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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 김은국 / 도정일 / 문학동네
2014년에 읽고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이번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책을 뽑았다. 내용도 가물가물하고...
바로 전에 읽었던 "이성과 감정"이 겹친다. 무신론은 이성이고 종교는 감성이다. 신앙은 이성이고 사랑은 감성이다. 드러냄은 이성이고 덮음은 감성이다. 이군은 이성이고 박군은 감성이다. 책을 읽는 나는 이성이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누군가의 말, "이분법 사라지는 곳에 낙원 있다", 구글링을 해보니 롤랑 바르트의 말이라고 한다.
순교자(殉敎者)란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을 일컫는다. 배교자(背敎者)는 믿던 종교를 버렸거나 다른 종교로 바꾼 사람이다. 역시 이분법이 존재하는 세계인 현세의 논리를 바탕으로 정의한 것이다. 믿는 자가 있다면 믿지 않는 자가 있을 터, 그 세계에는 중간 지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된 세상을 나는 낙원이라고 부르고 싶고, 그 낙원은 영원히 추구하는 것일 뿐, 붙잡을 수 없는 무지개와 같은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음으로 행복을 맛보게 하는 아름다운 허상일 뿐이다.
이야기는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의 하나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인간이라는 주제로 하나가 되어간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신기하리만큼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에서 "신"의 존재가 거부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야기가 1950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아래의 질문이 되풀이되고 욥기의 내용이 병렬 구처럼 따라다닌다.
목사님의 신 -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성 중에서 죽어가는 자들이 신음하며 다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느니라. - 욥기 24장 12절
인간의 삶에서 많은 사람이 종교에 의지한다. 그리고 거기에 한번 발을 들이면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더욱 그렇다. 이분법의 사고의 틀에 머무는 한 그렇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비종교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한 "순교자"인 민 소령은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는 이유를 "절실한 필요성(259)"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필요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거창하게 삶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위로를 받기 위하거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 고통을 견디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며, 친목 활동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군의관인 민 소령은 철수령으로 모두가 떠나는 평양으로 두고 온 환자들에게 돌아간다. 그 환자들은 생존 가능성이 작아 후방으로 이송도 되지 않은 버려진 부상병들이다. 그들은 피아로 나눌 수 없는 공간에 있으며, 민 소령을 어느 한 편을 선택하기 보다는 인간에 충실했다. 민 소령이 차를 돌리는 순간, 그는 순교자의 길로 들어갔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의 존재에 얽매일 수 없는 시대적 배경으로 인하여 참과 거짓도 뒤섞이게 된다. 철수기 임박한 평양 시내에는 '승리는 임박했다! 아군 반격 개시!'라는 전단이 뿌려진다. 그런 상황에서 신의 존재보다는 고난과 고통에 직면한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가늠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까짓 "순교자"의 길에서 조금 멀어지면 어떤가!. 그것은 민 소령이 이야기하는 "필요성"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리라.
그 필요성으로 신 목사나 고 목사는 그들의 행동이 거짓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장 대령이나 이 대위에게 이해된 바 되었다.
14명의 목사가 잡혀가고 그중에 12명이 처형당했으며, 두 명의 목사가 살아 돌아왔다. 12명은 죽었으니 이유를 불문하고 순교자라 불러야 하며, 살아 돌아온 자는 배교자라 불러야 할까? 단순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사건에서 작가는 많은 질문을 던진다.
배교자라고 스스로 정의했던 신 목사는 공산 치하의 한반도 북부에서 참 순교자로, 전설로 자리매김해 가는 것을 통해, 결국 진실이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일까? 신 목사가 자신을 희생-순교가 아닌-하면서 인간을 구제하는 길에 들어선 것처럼, 인간의 선한 측면이 적용된 것이 아니라면 결과도 동일하였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결국 처형당한 12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신 목사는 순교자의 대열에 들었지만, "한 목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숙제로 남는다.
여러가지 숙제를 남기는 소설이지만, 신목사가 대위에게 말한 내용이 작가가 전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십자가란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내갸 견뎌야 할 고통이고 아픔이고 좌절이고 고난이다.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 * * * *
"기독교인이나 목사도 인간이란 점을 잊지 마시오. 그들을 잴 때는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척도와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그 감정과 허약함을 재어야 하지 않겠소? 나는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어떤 성직자도 육체적 정신적 고문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54
"당신은 인간에 관한 사실을 얘기하고 있고 나는 내 신앙의 진리를 얘기하고 있다는 걸 모르시오?" "나를 판단하는 일은 그분의 몫입니다." 55 - 56
"설교를 하기엔 너무 병이 들었겠지!" 63
"그는 자기가 당한 고통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되질 않은 것 같더군. 그가 공산당 감옥에 갖혀 있었다는 것 아시죠? 그 친군 자기가 뻘갱이들의 박해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굴욕을 느끼고 있는 것 같더궁. 내 얘긴·····거 있잖습니까, 열두 명의 순교자들······" 70
"···· 까놓고 말해서 죽은 열두 명 순교자들은 순교자라 불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오. 왜냐? 그 사람들은 빨갱이 박해 앞에서 저항의 손가락 한 번 든 적이 없고 북한 기독교인들의 고난을 덜어주기 위해 어떤 일도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오. ····" 81
"그리고 나를 비겁자니 배교자니 욕해대는 북한 기독교인들의 거짓 자존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오. 여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병들어 있어. 박해에 순순히 굴복하는 동안 몸에 배어버린 정신적 질병이 그들을 마비시키고 있는 거요. 그런데 이제 해방이 되고 나니 하는 짓들이 뭔지 아시오? 떠들어대는 일뿐이야." 82
"그래서 나도 대들었지. '그럼 자넨 내가 어떡 했음 좋겠나? 그의 아들이 영웅이라고 나도 계속 인정하란 말인가? 내가 계속 거짓말을 해야겠다는 건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건 거짓말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 늙은이와 자네들이 모두 나를 경멸할 수 있도록 그 정도 거짓말쯤은 계속해달란 얘긴가?' 그는 나의 이 말에만은 뭐라고 대답을 못합디다. 난 대답하라고 계속 몰아붙였소." 83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가 끝까지 광신도로서, 자기야말로 이 지상에서 가장 의로운 하나님의 종이라는 그 믿음을 마지막까지 지키면서 죽었느냐 하는 거야. 96
"이 대위, 내가 신을 모독하도록 강요하지 마시오." 102
"젊은 친구, 그들이 진실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소?" 103
"우리는 한편으로는 신 목사의 양심의 순결과 그의 존경할 만한 평온을 변호해주어야 한다는 거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쨌든 거짓말한다는 행위 자체는 최소한 원칙상 한 인간의 양심에다 불신의 딱지를 붙이는 짓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상반된 작업을 우리가 어떻게 동시에 정당화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야." 109
"제가 알고 싶은 건 그 죽은 열두 명을 어째서 모두들 대단한 순교자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죽은 자들은 모두 훌륭했고 성자 같았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무슨 증거가 있나요?" 126
우리의 선전 목적에 맞추기 위해 진실을 비틀 수는 없습니다. 뿐 아니라, 고군목께서 지적하신 대로 그 진실은 순교의 종교적 성격과 관계된 것이므로 그 방면의 사람들이 처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52
"왜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해?"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 152
"난 기도할 수 없어!"---이것이 당신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소. 179
이미 말했지, 난 자네가 그 속으로 무얼 믿고 무얼 신봉하건 전혀 상관하지 않네. 허나 자네가 그 군복을 차려입고서 사람들에게 한다는 얘기가 안 그래도 비참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하는 것들뿐이라면 문제 곤란해. 자네의 국가가 취하고 있는 입장을 거스르면서 말일세. 사람들이 속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는 것들을 그들에게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나? 내 말 이해가 돼? 174
우린 이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만 하고 있어. 그걸 모르나? 175
"그렇소, 난 그들에게 내 신앙의 진리를 말하겠소."
나는 그말에 도전했다. "진리는 목사님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장대령 혼자의 것도 아닙니다." 179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하시든지 간에, 목사님께선 자기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하지 마십시오."
그는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나는 덧붙였다. "우리 기관을 위해서도 안 되고 우리 선전을 위해서도 안 됩니다. 목사님······"
그는 충동적으로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대위, 대위" 하고만 있었다.
"·····그리고 목사님의 신을 위해서도 안 되죠."
그는 격렬하게 내 손을 잡아 쥐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뜨겁게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내 신앙을 위해서요. 대위! 나의 새로운 신앙을 위해서요!" 180 - 181
182-183 신목사의 고백과 목사들의 반응
"목사님, 목사님의 신은 저들의 고난을 진정 알고 있을까요?" 202
"'그렇다면, 그런 척만이라도 하시오'라고 신 목사가 말하더군. 그런 척이라도 하라고 했어!"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위해서지, 몰라서 묻나?" 그는 격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고난에 시달리고 고문당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야, 모르겠어?"
우리는 말없이 헤어졌다. 216
222-224 욥기 봉독 by 박인도
교인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에게 위안과 확신을 줄 작고 멋진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의미 있게 하고 고난을 값진 것으로 해줄 그 어떤 것 아니겠나? ···· 그래 그 교인들은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그들의 생을 지속시키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어. 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지. 그들이 가진 그것을 우리가 꼭 동화라고 불러야 할게 뭐야? 228
>>>결국 신이 존재하는 여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신이 이야기한 서로 사랑하라는 그것, 그것을 실천하는 중에 신이 발현되는 것이다. 현실이 고통스럽거나 얼마나 힘이 드느냐, 절망과 무의미한 고난이 얼마나 내 앞에 도래하느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나와 신의 관계는 내가 타인과 얼마나 사랑으로 엮여 있는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목사님의 신은 목사님이 무슨 고난을 당하건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253
"말하겠어요. 전 목사님이 한 일을, 당신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고 있는 일을 경멸합니다. 거짓말에 거짓말의 연속 아닙니까? 무엇 때문이죠?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열두 명의 목사들은 모두 이유 없이 도륙당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영광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에 대해 당신의 신은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판국에 당신께선 신을 찬미하다니!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있는 판에 신을 찬미하다니요? 왜 백성들을 배반하시는 겁니까?" 254
263-264 신목사의 비밀
"···나는 절망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삶의 어둔 감옥에 던져 넣고 있는지를 보았소. 마을은 ··· 지옥이 따로 없었다오.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 그렇소, 당신이 환상이라 부른 그 영원한 희망 말이오.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하긴 이게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요, 하늘나라 하나님의 왕국에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난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던 겁니다."
"하지만 목사님, 당신의 희망과 당신의 약속은요?"
"나의 희망? 될수록 많은 이들이 절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될수록 많은 이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이 세상의 고난을 이겨내고, 될수록 많은 이들이 평화와 믿음과 축복의 환상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 그게 내 희망이오." 271 -272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