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오일 쇼크 앞에서 우리 경제는 훅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로웠다. 그나마 베트남 특수로 제2차 경제개발은 무난히 순항하였는데 원유 값이 두세 달 사이에 네 배로 올라 버리는 바람에 또 다시 주저앉을 기로에 서고 말았다. 나는 박통을 생각할 때 한면으로는 환멸을 느끼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그가 아니라면 그 누가 감당을 했을까 싶은 철통같은 영도력에 찬탄해 마지 않는다.
그로 나는 곤혹해지고 어눌해지고 마는 노릇이다. 요즘 복고풍으로 돌아 서 그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기도 한다. 당시 에너지 비용 증대에 따라 공산품, 수입품 가격도 덩달아 뛰었다. 1974년 경상수지 적자 20억 달러는 당시 정부 예산의 절반 규모였다.유신으로 정치적으로 고립무원인 상황에서 경제까지 따라 주지 않으니 사실 그의 거친 항해도 거의 끝이 난 듯 보인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칠흑 같은 어둠, 거센 파도를 헤치며 그는 수평선 너머 한 점 희망의 빛을 발견한다. 오일 머니를 블랙 홀처럼 빨아들이던 중동, 그 호랑이 굴 속으로 쳐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가자 중동으로 ! 1973년은 한국과 중동사이의 본격적인 경제교류에 있어서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한국정부는 중동 각 산유국들로부터 석유를 수입하는 동시에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조달을 하기위해 중동의 건설시장으로 파고들기로 한 것이다.
1973년 10월 제4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오일쇼크를 일으켰고, 그에 따라 유가가 4배로 급등하면서 이들 아랍 산유국들은 엄청난 '오일달러'를 축척하고 있었다.박통은 중동에 진출을 하지 않고서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리라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박통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위해 기존에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에서 전환하여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중동의 아랍국과들과 교류를 하며 적극적으로 중동의 특수를 위한 계획을 추진한다.
즉, 1973년 12월15일에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기업들의 중동 진출을 적극 지원하고 또 권장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73년 6월에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카이바, 알울라 간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한 것을 비롯해서 토목, 건축 분야를 중심으로 중동 진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술 인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도로를 닦는 단순 토목공사만 한국 몫으로 돌아올 뿐, 부가가치가 높은 플랜트 수출은 미국, 유럽, 일본 차지였다. 중동 진출 업체들은 "기계조립, 판금용접, 배관, 전기 등 전문기능 인력을 1500명만 확보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1976년 3월, 정부는 전국 11개 공고를 지목해 3학년 우수학생 2140명을 선발했다. 중동 현장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2급 기능사 인력 1500명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30% 정도 탈락을 예상하고 640명을 추가로 뽑은 것이다. 이들에게 800시간 실습교육을 시켜야 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2년이 필요했지만, 6개월로 기간을 단축했다. 중동 건설 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시간과 싸워야 했다. 정규 이론교육과는 별도로 주당 40시간, 하루 7시간씩 실습이 진행됐다.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이들의 6개월 실습에 쓴 용접용 산소가 8000병, 아세틸렌가스가 1만 병, 용접봉이 9만㎏이었다.
6개월 후 국가기술 자격검정 시험이 치러졌다. 70%를 기대했던 합격률이 100%로 나타났다. 2140명 전원이 현대, 대림, 대우, 동아 등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1977년 1월, 이들이 중동 현장에 투입됐다. 당시 용산공고를 갓 졸업한 청년이 사우디 현장에서 보내 왔던 편지 한 통은 우리의 가슴을 두고두고 아리게 한다. "가족, 모교, 그리고 조국의 명예를 걸머지고 있다는 각오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중동 건설시장의 판도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한국은 프랑스(7.2%), 영국(5.8%), 일본(4.9%) 등을 따돌리고 20.9%의 점유율로 미국(36.1%)에 이어 2위에 올라섰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제자리 또는 뒷걸음질을 했던 70년대 석유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만이 10% 내외의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현대건설의 중동 진출은 괄목할 만했다. 현대건설은 1975년에 바레인의 아랍수리조선소 건설 수주를 시작으로, 197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9억 3,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현대건설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중동에서 51억 달러가 넘는 외화를 벌어들였는데, 현대의 총매출 이익누계에서 해외건설이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또한 국가적 지원 속에서 중동 건설의 총 수주액은 1974년의 8,900만 달러에서 1975년에는 7억 5,100만 달러로 급격히 증가했고, 19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1975년에는 전체 건설 수출액의 93%, 1977년에는 96%를 차지하는 규모였다. 1975~1979년 사이에 중동 건설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총 205억 700만 달러였는데, 이는 총 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그동안 외화 보유에 어려움을 겪던 한국경제는 상당한 힘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렇게 중동특수 효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6년부터 79년까지 한국 경제는 사상 최대 호황을 기록한다. 성장률은 1976년 10.6%, 77년 10.0%, 78년 9.3%였다. 78년에는 1인당 GNP가 1000달러를 넘어 당초 계획보다 2년이나 앞선다.하지만 ‘수치로만 배부른 고도성장’(79년 4월 9일자 동아일보)이었다. 역사를 보면 스페인도 무적함대로 신대륙의 우선권을 갖을 때 은화가 넘쳐나 인플레가 극심했으며 로마의 아우구스투스황제도 은전이 넘쳐나 거꾸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시 인플레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살인적인 물가고로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경기 과열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부동산 투기도 극성을 부렸다. 신규 아파트 값은 분양 즉시 폭등했다. ‘복부인’ ‘프리미엄’이란 신조어가 이때 등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명을 지르고 있던 서민들에게 선거 직후인 78년 12월 제2차 오일쇼크까지 덮쳤다. 중동 산유국들이 이때부터 이듬해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원유가를 올린 것이다. 호황을 노래해오던 유신정권의 경제기조는 삽시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모든 물가를 통제하던 정부는 79년 3월에 국내 석유제품 가격을 9.5% 인상한 데 이어 7월에 다시 59%나 올렸고, 전력요금도 35%나 인상했다. 최종적으로 1979년 소비자물가 인상률은 21%나 됐다.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 사재기도 판을 쳤다. 유류 값 및 전기요금 인상에 이어 관련 제품 값도 최고 48%까지 인상 발표되자 아파트 등 고급 주택가 수퍼마켓 상가 등에서는 비누 화장지 설탕 식용유 등 생필품을 리어카와 용달차로 한 차씩 사들이는 ‘사재기’가 또다시 극성이고 버스요금 인상설에 자극돼 미리 쇠표(토큰)를 사두려는 시민들이 판매소에 줄을 이었다.무엇보다 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퍼지지 않고 있다는 노동자들의 항변이 갈수록 뜨거워져 기폭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 결과 과거에는 대도시에서 야당이 우세하고 지방에서 여당이 우세했는데 야당이 지방에서도 우세하여 소위 ‘여촌야도(與村野都)’ 경향이 현저하게 변하고 말았다. 78년 말 10대 총선은 집권 여당인 공화당의 명백한 패배였다. 총선에서 힘을 받은 야당은 기고만장해지며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 수감되어 서울대병원에서 연금생활을 하던 김대중도 박 대통령의 9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78년 12월 27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면서 제일성으로 “민주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에 당 총재직에서 물러나 권토중래를 꿈꾸던 김영삼도 박 대통령과의 전면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 극한 대립은 결국 막다른 곳으로 다달아 결국 화를 부르고 만 것이다. 78년 재차 오일쇼크로 경제가 힘든 판국 인플레까지 가중되던 차에 정치적인 파국이 생기며 우리나라는 나락의 늪으로 추락하고 만다. 급작스런 난국에 경제까지 휘청거리며 나의 살 길을 막막하게 했다. 하지만 세상은 요지경이다. 스페인에 프랑코총통이 독재를 무마하기위해 축구를 장려하였듯 전두환도 무마책을 만들어 냈다.
5공의 실세에는 세 명의 허씨가 있었다. 육사 17기 허삼수와 허화평. 그리고 후일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난세를 치세로 바꾼 영웅”이라고 묘사하여 파문을 일으켰던 허문도. 이 허문도는 군인 출신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었고 일본 특파원도 역임했던 중견 언론인이었다. 당시 나이 마흔 하나였던 허문도는 역사에 남을 대단한 기획 작품으로 자신의 출신지인 언론을 짓뭉개 놓는다. 그것이 언론 통폐합이었다. 그야말로 정권의 결정에 따라 수십 년 역사의 방송이 문을 닫고 신문사가 없어졌다.
지금과 위상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삼성그룹도 TBC를 빼앗겼고 동아일보는 동아방송을 잃었다. 1도 1지, 한 도에는 한 신문만 있게 했고 그 와중에 꼬장꼬장한 기자들은 하루 아침에 쫓겨나 술 취한 채 악을 쓰며 거리를 헤매야 했다. 이에 대해서도 허문도는 언론 통폐합이 자기의 소신이라고 우겼다. “언론과 재벌분리, 방송 공영화, 사이비 기자 정리”를 위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만든 게 바로 1981년 5월 28일 국풍 81이다. 국풍 81에서 민족 문화 창달을 위한 차전놀이나 풍물이나 고싸움 등등보다 월등 인기를 누린 것은 역시 대학생들의 가요제였다. 여기서 서울예전에 다니던 이용은 <바람이려오>라는 곡으로 누가 봐도 압도적인 가창력을 선보인다. 누구나 대상은 이용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대상은 서울대 그룹사운드에게로 돌아갔다. 아무튼 그 무렵 갑자기 재벌그룹들은 다투어 사람을 뽑는다는 광고를 일제히 신문에 게재를 한다. 재벌로부터 돈을 거두어 들인것도 그 무렵이다. 이에 호응하지 않았던 양정모의 국제그룹은 공중분해가 되고 만다, 그 무렵 나는 또 어디로 항해를 하였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