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7일(월요일) 사순절 5일차 - 에바다
말씀제목
- 에바다
말씀본문 - 마가복음 7장 31-37절, 요절 35절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새번역)
“그러자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개역개정)
말씀묵상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농아 또는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들의 공통점은 명사라는 점입니다. 명사는 그 존재를 완전히 규정하는 언어방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람들을 ‘형용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용사는 그 존재의 ‘일부분’ 혹은 ‘일시적’인 모습,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요. 참 탁월합니다. 옛 사람들, 특별히 성경을 기록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늘날보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을 확인해보게 됩니다. 명사를 만드는 일, 규정짓고 단정지어 말하는 것, 범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바라보며, 수백 번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해도 규정짓고 단정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우리를 회복하고 살리려 하셨던 것이지요. 그 마음,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따로 나가셔서 손으로 만지고, 침도 바르고, 한숨도 쉬시며 치유의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에바다!’(열려라) 하고 외쳐 자유케 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마침내 ‘똑바로’, ‘올바르게’, ‘옳게’ 말했습니다. 신체적으로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천적 청각장애인을 농아(귀먹을 聾, 벙어리 啞)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치유는 그의 들음부터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혀도 풀리고, 마침내 똑바로 말까지 하게 됩니다. 35절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의 들음이 열려지고, 혀의 올가미가 풀어져서 옳게 말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단순히 신체적 장애를 치유했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정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회적으로 억압된 사람들, 소수자들, 사회적 약자들, 경제적 약자들이 그들입니다. 권력관계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것이 부모자식, 동료, 연인, 친구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이 사회적 억압의 관계 안에서 바르게 ‘듣지 못하고’, 바르게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일들이 있는 것이지요. 또 현대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심리적인 고립과 병증들도 있습니다. 열등감이나 경쟁심리, 지나친 자격지심과 낮은 자존감 등등 심리적 문제들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바르게 ‘듣지 못하고’, 바르게 ‘말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영적으로 억압된 사람들도 많지요. 잘못된 종교적인 권위와 직분에, 그들이 쳐놓은 악한 올가미 안에서, 오늘도 바르게 ‘듣지 못하고’, 바르게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은 것입니다. 그게 바른 것이고 옳은 것이고 진리인 것으로 맹신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자유롭지 못한 사람, 소통이 어려운 사람,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 다른 생명들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 일방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주장들만 내세우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사실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이들은 ‘바르게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누구보다 말을 많이 할는지는 모르지만,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합니다. 말을 할수록 외롭고 고립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니, 다른 누구를 떠올릴 필요 없이, 우리 각자에게 이런 면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 ‘에바다!’는 저 2000년 전 신체가 고장 나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두 귀와 두 눈이 멀쩡한데도 귀와 눈이 고장 난 사람처럼 살고 있는 바로 ‘나’를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 앞에 오십시오. 귀를 고치십시오. 귀 기울여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어느 새 굳은 혀도 풀리고 ‘똑바로’, ‘올바르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찬송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기도
신체적으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유가 아님에도 여전히 바르게 듣지 못하고 바르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 제일 괴수, 내 귀를 고쳐주시고, 내 혀를 고쳐주옵소서. 바르게 듣게 하시고, 바르게 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