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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기 필리핀의 토지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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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구체적 사례로까지 분석이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동아시아 지역경제사의 비교·연구에 대한 기초작업으로서 수행된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 경제사의 연구 방향과 관계되어 있다. 근년에 동아시아지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관련지어 이 지역에서의 경제발전의 원인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진 바가 있다. 이 논의에는 주로 인적 자본의 성장, 개발독재, 수출지향적 정책, 아시아적 가치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보다 거시적인 요인으로서의 토지제도와 토지개혁의 성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마젤란의 필리핀 상륙 이후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필리핀은 1898년 말부터 1946년까지 - 1942년부터 일시적으로 일본의 점령 하에 있었던 시기를 제외하고 - 미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1946년 7월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필리핀은 1950년대 및 60년대만 하더라도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교육보급도가 높은 국가에 속했다. 식민통치기인 1935년에 이미 초대 대통령 퀘존(Quezon)을 선출하였으며, 독립 이후에도 민주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주변국에 비해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주요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해 왔던 것이다. 필리핀의 식민지기에 대한 연구는 토지소유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연구업적은 한결같이 식민지기에 확대된 대토지소유의 원인으로서 미국지배기의 토지정책 특히 공유지법과 교회토지법의 문제점을 언급하고 대토지의 확대에 따른 지주계급의 국가권력 장악 등이 독립 후의 토지개혁을 무산시킨 최대의 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다. 본고는 Ⅱ장에서 미국 통치기의 토지제도를 검토하기 위한 전제로서 스페인 지배기의 토지제도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본 후, Ⅲ장에서는 공유지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입법과 토지겸병 요인을 요약한다. 그리고 Ⅳ장에서는 미국의 식민지기에 확대된 지주소작관계의 확대요인과 특징에 대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Ⅱ. 사적 토지제도의 도입 1. 사적 토지소유의 형성 1521년 마젤란이 필리핀군도에 상륙한 이후 이 지역은 1565년부터 1896년까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스페인이 지배하기 이전의 토착사회구조에 대해서는 사료부족으로 상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는 것 같다. 다만, 여러 연구를 통해서 볼 때 원시공동체단계 말기로서 계급분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Salman, 1999, pp.1-12.).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 필리핀군도에는 Negritos, Igorots, Tboli 등의 여러 토착부족과 주로 동남아시아 본토와 인도네시아로부터의 이민자, 남부의 Moro 이슬람교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대다수는 말레이계 이민자들로서 바랑가이(barangays)라는 소규모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16세기 말 경 Central Luzon의 인구밀집 지대에서 바랑가이는 30호 내지 100호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보다 약간 더 큰 경우도 있었다(Corpuz, 1997, p.13.). 필리핀에서 대토지소유 확대의 계기가 된 것은 엔코미엔다제도(encomienda system)이다. 스페인은 필리핀군도의 모든 토지를 국왕의 소유인 realengas로 선언하고 식민화에 앞장 선 군인과 성직자, 정착자, 로마카톨릭계의 스페인 교회에 토지와 함께 사법권을 부여하였다. 엔코미엔다는 국왕이 소유하는 행정단위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관리들이 토지를 상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농민들이 대대로 공물을 납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엔코멘데로(encomendero)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경우 국가가 부과하는 강제노역으로부터 면제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농민의 토지를 포섭하였다(Putzel, 1991, p.45.). 스페인 지배기에 지주는 초기에 교회가 전형적이었지만, 점차 민간인 대지주의 비중이 커져갔다. 그리고 민간인 대지주는 스페인인과 스페인메스티조(spanish mestizo), 프린시팔리아(principalia), 중국인메스티조(chinese mestizo) 등으로 구성되었다. 스페인계는 주로 식민초기에 국왕의 토지증여를 바탕으로 토지를 확대한 세력이었다. 이에 비해 프린시팔리아는 필리핀의 고유한 제도인 caciquism을 기초로 성장한 세력이다. cacique이란 필리핀의 Moro인들 사이에서 족장을 가리키는 다투와 동의어인데, 스페인은 이 제도를 촌락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도입하였다. 중국인메스티조는 스페인 지배 후기에 지주로서 성장한 세력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이다. 중국인들은 멕시코와 은의 교역이 출현함에 따라서 Kwantung, Fukien 등으로부터 대거 이주해 왔다. 이들은 초기에는 주로 상업에 종사했지만 축적된 자본을 이용하여 점차 화폐대부업에 진출하였고 18세기 초까지는 Pampanga와 같은 지역에 이주하여 프린시팔리아로부터 토지를 임차하거나 국내소비를 위한 설탕공장을 건설하였다. 중국인과 상업부문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서 이들은 본격적으로 토지매입과 임차로 방향을 전환하였다(Putzel, pp.45-47.). 이들은 19세기 말에 스페인인과 결혼하거나 대규모 아시엔다를 분할매입하였다. 이 때문에 규모는 좀 더 적지만 예전보다 많은 수의 스페인 혹은 중국인 메스티조들이 100 - 500ha의 아시엔다를 소유하게 되었다. 즉 18세기 이후 20세기 초에 걸쳐 중국인 메스티조는 토지집적에서 현저한 성과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요약하면, 필리핀에서 민간인에 의한 대토지소유는 특히 18세기 후반 스페인 정부가 수출용농작물의 생산을 장려한 것을 계기로 동기가 유발되어 메스티조와 프린시팔리아의 토지가 확대되었다 할 수 있다. 2. 카사마와 인퀼리노제도의 도입 식민기 대토지소유는 기본적으로 카사마제도(kasama system)이란 분익소작제에 의해서 경영되었다. 카사마는 분익소작농으로서 대체로 생산물의 절반을 지주에게 납부하고 그 회에도 각종의 노역과 부담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스페인 통치 후반기에는 화폐경제의 진전과 더불어 인퀼리노제도(inquilinato system)란 새로운 패턴의 소작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 제도의 도입은 아시엔다의 발달과 관계가 깊다. 대농장인 아시엔다가 토지소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이다. 아시엔다는 1780년 이전에는 토지소유에서 그다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세계시장이 급속하게 확대되면서 스페인 정부는 수출증대를 위해서 설탕과 담배등 상업작물의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아시엔다의 확장정책을 취했다. 여기에 가장 먼저 대응한 것이 교회였다. 즉 쌀 및 설탕교역의 확대와 더불어 18세기 후반 마닐라만 부근의 Dominican과 Jesuit, Franciscan, Augustinian 등 교회를 비롯한 교단은 대토지를 경영하기 위하여 인퀼리노(inquilino)에게 임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퀼리노는 캐논(canon)이라 불리는 고정화폐지대를 지불하였는데, 캐논은 토지비옥도, 작물의 종류, 인구밀집도 등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인퀼리노는 고정지대를 일년 단위로 갱신해야 했기 때문에 해마다 부담이 증가하였고 이외에도 무상으로 노역을 제공했다(Bauzon, pp.6-7; Mclennan, pp.653-654, p.666.). 인퀼리노는 대부분 화폐지대를 지불하는 소작농이었지만 때로는 교회와 수도원에서 임대한 토지를 재차 카사마에게 대여하기도 했다(Murray, 1970, p.89.). 대토지의 확대로 인하여 토지를 상실한 농민은 소작농 혹은 노동자가 되거나 산악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문에 필리핀에서는 스페인 지배가 시작된 이후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미 스페인의 필리핀 지배가 시작된 1565-1663년 간의 초기반란을 시작으로 1717년, 1745년, 1762년 등 18세기와 스페인 지배말기인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농민반란은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초기의 농민반란은 토착신앙과 문화의 회복이란 명분 하에 반기독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는데, 이것은 교회의 토지수탈과 착취가 가혹했기 때문이다. 즉 농민저항은 근저에는 고율지대와 강제노동, 중세 등에 대한 불만이 기본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Ⅲ. 토지입법과 대토지소유의 확대 1. 토지입법 1) 공유지법 (1) 주요 내용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1898년 10월 1일 맺은 파리조약으로 2천만 달러에 필리핀에 대한 종주권을 획득했다.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인수한 미국은 곧 토지개혁 입법에 착수하였다. 미국이 집권 초기에 서둘러 토지관계법령의 정비에 착수한 것은 스페인이 지배 당시에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다. 특히 스페인 지배 말기에 일어난 필리핀혁명은 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기본적으로 식민통치를 종식시키려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혁명의 발생은 크게 ① 점증하는 억압과 착취, ② 프린시팔리아 혹은 엘리뜨지배계급과 중간계급에 미친 자유주의의 영향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지문제야말로 혁명 발발의 기본적 원인이었다. 미국은 1902년 필리핀혁명군을 완전히 제압하게 되자 곧 바로 토지입법의 제정에 착수했다. 필리핀을 지배하는 동안 미국은 수 차례에 걸쳐서 토지관계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공유지에 관한 정책이다. 여기서는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미국이 지배한 첫 10년 동안 재산권에 관한 기본 골격은 미의회와 필리핀위원회가 통과시킨 법률에 의해서 구체화되는데, 먼저 입법과정을 살펴보자. 미의회는 1902년 7월 1일 법률 제235호로서 1916년까지 식민지의 헌법으로서 기능하였던 필리핀 조직법(The Philippine Organic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의 제12조, 제13조, 제16조 등은 필리핀 내의 재산 처리에 관한 조항을 담고 있는데, 토지소유의 상한에 대하여 개인은 16ha, 기업은 1,024ha까지 공유지를 획득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사유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지배 초기에 공유지는 전국토의 적어도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Romani, 1956, p.851.), 경작가능지역의 3분의 2는 공유재산으로 분류되어 있었다(Martin, 1999, p.188.). 공유지법은 이러한 광대한 공유농지를 무토지농민과 빈농들에게 분할·제공함으로써 자작농을 육성하고 토지문제를 해결한다는 취지에 입각해 있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삼림 및 광산지역을 제외한 공유지는 기본적으로 실제적인 점유자와 정착자들에게 자작농지용으로 판매되거나 임대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소유증서를 갖고 있지 않은 자에게 공유지불하증서를 발행하게 되어 있었는데, 공유지를 매입·소유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공유지를 찾아내어 16ha까지 지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체는 21세 이상의 필리핀인 및 미국시민이거나 가장들이었다. 다만, 지정한 후 소유권이 인정될 수 있는 토지는 어떠한 사람에 의해서도 점유되어 있지 않고 특정용도에 배정되어 있지 않으며 삼림보다는 농업지역으로서 가치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비광산지역으로서 반드시 정착과 경작 목적으로 이용될 경우만으로 한정되었다. 둘째, 농민이 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조사·신청·등록청원의 3단계를 거쳐야 했다. 공유지국(The Bureau of Public Lands)에 서류가 제출되면 타당성여부가 검토된 후 일정금액의 수수료를 내면 입식이 허가되었고, 5년간 거주와 경작이 이루어지고 나면 공유지불하증서가 주어졌다. 이는 스페인시대의 불완전한 토지소유권을 완성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셋째, 신청자가 모든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경우라도 공유지국의 지휘 하에 토지가 조사되고 구획될 때까지 불하증서의 발행이 보류되었다. 또한 신청이 이루어진 후 언제라도 그리고 최종적으로 입증이 이루어지기 위한 합법적 기간의 만료 이전에 그 토지가 자작농 입식에 적절하지 않다거나 신청자가 무자격일 경우 그리고 거주와 경작에 관한 법적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에 불하는 취소되었다. 신청에 대해 고발이 있을 경우에는 고소한 자에게 60일동안 입식에 대해서 우선권이 인정되었다. 넷째, 자작농과 같이 토지를 매입하는 자도 적당한 토지를 지정한 후 신청할 수 있었다. 공유지국은 조사를 마치고 지가를 감정한 후 공매에 부쳤다. 경매는 최소한 감정가격 이상이면 성사되었고, 매입가격은 5년 이상의 연불로 지불될 수 있었다. 역시 공유지불하증서는 토지조사와 구획이 완료된 이후에 발행되었다. 만약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면, 회사의 경우는 구매자가 개인의 경우는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였다. 또한 판정 이후 5년이 지나서 공유지 불하증서가 발행되었으며, 발행전 구입자는 5년 동안 실질적으로 경작하거나 개간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만약 다른 필요조건들을 1년 이상 충족하지 못할 경우에는 토지는 정부에 환수되고 납입금도 몰수되었다. 이 외에도 상업적 플란테이션을 위해서 기업은 1,024헥타까지를 소유하거나 임차할 수 있었고, 개인도 1,024ha까지 임차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2) 문제점 공유지법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1902년 토지등록법(The Land Registration Act)의 문제점에 대해서 약간 언급해 둔다. 이는 공유지법의 취지를 무색케 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하려 한 이 법은 1905년에 미등록되어 있던 모든 토지를 공유지로 선언했다. 부족적인 필리핀인, Moro인, 가난한 농민들은 일반적으로 토지를 등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 신들이 대대로 경작하던 토지에서 무단거주자가 되었다. 자작농 육성을 기본 목적으로 했던 공유지법의 효과에 대해서 기존 연구들은 대단히 비판적이다. 이를 요약·검토해 보자. 첫째, 개인과 기업소유 토지의 상한에 대한 문제점이다. 먼저 기업의 경우에 1,024ha까지의 대토지소유를 허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필리핀 내 농기업의 이해와 맞물려 있는 상업적 플란테이션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필리핀을 자국의 자유무역체제에 편입하여 제1차산품의 공급처로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규모 차지의 길도 열어놓았다. 기업은 물론 개인도 25년 동안 1,024ha까지 차지할 수 있도록 하였고, 1회에 걸쳐 갱신이 가능하였다. 이것은 차지인이 농업임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합법적으로 작은 필지로 분할되어 소작농에게 대여되는 것을 의미한다(Martin, 1999, p.192.). 다음 자작농에게 허용된 16ha의 면적에 관해 검토해보자. 기존 연구들은 이에 대해서 토지소유권 획득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만을 지적하고 당시의 생산력 수준에 따른 자작농의 적정경작면적이 얼마인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당시에 제1급의 농지 1ha의 평균생산성은 40cavan으로서 이를 경작하는 데 최소한 2인의 노동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만약 농업종사자가 공유지 16ha를 확보했다면, 기계화가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노동력만으로 경작이 불가능하다. 결국 16ha란 소유상한도 자작농이 경작하기에는 과도한 규모였기 때문에 기업농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소작제로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공유지법은 1919년 법률 제2874호에 의해 소유상한을 100ha로 크게 완화해버리고 말았다(Putzel, 1992, p.52.). 둘째, 공유지 신청 주체에 대한 문제이다. 21세 이상이거나 가장일 경우 공유지를 불하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농업에 종사한 자가 아니더라도 토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인도 이 대상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농민들이 상호간은 물론 지주, 상인, 이민자와 경쟁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셋째, 공유지획득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살펴보자. 최소 5년간 거주하거나 경작해야 한다는 조건은 추가적 비용과 토지소유권 획득에 대한 불확실성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합법적으로 자작농이 되기 위해서는 크게 조사·신청·등록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외에도 고시과정과 소송의 가능성 등은 장차 혜택을 받을 사람에게 5년이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고시과정과 선서제출, 자작농 신청에 대한 소송이 발생할 경우의 법적 대응, 합법성을 증명해야 하는 수많은 증거제출 등은 빈곤한 농민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넷째, 토지임차 과정의 경우이다. 임차도 자작농과 유사하게 조사와 고시 등의 과정을 거쳐야 했 지만, 결정적 차이는 임차자에 대해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와 사이에 분쟁이 생길 경우 전자가 많은 대응수단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공유지법에는 어떠한 임차도 점주자나 정착민의 동의를 먼저 얻을 때까지 점유 혹은 정착에 의한 어떤 앞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차비는 공유지국의 국장(The Chief Bureau of Public Lands)이 매년 정하는데, 임차자는 매년 선불로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만, 공유지법에는 협상과정이나 소유권 주장에 대한 합법적 결정에 관한 어떤 기준도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Martin, 1999, p.192.). 여기에 스페인지배기로부터 유래하는 혼란스러운 토지사항과 1896-1898년까지 휩쓸었던 혁명기간 동안 토지소유권증서와 그 외 관계기록의 파괴로 인하여 농민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Bauzon, 1975, p.12.). 파리조약으로 미국이 획득한 공유지는 일단 농민에게 개방되었고, 소작농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농촌진흥국(The Rural Progress Administration: RPA)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공유지법이 효력을 발휘한 1904년 7월 26일부터 1913년 6월 30일까지 신청건수는 19,313건이었다. 이 중 4,470건은 거부되거나 취소 혹은 철회되었다. 1913년 6월 30일에 계류 중인 신청건의 절반 이상인 3,333건이 삼림국의 보고를 위해 보류되고 있었고, 그 나머지는 신청 정정(1,018건)과 수수료지불(1,636건)을 위해서 보류되고 있었다. 이렇게 식민지기 대토지소유의 확대에 대해서 기존 연구들은 그 원인을 공유지법에 돌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공유지법의 성과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즉 기존 연구는 공유지법이 대토지확장과 함께 농민추방, 토착사회의 급속한 해체를 초래한 주된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지만, 자작농의 몰락이 가속화한 것은 공유지법이 실시된 초기가 아니라 미국과의 자유무역으로 상업적 농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후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뒤 Ⅳ장에서 통계와 함께 검토하기로 한다. 2) 교회토지법의 내용과 문제점 공유지법과 함께 미국이 집권 초기에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추진한 또 하나의 법률이 교회토지법(The Friar Lands Act)이다. 교회토지법은 1904년 4월 26일 법률 제1120호에 의해 제정되었는데, 교회토지를 매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려는 것이 기본적 취지이다. 미국이 교회토지의 매입에 공을 들인 것은 농촌지역 불안의 상당 부분이 교회의 대토지와 가혹한 착취에 기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필리핀 혁명기에 교회는 농민들의 주요한 공격과 파괴, 추방의 대상이었다(Bauzon, 1975, p.10.). 교회토지법은 카톨릭교회가 소유하는 토지 166,000ha를 720만달러에 정부가 매입하여 판매 및 임차에 대한 우선권을 이미 토지를 경작하고 있는 6만명의 분익소작농에게 분배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수혜자는 매입비용과 이자를 지불하도록 규정되었다(Riedinger, 1995, p.87). 스페인지배 말기까지 교회는 약 171,000ha를 소유하고 있었고, Laguna, Bulacan, Batangas에만 교구가 관할 하는 네 군데의 소유지가 44,000ha였다. 이 토지들은 필리핀에서도 가장 비옥했다(Putzel, 1992, p.45.). 1902년 미국은 바티칸과 협상을 시작하여 1903년 말에 교단소유지의 거의 90%에 달하는 165,000ha의 토지를 약 700만 달러에 매입하기로 동의를 얻었다. 교회토지법 역시 소작농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스페인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지주 및 기업가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구입비와 유지비용의 부담 또한 만만치 않았다. 또한 농민들은 경작과 구입토지의 계속적 보유에 필요한 신용공급과 농업지원사업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Riedinger, 1995, p.87.). 이리하여 교회토지를 가장 많이 매입한 자는 소수의 토지귀족과 미국계 설탕회사 그리고 형편이 나은 인퀼리노 등이었는데, 절반 이상은 미국인과 필리핀 사업가에게 직접 판매되거나 임대되었다. 결국 스페인교회란 지주로부터 미국기업과 필리핀인 지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2. 상업적 농업의 발전과 대토지소유 필리핀은 333년간에 걸쳐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지만, 스페인경제의 낙후성·봉건성 때문에 필리핀 경제는 농업 면에서 스페인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았다. 18세기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과 함께 세계시장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자 스페인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필리핀에서 수출용 농작물 생산을 장려했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교역이 진전된 19세기에조차 필리핀의 대외교역에서 스페인은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영국, 중국과의 교역비중이 훨씬 컸다(Lava, 1958, pp.47-48.). 이들 국가와의 교역관계는 1834년 마닐라가 개항된 것을 계기로 크게 밀접해졌고, 상업작물의 생산도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필리핀 경제는 스페인 통치가 끝날 때까지 자급자족체제를 유지했다. 미국은 스페인과는 달리 단 수십년간의 지배를 통해서 필리핀 경제를 완전히 종속시켰다. 즉 미국의 정책은 미국을 수요자로 하는 필리핀의 상업적 농업의 발달을 자극하는 한편 필리핀을 미국 공업생산물의 판매시장으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양 지역간의 제한없는 교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미국과 필리핀 간의 자유무역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것은 1909년의 Payne-Aldrich법이었다. 1909년의 Payne-Aldrich 법은 필리핀에 30만톤의 설탕을 할당하고 쌀과 담배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반면 모든 미국제품은 무관세로 제한없이 수입할 수 있도록 되었다(Putzel, 1992, p.54.). 1913년에는 Underwood-Simmons법에 의해 모든 쿼타제한이 철폐되었다. 이리하여 제1차대전 이후에는 상업적 농업의 발전과 더불어 대토지소유의 중심은 교회 및 수도원으로부터 사적 기업과 아시엔다로 이동되었다. 특히 이 같은 변화는 설탕생산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대토지소유자인 설탕귀족(sugar baron)과 토지귀족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정치력 지배력을 확대해 갔다(Putzel, 1992, p.54.). 상업적 농작물을 생산하는 부분에서는 대체로 20세기 이전에는 소작농과 소토지소유자가 지배적이었지만, 새로이 대규모 플란테이션이 발전한 지역에서는 임금노동자의 비중이 높았다(Allen, 1938, p.55). 상업적 농작물생산의 증대에 따른 소유지 집중과 소작확대에 관한 자료로서는 Luzon의 중요한 설탕생산지인 Tarlac의 근접한 세 도시에서의 토지관계를 조사한 1936년 6월 노동성의 보고가 주목된다.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Luisita아시엔다는 그 면적이 24,000ha로서 대부분 사탕수수를 경작했다. 이 아시엔다를 소유하고 있는 Tabacalera회사는 필리핀의 다른 지역에도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Tarlac Sugar Central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후자는 이 지방의 다른 여러 곳에도 설탕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자유무역이 시행되자 상업적 농업의 발달을 계기로 농민토지의 수탈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대토지의 확대를 초래한 토지겸병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토지소유권을 탈취하는 방법으로서 합법적, 비합법적인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서는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으로 토지를 획득하는 것에는 미국과 필리핀 법정의 편향적 태도가 크게 작용하였다. 대토지소유자는 인근의 소농민의 토지를 겸병하였고, 만약 법정까지 가더라도 유리한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승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비합법적으로는 농민들이 점유 혹은 경작하고 있는 부근의 토지에 대해서 경계표와 울타리는 옮기는 방법이 사용되었고, 이외에도 이 외에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한 것이 고리대에 의한 토지수탈이었다. 19세기 이전에는 교회가 가장 큰 토지겸병자였지만, 19세기가 되면서 비성직 스페인인, 스페인 혹은 중국인 메스티조, 프린시팔리아도 토지겸병의 대열에 참가하였다(Bauzon, 1975, p.4.). 소생산자들은 빈곤 때문에 대농장주로부터 자금을 차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Kuangtung에서는 현금대부의 연이자율이 일반적으로 20%에서 높을 때는 100%였으며, 곡물대부일 경우 연 60%에서 100%, 심한 경우 400%를 넘는 경우도 있었다. 유통과정에서의 착취도 한 몫을 하였다. 20세기 초 Bukidnon고원지대에서는 Cagayan시에 거주하는 부재지주들이 자신들 혹은 자신들이 지정한 곡물상인에게만 판매하도록 강요하거나 때로 총기로서 협박하여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매입하기도 하였다. 3. 컴먼웰서의 토지정책 토지소유의 극심한 불균형으로 농업불안이 초래될 경우 움직임은 두 가지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는 농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토지개혁을 이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민반란이다. 스페인 통치기에 형성된 지주제가 미국의 지배 하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농민경제를 악화시켰기 때문에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격렬한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였다. 1920년대에 발생한 대표적인 농민봉기로는 Colorum반란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1924년에 시작되어 1931년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는데, 이 조직은 이미 스페인통치기에 사실상의 정치단체로서 조직되었다. Colorum조직은 미국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 Nueva Ecija, Rizal, Tarlac, La Union, Baranga, Surigao 등지에서 더욱 확대되었는데, 광범한 지역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이념, 리더쉽, 조직구조 등에서 상호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증거도 없고 신앙이나 관습도 다양했다.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은 거의 농민들과 도시의 프로레타리아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시기 농민들의 저항은 청원과 법정투쟁, 스트라이크, 아시엔다에 대한 방화, 곡물창고 공격, 지대거부, 시위와 집회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Kerkvliet, 1971, p.179). 1930년대에 발생한 농민운동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Sakdal반란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교사였던 Benigno Ramos에 의해서 합법적인 조직으로서 결성되었는데, 1930년에 우연히 발생한 사건을 기화로 곧 독립운동을 번진 이후 최소 15년간 Luzon지방의 중부 및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1935년 5월에 6만 5천명의 무장농민이 이 반란에 참여하였다(Lopez-Gonzaga, 1988, pp.427-442; Benda, 1965, pp.420-434.). 이러한 반란이나 농민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요구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독립이고 두 번째는 토지개혁이었다. 독립과 토지개혁에 대한 농민의 요구가 점차 강해졌기 때문에 정부는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3년에 공법1933년 제4133호로 사탕수수소작계약법(The Sugar Cane Tenancy Contract Act)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경작면적, 생산량, 농업종사자의 수적인 면에서 훨씬 큰 중요성을 가진 것은 같은 해에 공법 제4054호에 의해서 제정된 쌀소작법이다. 쌀소작법은 1) 지방어로 소작계약을 작성토록 하고, 2) 생산비와 수확물을 각각 반분토록하며, 3) 소작농에 대한 대부금에 대해서는 연 최고 10%의 금리를 넘지 않도록 하고, 4) 소작농이 빚을 질 경우에라도 소작농이 최소 수확물의 15%를 가져갈 수 있도록 하고, 5) 자의적인 소작농 해고를 금지하고 있었다(Hick, 1987, p.17; Riedinger, 1995, p.88; Murray, 1972, pp.154-155; Bauzon, 1975, p.16.). 언뜻 보면 이 법은 경작농민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고 지주와 소작농간의 관계를 규제한다는 점에서 소작농을 이상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존의 생산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공유지법의 기본정신인 자작농 육성을 포기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더욱이 지주들은 자치위원회(municipal councils)의 다수가 총독에게 청원할 경우에만 유효하다는 조항을 끼워넣어 무력화시켰다. 실시에서도 매년 소작계약을 갱신토록 할 뿐만 아니라 지방의 지주들이 장악하고 있는 자치위원회(municipal commission)가 규정을 제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주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계약의 갱신이 거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소작법은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지주들에 의해서 개정을 거듭하였다. 컴먼웰서 정부의 초대 대통령 Quezon은 1936년에 컴먼웰서 법 제178호로써 소작법을 개정하였다. 이것은 1933년의 소작법에도 불구하고 Central Luzon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농업불안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개정법은 "공공의 이익이 필요할 때" 즉 실질적인 농업불안이 야기될 때 대통령의 포고에 의해서만 효력을 지닌다고 개정되었는데, 법률 제461호, 538호, 608호에서 계속 개정되어 특정한 상황 하에서만 농민이 축출되는 것을 금지했다(Anonymous, 1958, p.392.). 그렇지만 개정법도 지주들에 의해 무시되거나 오히려 농민을 추방하는 데 악용됨으로써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소작법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농민저항에 직면한 미국은 토지개혁과 독립요구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식민지 지배정책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회는 필리핀의 부유층이 반대하는 가운데 필리핀 독립법(The Philippine Independence Law)을 통과시켜 자치제를 도입하였다. 이리하여 1935년 11월 15일에 출범한 컴먼웰서 정부는 초대 대통령에 Quezon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헌법에는 농업문제 해결에 필요하다고 인정될 경우 정부가 대토지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Quezon정부는 1936년 공유지분배를 촉진하기 위한 법률 통과시키고, 사유지 수용권한의 수용과 대토지 매입을 위한 농촌진흥국(The Rural Administration: 1938년) 및 국가토지정착국(The National land Settlement Administration: 1938년)을 설치하는 등 30년대 후반에 대규모 아시엔다를 수용하 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Bauzon, pp.13-14.). 그러나 헌법을 만들기 위해 조직된 헌법위원회(Constitutional Convention)가 주로 엘리뜨와 지주 출신 대표로 구성되고 의회 또한 지주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책의 효과는 그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컴먼웰서정부가 1천 1백만 페소의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정착시킨 농민은 1950년까지 겨우 8,300호에 지나지 않았다(Putzel, 1992, p.59.). 자치정부의 표면적 입장과는 달리 지주편향적 정책은 미국계기업의 토지소유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특히 상업용작물 생산부문에서는 공유지법에 의한 기업소유 상한 1,024ha보다 훨씬 많은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가령, 캘리포니아통조림회사(The California Packing Corporation, 상표: Del Monte)의 자회사인 필리핀통조림회사(The Philippine Packing Corporation, PPC)는 1928년에 상업적 규모의 파인애플 재배에 착수하였는데, 곧 이 회사는 공유지법에서 회사기업이 소유할 수 있는 상한 1,024 ha에 대해서 예외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자치정부는 농민이 세금을 제대로 부담하지 못할 경우 토지를 가차없이 몰수했다. 예를 들면, Rizal성에서는 세금미납으로 많은 토지가 정부에 몰수되었는데, 이 토지는 Taft위원회(Taft Commission)가 수도원으로부터 구입하여 소규모로 나누어 농민에게 팔았던 토지였다. 이 외에도 Luzon에서는 1930년대 중반 경에 세금미납 등으로 적지 않은 토지가 몰수되었다(Allen, 1938, pp.56-57.). 이와 같이 미국과의 자유무역으로 커다란 이익을 향유하는 지주 중심의 엘리트계급이 전혀 농업·토지문제를 해결에 성의를 보이지 않게 되자 농민운동은 더욱 조직화되었다. 필리핀공산당 (Communist Party of Philippines)과 사회당(The Socialist Party)는 각각 만명의 농민당원을 거느리고 토지개혁을 요구하면서 반정부 및 반체제투쟁을 전개하였다.(Ofreno, 1980, p.25.) 이후 필리핀은 1942년에 일본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되었지만, 이 기간에도 토지관계는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점령에 대하여 많은 농민들이 게릴라인 Hukbalahap 즉 항일인민군(People's Anti-Japanese Army)에 참가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토지소유자계급은 적과 결탁하였다. 결국 토지소유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대립이 외세에 대해서도 분열을 조장하였던 것이다. Ⅵ. 지주소작관계의 특징 이제 식민지기에 확대된 대토지소유와 지주소작관계의 특징에 대해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먼저 대토지소유와 지주소작관계에 관한 통계이다. 식민지기의 자료는 아니지만, <표 1>은 독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에 식민지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농가의 67.8%를 차지하는 3ha 이하의 영세농은 전체면적의 26.4%만을 경작하고 있다. 반면 농가의 0.4%에 지나지 않는 50ha 이상의 대농장이 경지면적의 1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농가의 6%인 10ha 이상의 농가는 39.2%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다. 가장 비옥한 토지 1ha에 필요한 노동력이 2인이었기 때문에 5인 가족을 기준으로 하면 2.5ha 이상을 한 가족이 경작하기 힘든다. 따라서 3ha 이상의 토지경영에는 임노동을 고용하거나 소작농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필리핀의 식민지기 농업통계는 매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계열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1903년부터 단 몇 해에 걸친 것에 지나지 않지만 <표 2>는 변화의 추세를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배 전기인 1910년대 말까지 전국적으로 자작농이 약간 증가하였다. 만약 <표 2>의 센서스가 정확하다면, 이는 기존 연구들이 한결같이 공유지법을 비롯한 토지입법들이 자작농을 육성하기는커녕 이들을 몰락시켰다고 비판을 제기하고 있는 것과 상당히 다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Central Luzon 평야 5개는 다른 지역보다 소작농이 크게 감소하고 있다. 공유지법이 소작농의 급격한 몰락을 초래했다는 분석은 사실과 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공유지법이 전국적으로 대량의 자작농을 양성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농민을 보호하는 데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1903년 이후 소폭 증가한 자작농이 1918년 83.4%에서 1939년에는 49.3%로 급속하게 감소하고 자소작농 및 소작농이 증가하였다. 비록 1903년과 1918년의 통계에 자소작농과 농장관리인이 자작농에 포함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948년에 이르기까지 소작농이 급속하게 증가하는 농민몰락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필리핀 중심지역인 Luzon에서는 타 지역에 비해서 이러한 사태가 급격하게 진행되어 1939년에 자작농은 30%에 크게 못미치고 자소작농과 소작농을 모두 합해서 전체농민의 70% 이상이 소작관계 속에 편입되어 있다. 특히 쌀의 주산지로서 농민반란이 격심했던 Central Luzon의 5개주와 Cavite 및 Rizal주에서는 농민분해가 빨리 진행되어 전국 평균보다 훨씬 높은 소작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39년에 대체로 순소작농이 50%였던 이 지역에서는 독립한 후인 1948년에 소작농이 60.2%로서 더욱 높아졌는데, 자소작농까지 합하면 농민의 70% 이상이 소작관계에 편입되어 있다. Luzon지역은 원래부터 필리핀의 곡창이기 때문에 쌀 경작지에서도 소유지집중이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미국 통치 후반기에 자작농의 급속한 몰락과 더불어 소작제도 내에서도 여러 가지 조건들이 악화되고 있었다. ② 농민몰락은 필연적으로 소작농에 대한 지주 지배력의 강화와 농민들에 대한 각종 부담의 추가로 귀결되었다. 먼저, 봉건적 잔재인 임시부역과 여러 가지 벌금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계약서 상에는 합법적 관행으로서 의무부역이 기록되었고, 로마카톨릭교회의 시중, 지주를 위한 각종의 무상노동 등도 추가되었다. 생산에 대해서도 관여하여 지주는 소작농이 생계유지를 위해 식량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소작농과 농장노동자들을 사취하거나 생산물의 중량을 속여서 팔거나 때로는 소작농이 가져갈 몫을 강탈하기도 했다. 농장으로부터의 추방도 빈번하여 교회가 소유한 San Padro Tunasan 아시엔다에서는 1914년 이후 2000명의 중에서 절반가량의 소작농 가족이 추방되거나 가옥이 파괴당했다. 또한 전에 없던 택지에 대한 지대도 부과되었다. 결국 소작농이 노력하여 생산이 증가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지대증징이나 각종 명목으로 지주에게 귀속되었다(Allen, p.64.). 이러한 과중한 부담으로 인하여 단위당 생산량은 미국 지배기 내내 거의 정체하였다(The League of Nations, 1943, p.96; 1940, p.98; 法貴三郞, 1941, p.51.) 마지막으로 지주소작관계의 성격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농민과 지주와의 관계는 스페인기의 구제도에서 자선의 외관을 띠고 있던 온정주의적 특징들로부터 점차 사무적인 계약관계로 전화되 어 갔다(Hick, p.12.). 그렇지만 소작제도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전근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양상도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분익소작제를 중심으로 복잡한 소작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대토지소유자들은 카사마라 불리는 분익소작농들을 경작자로서 이용했다. 그런데 문헌에 따르면 이들과 비슷한 소작농이 언급된다. 즉 aparcero라는 소작농이다. 이 aprceria제도는 미국 남부지역 면화지대에 있었던 분익소작과도 유사하다고 지적되는데, 지주가 종자와 자금을 제공하고 나면 나중에 비용과 수확물을 반분하는 것이었다. 둘째, 인퀼리노제도에 대한 것이다. 인퀼리노제도는 자본제적 농업체제가 보다 발전한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인퀼리노는 지주에게 토지생산성과 관계없이 일정액의 고정지대를 지불하고, 대부분 경우 카사마의 분익소작농에게 토지를 재대여했다. 이들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대부분의 연구는 이들이 화폐지불소작농이라고 정의하면서도 특징으로서 지주로부터 대여받은 토지를 카사마에게 재대여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지주로부터 분여받은 토지를 재대여했다고 볼 수 없다. 이상에서 검토한 것을 요약하면, 미국지배기에는 자유무역과 상업적 농업을 계기로 농민몰락이 빠르게 진행되고 분익소작제가 정액소작제를 대체하면서 소작조건이 크게 악화되었던 것이다. Ⅵ. 결 론 필리핀에서 사적 토지소유는 스페인 국왕이 성직자와 카톨릭 교회, 식민자들에게 증여한 엔코미엔다제도를 계기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스페인 지배의 초기단계에서는 주로 카톨릭 교회가 대규모토지를 받았으나 점차 스페인 군인과 정착자 등 민간인들의 토지가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8세기에 Manila의 개항과 수출작물 증산을 위한 아시엔다 확대정책으로 대토지소유제도가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농장은 주로 카사마라 불리는 분익소작농을 통해서 경작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대외교역이 발전하면서 마닐라가 위치한 Luzon지방을 중심으로 인퀼리노제도가 도입되었다. 스페인 지배기에 형성된 소작관계는 미국의 통치 하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토지소유가 확장되고 소작관계는 악화되었다. 농업·토지문제로부터 야기되는 사회적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필리핀을 지배하게 되자 미국은 곧 공유지법을 비롯한 일련의 토지법을 제정하였다. 이 시기의 토지입법에 대한 성과와 토지소유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모든 연구들은 대단히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이리하여 1920년대 및 1930년대에는 자작농의 급속한 감소와 소작농 증가, 대토지의 확대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고 화폐지불 소작농인 인퀼리노도 분익소작농인 카사마로의 후퇴현상이 일반화되었다. 소작조건도 매우 악화되어 이전에 없던 각종의 부담이 농민에게 강제되었다. 따라서 1920, 30년대에는 농민반란이 빈발하였다. 당시에 필리핀 국토의 절반 이상이 경작가능하지만 1939년에도 13.3%만이 수확에 이용되고 있었다(Anonymous, 1958, p.391.)는 언급은 미국통치 후반기에 유휴지매입과 개발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농민경제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농민반란에 직면한 미국이 내걸은 정책은 소작법이었지만, 이것은 기존의 소작관계를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35년에 출범한 컴먼웰서체제 즉 자치제 하에서도 소작농을 위한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필리핀 지배계급은 미국과 권력을 분점하면서 미국과의 종속적 자유무역체제 하에서 이익을 누렸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반대했고 토지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소극적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일본의 점령기에도 기득권이 손상되지 않는 한 일본에 호의적 태도를 유지하였다. 반면에 많은 농민들은 항일무장투쟁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필리핀에서는 독립된 해인 1946년의 쌀분익소작법을 시작으로 소작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1954년에 농업소작법을 내놓았고, 1955년 토지개혁법, 1963년 농지개혁법, 1972년 농지개혁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토지소유관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필리핀 정부가 형식적이나마 토지개혁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일본군 점령기에 활동은 전개한 Hukbalahap와 같은 급진세력이 토지개혁을 요구하면서 농민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즉 Magsaysay나 Marcos 등의 집권세력이 토지개혁 법령을 제공한 것은 급진세력을 와해시키거나 정권의 연장수단으로 동원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필리핀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이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던 것은 미국의 식민치하에서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지주세력의 반발과 책동 때문이었다. 때문에 필리핀은 독립 이후 끊임없이 반정부와 반체제세력의 공격에 시달리고 경제적 불안정을 겪어야 했으며, 이러한 불안정은 국내자본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외자도입과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저해했다. 따라서 식민지기에 형성된 대토지소유 및 지주소작관계가 토지개혁에 미친 영향과 독립 후 토지개혁의 과정 및 이것이 경제성장에 미친 영향에 대한 자세한 분석 또한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 과제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