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바로 공생공존이다
“역시 오바마 대통령은 명 연설가야, 그리고 사람이 신뢰가 가”
“내가 볼 때는 그 연설을 진보와 보수가 다 받아들이고 잠시라도 하나가 된 그 민족성이 더 부럽더라.”
“우리 대통령도 저런 감동적인 연설로 모두를 한번 하나 되게 할 수는 없을까? 각을 세워 싸우고 찢고 하는 짓들이 이제는 지겹다.”
“저런 소통과 공감대를 형성하려면 무엇보다도 진실과 신뢰가 있어야해. 대중은 진실 앞에서는 스스로 감동하게 되지.”
“우리는 축구경기 볼 때나 하나가 되지, 우리 민족성은 하나 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아.”
“우리는 싸워야 잘 되는 나라야, 그것도 괜찮잖아? 밥이나 먹자.”
며칠 전 식당에서 젊은이들이 모여앉아 최근에 오바마 대통령의 명연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필자의 귀는 자연스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우리며 그 대화에서 공감대를 이루는 부분이 많았다. 잠시라도 소통하며 하나가 된 그들의 문화와 정신이 선진사회로 보이며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소통은 긍정의 힘을 발휘하는 비타민과 같다. 그 힘 속에는 진실과 공의가 살아있기에 모두가 더블어사는 긍정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디딤돌이 된다. 이렇듯 긍정의 뿌리와 함께 모든 자연 만물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 있는 것들도 서로가 공생공존(共生共存)하며 산다. 특히 자연의 세계를 들여다 볼 때 생명하나하나의 역할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풀 한포기, 작은 돌멩이 하나, 바람과 폭풍, 하루를 살아가는 하루살이 삶도 서로가 긍정의 힘으로 소통하며 산다.
오바마 대통령은 소통의 원칙을 짤막한 연설을 통해서 말했다. 그는 최근 애리조나 주 총기난사 사건 현장 투산을 방문해 추모연설을 했다. 그 연설을 통해서 평소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까지 칭찬했다. 추모식에서 희생자들 이름 하나 하나를 거명하며 “위기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상대방에 귀를 더 기울여 화합하며, 우리 스스로 희망과 꿈을 결집시키는 계기로 삼자”라고 외쳤다.
특히 기존의 정치와 현실세계의 담론이 극도로 양극화 되어가는 실태 앞에서 서로가 각을 세우며 상처를 주는 갈등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소통의 중요성을 말했다. 그리고 이번 총격으로 생을 마감한 9세 소녀 크리스티나 그린 양을 애도하면서, 우리 아이들이 기대하는 부끄럽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가자 호소했다.
오바마는 총기난사로 유명을 달리한 희생자들 이름을 부르다가 어린 크리스티나 그린 이름을 호명한 후, 목이 메어 잠시 51초 동안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아마도 그 순간은 어린 딸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공감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쇼맨십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언론과 특히 ‘오바마의 실패’와 ‘오바마 저격수’로 불리던 글렌 벡과 러시 림보마저도 “최고의 명연설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잠시라도 서로를 인정하고 보듬을 줄 알았기에 그들은 분명 두 팔을 가지고 있는 정상인으로 보였다.
자본의 논리는 갈등과 상처만 남는다
잠시 우리정치의 현장과 종교의 현실을 돌아보았다. 정치와 종교적인 현실은 안과 밖에서 여전히 상대방 흠집을 잡아 끌어내리며 고소와 고발장을 날리는 싸움판이다. 국민은 고 물가와 매서운 한파 앞에서 몸과 마음은 더욱 얼어붙어 떨고 있다. 그리고 성도들은 기존교회의 비리와 상처들로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공생공존(共生共存)의 원리를 물질에서 얻으려하는 맘몬의 법칙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 풍족한 교회도 노예계약이 있다. 큰 교회가 개척한 미자립 교회들은 물질의 시녀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실태가 교회에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현실이다. 돈의 힘으로 사람을 부리고, 돈의 힘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곳으로 변질되니 결국 감투싸움과 함께 내분은 날로 커져간다. 종교의 님비현상까지 일으켜 숫자를 앞세운 조직의 힘으로 종교 간의 갈등까지 자처하고 있다.
힘 있는 교회가 부를 때 마다 열악한 교회는 숫자를 채워주어야 하고, 상명하달(上命下達)식으로 누구를 지명해서 당선시켜야 한다는 조직적인 명령을 따르며 시녀노릇도 해야 한다. 도움을 받는 자가 순종하지 않을 때는 당장 미 자립교회 헌금은 중단된다. 그야말로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미 자립교회가 많다. 같은 종교안에서도 물질로, 숫자로 갈라지는데 하물며 타종교와 어떻게 소통하며 지낼 수가 있겠는가. 성서는 진정 열린 마음을 외치고 있고, 이방인과의 소통을 수없이 부르짖고 있다. 성서는 굳게 닫아버리고 사람의 입만 살아서, 사람의 생각대로 말씀을 왜곡하는 강대상이 얼마나 많은가.
소통과 공생공존의 원리원칙을 위반하는 ‘지도층’들이 지금도 부와 권력의 담을 높이 쌓고 있다. 그래서 물질이 풍족한 교회와 자본이 넘치는 기업에는 기생충이 자연발생적으로 부화한다. 세상에는 ‘지도층’도 많지만, 반대로 이들은 ‘지도충’이다. 사람 뱃속에서 영양분을 갉아먹는 기생충이나, 노동력을 착취하는 ‘지도충’이 알을 까고 번데기가 되어 우리사회 구석구석에서 노동력과 인권을 착취하고 있다.
또한 우리사회 가장 심각한 것은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다. 최근 홍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75만 원대 임금의 처절한 삶을 보면서 사회구조가 비애스럽기만 하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최저 생활과 인권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점심식사를 여학생 화장실 청소도구함에서 소리를 죽이며 먹어야 했다.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그들의 열악함을 지식의 전당인 사측에서는 몰랐단 말인지, 그렇지 않으면 알고도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인지라 눈을 감아버린 것인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박한 삶의 현장은 눈물겹도록 처참했다. 용역업체와 학교 측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그들을 해고하려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은 75만원 최저임금으로 가족이 살고 있다. 이 겨울 한파에 생계를 위해서 시멘트 바닥에서 절규하며 매일 밤 새우잠을 자고 있다. 참으로 매정한 사학의 전당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은 결국 홍익대가 노조 간부들을 ‘업무방해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격분한 노동자들이 총장을 감금한 것이 업무방해혐의가 된 것이다. 이렇듯 법은 약자에게는 더 무서운 무기가 된다. 법은 억울한 자들을 위해 공정성을 지켜주며 약자의 편에 서 있을 때 법은 힘이 아닌 구세주다.
사람의 논리로 더불어 함께 살자
이들은 오직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최소한 같이 살자는 것이다. “같이 살자. 최저임금은 받게 하고, 최소한 밥은 제대로 따뜻하게 먹게 하자, 아프면 병원에는 가게하자, 최소한 그렇게 같이 살게 하자”이들의 절박한 기본적인 요구지만 사학의 전당에서는 귀를 닫고 있다. 비정한 지성의 전당이다.
더 이상 시장경제와 법이 힘 있는 강자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싼 용역회사와 계약을 바꿀 때마다, 밀리고 박탈당하는 쪽은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시장경제와 법의잣대에 떠밀려 어느 곳에 발을 붙이란 말인가. 하루 점심식대 300원으로 사람을 부리는 사학의 전당이, 보다 더 싼 임금으로 고용의 효과를 누리기 위해 시장의 논리로 갈아타려 한다. 시장의 논리로는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과연 법의 잣대는 어디를 향해서 갈 것인지......,
사람의 논리는 사람을 살리고 함께 공존공생 하는 논리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논리가 아닌 현대판 노예계약이다. 언제든지 사측은 자본의 논리에 맞추어 노예계약을 수시로 바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사회 지도층과 대기업이 자행하고 있는 노동착취의 표본이다.
선진사회란 무엇인가. 기초생활 대상자들이 최저임금으로 최저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그들의 절박함에 함께해주는 것이 바로 선진사회로 가는 길이다. 가난한 자들이 더욱 처절한 박탈감으로 밀려나는 사회는 부끄러운 국가다. 오늘도 이 혹한에 75만원에 목숨을 걸고 협상을 요구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서 과연 우리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행히 소수 시민들이 음식을 넣어주며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고통과 아픔에 모두가 귀를 열고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외치고, 보듬어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소통하며 공정사회로 가는 길이다.
오직 경제의 논리에 맞추어 선진사회를 외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높은 경제성장을 부르짖지만, 물가의 오름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그것은 소수 대기업과 재벌들의 성장일 뿐이다. 이러한 악순환과 갈등은 점차 골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가고, 그 골은 결국 산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교수진들의 무관심과 냉담함이다. ‘홍익’의 정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린학생들이 현장에서 과연 무엇을 배우겠는가. 대학은 이론을 가르치는 지성의 탑보다 먼저 사람의 논리를 가르쳐야 한다. 진정한 지성은 더블어함께 살아가는 행함을 실천하는 곳으로서 사람의 논리가 바로 지성의 상아탑이다. 바라기는 홍대 총장님이 오바마 대통령처럼 비정규직 노동자이름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며 “상처를 주는 갈등과 투쟁을 멈추고, 보듬고 소통하며 함께 살아갑시다!”라는 사람의 논리로 이 절박한 사태가 잘 마무리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사측은 여전히 냉담하게 답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한파는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