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라, 스물일곱 살의 순교자여
작고 아름답고 젊은 손골성지
한수산
소설가. 세종대 국문학과 교수.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오늘의 작가상',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렇게 더러운 길을, 이렇게 정신없는 골목을 지나가 본 기억이 나에게는 별로 없다. ‘손골성지’로 찾아가는 길은 그것부터가 하나의 충격이었다. 우리는 어쩌자고 이 지경을 만들어놓고 살아간단 말인가.
그리고 마침내 찾아간 손골성지에서 나는 물 흐르는 소리에 감싸여 망연히 서 있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작은 성지를 만난 기억이 나에게는 별로 없었다. 전국의 그 많은 천주교 성지가 거대한 관광지처럼, 신심을 오롯하게 담으려는 정성은 없이 뻔뻔스럽게 변해가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그랬다.
찾아가기 전에 약도를 몇 번씩 살펴보면서, 어쩐지 쉽게 찾을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나는 서울-수원간 국도의 수지지구 주변에서 유턴을 두 번씩 해가면서도 성지로 향하는 길목을 찾아내지 못하며 헤맸다. 이 길이 아니면 오늘 순례는 포기한다는 심정으로 전연 약도와는 닮아 있지도 않은 골목으로 차를 몰았다. 그 순간 동천동 사무소를 알리는 화살표가 보이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 부근 어디가 맞다. 무작정 골목 안으로 올라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자니 갈림길에 붉은 안내표지판이 서 있다. 왼쪽이 손골성지, 오른쪽으로 가면 성심교육원이란다.
여기서부터는 주변의 모습에 놀라기 시작했다. 온통 가구공장과 가구할인매장… 가구의 천지인데, 그 거리의 지저분함을 어디에 비하면 좋을까. 작은 시냇물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자니 성지까지 4킬로미터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주변 모습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도로의 왼쪽 시냇물 건너는 온통 가구공장들이고 오른편은 산자락이다. 밭에서는 콩도 자라고 옥수수도 자라고 있고 산도 있다. 그런데 곳곳의 난삽한 건물들과 입이 딱 벌어지게 쌓여 있는 폐품들에는 할말을 잊는다. 그런 길이 어지럽게 골목으로 갈라지면 그곳마다 성지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을 세워놓은, 정성이 고맙다.
그러다가 주변에는 갑자기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드문드문 들어선 주택들이 나타난다. 흔히 말하는 전원주택단지다. 이제까지의 더러움, 그 정신없음은 간곳이 없고 집집마다 정원에서는 잔디를 깎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저 사람들은 매일 저 아래의 혼잡과 더러움을 뚫고 올라와 여기서 잔디를 깎으며 산다는 말인가. 별사람들도 다 있다. 그 주택단지의 맨 위에 손골성지는 있었다. 해맑은 얼굴을 하고.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동천동 734. 성 도리 헨리코 신부를 기리는 손골성지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성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순교비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무실과 경당 그리고 하얗게 예수상이 있는 부분과 한 단계 높게 자연석을 쌓아올린 곳이 묘소가 있는 부분이다. 성지 입구로 들어서면 성 도리 신부의 입상이 서 있고 잘 자란 잔디 사이로 돌을 깐 길이 정갈하다. 그 길을 따라 자연석으로 담을 치듯 쌓아올린 사이사이에 자리한 십자가의 길, 올망졸망 서 있는 4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14처도 특이하다. 단아한 묘소 옆에 자연석을 윤이 나게 깎은 제대를 놓았고, 십자고상이 그 뒤에 서 있다. 이들을 소나무 숲이 감싼다. 더 무엇을 덧붙이랴 싶은 아름다움이 거기에 담긴다.
묘소를 내려와 ‘성 도리 헨리코 김 신부 순교비’ 앞에 섰다. 그 표면에 약력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성 도리 헨리코.
출생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뤼송 생 필레르 달몽. 사제수품 1864년 5월 21일. 조선입국 1865년 5월 27일 손골에서 선교활동. 1866년 2월 27일 손골에서 체포되심. 순교 1866년 3월 7일 새남터 군문효수형. 시복 1968년 10월 6일 로마 교황 바오로 6세. 시성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축일 9월 20일.”
이만큼 아름다운 성지도 없을 것이다. 저 밑의 혼잡과 무질서가 만들어낸 더러움을 뚫고 피어오른 연꽃 같다. 성지의 적막과 정갈함이 경쾌한 시냇물 소리에 감싸여 행복하기까지 하다. 이 물소리는 바로 저 밑 더러운 가구단지 사이를 흘러가던 그 똑같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였다.
여러 자료마다 조금씩 그 이름이 다르게 적혀 있는 성 도리 헨리코(Dorie, Pierre Henricus. 1839-1866) 신부의 생애를 그의 이름처럼 여러 자료들을 취합해 보면, 그는 1839년 9월 23일 프랑스의 작은 어촌에서 8남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가난했지만 신앙 깊은 분들이었다.
그는 본당 보좌신부의 주선으로 1852년 10월에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8년 후 뤼송 대신학교에서 2년 동안 수학하던 중, 1862년 8월 23일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1864년 5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조선 전교의 사명을 받고 7월에 프랑스를 떠나 홍콩에 도착, 다시 조선 입국을 대기하기 위해 요동으로 떠났다.
다음해 4월 17일 그는 동료 신부 3명과 같이 백령도를 거쳐 5월 27일 서해안 내포에 상륙한다. 위앵 신부만 내포에 남고 나머지 3명의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교우집이 10여 채 있는 손골 마을에서 조선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도리 신부는 어학 공부에서는 다른 선교사들보다 뒤졌지만 조선의 풍습에는 가장 잘 적응하여 신자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곧 병인대박해가 일어나면서 도리 신부는 주교댁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로 체포된다. 1866년 2월 28일 도리 신부는 볼리외 신부와 함께 각각 들것에 실려 죄인 압송의 관습인, 양손을 홍사(紅絲)로 가슴 위에 묶이고 중죄인이 쓰는 갓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포도청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과거와는 달리 선교사를 처형하기 전에 원한다면 본국으로 추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도리 신부는 본국 송환보다는 순교하기를 분명히 밝혔다. 1866년 3월 7일 군문효수형으로 새남터에서 처형된 네 순교자 중에서 도리 신부는 마지막으로 머리가 잘렸다. 그의 머리는 두 번째 휘두른 칼에 떨어졌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새남터의 형장에서 그는 눈을 감고 묵상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나는 그 분이 순교에 대한 마음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라는 증언이 있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