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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의 사순절
마태복음 26: 14-16
14.○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이제부터 한 달 동안 우리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새롭게 하는 사순절 기간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기간에 그 당시 예수님 주변에 가깝게 있었던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면 사순절 기간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그 첫 번째 사람으로 가룟 유다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서구 사회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지옥의 가장 고통의 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시저를 배반하고 칼을 댄 브루터스이고 또 하나는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라고 말들을 합니다.
두 사람 다 자기를 가장 신뢰하고 사랑했고 주인을 배반했는데 그 배반의 정도가 생명을 끊게 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역사에 보면 그와 같은 일은 많이 일어났습니다.
고려의 공민왕도 최측근의 보좌관이었던 최만생이 잠자는 공민왕의 가슴에 칼을 찔러 살해를 했고 박정희 대통령도 가장 믿는 보좌관에게 살해를 당하는 역사를 우리가 경험했습니다. 외국의 역사도 그런 역사가 많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인신매매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신매매의 역사를 살펴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야곱의 아들들이 동생 요셉을 애굽 장사꾼들에게 인신매매하여 은 20에 팔았습니다.
예수님은 은 30에 인신매매되어서 팔렸습니다.
인신매매 당한 노예들은 돈을 지불하고 사온 사람들의 생명권까지 주인이 주장을 합니다.
노예를 죽였다고 살인 죄수로 취급하는 것은 노예제도가 없어진 후의 일입니다.
미국도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 이전에는 노예를 함부로 죽였습니다.
존 뉴턴은 목사가 되기 전에 노예 장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잠비아에서 노예를 강제로 잡아다가 찰스턴에 가서 판매하는데 말 안 듣는 사람, 병든 사람은 갑판에 데려다가 칼로 죽여서 집어 던져 상어 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일을 했다고 그 사람을 경찰이 체포하거나 법원에서 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중에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을 때 과거 자기가 했던 일이 얼마나 못된 죄였는가를 깨닫고 지은 찬송이 “Amazing Grace”라는 찬송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그래서 그 찬송이 유명해 졌습니다.
문제는 왜 가룟 유다가 그렇게 끔찍스러운 일을 계획하고 또 실천했느냐 하는 것이 의문인데 이 의문은 영원합니다.
많은 추측적인 신학 해석이 있어왔으나 명확한 해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석들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본 예수의 기적 창출은 언제 나타났는가?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일으키셨는데 항상 위급 상황이 닥칠 때 했다는 겁니다.
어느 날 설교 들으러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마이크도 없던 시절에 일만 명을 놓고 설교하니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산 위에서 설교를 하시는데 배고픈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큰 문제가 발생하니까 제자들이 군중을 빨리 해산시키자고 합니다.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소서.”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안하십니다.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는데 지금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고심하던 예수님이 행사하신 기적 사건이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그 모든 문제가 현장에서 금방 해결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가룟 유다가 그것을 봤을 때 ‘아! 예수님은 급한 상황이 되면 반드시 기적으로 해결하신다.’ 믿었습니다.
그 다음에 더 심각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예수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때 상황이 성경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지금 과학적 장비를 가진 배를 가지고도 해상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견고한 세계 제일의 여객선 타이타닉호도 침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는 조그만 나룻배입니다.
손으로 노를 젓는 가냘픈 목조선에 불과합니다.
이런 배는 강풍이 한번 몰아치면 발칵 뒤집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급상황이 온 겁니다.
저는 배를 타고 밧모 섬에 갔다 오는 길에 큰 풍랑은 아니지만 거센 풍랑을 만나서 마치 배가 풍선처럼 흔들렸던 위험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위급상황이 닥치니까 예수님은 또 기적을 발하셨습니다.
“바다여! 잔잔하라.” 금방 해결이 되어 바다가 잔잔해 졌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 예수의 기적은 위급상황에서 반드시 나오는구나!’
지금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가룟 유다의 기대감은 빌라도 정부를 빨리 때려 부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앉으시는 것입니다.
이 기대감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넉넉히 그럴만한 능력이 확실한데 안하십니다.
그래서 급해서 제자들이 물으면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면 언제 그런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은 위급 상황이 되어야 기적이 나온다. 로마 군병들에게 생명도 위협을 당하시면 틀림없이 로마 정부를 때려 부수고 또 잔잔케 하실 능력이 나오실 것이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과 사건을 만들어서 로마 군병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끌어가게 만드는 이러한 추측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추측 해석이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조금 더 신빙성이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다른 제자보다 머리가 명석했던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특별히 수학적 계산이 빠른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재정 담당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베다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가 똑같이 매우 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예수님의 발을 씻길 때 그것을 보자마자 수학적 계산을 합니다.
“그 향유는 300데나리온이야.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훨씬 나을 것을 왜 발 씻는 데다 허비하느냐?”
그러잖아요?
다른 제자들은 말도 못하는데 가룟 유다는 금방 계산해서 말합니다.
이렇게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유다가 그 당시의 상황을 가만히 보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기대했던 예수님은 점점 반대의 이상한 소리만 합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는 사형수들만 지는 것인데 왜 우리 보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죽어야 된단 말인가?’ 이런 의문도 생기고 또 자신이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다.” 선언을 하십니다.
“아니, 예루살렘은 지금 왕처럼 올라가셔야지 고난을 받고 죽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런 계산이 유다의 마음에 왔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자기들 주변에 좁혀오고 있습니다.
그 반대의 세력은 계산이 빠른 가룟 유다의 생각으로 우리로서는 절대로 당해낼 수 없는 천하무적의 세력이 우리 앞에 있다고 계산이 되었습니다.
첫째, 로마의 세력입니다.
‘온 세상을 점령해서 이 유대 나라 땅에도 로마 사람 빌라도가 총 사령관으로 와서 지배하는 이 때 복장도 화려한 로마의 군병들이 칼을 번쩍이면서 예루살렘 거리를 날마다 행진하고 있는데 바로 그 세력이 지금 예수를 없애고자 하는데 어떻게 이길 것인가?’ 더군다나 유대 나라의 헤롯왕은 로마의 절대 복종해서 왕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는 종교 세력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입니다. 그 나라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을 배경으로 하는 막강한 종교 세력이 모두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헤롯 정부와 로마 정부와 가야바 종교 집단, 모두다 손을 잡고 한 가지 목적인 예수 없애기 운동에 나섰는데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럴 때 예수님은 초능력을 발휘해서 다 때려 부수어야 되는데 예수님은 정 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시니 다 틀린 일이 아닌가?’ 이런 계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다가는 나도 죽음에 직면할지 모르겠다. 예수가 잡혀서 죽을 때 측근에 있던 내가 괜찮을 것인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살 길이 있을 것인가? 반대편에 공로를 세우는 일이다. 그렇게 골칫덩어리로 앓고 있는 이 예수를 없애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주면 나에게는 아무 해가 없지 않을까?’
그래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어찌나 약삭빠른지 돈을 챙겼습니다.
은 30을 받아내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 값어치는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몸값입니다.
망해가는 집안을 뛰쳐나와서 최소한의 건질만한 것을 계산해 보는 것입니다.
이 가룟 유다는 돈 문제에 있어서 이미 성경에 판결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니라.”
성경에 이미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을 때도 지나친 말참견을 해서 예수님과 불편한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느냐?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그랬는데 그 말 다음에 성경은 가룟 유다의 말에 대한 해석을 달았습니다.
뭐라고 달았느냐?
“저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함이 아니요 돈을 훔쳐감이니라.”
그 돈이 자기 금고에 들어가면 슬쩍해서 빠른 머리 회전으로 자기 것으로 삼아버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가룟 유다에 대해 극단적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로라.” 이렇게 기록이 되었습니다.
더 결정적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절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하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그러면 왜 사탄은 열 둘 중에 유다를 선택했는가?
사탄의 역사 특징은 아주 간단합니다.
가능성의 지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에게도 사탄이 찾아왔잖아요?
언제 찾아왔습니까?
가능성이 있을 때였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했을 때입니다.
매우 배가 고픈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찾아와서 배고픔의 매우 적절한 논리를 갖다 대고 유혹하잖아요?
사탄은 가능성을 찾는 겁니다.
아주 밝습니다.
이와 같은 사탄 사역의 특성은 에덴동산에서부터 나타났습니다.
하와가 혼자 있을 때 사탄이 찾아와 마음을 흔들어놓아 버렸습니다.
사탄은 영리합니다.
12명 가운데 사탄은 확실한 판단이 유다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11명의 제자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11명은 모두 갈릴리 출신인데 혼자만 유다 출신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왕따 분위기의 소외감이 있는데다 정직하지 못한 도둑 근성이 이미 확인되었고 돈에 대한 집착이 돈으로 연결될 가능성마저 보이는 심리적 상태를 내보였습니다.
두 번에 걸친 마리아의 향유 소유 문제로 예수님과 불필요한 마찰적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만이 가득한 입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마음이 교만스러웠던 것이 있습니다.
유다 출신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인격 대우하지 않는 문화입니다.
그가 자기 마음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예수를 인신매매해서 배반하려는 생각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예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마지막 성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그때 제자들은 너무나 황당스러운 예수님의 발표에 대해서 서로 물었습니다.
“주여! 내니이까?”
새번역 성경에는 “나는 아니지요?” 그러고 물었습니다.
거기서 가룟 유다를 발표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이니라.”
그러면 그때가 회개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습니다.
사실 사순절이 되기 전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희망에 찬 기대감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로
마로부터 국권을 회복시킨다고 믿어왔고 자신들은 그러한 민족 혁명의 주체 세력이라고 굳게 자부해 왔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절정에 달했던 순간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 나라의 국적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출세를 못했습니다.
언제나 남쪽 예루살렘 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 차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다 갈릴리 출신인데 지금 갈릴리 출신들이 국무 위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왔다고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무슨 사건이 벌어집니까?
국민적 호응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했습니다.
거기 성경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제자들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이게 누구냐?”
이때 제자들은 성경에 뭐라고 답하죠?
‘갈릴리 나사렛 출신’을 강조합니다.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이 말을 우리가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우리 사회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 이제 예루살렘의 주인이 되기 위한 작업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이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세상은 바뀌었다.” 이러고 제자들이 흥분해서 지금 좋아하는 겁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 발표된 날 저는 케냐 나이로비에 있었습니다.
그날 나이로비는 다 뒤집혔습니다.
“우리 케냐 출신이 세계 최대 강국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케냐 혈통의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게 웬일이냐?”
거리마다 두들기고 춤추고 난리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대통령 당선되면 고향 사람들이 제일 흥분하며 좋아하잖아요?
제자들도 그런 기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갈릴리 차례다. 우리는 한 번도 역사에서 대우받지 못했어. 날마다 빈민촌의 어려운 신세만 지고 살았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
그러나 예수는 깜깜합니다.
“예수님! 뭐하시는 겁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
“지금이 때이지 언제가 때입니까?”
“너는 무슨 생각하는 건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잖아요?
사람들이 실망했잖아요?
“아니, 선지자가 어떻게 감옥에 갇히고?”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실망하니까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었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선지자를 보려고 광야에 나갔지 않느냐? 봤지 않느냐? 선지자는 고난을 당한다. 요한이 고난을 당해 죽을 것이고 나도 똑같이 그 길을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너희들도 내가 가는 길을 가야지.”
여러분은 교회 오셨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보고 “무엇을 보려고 교회 왔느냐?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 왔느냐?”
대답이 뭡니까?
결국 목적이 엉뚱했던 가룟 유다의 사순절은 최악의 슬픈 사건을 예수님에게 제공했고 자신도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내 인생의 목표는 뭔가?
예수님은 바로 가룟 유다와 같은 생각을 제자들이 전부 하고 있을 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실 이 부분까지 깨닫기가, 믿음이 여기까지 가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가고자 하는 길이 뭔가?
주님이 나를 보고 기뻐하실 초점의 방향 제시가 어딘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보세요. 사도 바울은 그것을 깨달았잖아요? “내가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그 길을 갔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사순절이라는 특별 제도의 기간을 만들어 지키고자 하는 뜻은 잘못 가는 내 인생의 방향을 이런 기간을 통해서 바로 잡으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다니는 공동체입니다.
무슨 역할로 주님의 고난스러운 십자가를 내가 질 것인가?
주님은 현장에서도 외롭게 외치셨습니다.
“내 뜻을 너희들까지도 모르느냐?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어이구! 이게 무슨 뜻이야?”
다 도망을 갈 외로운 골고다의 길을 혼자 가신 겁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가 무거워서 쓰러질 때도 있고 피 흘릴 때도 있고 눈물 흘릴 때도 있지만 하라는 겁니다.
가룟 유다는 십자가 고난과는 정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다가 자기의 계획이 물거품 같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절대 배반의 자기 살 길을 찾아버렸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유다는 자기 인격 파멸의 고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머리가 좋을수록 심리적으로 좌절이 빨리 오도록 되어 있답니다.
예수를 팔고 손에 들려진 은 30을 바라봅니다.
‘선생을 팔아서 죽게 만들고 내 손에 주어진 은 30을 어디다 쓰려고 내가 받아들었나? 내 모습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
“내가 잘못했다. 물려 달라.”
“일은 끝났다. 그것은 네 몫이다. 우리가 알 바 아니야. 네 책임이야.”
그래서 돈을 집어던졌다고 했지요?
최악의 선택을 해야 되는 고통에 빠지고 말아서 결국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의 죽음에 대해서 성경말씀은 순화해서 기록하지 않고 민망스러운 표현을 그대로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을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저에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이것이 가룟 유다의 사순절 행사였습니다.
만약 이때 가룟 유다가 그런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그 명석한 두뇌로 의로운 판단을 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장렬한 동참을 했다면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가룟 유다에 기울어져 왔을 것입니다.
기왕에 죽을 것을 생각 하나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죄인의 대명사로 가룟 유다는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도 있고, 목회자도 있고, 권사도 있고, 집사도 있습니다.
“어떤 축복의 사역이 제일 훌륭한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나 만들어 본다면 저한테는 순교자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왜 그게 제일 큰 축복의 사명입니까?”
이렇게 또 묻는다면 예수님과 똑같은 성격의 사명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나도 주님을 위해서 일순간 강제 수단에 의해서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은 최고의 사명이다.” 아무나 못합니다.
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은 주님이 지금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지혜롭게 판단해서 그것을 위해서 최대한 몸을 바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선택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늘나라 열두 보좌의 상징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영원하고 거룩한 자리를 돈 30냥 받아들고 빼앗긴 최고의 불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도 제가 졸업한 대학에서 졸업 설교를 하고 왔습니다.
사실 저는 그 학교가 그냥 신학교로만 가야지 종합 대학으로 발전하는 것을 반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종합대학이 되어서 5천명의 학생들이 모여드는 대학이 되었는데 옛날 제가 졸업했던 그 작은 신학교로만 남아야 거기서 훌륭한 주님을 위한 제자들이 나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종합대학의 한 구석에 신학교가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학교는 피어선 목사님이 세우신 학교입니다. 피어선 목사님이 담임목사님으로 계실 때 그 교회 교인 하나가 매우 유명해 져서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워너 메이커’입니다. 그는 책방 점원으로 일하다가 미국 최대 백화점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큰 성공 사업가가 되었을 때 당시 미국 대통령이 그에게 체신부 장관 임명을 하였습니다. 거절했습니다.
“왜 거절하느냐?”
“네, 제가 지금 체신부 장관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내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장관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뭔지 말하라.”
“네, 제가 출석하고 있는 필라델피아 베다니 교회에서 제가 오랫동안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습니다. 장관을 하면 그것을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러한 사명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책방 점원을 하다가 지금은 온 세계에 백화점의 일인자가 된 것을 내가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대통령이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그러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주일학교 교사 사명 방해하지 않는 조건에서 수락하라.” 그래서 한 것입니다.
그는 토요일이면 틀림없이 백악관을 떠나 교회에 와서 주일에 자기를 기다리는 주일학교 자기 반 몇 명을 가르치는 것을 그렇게 기쁘게 열심히 하였습니다.
끝까지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의 전 재산을 들여가면서 YMCA 운동을 해서 몸을 바쳤죠?
YMCA는 그의 재산으로 다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YMCA는 그가 자기 재산으로 다 만들어준 것입니다.
온 세계 YMCA운동을 했습니다.
바로 이 YMCA 운동으로 기독교 청년 지도자 양성에 힘써서 “그래야 세상이 밝아지고 훌륭해진다.” 1908년 12월 3일 종로에 대지를 사고 거기에 3층 현대식 건물을 건축함으로 한국 YMCA를 탄생시켜준 사람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신문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대통령 하시기 전과 대통령 퇴임 이후에 제일 열심히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똑같습니다. 대통령 할 때 그것을 못했는데 그때만 빼놓고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내가 다니는 이 조지아 주의 주일학교 아이들 가르치는 것을 열심히 합니다. 나는 주일학교 교사 열심히 하다가 미국의 대통령까지 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시는 것은 작은 일이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믿음에 따라서 커지고 작아지며 가치관의 변화가 올 뿐입니다.”
가룟 유다는 가장 귀한 것을 잊어버렸죠?
가치관의 판단을 잘못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가룟 유다의 사순절 행사를 조명하면서 가장 거룩한 주님과의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