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향 사과(四向四果)>
초기불교에서 붓다 제자들이 수행을 함에 있어서
네 단계의 수행 목표[向]와 그 도달 경지[果]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붓다는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함으로써
아라한이라는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는 4향 4과라고 불리는
네 쌍 8종의 위계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쌍팔배(四雙八輩)라고도 하고,
소승사과(小乘四果), 성문사과(聲聞四果), 사문4과(沙門四果),
줄여서 4과(四果)라고도 한다.
수행 네 단계란
수다원(須陀洹, 예류/豫流)ㆍ사다함(斯陀含, 일래/一來)ㆍ
아나함(阿那含, 불환/不還)ㆍ아라한(阿羅漢)의 네 단계이다.
이들 성자에 각기 향(向)과 과(果)를 한 쌍으로 해서 네 쌍이 되므로,
곧 사쌍팔배라고 했다.
향(向)을 도(道, Magga)라고도 하는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말하며,
과(果, Phala)는 깨달음, 깨달음의 도달한 경지를 말한다.
수다원의 경우엔 수다원향(도)과 수다원과로 나뉜다.
따라서 여덟 부류의 네 쌍의 성인(四雙八輩)이 성립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도(道, 向)란
그에 상응하는 과(果)에 들어서기 전의 수행 체험을 말하고,
과(果)는 도(道)의 결과를 말한다.
아래와 같이 수행해가는 과정(向, 道)과
수행에 의해 도달한 경지(果)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 4향4과이다.
• 예류향(豫流向) - 예류과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 예류과(豫流果) - 예류에 도달한 상태
• 일래향(一來向) - 일래과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 일래과(一來果) - 일래에 도달한 상태
• 불환향(不還向) - 불환과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 불환과(不還果) - 불환에 도달한 상태
• 아라한향(阿羅漢向) - 아라한과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에 도달한 상태이다.
위의 내용이 4쌍, 8가지로 구성돼 있으므로
사쌍팔배 혹은 팔부성인(八部聖人)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붓다 당시 직제자인 성문(聲聞)들이
수행으로 아라한이라는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거치는 네 경지를 말하며, 이것을 소승불교 수행단계라고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수다원(須陀洹, pali. sotāpanna)---예류(預流) 또는 입류(入流)라고도 한다.
수다원은 깨달음의 길을 하천의 흐름에 비유해서 그 흐름에 들어간 것,
즉 불도수행에 대한 확신이 생긴 상태를 말한다.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성스러운 흐름(八正道)에 들어섰다는 뜻으로 예류 또는 입류라고 한다.
그래서 수다원은 파멸되지 않는 이, 결정된 이, 깨달음에 이르는 이라고도 불리며,
파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대승불교로는 <금강경> 4구게 중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상태가 된 것이다.
② 사다함(斯陀含, pali. sakad-āgāmin)---일래(一來)라고도 하는데,
사다함은 수행도상에 있어서 한 번 더 윤회세계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래(一來)라 한다.
수다원과를 얻은 자가 다시 한 번 천계(天界)나 인간계에 태어난 후에
수행으로 사다함과를 얻으면 그 이후는 천계나 인간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어진
성자의 경지 또는 과보를 받는다.
이렇게 천상과 인간세계를 한 번 더 왔다가므로 일래과(一來果)라고 한다.
지혜를 얻어 번뇌와 미혹을 벗어나 진리를 보는 단계인 견도(見道)를 이룬 뒤
수도(修道)의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③ 아나함(阿那含, pali. anāgāmin)---불환(不還) 또는 불래(不來)라고도 하는데,
아나함은 더 이상 윤회세계로 물러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환이라고 한다.
이번 생에만 욕계에 머무르고 나면 다시는 윤회세계로 오지 않는다.
다시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
번뇌의 윤회에 휩쓸리지 않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나함은 욕망에 꺼들리지는 않지만,
물질과 순수한 정신에 대한 집착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색계와 무색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며,
아직까지 무명(無明)의 뿌리가 남아 있어서 존재의 참된 이치를
완전히 꿰뚫은 수준은 안 되며, 사성제(四聖諦)를 완전히
증득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④ 아라한(阿羅漢, pali. arahant, skt. Arhan)---나한(羅漢),
응공(應供), 무학(無學),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아라한과(阿羅漢果)에 이르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했으며, 해야 할 바를 다했고, 윤회에서 해탈해 열반에 들어간다.
아라한과 이전단계를 통칭해 有學位( 배울 것이 있는 계위) 또는 유학(有學)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아라한은 열 가지 족쇄가 모두 다 소멸돼
더 이상 태어남이 없어 윤회하지 않는 성자다.
범부중생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단계로 생각했었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면 어떤 것을 공양 받아도 업의 흔적으로 남지 않아
마땅히 공양 받을 자격이 있다 해서 응공(應供),
또는 응당히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므로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아만심이 없기 때문에 ‘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번거로워할 일도 없고,
들뜨는 마음도 없기 때문에 마음은 늘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리고 아라한과에 이르면 색계에 대한 욕망, 무색계에 대한 욕망,
‘나’라고 하는 마음(我慢), 들뜸,
어리석음(無明)이라는 오상분결(五上分結)마저 완전히 제거돼 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처음부터 사향 사과의 수행과정이
단계적으로 나누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네 가지 수행 단계는 나중에 체계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후대 부파불교의 아비달마 논사들에 의해 수행의 단계는
매우 복잡한 체계로 정리된 결과 마지막 아라한과는 대단히 높은 수준인 것으로 간주됐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설해져 있는 아라한은 수행에 의해 도달되는 것이지
아비달마 교학의 그것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최초기 아라한의 경지는 어떤 것인가?
나중에 체계화된 네 가지 수행 단계에 의하면,
처음 다섯 비구가 터득한 경지는 성자의 초기 단계인
예류향(預流向)이나 예류과(預流果)를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꼰단냐의 경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비록 꼰단냐가 연기의 원리를 터득함으로써 법안(法眼)이 생겼지만,
그가 궁극의 목적인 열반을 증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열반은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이 완전히 소멸된 경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율장의 <대품(大品)>에서는 “오라. 비구여, 법은 잘 설해져 있으니,
바르게 괴로움의 끝을 이루기 위해 범행(梵行)을 닦으라.”고 설해져 있다.
이것은 꼰단냐가 비로소 법의 눈[法眼]을 뜨게 됐으므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범행을 닦으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비록 다섯 비구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성 스님
고타마 붓다께서 말씀하신 이 네 가지 경지는 절대로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능력에 따라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현생에서 실현되는 불도(佛道)의 경지라고 한다.
또한 이와 같은 네 가지 성인의 경지를 세분해 그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Magga. 道 또는 向)에 있는 분과, 이미 그 경지를 성취한 (Phala. 果) 분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여덟 단계의 성인이 있게 된다.
이를 총칭해서 사쌍팔배(四雙八輩), 성문 사과(聲聞四果), 사향 사과(四向四果),
혹은 팔부성인(八部聖人)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을 삼위(三位) 혹은 성문 삼위라 한다.
바로 이분들이야 말로 진정 불도(佛道)를 제대로 걷고 있고
올바른 길로 가는 성인들이기에 모든 불자들이 예배 드릴만 하고, 공양 드릴만 하며,
재가자들의 참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이야말로 불ㆍ법ㆍ승. 삼보 중에서 ‘승(乘)’ 에 해당하는 분들이다.
또한 이러한 네 가지 단계의 수행단계는 그 과정을 거침에 따라서
총 10가지의 족쇄를 부수고 깨뜨려야 한다.
즉, 사향 사과(四向四果)를 성취하면서 열 가지 족쇄를 풀어야 하는데,
열 가지 족쇄는 아래와 같다.
① 예류과(豫流果)와 세 가지 족쇄
첫째 족쇄는 유신견(有身見)이다.
자아에 대한 믿음, 즉 몸과 마음(名色)을 나 자신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자아라는 미망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족쇄는 의심(疑心)이다.
쉽게 말해서 무지에서 오는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반신반의 또는 망설임,
그리고 믿지 않는 마음이다. 쉽게 말해서, 정말 열반은 있는 것일까,
팔정도를 닦으면 정말 열반에 이르는 것일까, 등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의심(불법에 대한 회의감)에 대한 것들이다.
셋째 족쇄는 미신(迷信) 또는 의례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見]이다.
이는 의례 의식의 본래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다.
이러한 집착은 본질적으로 어떤 일을 할 때 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마법이나 주술적 관습에 대한 맹신이 그 하나의 예로서,
불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인데도 불자들마저 거기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한다.
② 일래과(一來果)와 족쇄
네 번째 부수어버려야 할 족쇄는 감각적 욕망(感覺的 慾望, 貪心)이다.
다섯 번째 족쇄는 악의(惡意, 瞋心)이다.
악의라는 감정은 마음이 불만족을 느낄 때 나타나는 분노와 같은 반응을 말한다.
만족감을 얻으면 감각적 욕망이 생기고, 불만족해지면 악의(분노)가 일어난다.
일래과에 이르게 되면 첫 단계인 예류과보다 한결 열반에 가까이 와 있는 것이며,
이런 성인들에게는 겨우 세속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③ 불환과(不還果)와 족쇄
불환과는 위의 다섯 가지 족쇄, 즉 자아가 있다는 믿음, 의심, 미신, 감각적 욕망,
악의(분노) 등을 완벽하게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모두 부수어버린 단계이며,
이 단계에 이른 수행자는 결코 두 번 다시 욕계에 몸을 받아 돌아오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태어남이 끝난 사람, 즉 불환과라고 한다.
④ 아라한과와 다섯 가지 족쇄
여섯 번째의 족쇄는 희락(喜樂)을 탐하는 마음을 말한다.
형색(形色, ruupa-raaga)을 주제로 한 여러 선정 수행 단계에서 얻어지는
선정에 완전히 몰입된 상태는 비록 그것이 완벽한 열반의 기쁨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열반의 끝자락을 약간은 맛본 성취의 기쁨은 대단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열반의 맛이 다시 집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일곱 번째 번뇌는 묘락(妙樂)을 탐하는 미세한 욕망을 말한다.
무형(無形, aruupa-raaga)의 대상을 주제로 깊은 선정에 몰입했을 때
거기에서 얻어지는 묘락은 여섯 번째 족쇄와 비슷하지만
이 번뇌는 포착해내기가 한결 더 어려울 정도로 엷게 깔려 있다고 한다.
여덟 번째 족쇄는 우열의식(優劣意識, maana=慢心), 즉 자만심이다.
이것은 남들과 관련해 자신을 이런 저런 지위에 놓아보는 망상을 말한다.
자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자신이 남보다 낫다거나 못하다고 단정 짓는 것,
이 번뇌를 여덟 번째로 친 것은 그만큼 극복해 내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이 번뇌는 가장 높은 경지의 성자만이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아홉 번째 족쇄는 도거(掉擧, uddhacca)이다.
도거는 정신적 불안정, 주의산만, 완벽한 평화와 정적을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관심을 끄는 대상을 접할 때에 일어나는 동요와 들뜬 느낌 같은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무엇인가를 자꾸만 바라는 고질적인 갈망이 깔려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어떤 취향에 맞는 대상이 스치면,
좋다 싫다 하는 어떤 마음의 반응이 일어나기 쉽다.
그런 반응을 우리는 관심이나 흥미라고 한다.
무엇인가 새롭고 낯선 것을 보면 마음 설렘과 호기심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반면에 그 대상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좋았던 기분도 끝나버리고 만다.
도거의 본성은 바로 이런 것이라 한다.
열 번째이자 마지막 번뇌는 무지(無知, 癡心)이다.
지금까지 열거해 온 아홉 가지 이외의 다른 모든 번뇌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무지란 앎이 결여된 상태, 무명(無明)을 말한다.
이 경우의 앎은 참다운 앎(이해), 올바른 앎을 뜻한다.
만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거짓된 것이라면, 그런 앎은 없느니만 못하다.
우리들 범부 중생들은 고질적 무지와 그릇된 앎으로 인해 고(苦)를 받는다.
우리는 너나없이 무지는 사람들이 고를 즐거움으로 잘못 인식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