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와 현정이는 몇 일 더 있기로 하고 다른 친구들은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하다가 다음 목적지 리쉬케쉬에서 만나기로 했다.
드디어 헤쳐, 모여가 시작되었다.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도 우리들의 작별은
유난스러웠다. 서로 끌어안고 눈물까지 글썽이며..누가 봤으면 무슨 대단한
이별이라도 하는줄 알았을꺼다.
친구들이 떠나고 현정이는 엊저녁에 만난 옆방의 독일청년들과 durga mandir,
일명 멍키템플이라 불리는 두르가사원에 다녀온다고 나가고 나는 작심하고
오후까지 내쳐 잠을 자면서 그동안 싸인 피로를 풀고 컨디션조절을 하기로 했다.
꿈도 없이 땀을 흘리며 얼마나 잤는지 일어나 보니 4시가 넘어 있다.
어김없는 정전으로 사망 직전의 고물선풍기는 나보다 더 깊이 잠들어있다.
화장실에서 물 한바가지 끼얹고 시장에 들려 간단한 요깃거리들을 사들고
가트로 나가 구걸하며 노숙하는 사람들 틈에 나도 한자리 잡고 슬그머니
끼어 앉았다. 누구하나 쳐다보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고 편안하다. 아! 그렇구나, 잃을 것도, 크게 바랄 것도
없는 상태가 바로 이 평안함이구나,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맨바닥에 버려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평화를...오후 내내 그렇게 겐지스만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심하게 강 속에서 떠오른 해가 강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누른 강물이 검은 빛으로 물들면서 가트변은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뿌자의식! 힌두예배의식이다.
인도인들은 일생에 한번이라도 이 뿌자의식에 참석하는 게 평생소원이고
절대적인 가치다. 평생을 걸고 이곳으로 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단다.
전 세계에서도 이 뿌자의식을 보려고 일 년 내내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8시가 되니 화려한 금빛 제의를 입은 여러 명의 젊고 아름다운 브라흐만들이
의식을 집전 하였다. 알라딘 램프의 향 항아리와 신을 찬미하는 노래로 이어졌는데
그 아름답고 맑은 천상의 소리는 순수한 라이브였다.
예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오 분 십분 걸러 정전이 되었는데 제단의 촛불과
마침 만월의 달빛에 일렁이는 검은 강물이 신비감을 더 해주었다.
의식은 두 시간정도 걸렸다, 다시 못 볼지 모르는 그 광경을 동영상으로
찍고 눈으로 귀로 담아 두려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12시 넘게 까지 갠지스에 있다가 숙소로 돌아오니 현정이와 옆방 독일청년들은
짜이를 한 주전자 사다놓고 힌두의 다신사상에 대해서 열띤 토론(?) 중이었다,
열띠어 봤자 서로 아는 단어 몇 개를 가지고 손짓 발짓이 전부였지만,
그들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어느 토론장의 패널들 못지않았다. 별다른 결론도 없이
내일 아침에 이곳에서 약 15킬로 정도 떨어진 있는 세계 최고의 힌두대학을
방문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독일청년 둘 중 하나가 이름이 괴테란다.
뿌자를 보고 온 탓인지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꿈들을 꾸었는데 그 느낌이
아주 몽환적이고 동화적이었다.
5/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으나 옆방 청년들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오전에는 그냥 빈둥거리기로 하고 점심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나만 시장에 들려 식빵과 오이 당근 몇 개를 사가지고 다시 갠지스로 나갔다.
어쩌면, 하루도 빠짐없이 모래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들 그렇게
몰려오는지, 또다시 가난한 노숙가족들 틈에 슬그머니 끼어 앉아
그렇게 강물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갠지스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빵과 야채를 옆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수줍은 듯
말이 없는 싸이클 릭쌰왈라를 만나서 흥정도 없이 그냥 순조롭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지만 살인적인 더위에 땀을 쏟으며 뼈만 남은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폐달을 밟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괴롭고 신산스러웠다.
힌두대학은 왠만한 마을보다 규모가 더 크고 방대했다,
각 단과 대학 별로 따로 구분되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괴테가
아는 척 하면서 알려줬는데 정말 그런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나는 사실
그 친구 이름도 미심쩍어서 (너무나 위대한 대 문호의 이름이라) 말만 통했으면
민증? 이라도 까보라고 할 판이었다, 하기야 우리도 이순신도 있고 안중근도 있지..ㅋㅋ
그 넓은 구간이 푸른 숲과 붉은 꽃들로 너무나 잘 정비되어 마치 유럽에 온 느낌이
들었다, 힌두미술 갤러리, 기숙사, 유학생 안내소등 현대식 건물에 시설도 좋았다.
토요일이라 힌두미술 갤러리에 들어갈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대신 대학 내
힌두사원인 뉴 비쉬와나르 사원을 방문했다. 잘 달궈진 프라이팬처럼 뜨거운
대리석 바닥 입구에서부터 신을 벗고 맨발로 발을 동동 구르며 들어가 보니
사방이 네모로 뚫린 벽으로 된 총 3층의 전형적인 힌두사원이었다, 이곳도
예외 없이 수많은 신자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끝없이 종소리가 울리고
신을 찬탄하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와 꽃과 향과 차를 바치는 예배가 끊이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가난한 거지들은 벽 난간이든 바닥이든 틈만 있으면
어디든지 구겨져 누워 잠들어 있었고 가난한 엄마들은 온통 눈 밖에 보이지
않는 허기진 어린것들을 앞세워 구걸을 하고 있었다, 어떤 여인은 주먹만 한
아기를 옆구리에 끼고 불판 같은 대리석 바닥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늘어져 누운 대리석 바닥은 맨발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져
있고 뙤약볕을 가릴 한 치의 그늘도 없었다, 그 곁으로 잘 차려 입은 인도
대학생들이 시원한 코카콜라를 마시며 떠들며 지나가고 관광객들은 셔터를 눌러
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우리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야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중얼거리면서, 바로 담장 밖의 그 푸른 숲이 담 하나를 두고 있는
여기는 비참한지옥을 이루고 있다, 이곳의 신들은 그렇게 열렬하고 간절한 예배를
받으면서 어째서 자기 신도들에게는 이토록이나 가혹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나는 정말 이해 할 수가 없었고 괜히 부화가 치밀어 더 이상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심란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 왔다가 오후에 시장에
나가 당장 입을 옷 몇 개를 샀다. 펀잡 한 벌, 민소매 윗도리 한 개, 350루삐,
우리 돈으로 4500원 정도지만 인도 물가로 생각하면 싸다는 느낌은 없다.
무조건 아껴야 한다는 약간 쫌스런 생각 때문에... 진작에 좀 그렇게 알뜰할 일이지...
해질 무렵 다시 보트를 타고 갠지스를 건넜다.
끝없는 모래사장에서 가트 쪽을 바라보았다. 강을 건너도 사람들의 무리와 주인 없는
소들과 개, 염소 떼들은 마찬가지로 웅성거렸다. 꽃 파는 소녀에게 사진 한 장 찍어주고
강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냥 이 정도면 족하다! 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들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허공에 다 흩어져 버린다. 건너편 가트에서는 여전히 강물에 잠기기를
반복하는 사람들, 빨래하는 사람들, 시체 태우는 불빛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우~웅 소리가 들렸다.
눈 닿는 곳 아득한 모래사장에서 부연 회오리가 일으나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천지를
뒤덮어 버렸다. 어떻게 피하고 자시고 할 새도 없이 (피할 곳도 없었지만)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리고 물가 쪽으로 뛰어 겨우 배 난간을 부여잡고 회오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말로만 듣던 모래 회오리를 만난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조용해져서 눈을 떠보니 온 세상은 누른 모래먼지 속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서둘러 배를 타고 위태롭게 강을 건너 가트로 돌아오니 온 몸 구멍이라고 생긴데는 모래로 가득하다, 그런데 우리를 뺀 다른 사람들은 몸 가득 모래를 뒤집어쓰고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음식을 먹고 오물
투성이 자리에 뭉개고 앉아 경건하게 기도하고 의식을 보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할 수없이 우리들도 그냥 한자리 잡고 뭉개고 앉아 뿌자의식을 구경했다.
종교 없이는 못사는 사람들! 인도에서 神은 그 모든 존재의 제 일 순위에 놓여 있었다.
의식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했으나 모래는 잘 빠지지 않았다,
서걱거리는 머리를 긁어가며 그래도 금방 곯아 떨어졌다.
* 여섯번째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쯤에서 온 몸이 붓고 몹시 힘들어 졌던 때입니다.
첫댓글 드디어 여섯번째 이야기...^^
인도여행 에서는 고행이란 단어를 빼면 안될것만 같은...ㅠ.ㅠ
단단히 맘먹고도 참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너무나 생생한 글들과 사진으로 마치 제가 그안에 있는듯...
모래회오리에 맞은듯...갑자기 씻고 싶어지고...^^
다음이야기...
더한 고행이셨겠네요...
다음 이야기에선 저역시 몹시 아플듯합니다...^^
감사합니다...꾸벅!
뭐 고행만 있겠습니까, 나그네 길에는 힘든 상황들을 상쇠 시켜주는 행복한 시간들이 늘 바쳐 주지요.
그래서 또 떠나는 것이고............
여행이라는 건 금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큼 그 안에 들어가
그들과 하나가 되는 건가 봅니다.
사진이 없는 부분에서도 상상이 절로 되는 글들...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지네요..^^
맞는 말씀입니다. 세상 어디든 사람이 살고 그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그들과 손잡아 보는것!
그것이 여행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합니다.
역시 작가 글솜씨를
마치 함께여행하는 느낌입니다.
우리 지리산 남매들끼리 (접때 입양한 얼라꺼지해서) 한번 떠나보면 진짜 리얼리티 빵빵할텐데.
중간 건너뛰고 읽어도 재밌네요 ^^ 그 강가에 가보고 싶어져요 괴테, 종교없이는 못사는 사람들, 대학에서 본 광경들... 근본없이 그 끝이 있을수없다고 했는데...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지경인듯해요... 다음이 궁금해지네요 ^^;
나는 여행내내 그들의 신과 불화한 시간들이 많았다오. 나중에는 화해했지만.......
고맙고..고맙습니다!
직접 체험하지 못한것을 체험한것 이상 더 현실감 있게 풀어서 묘사해주니...
이거 부담 주려고 하는말이 절대아니고...한 20편정도 이어지면 책으로 꾸며도 되지 않을까?
가능성 이상의 그 뭣이 있어요!!!
형님, 이건 그냥 우리끼리 돌려보는 일기장 같은 거예요. 책은 무슨,
종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곧 종교인 사람들의 이야기 잘 읽었읍니다. 아주 아주 오래전에 네팔과 인접한 인도국경 쪽을 여행한적이 있었읍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지금의 삶이 이러할진데 하물며 2~3,000년전에는 오죽했겠냐고.. 그래서 부처님도 나오셨다고.. 그들은 이런 삶속에서 종교마저 없다면 아마 살아갈 수 없을거라고 이야기 하더군요...하지만 그들은 종교의 믿음속에서 가진자들보다,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자들보다 가진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오히려 더 평안한 삶을 살고 있겠죠 ? 글을 읽으니 슬슬 또 저의 역마살을 자극하네요....
사람들이 그들을 보는 시각은 모두 자기 시각,잣대로 보고 평가합니다.
제가 본 그들은 비록 맨땅에서 노숙을하고 빵 한쪽을 구걸하는 극단적인 궁핍속에서도
비굴하지 않았고 탐욕스럽지 않았답니다.
그들에게 현실이란 그저 윤회의 강을 건너는 길목 정도일뿐
우리처럼 일희일비하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그들 앞에서 저 자신이 더 초라할 때가 많았지요.
산자야님의 그들의 신에 대한 회의?, 불화? 저 역시 그랬을 것 같으네요.
물론 좀 더 깊은 내면을 여행한 다음에야 어떤 답을 얻을지 모르지만...
아주 감명 깊게 읽고 있답니다.
다음편도 기대 됩니다.
감사합니다.
위의 댓글중 그러한 삶중에도 비굴하지 않았고 탐욕스럽지 않았다 하는 대목에서 자꾸 걸리는것이...달관한 경지일까
아니면 몸부림 쳐봤자 달라질것이 없다는 자포자기의 삶일지..윤회의 강을 건너는 한과정으로 무애의 삶일지...
여러측면이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받아드림, 즉 수용이었습니다.
세세하게 분석해 들어가면 아주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있지만 그들에게 현생과 내생은 모두
신과 연결되어 있고 그러기에 특별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분노하는 마음들이 별로 없는듯 했습니다.
역시!!!
이일 저일로 뒤늦게 찿아 봅니다 ^^
사진과 함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인도에 대해서 갈수록 궁금증만
더해 갑니다....인도 여행기는 들어도 들어도 지루하지 않으니..감사 ^^
오늘 내일 찬바람이 많이 분다고 합니다
항상 건강 하세요 ^^
늘 고맙고 든든한 우리들의 둠벙님! 일도 잘 만들고 추진도 잘하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즐겁고 행복한 추억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