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상이군인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고, 지금도 그이름이 심심치않게
들리지만 난 내 아버지를 국가 유공자라고 부르고싶다.
상이군인 이라는 표현 속엔 "불쌍한 불구자"로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것 같고, 국가 유공자라는 의미 속엔 나라에 어떤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것 같아서이다.
아버지는 625때 강원도 고성의 어느 이름모를 전선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으셨다.
아버지는 그 후유증으로 반평생을 그 곪은 상처가 아물고 덧나기를 반복하는
고통 속에서 사셔야 했다.
내 나이 40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어린시절의 어떤 밤들이 생각나곤 한다.
깊이 잠든밤........
고통에 절은 신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 나면 어김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왼쪽 다리를 함께 껴안고 울부짖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 상처를 치료하기위해 구할 수 있는 모든 약재를 사다가
아버지의 상처에 바르셨다.
지금도 잊혀지지않는 약재중 하나가 "송장 뼈다귀속의 벌레"이다.
납작하면서도 전갈처럼 집게 발이 있었던 벌레로 기억된다.
밤마다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으시는 아버지 였지만, 아버지는 낮시간엔 아파할
여유도 없으셨던것 같다.
물려 받은 재산도 땅도 없으신 아버지는 객지의 공사 현장(장성댐,고려 시멘트 등)을
전전 하셔야 했고 이나마도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쫒겨나기 일쑤였다.
그때는 장애인 취업 보호 제도는 꿈도 꿀 수 없는 때였고, 국가 유공자에 대한
예우도 거의 미미한 그런 때였던 것이다.
직업을 갖기 힘든 아버지에게 가장 큰 소득원은 한달에 한번 지급되는 연금이었는데
쌀 반가마 값도 안되는 금액으로 기억 된다.
이 돈은 아버지의 덧나는 상처를 치료하는 약값으로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이런 아버지를 남편으로 둔 어머니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도 없었다.
남의 농사에 품팔기는 기본, 공사판에서 남자들도 힘들다는 골재 운반(커다란 돌을
머리에 이고 나르기)등등........
그러나 우리의 가난은 영영 벗어나기 힘든 버거운 숙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돈문제로 심하게 다투셨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셨다.
해가 늬엿늬엿 질 무렵에 집을 나선 아버지는 밤이 이슥토록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때서야 걱정이 되신 어머니는 어린 내 손을 잡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온동네를 이잡듯이 찾아 다녔지만 아버지는 어디에도 계시지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다시 아버지를 찾아 동네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동네 어귀를 벗어나 1Km쯤 지나서였다.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논둑위에 웅크리고 있는것이 보였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계셨고, 그런 아버지를 발견한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를 껴안고 반가움 반 어떤 안도감 반으로 함께 울어 버렸다.
표정 없이 먼 서쪽 하늘만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혼자 무슨 말인가 되뇌고 계셨다.
"수술 할란다..... 수술 할란다......."
"이 다리 짤라 버리먼...... 인잔 아푸지도 않고.... 급수가 올라가 연금도 더 나올꺼다"
"수술 할란다.... 수술......."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 말씀에 대꾸도 못하시고 서럽게.... 서럽게 울기만 하셨다.
그날 밤 아버지와 나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픈 다리를 함께 껴안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몇개월 후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원호병원(지금의 보훈 병원)에 입원 하셨고 피부암
판정을 받았다.
지금 생각 해보면 납중독에 의한 피부암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원래 총상을 입은 곳은 발목이었는데 암이 전이 될까봐 허벅지 까지 절단하는 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나서 아버지는 2급갑(현재 3급)이라는 등급을 받으셨다.
수술 후 우리의 생활 형편은 한결 좋아졌다.
하루 한끼의 보리밥과 두끼의 고구마 식사가 하루 세끼 혼합곡 밥으로 바뀐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고구마 만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혼합곡은 조금 나이든 세대는 알겠지만 요즘의 신세대는 잘 모를것이다.
혼합곡이란 3년 이상 묵은 정부미(통일벼 쌀)에 납작하게 누른 보리 쌀이 절반쯤 섞인
곡식이다.
아무렴 어떠랴!
우리 가족은 더이상 배고프지 않게 되었는데.......
아버지의 병든 다리를 팔아 우리 가족은 배고프지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번듯한 대기업에 취업도 하게되었다.
그리고 대학 3년 때부터 사귀던 예쁜 아가씨와 이때부터 결혼식을 뒤로 미룬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삭월세로 허름한 여인숙 방을 하나 얻어 석유 버너 하나, 코펠한벌, 2인용 닭털
침낭 하나가 전부인 신접 살림을 시작하였다.
그 후엔 아이가 생기면서 더 넓은 집과 살림 살이가 필요 해 은행 빛을 얻게 되었고
그 은행빛은 직장 생활 10년인 작년(2000년) 퇴직금을 받아 모두 값았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국가 유공자"와 그 가족이 살아온 이야기 이며 현재의 이야기 이다.
물론 나보다도 더 못한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나라에 몸을 바쳐 싸우고, 그 상처에 신음하며 반평생을 살아온 그 사람들의 이야기중
일부 이기에 나와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굳이 월 100만원 남짓한 현재의 내 아버지의 연금과 보훈청 공무원의 월 수입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우리나라의 국가 대표 선수들과 그 연금 수준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기업체의 연봉과 내 아버지의 연금은 더더욱 비교하고 싶지않다.
그러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는 연금과 함께 장미빛의 미래와 건강한 몸이 남아있으나,
우리의 "국가 유공자"는 어떤가?
하나뿐인 몸마저 국가에 헌납한 우리의 "국가 유공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어떤가?
예전에도 고통에 신음 하였고, 현재도 절름발이의 경제 생활을 영위하는 "국가 유공자"와
그 가족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어떤가?
난 내 아이에게 또는 후손에게 감히 이렇게 말 하고 싶다.
어리석은짓 말라고........
나라에 금메달 하나를 선물하면 영웅이 되고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지만,
"국가 유공자"가 되면 나라의 짐(?)이 될 뿐이고 너 자신의 미래가 암울할 것이라고.......
"우린 상이 군경이 아니라 국가 유공자입니다"라고 외치는건
너 혼자 만의 공허한 외침이 될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