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잠꾸러기의 말
이정인
쑥국은 안 먹을 거예요
마늘이 들어간 나물무침도 안 먹어요
쑥과 마늘을 안 먹고 100일을 살면
다시 곰이 되지 않을까요?
나는 곰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에요
곰이 되어 긴긴 겨울잠에 빠져있더라도
죽은 게 아니니까 깨우지 마세요
여름에 겨울잠을 잘 수도 있어요
긴꼬리제비나비 이정인
시커먼 복면을 썼더라고요
담을 훌쩍 넘어 왔어요
담을 넘는 건 도둑이잖아요?
꽃밭을 뒤적거리다가
또 담을 넘어 달아났어요
딱히 없어진 건 없는데
뒤적거리던 꽃송이에
코를 대보니
향기가 살짝
옅어진 거 같아요
어떻게 믿겠어요 이정인
바위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어요
이 일을 빗방울이 했다는데
어떻게 믿겠어요
빗방울이 된 구름이 한 일이라고
누가 믿겠어요
바위는 쇳덩이 같고
빗방울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데요
또, 구름은 엄마 살결처럼 부드러운데요
바위 오목한 곳에
바위를 뚫은 빗방울들이
쉬고 있어요
닭이 보는 앞에서 / 이정인
어떤 사람이
둥지에서
갓 낳은 달걀을 꺼내더니
톡
쪼옵
쪼옵
쫍
요구르트처럼 빨아먹었다
저건 좀 아니지
아직
따뜻한 알을
닭이 보는 앞에서
척
이정인
풀밭 위를 기어가는
자벌레 한 마리
나한테 들킬까 봐
걱정이 태산 같겠다.
엄마 모르게 산 게임 카드
숨겨뒀던 나처럼
'들키면 끝장일 거야!'
눈곱보다 작은 고 심장이
방망이질이겠지?
꽁무니를 머리에 갖다 대며
고물고물
기어가던 자벌레
갑자기 구부린 허릴 쭈욱 펴더니
나무가지인 척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못 본 척.
남자들의 약속
이정인
남자가 셋이나 되는 집에서
하나뿐인 여자 마음 몰라준다고
엄마가 집을 나갔다.
쓰레기 버리러 나간 엄마가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가 잘 가는 운동장에도 없고
길 건너 공원을 샅샅이 찾아도 없다.
나는 가슴을 쿵쾅거리며
다리 밑에도 살펴보았지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집이 발칵 뒤집힌 줄도 모르고
새벽에야 돌아온 엄마,
차 안에서 음악 듣다
그만 잠들었단다.
엄마 앞에서 남자끼리 약속했다.
양말 세탁기에 골인하기
자기 이불 자기가 개기
신발 얌전히 벗어 놓기
튀지 않게 오줌 누고 물 꼭 내리기
밥 차릴 때 숟가락 놓기……
손꼽아보니
어려운 일 한 가지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