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8,34~35)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서양에서는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물려주는 풍습이 있답니다. 이때 그 진주를 ‘Frozen Tears
(얼어붙은 눈물)’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딸이 시집살이하다가 속상해할 때 조개가 살 속에 모래알이 박힌
고통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잘 참고 견뎌내라는 뜻일 겁니다.
진주는 진주조개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어쩌다 조개의 몸속에 들어온 모래알은 조갯살 속에 박혀 고통을
줍니다. 그때 조개는 ‘nacre(진주층)’이라는 생명의 즙을 짜내어 모래알 주변을 덮어 싸고 또 덮어 쌉니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이 흐르면 바로 그곳에 우윳빛 영롱한 진주가 탄생합니다.
진주조개 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모두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조개에는 두 가지 선택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nacre(진주층)’을 생산해서 코팅 작업을 시작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경우 수개월 수년에 걸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대신 들어온 모래 때문
에 조개는 병들고 심한 경우에는 아예 죽어버립니다. 조개가 당면한 이 선택이란 침입한 모래알을 도전으로
받아들여 진주로 만드느냐 그렇지 않으면 피차 망하느냐 하는 선택입니다. 이것은 조개의 선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삶에도 이런저런 모래알이 들어올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시련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찾아올 때 ‘내가 지금 값진 진주를 품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라고 합니다. 내가 당면하는
시련이 크면 클수록 ‘내가 품고 있는 진주도 더 크고 더 값지겠구나!’라고 생각하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흘리
는 눈물은 내일이면 아름다운 진주로 바뀔 것입니다.
로욜라 이냐시오 성인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젊어서 기사로서 전쟁터에 나가 자신의 영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용감히 싸웠습니다. 불과 수백 명을 이끌고 1만 2천 명이나 되는 적군의 공격을 용감히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양 다리를 다치는 부상을 입고 그만 프랑스군의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1521년 간신히 고향 로욜라에 귀환
한 그는 몇 번의 다리 수술을 위해 수개월을 병상에 누워 지냈습니다. 병상에 누워 지내는 동안 그는 위대한
성인들의 자서전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기 내부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라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의식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엇
인가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와 자신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는 힘이었습니다.
병상에 누워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이냐시오는 과연 무엇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 싸웠던가하는 의문이 들었
습니다. 영주를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 자신의 영예를 위해서? 모든 것이 헛되고 한 순간이라는 생각뿐이었
습니다. 칼과 창에 찔려 신음하는 병사들 속에서 전쟁의 잔혹함과 비참함만 느꼈습니다. 옛날 기사 시절을
회상할 때 잠시 동안은 유쾌함도 느꼈지만, 곧바로 침울함과 황량함만 가져다 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성인전을 읽을 때는 커다란 위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변치 않는 진리를 위해 모든 생을 거는 성인
들의 모습이 오히려 영웅적이었습니다. 본받고 싶다는 열망이 솟아올랐습니다. 무엇보다 평화를 느꼈습니다.
특히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에 감격했습니다.
이냐시오는 궁금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다른 감정이 솟아오르는 까닭을. 자신의 온몸을 감싸는
‘황량’과 ‘위로’의 차이를 묵상하던 이냐시오는 이 둘의 차이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곧이어 ‘영적식별’을 위한 ‘영신수련’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하느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라면 ‘위로’를 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이 미세한 차이
를 식별하는 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새 출발을 위해 몬세라트 수도원을 향해 떠났습니다.
1522년 봄 어느 날 이냐시오는 만레사 근처 카르도네르 강변 어느 동굴에서 ‘조명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후 그의 삶과 기도의 주제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잠시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오랜 기간 철학과 신학공부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동안 갖은 오해와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오직 순명과 정결과 청빈 그리고 식별의 은사에 매달렸습니다.
“자신을 버리고”라는 그리스어 동사의 본래 뜻은 ‘부인한다(aparneomai)’는 뜻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거짓된 생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제 목숨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제 것이라는 거짓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로욜라 이냐시오 성인도 자기 안에 들어온 모래알을 품고 묵상을 하면서 진주층으로 감싸 안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목숨이 제 것이라는 거짓 속에서는 오직 침울함과
황량함만 느낄 뿐이었습니다. 결코 영적 위로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위로를 통하여 깨달은
영적식별과 영신수련을 온 세상에 전파하였고, 그것을 통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품안에서 키웠던 영롱한 진주를 온 세상에 내보였습니다.
-- 윤 경재 요셉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