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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피의 피날레
堂井 김장수
한 생명의 탄생, 그리고 행복의 시작
어느 시골마을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의 어머니는 고구려의 국조인 삼족오가 하늘 높이 치솟다가 서낭당 지붕에 앉아 있는 것을 꿈속에서 보았다고 한다. 꿈속에서 삼족오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곧 훌륭하게 성공할 것이다. 그러니 그 재능을 손상시키지 말고 잘 키우기 바란다.”
그렇게 말하고 난 후에 어머니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나 일어나 보니, 꿈에도 너무 생생해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후 임신을 했다. 주변 사람들은,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면 참 좋겠다.”
“이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 마을의 큰 경사네요!”
“정말이지 고생 많으셨어요.”
그렇게 축복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의 축복 속에 태아를 조심스럽게 키웠고, 음식도 좋은 것만 먹었다. 그 뒤, 태기가 있자, 아버지는 그녀를 산부인과에 데려갔다. 얼마 후, 간호사가 나와서는,
“사랑스러운 왕자님이예요!”
“아무 이상이 없던가요?”
“예. 무척 건강해요.”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산후조리실에 들어가 보니, 너무나도 건강하고 귀가 넓적한 아기가 태어난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 아기를 장세절(張世節)이라고 지었다. 의사의 종합검진에도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보니, 장세절은 너무나도 건강한 운동선수가 될 것 같다고 누가 그러더란다. 장세절은 엄청난 기와 아버지를 닮은 정기(精氣) 서린 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이 날은 2000년 7월 3일 밤 11시 44분 13초였다. 세절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속삭였다.
“세절아, 너는 훌륭하게 될 수 있을 거야.”
어머니는 기쁨이 넘쳤고, 아버지는 세절이가 장차 운동선수가 될 것이라 주변에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세절이의 탄생은 주변에 큰 축복이었다.
동생 세광이의 출생
2003년 12월 11일 밤 10시 4분 33초, 동생 장세광(張世光)이 태어났다. 세광이의 어머니의 꿈에 검은 용이 시골 버드나무를 휘감고 있다가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세광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세광아,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형처럼 건강하게 자라렴,”
세절이에 이어 세광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마을은 잔칫집의 연속이었다. 세절이는 그렇게 태어난 동생 세광이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2003년 12월 22일, 세절이가 어머니한테,
“어…, 엄, 마!, 엄마! 엄마!”
이러는 거다. 어머니는 크게 놀라는 한편 너무 기뻐서,
“그래, 우리 세절이 착하네! 엄마랑 세광이 보러 갈까?”
이러시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세절이도 기뻐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린이집 친구들
세절이가 3살 때, 어머니는 세광이를 업고 아버지와 같이 일해야 했기 때문에 세절이는 어머니와 떨어져 어린이집에 머물게 되었다. 다행히 세절이가 태어날 때부터 쭉 지켜보시던 어린이집 선생님은 세절이 형제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또한 세절이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여자친구 김희선(金希仙)은 훗날에 세절이와 결혼하게 되고, 세절이도 희선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어느 날에는 세절이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희선이한테 뽀뽀를 했다. 세절이나 희선이나 기쁜 마음은 같았다. 또 다른 여자친구 송혜지(宋慧智)는 세절이에게 여러 가지 상식과 예절을 가르쳤다. 혜지는 세절이보다 한 살 더 많았다. 훗날 혜지는 권성우(權星宇)와 결혼하게 된다. 성우는 세절이의 동갑내기 친구로, 세절이가 운동선수로 성장할 때 보이지 않는 조력자가 된다. 성우는 커서 통일 한국의 최고 사업가가 된다. 이인구(李仁求)라는 아이는 세절이보다 한 살 아래지만, 세절이룰 형처럼 따랐다. 인구는 훗날에 대학교수가 된다. 범영수(范永壽)라는 아이는 세절이와 동갑으로, 훗날 친환경 사업가가 된다.
세절이는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도 뛰어났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들었다. 정말로 훌륭한 아이가 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세절이는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어머니랑 세광이랑 어린이집에 가는데, 갑자기 화물차 한 대가 세절이를 덮칠 찰나에, 어떤 아주머니가 그 사고를 면하게 해 주었다. 하마터면 세절이는 죽거나 아니면 장애인이 될 뻔한 아찔한 사고였다. 그 아주머니는 인구의 어머니였다. 인구 어머니는 세절이한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세절아, 괜찮니? 세절이 어머니, 후유, 큰일날 뻔했어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세절이는….”
“정말로 고맙습니다. 인구 어머니, 우리 세절이 어린이집에서 잘 지내나요?”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들어요. 우리 인구는 세절이만큼 착한 편이에요.”
“정말 다행이네요. 세절아, 이제 엄마랑 집에 가자.”
훗날 장세절은 이렇게 회상했다.
“정말이지 아찔한 하루였다. 그 차에 치였더라면 죽거나 장애인이 될 것은 뻔했다. 하지만 인구 어머니께서 나를 구해 주시어 오늘에 이르렀다. 나를 응원해 주시는 분들에게 고마움을 이제라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어느 날, 세절이의 집안 어른들이 세절이네 집에 찾아와 《천자문》을 읽어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시골의 풍토는 천자문을 떼야만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풍토가 강했다. 세절이도 천자문을 읽고 얼마 안 가 천자문을 떼었다. 세광이도 3살 때 천자문을 뗄 정도로 형만큼 똑똑했다. 그만큼 세절이 형제의 존재는 시골에서는 축복이었다.
초등학교 유치원에서의 생활
세절이가 5살 때, 세광이는 2살이었다. 세광이는 어린이집에, 세절이는 초등학교에서 운영하는 공립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희선이, 혜지, 성우, 인구, 영수도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세절이는 유치원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사귀게 되었다. 다른 동네 태생의 친구 3명이었는데, 말썽꾸러기지만 분별할 줄 아는 정형선(鄭炯宣), 공부는 못해도 축구에 뛰어난 민우식(閔友植), 할머니와 부모님께 효자인 진규태(陳圭泰)가 그들이었다. 훗날 형선이는 농부가 되고, 우식이는 월드컵 우승 MVP가 되어 한국 축구에 큰 공을 세운다. 규태는 어른이 되어서는 모범 납세자로 새마을 훈장을 받는다. 형선이, 우식이, 규태를 비롯한 주변 친구들은 세절이가 반드시 성공할 것임을 예상하고 세절이와 세광이를 크게 아껴준다.
인구가 유치원 선생님께 말하기를,
“선생님, 세절이는 운동에 뛰어나니까 어떤 운동이라도 시켜주세요.”
이러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건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생각하자.”
이러시는 거다. 아무튼 세절이는 복이 많은 아이였다. 그 당시에는.
유치원에서 세절이는 국어 이외에도 산수,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 컴퓨터 등을 익히게 되었다. 사실상 세절이가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세절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면 되는 것이었다. 장세절은 이렇게 회상했다.
“유치원 생활 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그 동안에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나쁜 짓은 결코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던 시기였다. 나는 나쁜 길로 가면서까지 추잡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다.”
초등학교 입학
세절이가 7살 때였다. 세절이는 동생 세광이(당시 4살)를 데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세절이가 1학년에 입학했을 때, 담임선생님이신 주광호(朱廣浩) 선생님은 세절이 형제를 교단 앞에 세우고 말씀하시기를,
“장세절과 장세광 형제는 언젠가 큰일을 해낼 것이니까,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자. 알겠지?”
하는 것이었다. 세절이가 입학할 당시 학교의 현황을 보면, 1학년은 세절이를 포함해 9명, 2학년은 혜지와 성우를 10명, 3학년은 5명, 4학년은 6명, 5학년은 13명, 6학년은 14명이었다. 비록 시골 학교였지만, 정이 많고 왕따가 없어 행복한 학교생활이었다고 장세절은 술회했다.
세절이는 공부뿐만 아니라 모범적이고 운동을 잘 해 주변의 칭찬이 자자했고, 희선이에게도 사랑받을 만큼 착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세광이는 성격이 내성적이라 친구가 별로 없었다. 혼자 힘으로 공부하며 형에게 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외로움을 많이 탄 세광이지만, 평생 동안 형과 사이좋게 지냈다.
1학년 때 어느 날, 혜지와 성우가 희선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자고 했다. 세절이가 희선이를 데리고 오자, 네 사람은 가까운 교회로 갔다. 교회 선생님은 세절이에게 기도하는 법과 성경을 가르쳐 주셨다. 세절이는 하느님과 예수에 대해 조금씩 알고 있었다. 세절이 부모님과 희선이 부모님은 이런 세절이와 희선이에게 종교도 적당히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절이와 희선이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 세절이에게 교회 목사님은 영어와 독일어, 중국어를 가르쳐 주었다. 얼마 안 가 세절이는 영어와 독일어와 중국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장세절은 이렇게 회상했다.
“만일 어렸을 때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돈밖에 몰랐다면, 그 후가 상상하기조차 싫을 만큼 비참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골 교회라도 사람을 사랑으로 배려해 주시는 목사님 덕에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였다.”
어쩌면 장세절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시골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비참하게 살다가 끝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장세절은 복이 많은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6학년까지
인구가 1학년이 된 후 어느 날, 인구가 세절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절이 형, 형아는 커서 뭐가 될 거야?”
“나는 운동선수가 되고 싶어. 인구 너는?”“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그럼 인구는 공부 많이 해야겠네?”
“세절이 형아는 공부 잘 하니까 해낼 거야.”
“고맙다, 인구야.”
세절이는 2학년 담임선생님인 임성미(林盛美)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다. 사실 장세절은 살면서 말썽과 장난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예 그런 장난을 할 유혹을 어릴 적부터 이기는 법을 익혔다고나 할까. 차라리 장세절에게는 그것이 나은 건지도 모른다. 임성미 선생님은 세절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절아, 너는 공부 잘하고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하니까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앞으로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렴.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네.”
장세절은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사이좋게 놀았다. 근처 개울가나 학교 놀이터가 세절이의 주된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놀면서도 공부도 열심히 해서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어느 새부터인가 장세절은 육상에서 조금씩 재능을 익히게 되었다.
그 후 3학년, 4학년을 거쳐 5학년이 되는 해에는 전국소년체전에서 육상 100미터에서 10.23이라는 기록으로 금메달을 따게 되었다. 6학년 때는 육상 400미터에서는 은메달을 따게 되었다. 100미터에는 10.11이란 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그렇게 장세절은 육상에 조금씩 재능을 가지게 되었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후에는 육상부에 들어가서 마라톤에 도전하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중학교 육상부에서 마라톤을 배우려면 돈이 필요하지만, 세절이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세절이가 마라톤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동생 세광이도 모범생으로 살면서도 형이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응원 덕분에 전국소년체전에서는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노력을 열심히 하여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 그래서 체육대에서 교비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행운도 누리게 되었다.
세광이의 일생
동생 세광이는 2003년 12월 4일에 태어났다. 호는 경촌(耕村)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형과 사이좋게 지냈고, 그 우애는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다. 중학교까지는 집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는 도시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 졸업 후 회사에 취직하여 결혼을 했다. 그 후로는 혜산으로 가서 사업가가 되었다. 장세광은 혜산에서 생수 회사, 철도 회사, 건설 회사 등을 경영하면서도 혜산의 동계 올림픽 유치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 후 경촌 장세광은 노벨 평화상에 올림픽 훈장도 받았다. 2096년 3월 4일 별세하면서도 끝까지 형에 대한 우애를 잊지 않았다. 슬하에 딸 영숙이와 아들 진암(眞庵) 장효선(張孝瑄)이 있다.
체육대학 졸업, 그리고 슬럼프
세절이는 그 후 체육대학에 교비생으로 입학했다. 세절이는 대학 3학년 때 국가대표가 되어 육상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땄다. 하지만 세절이도 슬럼프는 피할 수 없었다.
“세절이는 더 노력해야겠어.”
이 말에 상처를 받은 세절이는 혼자 운동에 전념했다. 그 와중에도 의심스러운 약은 먹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아파도 약도 마음 놓고 못 먹고 있는 세절이가 안타까워 은퇴를 권유했지만, 장세절은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기도 했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용기를 내어 성공하자는 의지를 굳게 다졌다. 훗날 장세절은 이렇게 회상했다.
“만일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대로 주저앉았다면 내 일생은 망가졌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왔다 해도 나를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것을 가까스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용기를 주셨다. 그 덕에 어려움이 닥쳐와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 후 장세절은 슬럼프를 가까스로 극복하고 열심히 노력했다. 덕분에 체육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영광의 금메달
장세절은 2024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참가하여 열심히 뛰었다. 일본, 에티오피아, 케냐, 남수단,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장세절은,
‘포기하지 말자.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잖은가.’
하며 의지를 굳게 다졌다. 이윽고 달리기 준비가 끝나고, 총성이 울렸다. 장세절은 ‘서두르지도, 쉬지도 말라’는 어느 위인의 말을 간직하며 천천히 달렸으며, 중간 중간에 물을 머리에 끼얹기도 하며 쉬지 않고 달렸다. 앞쪽의 선수가 지치는 기색이 역력하자, 장세절은 힘을 내어 마침내 앞쪽의 선수와 맨 앞에 달리던 선수를 가까스로 제쳤다. 그리고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선 장세절은 조국을 생각하며 열심히, 그리고 빨리 뛰었다. 그렇게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장세절은 시상대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울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정말이지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습니다. 저를 응원해 주시는 여러분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저를 훌륭히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세광아! 못난 형을 응원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했다. 영광의 금메달을 딴 그는 별로 아쉬울 것이 없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장세절이 펼친 금메달을 향한 이 경기는 그야말로 ‘영광의 경기’이자 ‘피의 피날레’였다.
훈장 수여, 그리고 감독 취임
장세절은 귀국 후 체육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훈장과 금메달을 부모님과 할머니께 보여 드리면서,
“이제 효도할게요. 정말이지 저를 이렇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다, 세절아! 네가 우리들을 기쁘게 하는구나!”
“걱정마라. 이 할미가 맛있는 거 해줄게. 기다려. 알았지?”
“네 할아버지께서 이걸 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늘에서 보고 계실 거야.”
고향집에서 큰 환영을 받은 장세절은 마을에서도 큰 환영과 박수를 받았다.
“우리 마을이 생긴 이래 큰 경사네.”
“세절이가 우리 마을을 빛내 주었어요.”
“세절이가 해낼 줄 알았어!”
곧바로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 세절이네 가족들도 모두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희선이는 결혼반지를 세절이한테 받았고, 그 자리에서 세절이에게,
“우리, 결혼하자.”
라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세절이가 대답을 했을 때, 희선이는 세절이를 안아주며 뽀뽀를 했다. 이를 지켜본 마을 주민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 무렵 혜지는 성우와 결혼한 상태였고, 친구들도 달려와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잔치에서 목사님은 세절이와 희선이의 결혼식을 치렀고, 동생 세광이도 달려와 축하 선물을 주었다.
꿈같은 여러 시간이 지났는지, 그는 선수촌으로 돌아와 훈련에 열중했다. 그러나 어느 실업팀에서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하지만, 장세절은 아직은 부족하다면서 다음으로 미루자고 제안했다. 장세절은 그것으로 은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저 장세절은 마라톤에서 은퇴하고 지도자가 되려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기자회견장은 격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제자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
그 후 장세절은 미국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고, 어느 실업팀의 감독이 되었다. 제자들 중에는 장세절 팬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직접 장세절을 만났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덕분에 열심히 훈련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원은 그야말로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그 말을 들은 장세절은 직접 상부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마라톤 팀을 지원해 주십시오. 되는 만큼만 말입니다. 그래야 내가 선수들에게 할 말이 생깁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만족스러운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얼마 후 2028 올림픽이 열렸다. 제자 중 이창원(李昌源)의 금메달 획득은 큰 성공이었다. 깜짝 놀란 장세절 감독과 실업팀 사장은 훈련비를 올려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이행되었다. 그 후 장세절 감독은 훈련비 걱정없이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얼마 후에는 장세절은 511억 달러의 세계 부자가 되어 있었다.
해외여행
그후 30년이 흘러 유림(裕林) 장세절은 58세가 되었다. 희선이의 슬하에 5남 3녀를 둔 유림 장세절은 일본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일본에서 쇼핑도 하고, 훈장도 받고, 라멘도 먹고, 재일 동포도 지원하고, 바쁜 하루를 보냈다.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고, 회고록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회고록의 이름은 《사랑 받고 사랑 주고》였다. 이 회고록에서 장세절은 이렇게 밝혔다.
“나는 정말 사랑받기 위해, 사랑을 주기 위해 매사에 조심하며 살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정말 기뻤다. 마라톤이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력과 인내력, 정신력이 없이는 하기 힘든 것이 마라톤이다. 난 상관없지만 후배들의 고통을 잘 알기에 나는 마라톤 경기를 할 때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후 장세절은 64세 때,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다. 그것은 아름다운 꽃잎의 피날레였다. 노벨상을 수령하고 귀국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많이 변해 있었다. 집에 와 보니, 할머니와 부모님은 돌아가신 뒤였고, 동생 세광이는 혜산으로 떠나고,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시골은 황폐해진 지 오래였다.
장세절은 노인이 된 권성우를 만나 경황을 들었는데, 그 대답은 이러했다.
“자네 할머니와 자네 부모님, 마을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없네. 이제는 학교는 폐교되고, 어린이는 얼마 안 남았다네. 그나마 부모들은 도시로 가고 없고, 이 마을에는 우리밖에 안 남았네.”
속상한 장세절은 이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스스로 마을의 촌장이 된 유림 장세절은 가족들을 데리고 마을의 활성화에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장세절의 노력으로 마을은 활성화되었지만, 인구가 줄어 걱정이 앞섰다. 2090년에는 인구가 다시 늘어 마을은 옛날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학교도 다시 문을 열었다.
별세
2093년 3월 2일에 갑자기 열병에 걸린 장세절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하늘나라로 간다. 이제는 우리 마을의 운명은 너희들에게 달렸다. 모두가 힘을 합쳐 이 마을을 지키도록 해라.”
2093년 4월 1일에 장세절은 세상을 떠났다. 3년 후에는 경촌 장세광도 형을 따랐다. 장세절이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 터에는 유림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유림 장세절은 그 박물관에 안장되었다.
유림 장세절. 그는 하늘나라로 갔지만, 그가 이룬 업적은 영원히 살아 있다.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 조건에 연연하지 마시오. 나의 일생은 하루하루가 피의 피날레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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