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종남산(608.3m)
종남산은 송광사를 세운 도의선사가 절터를 구하기 위하여 남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땅속에서 깨끗하고 풍부한
영천수가 솟아오른 것을 발견하고는 이곳에 큰절을 세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는 일을 포기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송광사 뒤편으로 기암괴석과 울창한 잡목숲을 헤치고 오르면 해발 617m의 종남산 정상에 다다르고 이곳에서
중간지점에는 펜아시아페이퍼코리아 임산관리소가 있는데 이곳 석간수는 약수중의 약수로 잘 알려져 있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완주 서방산(612m)
지명은 서방정토(西方淨土), 즉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라는 불교용어에서 유래하였다.
부산민들레산악회2월4일제510차숨겨진우리산종남산.서방산.서래봉.되실봉.송광사산행안내
A팀->. 위봉재~되실봉~서래봉 ~오도치~서방산~남은재~종남산~남봉~ 송광사~주차장
B팀->: 위봉재~되실봉~ 위봉폭포 ~ 송광사~주차장
◐산 행 거 리 11.5km (도상거리)◐산행시간* 5시간
◐산행 준비물
☞ 랜턴+도시락+식수+간식+여벌옷+개인동계등산장비
◐출 발 일 자
2024년2월4일(당일)
출발시간
7시출발
◐출발장소
서면지하철 5번출구앞7시출발
경유지(동래세연정7:15 덕천부민병원7;30) 출발시간을 꼭지켜주시길 바랍니다...
◐ 예약 조기 마감될 수 있으니 사전예약 바랍니다
◐누구나 환영합니다
◐ *아침떡*베지밀*커피*하산주 현지식당*
◐교통비
4만원 (사전예약해주시면고맙겠습니다)
◐ 전화.문자.댓글
새마을금고;9002-1547-71469 예금주김대경
최신형41승 희망고속투어(주)
◐예약전화
민들레 총무->HP 010-3377-8356
위봉폭포
위봉폭포는 2016년도에 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었다.
사계절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소양 송광사
조선 후기 다포식 맞배지붕의 사찰_소양 송광사 일주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
완주 송광사는 종남산 아래에 자리 잡은 곳으로 산에 있는 절에서는 보기 힘든 큰 연지를 갖추고 있는 절입니다. 연지에는 홍련과 백련이 구분해서 나눠져 있으며 햇빛이 잘 드는 위쪽부터 하나씩 피어나고 있습니다. 연꽃을 보러 가기 전 간단히 송광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송광사 가람배치도 (출처_소양 송광사 홈페이지)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때 백련사로 처음 지어졌다가 '소나무가 널리 자리한다'라는 뜻에서 '송광'으로 절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 임금이 대대적으로 복원하고 '선종대가람'으로 호국원찰로 삼았다고 합니다. 송광사 가람배치는 백제식 평지 가람 형식을 이루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처]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소양 송광사
가야할 종남산 줄기 한눈에 들어옵니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4호인 종남산 송광사 일주문.
온갖 번뇌망상을 여의고 깨달음을 향한 일념으로 들어설 수 있는 문입니다..
금강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금강과 같은 단단한 지혜로 번뇌 망상을 제압하는 금강역사를 모신 송광사의 두번째 문입니다..
다시 4대천왕이 있는 천왕문을 지나야 대웅전에 이릅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사찰...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지었다고 합니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고..
보물 제1243호인 대웅전..
사찰 뒤편의 관음상..
대웅전에는 국내 최대크기의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우측에 아미타여래좌상, 좌측에는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송광사는 국가 위난이나 기도 감응시에는 대웅전, 나한전, 지장전의 불상들이 땀을 흘리고 있어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특히 대웅전 불상은 KAL기 폭파사건, 12·12사건, 군산 훼리호 침몰, 강릉잠수함 출몰 등..
그리고 1997년12월2일부터 13일까지는 엄청난 양의 땀과 눈물을 흘려 IMF를 예견하는 기적을 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송광사의 대웅전 앞에는 아[亞]자형 또는 십자형이라 불리는 범종루인 종각이 있는데,
2층 누각 안에는 중앙에 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칸에 종,북,목어,운판을 걸어서 기본 불구(佛具)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 건물 안의 종은 1716년(숙종42)에 무등산 증심사에서 주조된 것으로 1769년(영조45)에 중수되었으며,
「완주송광사종루」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습니다...
태조암
숲속에 파묻힌 돌담 주춧돌도, 천년 고탑도 비스듬한 그 암자의 마당에 들어서면 물소리가 밟히고 먹뻐꾹 울음소리가 옷자락에 배어드는 심산의 암자였다.
암자의 마당 끝 계류가에는 생남불공(生男佛供) 왔던 아낙네들이 코를 뜯어먹어 콧잔등이 반만큼 떨어져 나간, 그래서 웃을 때는 우는 것 같고 정작 울 때는 웃는 것 같은 석불도 있었지.
어떻게 보면 암자가 없었으면 좋을 뻔했던 그 두루적막 속에서 이십 년을 살았다는 노 공양주보살님이 그해 늦가을 그 석불 곁에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자기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을 때, 다람쥐 두 마리가 도토리를 물고 돌무덤 속으로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네.
옳거니! 돌무데기 속에는 도토리가 많겠구나.
묵을 쒀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먹어야지.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중얼거린 노공양주보살님이 돌무덤을 허물어뜨리고 보니 과연 그 속에는 한 가마는 좋이 되게 도토리가 가득했다.
그 한 가마나 되는 도토리를 몽땅 꺼내어 묵을 해 먹었던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놈의 다람쥐 두 마리가 공양주보살님의 흰 고무신을 뜯어먹고 있었다.
뜯어먹다가 죽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너무도 추운 날이라 그날이 소한이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당시 내가 머물던 한 공동체마을에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상한 결혼, 하지 말아야 할 결혼식이 있었다.
그 결혼의 부당함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내 최소의 경고가 그곳을 나오는 것이었다.
내 배낭엔 정찬주의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라는 책이 들어 있었다. 책속의 길을 따라 이곳저곳 암자를 찾아 돌아다녔다.
후에 나는 그것을 ‘만행’이라고 포장하고 혼자 만족해하곤 했다. 실은 마음 둘 곳 없는 '배회'였는데.
날은 추운데 여러날을 그러고 다니다보니 그것도 심드렁해져 따듯한 방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호기 있게 떠나온 길을 다시 돌아갈 배짱도 없어 여기저기 마른 산기스락을 배회하다가 또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찾아들었던 게 태조암이었다.
여러 날 이어지는 혹한으로 산내들은 온통 눈속에 묻혀 있었다. 책이 일러주는대로 조붓한 산길을 따라 걸었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다보니 혹한인데도 몸은 더워 잔등에 땀이 났다.
목적지가 아닌데도 굳이 오르막길을 허위허위 올라간 것은 나를 혹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머릿속에 휘돌고 다니는 오만가지 상념들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봤자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을.
내 신앙을 위한답시고 다람쥐의 양식을 약탈한 공양주보살의 이기심에 대한 일화가 내내 머리속을 귀살스럽게 했다.
어디 저 공양주뿐이겠는가. 배려심 많고 고아해보이는 사람도 실은 내면 한쪽에는 그러한 이기심 정도는 다 있다는 사실을.
눈을 헤치고 마침내 도착한 암자는 아주 작고 초라한 건물이었다. 암자라기보다는 가난한 처사가 세속을 떠나 홀로 기거하는 오두막 같은 집이었다.
눈속에 파묻힌 암자는 너무도 적막했다. 굴뚝에서 실연기가 나오는 것으로 사람이 기거하고 있다는 알 수 있었다.
너무도 조용해 내 발소리 날까 사부작사부작 했지만 아마 안에 있는 사람은 낯선 인기척을 알았을 테다.
행여 문 열고 나와 차 한잔 하고 가라기라도 할까봐 얼른 돌아 나왔다. 내려오는 길은 다시 추웠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다시 태조암을 찾아보았다.
그땐 몰랐는데 이번에 다시 태조암을 찾았더니 암자가 속한 산은 위봉산이었다.
눈 대신 두터운 낙엽이 깔려 있다.
그날 그길의 기억은 하나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