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영상을 지켜보던 윤 원장은 회전의자를 창 쪽으로 빙 돌려버렸다. 함께 보던 참모들 역시 침묵했다.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진보진영 인사들의 시각은 대부분 회의적이다. 평소에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은 은연중 언행에 배어있다. P의 연설은 그러한 사고방식들의 잠재적 근거 중 하나인 북한정권을 정면으로 질타하며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적자임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오던 '북한의 진실'이라는 천적을 만난 그들의 뇌리에는 오로지 한가지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 이건... 좀 어렵구나.’
본격적인 유세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마당에 이미 기선을 제압당해버린 것이다. 복잡다단한 복지정책과 햇볕정책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티던 그들의 사고를 성큼 뛰어넘은 P 후보의 북한관은 깊은 패배감을 그들에게 안겨주었다.
홈페이지에 올린 그날의 영상은 Network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인터넷과 트위터의 쓰나미로 전국을 덮쳤다. 어떤 대항논리도 그 감동 앞에서는 무력했다. 민족과 통일의 의미를 재해석한 강력한 논리에 격동된 국민들 앞에는 복지를 들먹이는 어떤 화려한 주장도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강남 좌파의 현란한 레토릭, 대중을 즐겁게 해주던 나꼼수, 따뜻한 가슴으로 대중을 끌어들이던 윤 원장이나 민재인의 친화력도 그 메시지의 파괴력 앞에서는 무력했다. 원자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처럼 진보진영은 하루아침에 초토화되어 버렸다.
6. 전사戰士 들
P 의원 영상은 오송 연구소에서도 화제였다. 민우가 보내준 영상파일을 보던 미주는 문득 의식지도를 떠올렸다. 저 정도 열광이라면 대체 어떤 수준의 파동일까?
그 말을 들은 오선임은 무릎을 치더니 즉각 빌리에게 영상을 연결했다. 그러자 빌리는 영상에 나타난 인물들의 감정 파동을 250에서 540점까지로 나누어 평가했다.
250은 연설 중간쯤, 그리고 마무리 부분은 540점에 육박했다. 그것은 신뢰, 낙관 그리고 존경을 의미하는 점수였다. 게다가 빌리는 그 감정을 이미지로 해석한 영상을 보여주는 놀라운 능력을 과시했다. 그것은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오로라의 이미지였다.
“ 그렇다면.....”
물끄러미 화면을 응시하던 오선임이 문득 주억였다.
“ 난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이건 말이지, 앞으로는 여론조사 따위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이야.”
“ ...... ?”
함께 있던 연구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선임을 바라보았다.
“ 모르겠어? 이런 둔탱이들!
차라리 줄무늬 녀석 데려오는 게 낫겠다. 어이구 내 팔자야.”
절레절레 흔들지만 막상 얼굴은 웃고 있었다.
“ 생각들 좀 해봐. 현장 영상을 빌리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답이 나오지 않겠어. 점수에 영상까지 곁들여서 말이지.”
연구원들은 그제야 일제히 탄성을 울리며 끄덕였다.
“팀장님, 이걸 밑천삼아 여론조사업체를 차려도 되겠는데요.”
그럴 법한 얘기였다.
선거철이 되면 거의 매일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한다. 그러나 그런 보도에는 꼬리표처럼 오차범위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고 인터뷰 방식이나 표본 집단규모에 따라 결과는 들쑥날쑥 하기마련이었다. 그러나 ccTV 카메라를 통해 수만 명을 동시에 모니터하는 빌리의 능력이라면 우선 표본의 신뢰성부터가 높다. 또한 질문지 대신 감정파동의 모니터라면 결과는 정확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
양 손에 비스켓을 쥔 지오가 뒤뚱 걸음으로 비둘기를 쫓아다닌다. 제 깐에는 비둘기에게 줄 요량이지만 막상 비둘기에게는 3살배기도 위협적인 거인이다. 푸득거리며 달아나는 비둘기들을 하릴없이 좇다 문득 생각난 듯 조막손의 비스켓을 한입 베어 문다.
‘이 맛있는 게 왜 싫다는 거야?’
해맑은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이제 걸음마가 제법 익숙해진 지오는 혼자 연구소 정원을 싸돌아다니는 시간이 늘어났다. 민우가 사라진 뒤 독서량이 부쩍 늘어난 미주는 지오를 혼자 내놓을 때가 잦아졌다. 정원에 아이에게 위험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미주는 꾸준히 공부했다. 평균학력이 대학원 수준인 연구소는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말 한 마디도 섞기 어려운 분위기다. 하지만 방송통신대에 생명공학과정은 없었고 독학마저 어려운 것이 이공계다. 그래서 구내 도서관의 Bio 관련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갈수록 자연의 신비에 매료되어갔다.
원자와 세포 이야기는 알아갈수록 오묘했다.
원자와 세포는 자연계의 로봇이며 우주의 주체였다. 누가 먼저였나? 닭이냐? 달걀이냐? 도킨스는 달걀이 먼저라고 이기적 유전자에서 답한다. 생명의 원천은 결국 세포의 설계자인 유전자라는 주장이었다. 유전자에게는 맹렬한 번식본능 뿐 자생력이나 자의식 따위는 없다. 따라서 번식하려면 숙주가 필수요소였다.
그 결과 자연계에는 거대한 생명사슬이 형성되었다. 유전자는 그 모든 생명을 숙주 삼아 먹이사슬을 지배하는 주인이었다. 그 사슬 속에는 번식을 위한 섬뜩한 지혜와 교활한 창의성이 공존했다.
산란을 앞둔 뻐꾸기는 알 2~3개가 있는 뱁새 둥지를 찾아 알 하나를 밀어내고 산란한다. 이윽고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부화하자마자 뱁새 알을 모두 밖으로 차내 떨어뜨린다.
뱁새는 저보다 서너 배 크게 자라 떠날 때까지 뻐꾸기 새끼를 키운다. 뻐꾸기 류 50여종과 딱따구리 중 벌 앞잡이 새에게 이런 부화기생 본능이 있었다.
벌 앞잡이 새는 붉은 목 벌잡이 새의 둥지에 기생한다. 그 새끼는 날카로운 갈고리 형 부리로 둥지주인의 새끼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 침입자는 둥지주인인 벌잡이 새 새끼 2마리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속은 양부모들은 제 새끼로 알고 기르기 마련이었다.
달팽이를 숙주로 삼는 달팽이 기생충의 최종 목표는 새의 창자다. 그럼 왜 달팽이에 기생하는가? 달팽이를 새가 먹기 때문이다. 달팽이에 1차 기생한 후 새에게 침투하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새에게 옮겨가기 위해 달팽이를 잡아먹히기 쉽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원래는 보호색인 촉수를 눈에 띄는 화려한 색으로 바꾸고 야행성인 달팽이를 낮에 돌아다니게끔 조종한다. 새는 달팽이를 나비 유충쯤으로 알고 잡아먹는다. 이렇게 새 창자로 이동해 여생을 보낸 기생충은 변을 통해 땅으로 내려와 다시 달팽이와 새를 순환하며 살아 간다.
가장 큰 성공을 이룬 인간 유전자는 숙주를 최상위 포식자로 밀어 올렸다. 덕분에 여유를 얻은 인간은 사색을 통해 신을 찾고 컴퓨터를 발명했다. 이윽고 컴퓨터가 학습능력을 갖추면서 인간과 컴퓨터를 구성하는 기본 소자, 유전자와 반도체는 점점 닮아갔다.
생명과 인공지능의 경계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