것이 율법이라면, 다시 한 번 새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갈 수 없잖아요” 최덕신이라는 분이 지은 [우리]라는 곡에 나오는 노랫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갈 수 없잖아요!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우리만큼만 시시비비를 정확히 따지시는 분이라면 지금 여기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기고만장하고 설치니까 예수께서는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깨우쳐주신 것이지요.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제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교수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해방신학과 마르크시즘을 공부하신 아주 진보적인 학자였습니다. 그 성격도 드세고 거칠기 짝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이 들어 중년이 넘어 노년이 되면서 동네 분들을 전도하여 학교 안에 자그마한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담할 목회자를 모시고 했습니다만, 사실상 교회의 설립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좋아하는 찬송가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었습니다. 그 거친 분이 얌전히 앉아서 그 찬송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절로 입가에 웃음이 지어집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도 점점 더 은혜가 좋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아니 실은 은혜가 절실해집니다. 나이가 먹으면서 죄가 더욱 깊어졌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무엇을 감사할까요? 추수감사의 계절 이 가을이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해 동안, 아니 이날 이때까지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찬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돌아보면 이것, 저것 주님의 은혜가 큽니다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생명 주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아직도 기회 주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죄 있다’ 하지 않으시고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나이까지 쓸모없이 살았다고 비난하고 정죄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다시 살라고 기회를 주십니다. 얼마나 크신 은혜인지요! 사실은 이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고, 지금 살아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아 우리 삶의 자리에서 감사의 삶, 용서의 삶,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