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영웅의 대결
북 흉노 측은 병사수가 이만 명이 훨씬 넘어 보인다.
어제의 전투에서는 중요한 군수물자까지 모두 포기하고 다급하게 도주하였던,
남 흉노군은 일단 패잔병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해볼 만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기습을 당하여 병력의 반을 잃고, 퇴각하였지만 아직은 자신이 있다.
전투력이 약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예기치 못한 전술적인 기습작전에 말려들어 패한것이다.
먼저, 천부장과 정예 병사들이 건재하다.
더구나 막북무쌍 한준 소왕의 치우 창술이 빛을 발하고 있다.
어제의 전투에서도 여실 如實히 증명되었다.
천하무적의 치우 창술에 추풍낙엽 秋風落葉처럼 나가떨어지는 적병들, 모두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심기일전 心機一轉하여 진영을 새로이 구축한다.
어제까지는 공격 형태의 좌우로 넓게 펼친 학익진 대형 鶴翼陣 隊形이었지만,
오늘은 수비 형태인 반월형 半月形으로 바꾸어, 진형을 축소시켜 구축하였다.
상대 병력과 비교해 그에 따라 진지 구축 構築 방식을 바꾼 것이다.
오후가 되니 북 흉노 군사들이 이십 리 밖까지 진격하여 진형을 갖춘다.
북 흉노 측에서는 최장안 천부장이 선봉장을 맡고 양 진영 가운데로 나선다.
사로국에서 뒤늦게 합류하였지만, 최장안 장수도 이제는 백전노장 百戰老將의 위용을 보여 주듯이,
장창을 오른손에 꼬나쥐고 왼손으로 말을 몰아가는 모양새가 몸에 익은 노련한 장수의 모습이다.
남측에서는 고적타 천부장이 장창을 들고 말을 몰아 나와 대결을 벌인다.
두 장군이 떨어졌다 교차하며 7, 8합을 겨루더니, 돌연 최장안의 손에서 투망 投網이 펼쳐진다.
고적타의 창과 오른팔이 손바닥 크기의 그물코 사이로 들어가 버리니 고적타는 힘을 쓸 수가 없다.
그러자 남측에서는 보육고 천부장과 백부장 두 명이 고적타를 구출하고자 지원 나온다.
이를 저지하고자 북측에서는 배중서와 서누리, 정돌식이 전장으로 나간다.
대결장이 어지러워지자 이제 남측에서는 구목릉 소왕이 이천의 기마병을 이끌고 나오고,
북측에서는 기혁린, 우문 청아 천부장이 사천 명의 기마병으로 이에 대응한다.
그러자 병력의 차이로 인한 세 불리 勢 不利를 감지한 남군 측에서는 막북무쌍 한준 소왕이
직접 백마를 몰며, 양날 창을 꼬나 쥐고 양 진영의 중앙을 헤집고 나타났다.
막북무쌍 한준 소왕이 전장터에 모습을 드러내자, 북 흉노 측의 병사들은 무기를 내리며
모두 뒤로 피하기에 급급하다.
그러자 양 진영 사이에 큰 길이 생긴 것처럼 병사들이 남북으로 짝 갈라졌다.
과연 막북무쌍의 별호는 명불허전 名不虛傳이다.
막북무쌍이 전장에 백마를 타고 무쇠로 만든 양날 창을 들고 그 위용을 과시하며 나타나자,
적. 아군을 가리지 않고, 초원의 용사들이 모두가 떠올리는 영웅이 또 있었다.
과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초원의 또 다른 영웅, 묵황야차 이중부 소왕이
갈색 말을 타고 묵황도를 비껴들고 양 진영 가운데로 나타난다.
이번에는 남 흉노 측 병사들이 멀찌감치 뒤로 물러난다.
또다시 만난 초원의 두 영웅.
두 영웅 모두 감회 感懷가 새로움을 느낀다.
철도 들기 전 코흘리개 시절에 산동성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만나 서로 치고받고 싸워가며
죽마고우 竹馬故友로 자라났고, 세상을 알게 될 때쯤에는 둘도 없이 친한 동무로 함께
땀과 피를 흘려가며, 서로 도와주고 의지하며 무술 수련도 같이하였다.
그렇게 동고동락 同苦同樂한 친구고 동료로서 서로가 간담상조 肝膽相照하는 사이로
허심탄회 虛心坦懷하게 믿고 지내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기고 그 골이 깊어지더니, 결국은 서로의 가는 길이
이상하게 엇갈리게 되면서 지금은 적으로 마주한 채, 날카로운 창과 무거운 칼로 서로가
옛 동무를 노려보며 대립하고 있다.
불과 칠, 팔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묘한 상황이 지금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서로의 갈 길이 다르다.
둘 다 너무 멀리까지 가버린 것이다.
이미 넘을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것이다.
이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수천, 수만의 많은 눈이 자신들을 믿고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한 나라(國家)를 건국 建國할 수도 있는 무용 武勇과 지휘 능력을 갖춘 영웅들이다.
묵황도를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든 묵황야차.
“와 아~”
북 흉노의 용사들이 모두 함성 喊聲을 지른다.
그러자 막북무쌍의 양날 창도 허공을 서너 바퀴 맴돈다.
이번에는 남 흉노의 병사들이 크게 힘차게 소리 지른다.
두 영웅은 말을 몰아 상대를 향해 달려 나간다.
창과 도가 허공에서 춤을 춘다.
양날 창의 화려한 치우 창술의 기세는 거친 바람을 불러일으켜 초원을 휩쓸고,
묵직한 묵황도의 조선세법의 위력은 구름을 가르고 태양을 부른다.
말들은 서로 교차하며 스치듯 지나가더니, 곧 바로 되돌아 힘차게 격돌 激突한다.
건곤일척 乾坤一擲의 대결이다.
조그마한 양보나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두 영웅은 반 시진을 싸웠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있다.
대결 중간 중간 막북무쌍의 양날 창이 위에서나 옆쪽에서 묵황야챠를 향해 내려치는 초식들이
두세 번 시도되었으나, 이중부는 이번에는 묵황도의 등 쪽의 패인 부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정상적인 도법으로 일관 一貫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한준이 초조함을 보인다.
자신이 새로 창안하여 수련한 천하무적의 ‘쌍수압초’의 격투기를 사용할 기회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병장기로 싸우는 도중 자기가 먼저 무기를 던져 버릴 수는 없다.
그렇게 초조한 마음이 앞서니 창술도 조금씩 어지러워진다.
이를 감지한 남 흉노 측에서는 징을 두드려 막북무쌍 소왕을 불러들였다.
한준이 뒤로 물러서니 이중부도 자기의 진영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양측 병사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두 영웅의 무예에 탄복하고, 서로 아군 측 장군을 응원하는 함성이다.
마유주를 한 잔씩 마시고 다시 대결장에서 마주한 두 영웅.
그러자 막북무쌍 한준 소왕이 창을 마상 안장에 찔러둔 채 말에서 뛰어내려,
맨손으로 박수를 두 번 치더니 위풍당당 威風堂堂하게 결투장으로 걸어 나온다.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임을 과시하는 행동이다.
무기로는 승패가 쉬이 결판나지 않으니, 격투기로 승부를 결해 보자는 뜻이다.
맨손 격투기야말로 모든 무예의 기본이다.
그렇다, 무기는 맨손으로 상대를 제압하기 어려울 때 사용하는 것이다.
아니면, 혼자서 여러 명을 상대할 때, 하는 수 없이 도움을 받아야 할 병장기 兵仗器인 것이다.
손에 무기를 들지 않고, 빈손으로 겨루는 대결이야말로 진정한 원초적인 승부다.
하여, 자신이 사용하는 무술 명칭도 ‘쌍수압초 雙袖壓草’로 하였다.
병장기 없이 ‘양 소매자락으로 초원을 제압한다’라는 뜻이 아닌가?
지난번 격투기는 처음부터 막북무쌍의 ‘쌍수압초’ 초식이 빛을 발하며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돌연 突然 출현 出現한 늑대로 인하여, 완전하게 끝나지 못한 대결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오늘 다시 맨손 격투기로 겨루어 승부를 확실하게 매듭짓자는 뜻이다.
고수들은 멀리서 보아도 그날 겨루었던 격투기의 내용과 유, 불리 有, 不利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가까이 눈앞에서 목격하였더라도 그날, 두 장군 사이에 벌어진 대결 내용과
그 승부 여부 勝敗 與否를 정확하게는 모른다.
유, 불리 정도로 대충 감을 잡는 범주 範疇에 그치고 만다.
어느 한쪽이 바닥에 쓰러져야지만 뚜렷하게 그 승패를 분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그 결과를 수많은 대중 大衆 앞에서 확실하게 보여주겠다는 굳은 의지 意志의 표현이다.
영웅 중의 영웅 대접을 받고있는 묵황야차 이중부도 비겁하게 꼬리를 내릴 마음은 추호 秋毫도 없다.
막북무쌍의 도발적인 모습을 지켜본 중부 역시 묵황도를 자신의 애마 愛馬인,
갈색 말 안장에 걸어두고는 대결장으로 어깨를 펴고 뚜벅뚜벅 걸어 간다.
관전자들이 더욱 흥분한다.
양 측의 병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대결장 가까이 한 걸음씩 옮겨 다가간다.
기마전 騎馬戰 대결이 아니니, 큰 덩치의 전마 戰馬가 제외된 만큼 결투장이 축소되는 것이다.
모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목으로 침을 삼키고 있다.
남군 병사들의 눈에는 지난번 대결 때처럼, 격투기의 진행 과정은 처음 보는 신묘한 격투술을 구사하는
막북무쌍 소왕이 당연히 상대방을 압박하는 공세를 취하는 우세한 양상으로 진행될 것이며,
결과는 분명 승리할 것이라는 굳은 확신이 엿보인다.
반면에 북측 장수들의 미간에는 다소 불안한 느낌이 얼핏 스쳐 지나간다.
다만, 박지형 부 군사와 천강선 우문청아 천부장, 두 사람은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남군 측 관전자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드디어 막북무쌍의 쌍수압초 雙袖壓草 초식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과연, 현란한 쌍수압초란 필살기 必殺技가 무술 초식 이름 그대로 초원을 제압해 간다.
그 기세에 놀란 풀잎은 바닥에 엎드리고 풀뿌리는 근간 根幹으로 움추러든다.
남 흉노 군사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힘차게 함성을 지르고, 북 흉노 병사들도 이에 질세라
큰 소리로 아군 장수를 서로 응원하고 있지만,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그러나 당사자인 묵황 야차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이 태연해 보인다.
쌍수 압초를 대적하는 자세가 유연하며 자신감이 가득하다.
오른손이 수도로 手刀로 변하여 위로 올라가고 왼 주먹이 횡으로 날아간다.
그런데 그 위력이 대단하다.
막북무쌍의 쌍수압초 초식이 화려하고 현란하다면,
묵황야차의 격투술은 단순해 보이면서도 위맹스럽기 그지없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맹렬한 격투술이다.
그러자 막북무쌍의 쌍수압초 초식이 지난 번 대결 때와는 달리 크게 힘을 쓰지 못한다.
한준의 쌍수압초 초식들이 현란한 창술이라면,
중부의 격투술은 묵직한 도법을 연상시킨다.
그렇다.
지난 겨우내 이중부는 이 새로운 격투술을 창안 創案하고 수련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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