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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온정, 불굴의 의지, 수필가 채낙현
채낙현의 수필세계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열며
1.1. 채낙현의 인간세계
1.2. 채낙현과 달맞이길
1.3. 채낙현과 수필가 예춘자
1.4. 채낙현과 동래의 노래
Ⅱ. 채낙현의 수필세계
2.1. 채낙현 수필의 지형
2.2. 수필평단의 과제
2.3. 채낙현 수필의 문학성과 예술성
Ⅲ. 닫으며
• 채낙현 약력 /
I. 열며
타 장르에 비해 수필미학의 논리 개발이 더딘 현실에서 그리고 ‘직업적인 수필가’의 반열에 결코 끼이지 않는 채낙현의 수필을 가지고 문학적 잣대로 진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나, 어쩌면 진정한 예술의 평가는 사후에 이루어진다고 한 차원에서 이 시점이 그의 문학을 제대로 평가할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이가 다 알다시피, 채낙현은 80년대 이후 부산에서 활동한 수필가로서 불굴의 의지와 따뜻한 온정을 이웃에 뿌리며, 행정가로 언론인으로 그리고 작가로 충만한 남자의 삶을 살았다. 풍성한 내일의 인생을 살아가려는 뜻있는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꽃피우고, 인생을 토로하고 청춘을 구가하며 살았다. 허기진 그의 가슴은 언제나 멀리 흙냄새 풍기는 향리의 초가집과 막걸리와 무지개, 꽃구름과 잔디언덕, 흐르는 시냇물, 푸르런 들판들이 아름답게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단 한 번도 거부를 부러워해본 적이 없었다. 그 정신은 그야말로 ‘폭우의 웅장한 격류’를 ‘인생의 줄기찬 역정’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평소 납작코로 추남이란 소리를 들어왔는데, ‘못나도 할 말이 있다’는 수필에서 일본의 문학평론가 구리야가와하꾸손의 <결함의 미>를 가져와 저신의 얼굴이 못난 것을 자위하며 살아왔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는 참으로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었다. ‘걱정 근심이 없는 천당과 극락보다는 불안과 괴로움과 아픔과 모자람이 뒤섞여 있는 그런 갈등 속에서 의욕과 투지와 집념으로 인생을 멋지게 다듬어 간느 것이 삶의 참맛이라고 설파하였다. 평생 ‘풍류’를 부르짖었고, 항상 제자들 앞에서는 선생으로서 자존심으로 가지고 스승으로서의 의미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사가 풍성해야 인생의 향취’ 우러나오는 법이라고 설파하고 그 선비 정신을 두고두고 좇았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채낙현의 풍유정신과 선비정신은 인생의 향취를 풍겨주는 수필문학으로 빛을 발하며 큰 울림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가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없는 지금이야말로 채낙현 수필의 가치를 평가할 최적기라는 데 평자도 동의한다. 물론 부산문인협회도 <작고문인조명>이라는 코너를 통해 작고문인 특집을 마련하고, 작고문인의 문학정신을 평가하고자 했을 것이다. 행정가이기 이전에 훌륭한 수필가였다는 점에서 채낙현 수필의 가치 체계를 정립하는 것은 우리 후배 수필가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여겨진다. 따라서 행정가로 언론인의 후광으로 채낙현 수필가가 작가로서 명성을 떨쳤는지, 정말 채낙현이 수필을 잘 썼는지 짚어보는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수필의 문학성이란 수필이란 문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어야 한다는 전제로 출발한다. 문학적 접근 즉 수필이 일상의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문학적 장치를 예술적 장치로 승화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리란 관점에서다. 수필의 예술적 접근만이 수필의 '잡문성'을 해소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폄하되어온 수필의 위상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도 전제해 둔다. '누구나' 쓰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씌여지는 글이라는 인식이 세상의 저변에 깔리지 않는 한 수필의 운명은 서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 쓰기의 출발점은 문학적인 취미에서가 아니라 심미적 취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채낙현 수필은 이런 기준을 만족하고 있는가. 여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채낙현의 수필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채낙현의 수필집을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도서관 검색을 하니 다행스럽게도 시민도서관에 두 권의 수필집이 보관되어 있었다. <생긴 대로 살기>라는 수필집은 구할 수 없어서 세 권의 저서 중 두 권을 확보하여 정독해 나갔다. 적어도 감성과 지성의 균형 있는 조화를 통해 사물과 사회현상의 실재와 작가 스스로의 인생관을 동시에 노출한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와 심미적 의무 그리고 미적 취향을 가진 수필가인가 하는 관점도 중요하다. 채낙현 수필이 문학 단계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업그래이드된 상위 개념으로 나아간 '예술'에서 정의될 수 있는가도 평가 척도에 넣어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해 수필이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주제와 제재 중심의 문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라는 식의 진술을 채낙현 수필이 만족시키느냐는 것도 살펴보아야 할 점이다. 그럼 지금부터 행정가 구청장 출신 채낙현이 아니라 수필가로서 채낙현 수필의 문학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1. 1. 채낙현의 인간세계
채낙현은 인천 채씨 28대손인 아버지와 경주 정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임오년(1930) 7월 14일(음 6월 19일) 미시에 시조할아버지의 29대손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가통의 계승자인 작가가 태어나자 마자 조부가 돌아가시고 일곱 살 때 아버지를 갑자기 거짓말처럼 잃었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그대로 축소하여 재판한 것처럼 이목구비가 꼭 닮았다고 한다. 여섯 살때부터 누나에게서 천자문을 전수받았다.
채낙현의 부친은 함안읍내 들판을 다스리는 붓도감을 했고, 또 함안면 소방대장직도 역임했다. 언제나 호탕한 성격에 경우 바르고 대가 찼으니 그 억센 아버지의 호기를 함안읍내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까지도 당해낼 분이 없을 정도로 맛있는 사나이였다고 한다. 집안의 농사일 같은 건 늘 머슴들에게 맡겨놓고 동네일이며 남의 일에는 언제나 앞장 섰다고 한다.
어릴 때 머슴집 아이를 비롯하여 동네 꼬마들을 이끌고 현장으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구멍 뚫린 5전짜리 은전을 얻어와서 눈깔사탕을 사가지고 아이들을 어루기도 했고, 매구를 칠 때는 어버지 목에 목마를 타고는 그 신나는 가락에 맞추어 아버지와 함께 우쭐우쭐 춤을 추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소방대원들이 불 끄는 연습을 하는 데도 동네 꼬마들을 거느리고 가서는 아버지의 구령에 따라 민첩하게 움직이는 소방대원들의 동작을 보면서 꼬마들에게 나 보라는 듯이 으시댄 일도 있었다.
채낙현의 아버지는 술과 게집과 투전판에 청춘을 몽땅 털어버리고 거짓말처럼 돌아가셨으니 채낙현은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을 것이며, 완전히 알거지가 되어버린 가솔을 이끌고 오늘까지 살아오신 어머니의 피눈물나는 생애야 얼마나 쓰라린 공통이었으랴’ 라고 <자화상>이란 수필에 적었다. 채낙현은 아버지가 털어간 조상들의 유산을 어느 정도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어엿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인천 채씨 가문의 30대손을 세 명씩이나 두어 조부모님이 그렇게 염려하던 가통단절의 위기를 거뜬히 모면하였다.
결혼할 당시 손에 쥔 것이라고는 땡전 한 푼도 없었고, 해운대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도중에 예식장 사용료가 미진되었다고 정차당한 일도 있었다. 이래저래 친구와 지기들 덕으로 단간방에 세를 들어 살림이라고 차렸는데 아내는 채낙현에게 간이 크다고 했다고 한다. 돈 한 푼 없이 무슨 체면으로 양가집 딸을 유인하여 장가들 생각을 했느냐고 책망했다고 한다. 이토록 무일푼의 경지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산 증거가 결혼과 집장만이라고 하며,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다 갖춘데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없고 모자라는 가운데서도 불굴의 집념과 투지만 있으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실증과 그것이 또한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지고 보람찬 대가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자랄 때 그 험한 가시밭길은 불언키로 하고, 철들어서부터 농삿군으로, 접장 노릇으로 기자 노릇으로, 전전타가 늦게나 행정관료로 몸담아 온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예나 지금이나 마음은 푸를 청청 그대로고, 세끼 밥 챙기는 것 그대로고, 월급봉투 맡기고는 용돈 때문에 싸우는 것 그대로다. 집안 일은 아예 간섭 않고 돌볼 줄 모르는 것 그대로고, 아내의 잔소리도 그대로다. 집안이야 죽이 끓든지 밥이 끓는지 그건 내 소관이 아니고, 다달이 월급 봉투만 맡겨주면 집안일은 아내가 알아서 처리하는 방향으로 길들여 있고, 나는 주는 대로 먹고 입고 하면 그만이니 우리 집에 저금하여 모은 돈이 있는지 부채가 얼마나 있는지, 재산이 붙었는지 줄었는지 그건 아내만이 아는 비밀이다.’(이도유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채낙현은 철저하게 가정일은 아내에게 일임하고, 오직 바깥일에 열심이었던 것이다.
종이 한 장이면 왔다갔다해야 하는 직장 따라 조무래기들과 세간살이를 이끌고 경남지방의 의령으로, 마산으로, 거제로 전전하면서 살림을 옮겨 살았고, 부산으로 왔다가 공직의 사령장은 다시 그를 전북으로 보냈던 것이다. ‘나는 집안의 살림을 모른다. 빚이 있는지, 저축한 돈이 있는지 내 소관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지난 날의 낭비며 잘못된 일을 진심으로 반성하는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그는 때로는 응원자로서, 때로는 잘못된 길을 바르게 인도하는 안내자로서의 몫까지 다 해 주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호젓한 방 안에서 열심히 다림질하는 아내의 그 수척한 얼굴에서 뼈가 저리도록 느낀다.
1981년 첫수필집에 책머리에, ‘본래가 글 쓰는 문학도는 아닙니다. 민심에 따르고 천성에 끌려가는 하찮은 나의 공직생활 중에도 깡그리 문학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땅을 누리는 똑같은 사람으로서의 쓰리고 아픈 생각들을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때그때 수필해 본 결과, 한때 지방의 일간지면의 칼럼란을 더럽혀 본 몇 편을 가려 이 책으로 엮어 보았습니다. 아직도 풋내가 가시지 않은 점, 일깨워 주시고, 어떤 일에도 순천하고, 민신 얻으며 더 보람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따뜻한 채칙으로 매질하여 주시길 진심으로 빌어마지 않습니다.’라고 썼는 데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는 무슨 일을 하건 솔직하고 겸손하게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사람으로 살면서 쓰리고 아픈 생각들을 펼쳐보고자 했으며, 풋내가 가시지 않은 글들이라고 하면서 채칙으로 매질해 주기를 부탁한 것이다.
1.2 . 채낙현과 달맞이길
사람 역시 다 다르다. 꽃도 다 다르고 사람도 다 달라 종내에는 꽃이 사람이고 사람이 꽃인 달맞이고개 벚꽃 길인 달맞이고개는 한결같다. 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이다. 달맞이고개는 언제부터 벚꽃 길이 됐을까. 다른 말로, 언제 벚나무를 심었을까. 달맞이고개가 벚꽃 길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 언제부터 벚꽃 길이 되었는지 아는 사람 역시 드물다. 벚나무가 굵직하고 듬직해서 대개는 고갯길 역사만큼이나 오래됐으리라 짐작한다. 과연 그럴까.
짐작과 달리 달맞이고개 벚꽃의 역사는 의외로 짧다. 사십 년이 채 안 된다. 1983년 벚나무를 심었다. 벚나무는 원래 그렇다. 잘 크고 금방 큰다. 그리고 우아하다. 땅 척박하고 바닷바람 모진 섬나라 일본이 한국 토종 왕벚나무를 개량해 섬나라 곳곳에 퍼뜨린 이유다. 한국 왕벚나무는 일본 벚나무 선조다. 왜 1983년일까. 국토 공원화 사업이 그 무렵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사천만 푸른 의지로 아름다운 국토 경관을 이루자’는 구호를 내걸고 전 국토 공원화에 나서던 때가 그때다. 해운대에선 달맞이고개 공원화가 과업이었다. 구청 공무원이 고갯길에 자연석 쌓고 벚나무를 심었다. 그해 7월 30일 ‘달맞이동산’ 기념비를 고갯길 정상에 세웠다. 기념비는 지금도 당당하다.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여. 걸음을 멈추어 지난날 힘겨웠던 우리들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다시 걸어가야 할 내일의 꿈속에 이 아름다운 동산을 담아 바람과 바다와 청산을 노래할지어다.’ 달맞이고개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달맞이언덕, 달맞이동산 등이다. ‘달맞이’란 명칭은 당시 구청장이던 채낙현 수필가(1930~2004)가 처음 붙였다. 해운대구는 1980년 4월 출장소에서 구청으로 승격했다. 초대 정철진 구청장에 이어 채 청장이 1982년 9월부터 1984년 5월까지 2대 구청장을 맡아 반듯한 해운대, 제대로 된 해운대 만들기에 애썼다. 달맞이고개 벚꽃 역시 채 청장 작품이다. 수필가답게 길손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격문을 기념비 아래 남겼다.
1.3. 채낙현과 수필가 예춘자
‘수필집 <생긴 대로 살기>에 게재된 저자의 약력을 보면 한 수필가의 생애가 펼쳐진다. 젊은 시절에는 교육계에 종사하다가 후에 관료사회에 발을 들여 놓는다. 관료직은 구청장직에까지 이르러 정년토임을 맡게 된다. 녹조근정훈장은 한 수필가의 삶에 남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채낙현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한 것이 전부다. 그후 자격검정고시로 이어진다. 초등교원시험을 거쳐 중등교원검정고시에 합격하는 입지전적인 약력만 보아도 치열한 삶을 살아온 자취가 돋보인다’고 유병근은 ‘채낙현의 삶과 수필’에서 적고 있다. 수필가 이원우의 <세종대왕이 화나겠다>라는 수필에는 채낙현 수필가와 예춘자 수필가의 흥미로운 인연 이야기가 나온다.
채낙현은 봉생병원장 정의화 박사를 가끔 찾아왔다. 물론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정의화는 뒤에 국회의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했는데, 그는 채낙현을 깍듯이 대했다. 가물에 콩 나 듯 했지만 정의화와 채낙현은 그 뒤 몇 번인가 예춘자의 찻집에 들었다. 그들의 화두에 수필이니 데뷔니 하는 말들이 오가는 걸 예춘자는 듣는다. 어느 날 채낙현이 예춘자를 불렀다.
“정의화 의원은 국회의원이기도 하지만, 수필가야. 봉생병원장이신 걸 너도 알지?”
“그럼요. 두 분이 가끔 수필을 이야기하시더군요.”
“어때? 너도 수필을 한 번 써 보고 싶은 생각 없어?”
“저 같은 게 뭐….”
“과공은 비례. 난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이 전부야. 그런데 수필집도 몇 권 냈고, 한글학회 부산지회장이잖아? 넌 방송대 졸업이고, 인상이 워낙 좋아 문단에서도 호감을 얻을 거야.”
그게 인연이 된 것이다. 가끔 그렇게 만난 채낙현에게서 수필 창작법을 배워서, 2년 만에 부산 문인협회에 이름 석 자를 올리게 된다. 이윽고 한글학회에도 가입했음은 물어보나마나. 여기 저기 동인회에 글을 발표하자, 채낙현은 어느 날 그에게 <부산시보>를 한 장을 내밀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나오는 시청 기관지야. 여기 ‘주간 사설’이라고 있지? 사설(辭說)은 ‘사설시조’의 그 사설이야. 말씀 사(辭) 말씀 (說), 그저 수필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
“한데, 이걸 제게 왜 보여 주시는 거지요?”
“네가 원고 심부름 좀 하라는 뜻이야. 너 컴퓨터 다룰 줄 알잖니? 나하고 의논하여 필진을 구성하고, 그로부터 원고를 받아서는 편집부로 보내 주는 일을 좀 하라는 뜻이야.”
“그 어려운 일을 제가 어떻게 해 나가지요?”
채낙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예춘자 가게(전통 찻집)에 많은 명사들이 모여드니, 그들에게 가끔 작설차 한 잔씩 대접하면서 부탁해 보라는 것. 자기도 가끔씩 친구들에게 청탁하마고도 했다. 그게 예춘자가 무려 36개월 동안 <부산시보>에 매달리게 된 동기였다. 과연 찻집을 찾는 인사들이 자연스럽게 <부산시보>의 ‘주간 사설’ 고객 혹은 필자가 될 수밖에. 수필가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문인들과도 접촉의 외연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한글학회 회원들이 출입하다 보니 그 지면은 점점 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게 시민들의 평이었다. 자기의 글이 실린 <부산시보>를 수십 부 안고서는 지하철에 올라 승객들에게 나눠 준 원대권 수필가도 있었다.
-이원우 <세종대왕이 화나겠다> 중에서
물론 일정액의 고료가 지급되었다. 당시로 봐서는 상당액이었다. 부끄럽지만 그걸 더러는 전액 예춘자에게 수고료라며 되돌리는 필자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예춘자의 대타(代打) 몫(고료)은 고스란히 자신의 통장에 입금되었던 것이다. 이원우 수필가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절 3년(36개월)의 피나는 노력은 예춘자에게 엄청난 성장을 안겨 주었다는 평가다. 36개월을 주 4회로 환산하면 114회다. 그 많은 양의 원고 교정에 혼신의 힘을 쏟았으니 그건 천금을 주어도 못 사는 예춘자에게 수련과 공부의 기회였다. 보다 나은 수필을 쓰게 된 데는 ‘주간 사설’의 힘이라고 고백하는 걸 예춘자는 망설이지 않았다고 한다.
기적에 진배 없는 일 하나. 부산 시장을 비롯한 시의회 의장 등 관계자는 물론, 동사무소의 9급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눈치를 채지 못하게 비밀리에 예춘자에게 시보 사설을 모으는 그 일이 시작되었고 조용히 끝났다는 사실이다. 작전을 방불케 했다고 하자. 전직 경찰공무원인 편집실장이 바뀌고 나서 예춘자 수필가는 그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었다는 게 이원우 수필가가 수필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1.4. 채낙현과 동래의 노래
‘구민 누구나 다함께 부르면서 화합할 수 있는 동래의 노래가 다시 태어났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동래구는 민선 7기를 맞아 소통·화합·혁신! 다함께 행복한 동래란 구정목표를 정하고 이를 상징할 동래의 노래를 새롭게 탄생시켰다는 내용이다.
채낙현은 18세 때 초등교원 자격 취득으로 공직에 몸담은 이후 동래구청장직을 마지막으로 43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였다. 23년간을 행정관료로 일해오면서 참모직으로 부산시 문화공보실장, 감사과장(경남도), 기획담당관, 보건사회국장(전북도)을 역임한 바 있으나 주로 일산 지휘관으로 일해왔다. 해운대구청장에서 동래구청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89년 6월이다. 동래구민의 날을 제정하고, 구기, 구목, 구화, 구조를 선정토록 하였다. 동래의 노래는 지난 1990년 채낙현 전 동래구청장이 재직 당시 노랫말을 짓고 국민가곡 향수 등 주옥같은 가곡 등을 작곡한 하오주 작곡가가 곡을 부쳐 완성됐다. 하지만 동래의 노래는 이후 계속 활용되지 않으면서 점차 구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에 동래구는 민선 7기 출범을 계기로 구민의 소통과 화합에 가장 적합한 고장의 노래를 만들기로 방침을 정하고 동래의 역사·문화·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원곡 동래의 노래를 발굴하고 노래를 만든 분들의 고귀한 뜻을 살리기에 나섰다. 이를 위해 동래구는 올해부터 전문가와 편곡작업을 진행한 데 이어 음악전문가와 구 간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심사를 진행했으며, 동래의 노래 편곡작품을 최종 선정했다. 새롭게 탄생한 동래의 노래는 경쾌한 곡조에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편곡돼 구민 누구나 노랫말 의미를 되새기며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다.
동래구는 남성·여성·합창·반주 등 모두 4가지 형태로 녹음을 한 동래의 노래 CD 1천매를 제작해서 각종 행사 때마다 적극 활용하고, 관내 학교 및 노래교실 등에도 CD를 배포하는 등 동래의 노래를 적극 알려나가기로 했다는 신문기사다.
당시 동래의 노래가사공모에는 구청장인 채낙현이 아무도 모르게 가명으로 응모하였으나 20여 편 중 가명인 자신의 작품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결국은 뒤에 알려졌지만 채낙현은 상금 30만원을 받아 불우이웃돕기에 기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래애향대상제도 만들어 시행하였다. 동래의 노래에 이어, 동래 청년의 노래 가사를 쓰기도 했다.
Ⅱ. 채낙현의 수필세계
2.1. 채낙현 수필의 지형
우리 부산수필문학 전체의 지형 안에서 채낙현 ‘수필'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가 행정가이면서 많은 수필 작품을 발표했고, 수필집이 나오는 대로 주목을 받았다는 점이다. 다수의 행정가 수필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수필가가 채낙현이다. 수필창작에 종사하는 인적 구성의 폭이 매우 넓어진 데 비해서 행정가의 참여가 저조했다는 것은 수필의 외연 확보 차원에서 크다란 손실이었다. 채낙현 수필문학이 가지고 있는 위상은 수필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장르적 성격을 알려주는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정립해 가야 할 수필정신에 대해 매우 암시적인 지표를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채낙현 수필의 위상을 면밀하게 해석하여, 수필이 우리문학 전체 영역에서 풍요로운 역할과 기능을 담당해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채낙현이 수필을 매우 활발하게 창작해왔고, 다양한 매체에 수필을 게재해 왔는데 비해 그의 문학적 위상은 부산에서는 대중적이었지만 전국적으로는 그다지 높지 않았고 수필계 내에서는 약하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수필가가 아닌 구청장 출신 수필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일종의 신변잡기의 혐의를 씌우면서 본격적인 공론의 장으로 편입시키지 않는 게 우리 문학적 풍토이고 보면,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채낙현 수필에 대한 편견이었다면, 수필문학의 발전 측면에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수필작가들에 대해서는 그 흔한 문학적 접근조차도 인색한 우리 현실에 개탄하고, 우리 수필인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물론 수필이라는 것이 쓰기 전에 어떤 계획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느낌, 기분, 정서 등을 표현하는 산문 양식의 한 장르라고 이해되고 있고, 나아가 무형식의 형식을 가진 비교적 짧고 개인적이며 서정적인 특성을 가진 산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오해의 중심에는 일부 일상성의 특성을 갖는 채낙현 수필이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서사적 경향이 많은 작품 특성이 채낙현의 문학적 평가를 다소 늦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수필 안에는 그 나름의 고유한 세계 이해방식과 표현방식이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같은 ‘본격 수필가’의 반열에 들지 않는 수필가의 수필을 옥석을 가리지 않고 주변 장르로 인식하는 관행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2.2. 수필평단의 과제
수필문학의 지형을 통해서 수필평단이 떠안은 과제는 첫째, 채낙현현 수필의 정확한 분석을 통해 채낙현 수필을 문학의 본류에 편입시키는 일이다. 둘째, 대중적으로 수필가로서의 인지도는 낮지만, 전국적 수필계 내의 낮은 위상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를 한꺼번에 해소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채낙현의 수필미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수필이라는 것이 전문적인 수필언어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장르적인 언어를 빌린다는 점에서 종합문학이다. 따라서 수필미학은 다양한 관점을 포괄해야만 된다. '미'란 미학에서 다루는 문제다. 수필이 예술에 속하는 한, 우리는 수필의 예술성, 즉 수필미학에 대해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현상에 대한 특성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의 대립항을 찾아 대조하면서 서술하는 것이다.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닌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자연 그대로의 '미'와 다르다. 이런 차원에서 채낙현 수필의 미학적인 조명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채낙현의 수필집 <시정에 부는 바람>과 <고향에는 봄이 있다>에 발표된 많은 수필은 위의 조건을 충족하는 높은 품격을 지닌 수필이다.
결국 예술의 '미'는 조형미다. 그러면 이 조형성을 구성하는 인자는 무엇이며, 그 경계를 이루는 핵심 요소는 뭘까. 전통적으로 진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는 것은 종교와 과학이고, 현실적인 선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고, 미래적 생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다. 적어도 한마디로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때, 수필미학은 존재의 토대를 얻게 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수필은 그 특유의 일상성, 무형식성, 평이성 등을 특색으로 하면서 비판적 문제제기보다는 공감의 영역을 지향하는 성과를 우리 수필문학에서 만만치 않게 거두고 있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채낙현 수필의 특성은 낙천적, 풍류적, 선비적 사고를 통해 얻은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세계에 대한 모순적인 인식으로 변용되어 문학적으로 형상화된다는 데 있다. 최승범 교수가 쓴 제1수필집발문 <채낙현 형, 그 인간과 수필세계>, <참삶의 수필세계>, 유병근이 쓴 <채낙현의 삶과 수필> 평은 채낙현의 인간적인 면과 그 정신이 반영된 수필에 대한 서평으로 인간미의 극치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채낙현의 수필의 문학세계의 부족한 평가에 대하여 깊은 반성적 시선을 던지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수필미학의 정립과 채낙현 수필에 대한 평가를 적극적으로 해나가야 할 것이다.
2. 3. 채낙현 수필의 문학성과 예술성
지금까지 부산에는 채낙현과 같은 훌륭한 수필가가 존재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수필은 문학의 서자 취급을 받아왔다. 아직도 수필을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 그 내용부터 작법까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오늘의 독자들은 이 혼돈스럽고 험하고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양식이나 정신적 양식을 달라는 것이다. 오늘의 독자들은 이같이 다양한 정서적 반응을 요구하고 있다. 삶도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데 대한 확인을 가지게 해달라는 것이다. 단언컨대 채낙현 수필은 이런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필은 문학이요,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 해도 예술성이 없으면 문학이 아니요, 문학성이 없으면 유명한 수필가가 쓴 글이라 해도 수필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수필의 형식을 갖춘 글 가운데 예술성 즉 문학성이 제고된 수필다운 수필만을 수필로 인정해야 한다. 종교인의 수필도, 비문인 수필가의 수필도 마찬가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수필의 문학성이란, 한 편의 작품을 문학적으로 만들어가는 구조적인, 형상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내심에 투영된 감정이나 정서가 세련되게 문학적 방식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호반에 떠 있는 달빛의 요요한 자태를 그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달빛을 내 방에 끌어들여 나와 대화를 하고, 거기에서 어떤 정신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창조적 사상’이다. 늦가을 저녁녘, 지적지적 내리는 가을비에 젖어 병든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쓸쓸한 풍경만을 그려서는 안 된다. 거기에서 생의 허무나 죽음과 같은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것이 낙엽에 대한 체험의 변용이다. 이것이 문학으로서 수필이요, 예술로서 수필이다. 위의 측면에서 채낙현 수필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가 문학성의 요구에 부응하는 편이다. ‘시정에 부는 바람’은 행정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며, <고향에는 봄이 있다>에는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는 행정가로서 그의 철학과 생활인으로서의 그의 세계관이 작품에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전체 작품으로 채낙현 수필의 문학성을 논할 수는 없다는 점도 밝혀 두어야겠다. 그의 대표적 작품집 두 권으로 채낙현 수필의 문학성을 논의해 볼 차례다. 먼저 채낙현 수필의 문학성은 ‘체험성’적인 기법에서 그 가치를 발한다. 채낙현은 수필의 특성이 ‘정’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식한 사람으로서 수필 창작의 비밀에 정통하기 때문에 결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문필 고유성의 고지에 올라 있다는 것이다. 그가 걸어온 전력이 다기다양하고, 일찍이 편모슬하의 어려운 살림 속에서 고생고생 잔뼈가 굵은 분이었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치루어 초등 중등 교사에서 교장 자리까지 꿰찬 분이기 때문이다. 정계 언론계, 행정 분야에서 구청장 군수까지 역임한 분이다. 수필이 주는 맛이 진솔한 체험에서 나온다면, 채낙현은 경험을 진솔하게 형상화하는 수법은 탁월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그려내는 풍경은 절경에 가까운 것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정신을 어느 누가 이토록 아름답게 문학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채낙현의 수필은 품맛을 자랑한다. 행정직을 수행하면서 매일 일기를 썼다는 것은 그의 수필가적인 역량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 하겠다.
이에 비해 흐르는 물을 인생이라고 비유해온 나는 수십 념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런 물굽이를 직면할 때마다 우리들 분별없이 를러가는 인생으로만 느껴지는 감정엔 변함이 없고 이향전전 셋방전전 식솔의 호구에 급급할지언정 허기진 나의 가슴엔 언제나 멀리 흙냄새 풍기는 향리의 초가집과 막걸리와 무지개와 꽃구름과 잔디언덕, 흐르는 시냇물, 푸르런 들판들이 아름다이 살아있어 단 한번도 그 <에이치 투 오>의 거부를 부러워해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이다.
- <이질> 중에서 -
채낙현 수필의 문학적 우수성은 그의 수필이 '구체성과 보편성'에 기대어 창작된다는 점이다. 구체성과 보편성은 문학 고유의 특성이다. 그것으로 문학은, 여타의 인간 정신활동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의 독자성을 옹호한 이래로, 채낙현 수필이 영속적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바로 감각적 구체성과 보편성 때문이었다. 구체성과 보편성에 입각하여,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의 배경을 가진 다양한 독자들이 텍스트의 객관성에 채낙현 나름의 주관성을 가미해서, 보충적으로 문학성을 구현시킬 수 없었다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인류유산으로서의 문학작품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학가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는가 하는 문학성이다.
채낙현 수필의 문학성 문제는 앞서 언급한 ‘체험성’과 더불어 다음의 두 가지를 구제하는 데에 귀착된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가 ‘구체성’의 확보인데, 이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이나 사상을 어떻게 구체성으로 구제하느냐 하는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하면 사상이나 교훈은 추상인데, 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어떻게 형상미학으로 구체화해내느냐에 문학성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편성’ 확보인데, 이는 잡다한 이야깃거리 즉 정보나 소재를 어떻게 문학적으로 변용하는가의 문제다. 다양한 소재들이 문학적으로 구제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개성적이고 일관된 관점 아래 그것들이 내적 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그 통일성이 인생과 세계에 대한 어떤 해석을 드러내어야 하는데, 보편성은 그 해석이 온당할 때 얻어지는 기쁨인 것이다.
수필이란 반드시 필자의 목소리가 강하고 필력이 있어야 호소력을 주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지만 진실된 목소리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때 힘을 지니는 것이다. 수필은 이러한 구체성을 특성으로 창작된다고 할 수 있다. 채낙현의 <이질>란 수필을 예로 들어 보자. 이 수필은 재제와 작가의 인생관이 갖는 상관성 때문에 작가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 수필이 ‘구체성’과 ‘보편성’의 요소를 충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수필은 발단과 결말의 수미상관적 처리로 인해서 미학성이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장르다. 발단부와 결말부는 수필의 6요소에 들어간다. 그만큼 중요한 요소다. 수필을 쓸 때 제일 어려운 부분이 도입부와 결말부 처리다. 저자는 친구 몇몇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흘러가는 폭우의 웅장한 격류를 보면서 작가는 흐르고 흘러가는 물굽이에서 인생을 이해한다. 그런 시간의 유동 속에서 무상한 인생이 죽어가고 또 살아나고, 삶과 죽음이 섞바뀌는 인생의 섭리를 깨닫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또 하나 다른 무리와 마주치고 되고, 그 무리들 가운데 유독 자신을 얼싸안는 죽마고우 한 명의 이야기로 전개부를 장식한다. ‘도도히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우리 인생’이라고 일갈했지만, 되돌아온 친구의 대답, ‘뭐? 인생이라고? 야이 그 썩어자빠진 소릴랑 곰팡내나는 너 골방에나 가서 개갈통을 쳐박고 하란 말이야. 저게 무슨 인생이람’이라고 한 말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공식적인 생활설계에 빈틈없이 살아가는 처세자 친구의 일갈은 물을 인생이라고 비유해온 그를 풍류 인생에서 빼내지 못한다. 자본주의 논리로 거부된 친구를 ‘단 한 번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다짐이 강한 설득력으로 다가오는 건 왜일까. 채낙현의 이런 선비정신과 풍유의식 논리는 쉽게 공감을 획득한다. 그것은 작가가 삶의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체험적인 구체성으로 제시하거나 그것을 보편성에 기댄 인식논리로써 우리에게 제시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례석 위에서 둘을 나란히 세워 놓고 내려다 보니 화가 치밀어 못견디겠더라. 신부는 나무랄 데 없이 아르다운 미인인데 신랑은 형편없는 추남이더란 말이야. 꼭 내가 소중히 간직한 귀중품을 추남인 자네에게 도둑맞은 기분이더란 말이야.”
“선생님! 얼굴 잘나 미남이면 뭣합니까? 사내가 전시장에 내놓을 전시품도 아니고, 툭사리같이 못나도 멋이 있어야 매력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 딴은 멋쟁이라고 자부합니다. 선생님께서 아끼시던 저의 아내도 저의 이 <멋>에 반해서 시집왔습니다.”
궁색한 변명을 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내 낮은 콧잔등이 덕으로 내가 내 값을 다 못 하는가 싶었다. 낮은 콧날 때문에 대하는 사람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내 얼굴을 매일 아침 거울을 통해 만나보기야 하지만 내가 봐도 호감이 가는 얼굴은 아니고 험상궂기가 짝이 없어서 내 얼굴을 창작해 낸 부모님을 원망스럽게 생각한 때도 있었다.
- <못나도 할 말 있다> 중에서
작가는 자신의 못생긴 얼굴에 대한 주례의 농담에 던진 자신의 멋 철학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다음 문단에서 바로 인정을함으로써 정공법을 택해 자신의 멋철학을 풀어내고자 한다. 채낙현 수필에서 나타나는 풍유에서 이미 멋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졌지만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사내’라는 말이다. ‘사내’는 채낙현 수필가와 수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단어란 사실이다. 작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도 있다고 고백하지만 그 다음 문단은 ‘그러나’라는 역접의 연결사로 시작한다는 데 주목해 보면, 결코 사내의 삶에 얼굴의 못생김은 문제가 아니며, 완전무결성은 삶의 재미를 앗아간다는 것이다. 오히려 ‘결함의 미’를 설파한 일본의 평론가 이야기를 빌려와 멋철학의 논거로 삼았다. 여기에 더하여 ‘정사’와 ‘야사’를 대비하여 ‘야사가 풍성해야 인생의 향취가 저절로 우러나온다’는 그의 인생론은 한 번 왔다 한번 가는 짧은 인생, 바람도 일고 눈보라도 몰아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깨달음에서 나아가, 작가는 인생의 향기는 파란만장한 야사의 역정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러한 ‘야사론’의 논리 하에서 채낙현은 인간의 역사가 완전성이 아닌 결함의 멋을 지향한다면 인생이 향기로울 것으로 보고 있다. 인생이란 변화무쌍한 것이고, 짧다. 풍유는 멋과 불과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향기를 취하기 위해 자본주의 논리를 버리는 전형적인 예가 풍유임을 상기하면서 독자는 채낙현의 ‘사내’ 논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한 과정으로서 멋철학을 얻게 된 이치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 수필은 작가 자신이 가고 있는 인생의 길, 사내의 길이 주는 멋이 술자리 방담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공감을 준다. 감동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미적 정서의 반응이다.
영국이 당하는 최악의 난국은 밖에서 오지 않고 안에서 오는데 그것도 근로대중으로부터 오지 않고 머리 좋은 독특한 계층으로부터 온다고 폭탄선언을 하여 위정자를 비롯한 상층부 인사들의 각성을 촉구한 바 있는 처칠 경은 일찍이 수상의 인수를 받는 자리에서 ‘내가 받칠 것은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다’고 역설하며 그의 숨김없는 애국충정을 토로하였고, 인도 5억 국민의 절대적인 신망 아래 끝내 영국의 식민마수를 몰아내고 어둡고 캄캄한 조국을 해방시켜 통치해 온 간디 옹은 그가 죽었을 때 남긴 유산이 스립퍼 샌달 차컵 숟가락 애용가집 회중시계 안경뿐이라고 전한다.
- <吏道유감> 중에서
삶의 현실에는 끝없는 소유욕의 굴레가 씌어져 있다. 그 욕망은 인간의 원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현대 사회의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배태된 물질적 욕망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삶을 구속한다. 인간이 가진 것이 없이 태어나 가진 것이 없이 죽는다는 말은 유한자로서의 인간을 인식하는 허무주의의 소산은 아니다. 억지로 무언가 더 소유하려는 의도가 삶의 균형을 파괴한다면, 오히려 가난한 마음 속에 평정을 지니는 편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이런 깨달음은 <무소유>란 수필에서 ‘우리들이 필용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엔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란 진술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이는 며칠 전 도내 어느 중학교의 수학과 담당인 58세의 늙은 교사와 17세의 어여뿐 여학생이 사랑의 천지를 찾아 가원도 방면으로 출행랑을 놨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시정에서 흘러나오는 관심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하기야 세계적인 애정시인 바이런은 60대의 인생 황혼길에서도 소녀와 멋진 연애를 했다고 전한다. 국경이 없다는 사랑의 세계에 연령의 격차가 문제될 바 아니고, 사제지간에 꼭 지켜야 할 사도궁행이 문제된 바 아니다.
- <사련> 중에서 -
이성을 망각한 연애행동을 사련이라고 한다. 이 수필은 교육자의 본문을 망각한 사랑행각에 경종을 울리는 수필이다. 세상의 눈이 이들의 사랑에 대해 그냥 두지 않자, 그 늙은 교사는 그 소녀와 함께 그들의 새 천지를 찾아 멀리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진실한 연애는 감각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감정에만 맡길 수도 없는 것이다. 이에는 무엇보다도 예리한 이성의 작용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적고 있다. 인간 나이 60이면, 이성을 생활 속에 담아 달관해야 할 교육자의 위치라는 것이다. 작가는 결말부에 이르러, ‘수학의 공식처럼 명확한 이 인생의 기본과정을 이타해버린 이 늙은 기염은 아무래도 하나의 꽃같이 아름다운 청춘을 짓밟아버린 탈선 같기만하여 가증스럽다.’라고 하였다.
단순히 60대와 10대의 연령차에 문제를 두었을 때만 해도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고 하는 논리로 이를 두둔하던 작가는 이 교사의 교직자로서의 일탈과 탈선이 도를 넘자, 바이런의 연애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론, 아나톨 프랑스의 관능감각론 등의 연애에 관한 구체적인 예화나 근거를 들어 이들의 사련을 비판한다. 이는 곧 작품에서 말하는 이성은 순리를 의미한다. 교육자의 입장인 작가가 이성의 작용을 강조하고 있는 이 수필은 연애에 있어서 인성의 작용을 성찰하고, 자신이 논리를 ‘구체성’의 일환으로 제시함으로써, 사련의 허망함을 잘 드러내었다. 이러한 이성작용의 깨달음은 다시 교육자의 위치로 확대하여 사도윤리의 성찰로까지 전개된다.
성찰의 소산으로서, 이 수필은 논리적이며 담담한 필치가 전체 사상을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어 ‘보편성’을 띤다. 그 준엄함이 교직윤리로 승화되고 있음은 은둔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참여하는 문인으로서 작가적 소명을 다하려는 자세인 것이다. 평범한 삶 속에서 삶의 깊이 있는 진리를 스스로 터득하는 모습을 잘 드러내 감동을 준다는 측면에서 채낙현 수필은 문학적 가치를 충분히 지닌 다고 하겠다.
<고향에는 봄이 있다>는 채낙현의 세 번째 수필집이다. 첫 수필집 <시정에 부는 바람>(1981), 두 번째 수필집 <생긴 대로 살기>(1988)에 이어서 출간한 것이다. 첫 수필집은 전라북도에서 공직생활을 하고 있을 때 출간했다. 그는 도 보사국장과 옥구군수 재임 중에도 곧잘 문우들과 잘 어울렸으며 그때마다 막걸리를 기울이면서 문학이야기로 꽃을 피웠다고 한다. 정년 이후에도 지방의회 의원, 신문사 사장, 부산문인협회 부회장, 부산외솔회장, 동래문화회장 등을 맡으면서도 수필 창작을 이어갔다. 그는 시문을 생각하듯 목민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향전전하던 공직생활을 마치고 척박하고 황량하기만 하던 도심에서 그 지겹던 삶을 청산하고 봄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회귀의식을 <고향에는 봄이 있다>에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오늘이 있기까지 내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지난 날 허기진 고향에서 어리날의 그 눈물겨운 굶주림이, 나의 가슴에 불굴의 의지를 가꾸었고, 불퇴잔의 용기를 복돋아 준 값진 교훈이었음을 말하고 싶다.
고향 떠나 50년이란 긴긴 세월이 흘러갔다. 이제 정년으로 공직을 끝내고 허허로운 노기에 접어들었다. 지난 날 그렇게도 허기졌던 고향의 봄이 세삼 그리워 내 다시 고향을 찾았다. 이젠 허기도 굶주림도 지겨움도 사라지고 생기발랄한 아름다운 고향의 봄이 정겹게 펼쳐 있다. 내 여기 다시 회춘하려는 환희에 들며 들녘 언덕 위에서 푸른 산야를 바라본다.
- <고향에는 봄이 있다> 중에서
채낙현은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아온 이력이나 그의 수필을 보면 한시미학에서나 볼 수 있는 시궁이후공론을 접할 수 있다. 좋은 글은 고난을 겪은 이후에 나오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돈이 없어 수하여행도 못 가고 가축 사육당번을 하면서 허기에 못견뎌 실습용지에 재배하고 있던 붉은 무를 뽑아 먹고 일본인 교장에게 들켜 5일간 정학을 당한 적도 있었다. 정학 동안은 가족을 속이고 매일매일 책보따리를 가지고 학교가 아닌 아버지 무덤가를 찾았다는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적빈의 세월은 그에게 불굴의 정신을 심어주었다. 초등학력이 전부인 근느 독학으로 초등 중등 교원자격을 취득하였고, 행정사무관 시험에도 합격하여 공직을 평생의 업을 삼았다. 퇴직 후의 멀어져가는 인심, 육신의 노화에 대한 소회가 안타까움을 주지만, 그는 고향의 기운에서 봄빛을 보며 회춘의 기쁨을 만끽하고자 한다. 작가는 고향의 봄을 찾아 허허로운 노기를 달래고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인심을 청산하며 새로운 인생으로 전환하려는 자제를 가지며 귀소본능을 놓는다.
II. 닫으며
지금까지 고향의 봄처럼 따뜻하고 사내다운 패기와 선비 같은 풍유로 한 세상을 풍미했던 그는 질항아리처럼 담박했던 자신의 삶을 세 권의 수필집에 담아냈다. 채낙현의 수필은 맛은 풍유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지성과 이성에서도 나온다. 단지 ‘행정가’라는 관료로서의 뜻만을 건져 올리기에는 그가 남긴 수필들이 주는 가치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다. 그의 수필은 적빈을 뛰어넘어 ‘참삶’이라는 가치를 일구어낸 거대한 숲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면 법정의 그 ‘텅 빈 충만’을 보는 듯한 무욕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이 너무나 크서 어떻게 다 감슴에 안을지 염려된다.
채낙현 수필을 분석해 본 바, 채낙현 수필의 문학성은 ‘체험성’과 ‘진솔성’ 그리고‘구체성’ 그리고 ‘보편성’이라는 틀 속에서 나온다는 게 평자가 내린 결론이다. 수필의 문학성은 이 세 요소가 합해졌을 때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어떤 옷이 작품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 좋은 디자인, 좋은 옷감은 기본이다. 문제는 그 옷의 색깔과 문양이다. 좋은 옷감으로 잘 디자인된 옷에 어떤 색깔의 문양을 샛길 것인가가 작품의 종합적인 품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정의해서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고 한다. 형상은 구체성과, 그리고 인식은 보편성과 연결된다. ‘구체성’의 결여는 미적 쾌락의 결여로 이어져, 심미성을 주지 못해 미적 구조로서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보편성’의 결여는 교훈성의 결여, 즉 인식의 결여로 이어져, 수필을 소재 제시나 나열에 불과한 단편적 잡문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다행스럽게도 <이질> <못나도 할 말 있다> <이도유감> <사련> <고향에는 봄이 있다> 등 그의 주옥 같은 수필들은 체험을 통한 진솔한 고백이 감동을 주고 있다. 이는 채낙현이 수필작법을 제대로 터득하고 창작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그는 수필과 공직, 공지과 수필에 온 정열을 불태워온 사나이 중 사나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수필집 세 권의 제목 ‘시정에 부는 바람’ ‘셍긴 대로 살기’ ‘고향에는 봄이 잇다’는 본수를 지키며, 순명하면서 도시보다는 순수의 고향에 희망을 걸어보자는 철학이 녹아있다. 그의 수필이 오랜 세월 변함없이 사람들의 영혼을 적시고 있는 데에는 필시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문학인으로서의 진솔성은 불굴의 의지와 더불어 채낙현의 수필에 문학적 힘을 부여했다고 하겠다. 때문에 그의 수필은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닌다. 행정가로서 혁신에 앞장서고, 소명을 충실히 수행한 그의 참삶이 녹아 있는 수필을 읽으면서, 평자는 채낙현 수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데 주저할 수 없다. 수필 감상의 쾌미를 주는 내면 풍경이 진솔하게 녹인 문학적 구성을 통해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글이 최고의 수필이란 판단 때문이다.
|약력|
1930년 경남 함안 산
가야 함안 초등학교 교사 ,해동중학교 교사, 함안중 교장 경남일보 편집부국장, 부산시 중구 영도구 총무과장
부산시 문화공보실장, 경남대 감사과장 마산시 부시장
거제군수, 전북도 보건사회국장, 부산시 기획담당관
부산진구, 동구, 해운대구, 동래구청장 ,부산시 동래구의회 의원
부산외솔회 회장, 동래문화회 회장, 부산문인협회 부회장
헌꾸수필가협회 회원
녹조근정훈장, 올림픽기장, 향토문화상, 전북도 애향장
저서: 시정에 부는 바람, 생긴대로 살기, 고향에는 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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