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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다윗 왕이 신하 아히마아스와 구스 사람에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전쟁터에 있는 아들 압살롬의 안부를 묻는 말입니다. 이 질문은 다윗의 고통스러운 질문이요 나아가 간절한 바램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이 잘 있어야 하는데, 내 아들 압살롬은 살아야 하는데, 내 아들 압살롬은 어떻게 하든지 잘 되어야 하는데 ….’ 염원이 들어 있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 문장을 저와 여러분에게 던져 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잘 있느냐?” 여러분의 자녀들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묻습니다.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 어떻게 되었는지를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내 스스로에게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내 자녀들은 잘 있느냐?”
다윗 왕은 자기 아들 압살롬에 대하여 부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소년 압살롬은 잘 있느냐?”
이 질문을 던지는 아버지 다윗은 누구입니까?
다윗 왕은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왕이었습니다.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성군이요 존경 받는 왕이 바로 다윗 왕입니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하나님을 충성되이 공경하고 그 말씀을 잘 순종하면서 40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전후무후한 명군으로서 다른 어떤 후대의 왕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을 위대한 왕으로 칭송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시점에는 유대사회에 메시야 대망 사상으로 충만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 하에서 가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신들의 가난과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그 메시야가 누구냐 하면 바로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야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남의 여자 밧세바를 범하는 간음죄를 지었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이요, 신실한 부하 우리아를 싸움터에 나아가 죽게 한 살인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는 그때마다 슬픔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잃고 슬퍼해야 했습니다(삼하 12:1). 그의 장남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욕 보이는 수치를 맛보아야 했습니다(삼하 13:8-18). 이로 인해서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은 형제인 암논을 죽이는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삼하 13:28-29). 압삽롬이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헤브론에서 왕이 되어 반역을 꾀하였습니다(삼하 15:1-12). 또한 그가 다윗의 후궁들을 욕보이는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런 사건 속에서 다윗의 가정이란 어떤 가정이었겠습니까? 다윗은 여러 명의 첩들과 19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파란만장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은 19명의 아들들 중에서 압살롬에 관한 사건입니다. 압살롬은 세 번째 아들로서 갈멜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입니다(대상 3:1-9). 그는 반란을 일으키고 왕위를 찬탈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아들의 반란에 다급하여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를 못하고 피신을 해야 했습니다. 다시 충성스러운 신하들과 장군들이 힘을 내어서 반란군과 대결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압살롬의 군대가 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의 반군 군사 2만이 전사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압살롬은 도망을 치다가 그가 자랑하는 머리 때문에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요압의 군사들에 의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윗 왕은 전장의 소식을 궁금해 하며 기다렸습니다. 전쟁터에서 소식을 가지고 달려오는 아히마아스에게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어서 구스사람에게도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라고 거듭거듭 묻고 있습니다.
만약에 반란으로 피신해 있는 왕으로써 전쟁터에서 듣고자 하는 다급한 소식은 승리의 소식(승전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듣고자 하는 소식은 승전보보다 아들의 무사 소식이었습니다.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1. 아버지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지금 소식을 듣고자 하는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여 대항해온 불효막심한 자식입니다. 천하의 못된 자식입니다. 그는 자식이 아니라 원수입니다. 어찌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탐하여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댄 못된 자식입니다.
만약 이런 못된 자식을 살려주면 다윗은 자신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이 제거되어야, 죽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는 살아주어야 하는,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자면 아들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들을 살리 자니 자신이 죽게 되고, 자신이 살 자니 아들을 죽여야 합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제 드디어 왕의 군대와 반란군이 에브라임 골짜기에서 결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미 주사위는 벌써 던져졌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고민은 더 깊어졌습니다. 배은망덕한 자식이지만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출전하는 장수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삼하 18:5)
바로 이것이 모든 부모님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자식들은 정녕 부모님의 이 마음을 모를 것입니다. 만일 이 마음을 안다면 어느 누구도 부모님께 누를 끼치는 자녀들이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배은망덕한 자식이었지만 그가 원수들과 함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충격을 받아 성문 위층으로 올라가 대성통곡하였습니다. 탄식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
다윗의 탄식을 보면서 자식에 대한 아비,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사랑으로 죄인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2.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자녀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이렇게 애타는 마음으로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아들 압살롬은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사무엘하 14:25에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정말 대단합니다. 외모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에서 압살롬과 같이 아름다운 용모가 없습니다. 아주 준수한 용모에 남자다운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백성들로부터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의 19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포스트 다윗’으로 각광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다윗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들에 대하여 이제는 질문합니다. “소년 압살롬은 잘 있느냐?” 개역개정은 ‘소년 압살롬’이라고 하고, 현대인의 성경에서 ‘어린 압살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지만 압살롬은 군대를 일으키고, 싸움을 지휘할 만큼 성장한 청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20대 혹은 30대 초반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장성해도 부모의 눈에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구순의 어머니가 칠순의 아들에게 “애야 차 조심해라”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염려합니다. “소년 압살롬(내 아들 압살롬)은 잘 있느냐?” 그렇지만 그 염려는 허사였습니다. 전쟁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 구스 사람의 보고는 “이미 전장터에서 원수들과 같이 소년도 죽었다는 보고입니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32)
성도 여러분, 오늘 부모 된 교우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자녀에 대하여 이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내 아들과 딸은 잘 있는가?” 여러분의 자식들은 안녕하십니까? 무사하십니까?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사늘한 죽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때 늦은 물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바램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성군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그는 자녀들을 어렸을 적부터 믿음으로 양육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을 것입니다.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분주하게 밤낮으로 정사를 논했을 것입니다. 주변 나라와 쉴 사이 없이 전쟁을 치루면서 전장터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식들에게 왕자요 공주의 신분을 주고, 왕궁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살가운 사랑을 나누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부재의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많은 여자들의 갈등, 배 다른 형제와 누이들 이들이 만들어내는 긴장은 가정 내에 팽배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이 형이 동생을 범하고, 또 동생이 형을 죽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가정 안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너무나 쓰리고 아픈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들은 자녀들이 나빠서 …. 예 맞습니다. 하지만 자녀의 신앙에 무관심했던 다윗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식의 신앙은 개인적인 신앙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어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그늘 아래 있을 때, 영향 아래 있을 때에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고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신실을 그 자녀에게 알게 하라”(사 38:19)
“오직 주의 요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어느 때 어디서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5-7)
내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내 생명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면 내 자식이 신앙에 대하여 소홀히 하고, 등한히 한다면 그냥 그대로 버려 둔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는 내가 믿음 하나님의 신앙에 대한 확실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말 내가 최선을 다하고 다했는데도 불가항력일 경우입니다. 그때는 기도하며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그들의 영혼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이 죄속으로 흘러가는 것을 방관해서 안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는 것에 대한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호박 모종을 봄에 심고 뿌리가 활착이 되고 나면 줄기가 쑥쑥 자랍니다. 그 줄기를 그냥 두면 서로 엉키고 설키게 됩니다. 그리고 담장을 넘어가면 동물들이 뜯어먹어버립니다. 그래서 농부는 부지런히 그 줄기의 방향을 바꾸어 줍니다. 그러면 밭고랑에서 서로 엉키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모양으로 줄기가 번져갑니다.그리고 결실을 얻게 됩니다. 자식의 신앙교육도 그러합니다.
다윗에게는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있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이 반역하고 죽은 후 그의 부친 다윗은 나이가 많아 기력이 없음을 알고, 요압 장군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원을 얻어 스스로 왕이 되려고 반역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 1:5-10). 다윗 왕이 아도니야를 어떻게 키웠는지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고 있는지 아시니까?
“그 부친이, 네게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왕상 1:6)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자녀들로 말미암아 말년에 고통을 당하고, 마음이 상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너무나 지나치게 위하고 아꼈습니다. 육적으로 사랑만 했지 그의 신앙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육적인 것은 다 채워주었겠지만 자녀들에게 영적인 쓴소리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대항하여, 주변 사람과 공모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행여나 그를 섭섭하게 할까해서 오히려 염려했습니다.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부모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초달을 참아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잠 13:24)
‘오냐 오냐’ ‘잘한다 잘한다’고 칭찬하는 것만 잘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잘못했을 때는 지혜롭게 ‘안돼, 그러면 안돼’라고 따끔하게 방향을 틀어주는 것도 참 사랑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압살롬은 잘 있습니까?” 더 늦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부모의 책임과 사명을 해야 하겠습니다.
어린 시절에 예수님은 양부모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요?
첫째로, 성경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12살 때에 부모님과 함께 성전에 갔습니다. 그때에 성전에서 랍비들에게 성경을 묻기도 하고 듣기도 한 것은 어릴 적부터 부모로부터 성경을 꾸준히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성전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벌써 그 곳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면서 그 안에 머물어 있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을 낳고 키우면서 부모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을 사랑하게끔 가르쳤습니다.
세계 선진국 중에 G7국가들이 있습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이제 G8으로 들어가려고 외교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참 대단하지요. G7 나라들 중에 무역량이 미국 다음으로 많은 나라가 독일입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으로 나라가 완전히 황폐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라인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경제 부흥과 민주화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동력이 된 3대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닮이 아니라, 꽃을 심고, 노래를 부르고, 어린이를 많이 낳았던 것입니다. 꽃을 보며 노래하는 그곳에서 아이들은 장성해갔습니다. 이것이 재건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가정 안에서 신앙의 꽃을 피우고, 교회 안에서 찬송하며 예배하게 하고, 세상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앞으로 언젠가 듣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압살롬은 잘 있는가?” 우리는 안심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오늘 지금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압살롬은 잘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들(압살롬)을 위해 눈물의 기도로 씨앗을 뿌리고, 말씀으로 양육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