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 너는 복이 될지라 말씀/ 창세기 12:1-9 요절/ 창세기 12:2 | 2025. 3. 2 | |
봄학기 특 강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우리는 누구나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캠퍼스에 입학하는 신입생들, 그리고 재학생들과 복학생들 모두 복된 대학 생활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잘 되면 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복 받았네요.” 새해 가장 많이 하는 인사말도 “복 많이 받으세요.”입니다. 복된 인생, 복된 대학 생활이 되기 위해선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 받았네요, 복 받으세요.”라는 인사만 받아도 우리는 기분이 좋고 힘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이 말은 이제 내가 복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복을 나눠주고 축복해 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가슴 떨리는 말입니까? 사실 우리는 인생의 파도에 이리 치이고 저리 부딪혀서 깨지고 부서지고 망가진 배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부담 주고 아픔만을 주기 잘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신이 싫어 자신을 고쳐 보고자 하지만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스스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러 고쳐 쓰십니다. 쓰시되 망가진 채로 쓰시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 쓰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 학기 새로운 비전과 소망을 덧입고 힘차게 도전하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어제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만나 대화를 해보니 다양한 곳에서 춘천으로 온 이들이 많았습니다. 가깝게는 가평에서 그리고 경기도 남양주, 서울, 강원도 인제, 강릉, 조금 먼 경북 경주, 그리고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서 온 학생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새로운 대학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새로움의 시작은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새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자 찾아오셨습니다. 이를 위해선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시작입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아브람의 삶을 지탱해 주는 토대와도 같습니다. 아브람이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고향은 엄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포근하고 따뜻하여 영영 거하고 싶은 곳입니다. 가족과 친지, 친구들과의 추억이 깃든 곳입니다. 또한 익숙한 곳이요 삶의 터전과 기반을 쌓은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고향 땅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고향 땅을 떠나야 하나님이 보여줄 땅,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친척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친척은 아브람을 지지해주고 생사고락을 함께한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정든 땅을 떠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정든 사람을 떠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집도 떠나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경제적으로 신앙적으로 자립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도움과 희생 없이 스스로 자란 이들은 없습니다. 부모야말로 나의 모든 토대요 고마운 분이기에 떠나기 힘든 존재입니다. 하지만 참 자아를 찾고 나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부모를 떠나는 것은 부모와 결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나쁜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부모를 의존한데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당시 우상숭배의 문화에 오염되어 우상을 섬겼습니다. 아브람은 이런 우상숭배의 영향력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말로만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만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새로운 결단과 믿음을 드려야 합니다.
분명한 떠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떠나고자 할 때 아픔이 따릅니다. 안정된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희생도 따릅니다. 미지에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들어옵니다. 주변에선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타협하도록 합니다. 그로 인해 떠나기를 주저하며 결단하지 못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단하여 베어 버리지 않으면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뿐입니다. 나를 지탱해 주고 격려해 주고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찮은 것으로부터 떠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생명줄과 같은 것으로부터 떠나라고 하십니다. 생명줄과 같았던 것들이 사실은 썩은 동아줄일 수 있습니다. 썩은 동아줄을 버리고 참 생명줄인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떠날 수 있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복의 근원 된 삶으로 들어 가게 됩니다.
우리는 말의 목을 벤 신라 장군 김유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 그는 천관이란 술집에 자주 드나들며 허송세월하고 있었습니다. 참다못한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유신이 나라를 영화롭게 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에 김유신은 이를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이 술에 취한 김유신을 태우고 천관이란 술집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술이 깬 김유신은 그 말의 목을 베어 버리고 천관을 떠났다고 합니다. 한번 떠났다고 하여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본성과 주변은 자꾸 나를 돌아가게 만듭니다. 계속하여 떠나야 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으로부터, 게으름과 안일과 정욕과 교만, 죄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자신의 의로부터 떠나야 하며 세상의 물질주의 인본주의 성공주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떠나는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곳을 향해 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복의 근원이 되도록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떠나서 가라고만 말씀하셨지 구체적인 장소나 방향조차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너를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 너를 책임지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믿고 떠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길로 밀어버리는 무책임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의 놀라운 계획과 뜻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은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큰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영토가 큰 나라, 국방력이 큰 나라, 경제력이 큰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큰 나라는 영적인 파워가 큰 나라입니다. 크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를 가리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나라입니다. 온 인류의 적인 사탄 마귀 권세를 파하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나라, 그 나라가 진정으로 큰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건설하실 메시아 왕국을 가리킵니다. 이 나라가 아브람을 통해서, 아브람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아브람은 딸자식 하나 없습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변변한 가족, 가문 하나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를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름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의 크기는 저마다 다 다릅니다. 큰 이름이란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름입니다. 그 당시 아브람이란 이름의 크기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의 이름은 가족과 이웃 사이에서나 알려진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듣보잡 취급을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하나님 나라 명예의 전당에 기록될 만한 큰 이름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이 말씀의 뜻은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겠다.”라는 것입니다. 2절을 자세히 보면 주어가 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큰 민족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십니다. 아브람은 한없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가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삼을 때, 하나님이 그의 인생의 주어가 되실 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복되게 하십니다. 인생이 복을 받고, 위대하게 되는 비결은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1: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야고보서 1:17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모든 복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복되게 하십니다. 우리 이름을 창대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복의 근원, 복덩이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 지라” 하나님은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그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후손 가운데 구원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주심으로 죄로 죽어가는 인생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을 때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때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풍성한 삶을 누리고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역사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복의 기준, 복의 통로로 삼으시고 죄와 어둠 가운데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복된 인생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은 모두 다 미래의 일들입니다. 현재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보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그 어떤 보증보다 더 확실한 보증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믿음입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에 두었던 정과 미련을 부인했습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람은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과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아브람의 씨로 오셨습니다. 아브람이 이런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 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브람이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하게 믿고 순종한 것이 아브람의 인생을,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믿고 순종하여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람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환영! 아브람! 가나안 입성’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보았습니까? 아니면 아브람을 위해 마련된 전원주택과 푸른 목장을 보았습니까? 6절을 보면 아브람은 거기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각자 자기 땅을 지키고 있는 가나안 주민들을 보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실 때는 무언가 선물을 준비해 놓고 계실 줄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아브람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졌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깊이 헤아리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때 아브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수습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요. 나 이제 비뚤어질 거예요.” 그런데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람은 계속해서 가나안 땅을 북에서부터 남으로 내려가면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드렸습니다. 이 제단은 무엇을 나타낸 것일까요? 이것은 아브람이 이 땅을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표지였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희미한 것을 본 것처럼, 미래의 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금을 얻고 나서 은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금을 얻을 줄 믿고 은을 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히11:1).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믿음은 약속의 성취를 이룰 때까지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저는 강릉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서낭당이 있고 사람들이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절에 가서 빌고 이따금 굿도 하였습니다. 대학을 춘천으로 오게 되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선 인생의 의미와 길을 알지 못해 방황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신유니스목자님의 초청으로 이곳 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성경 말씀을 일대일로 공부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여러 동아리 활동과 세상의 잔재미에 더 시간과 마음을 드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씀과 교회에서 멀어졌습니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또다시 방황하였고 인생이 참으로 허무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 복된 인생을 살고 싶지만 그러한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이었습니다.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교회에 왔습니다. 나를 겸손히 내려놓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말씀이 중심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 했을 때 길 되신 나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가장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찾게 되었고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고 참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가 크고 너무나 감사하여 이 귀한 복을 나눠주고자 목자가 되었습니다. 대학원도 진학하고 풀타임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 길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너는 복이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게 하시고 때마다 그 말씀을 체험케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친히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자신을 복의 근원이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저로 인해 잘 된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복 없는 자를 주님은 “너는 복이 될지라” 말씀하여 주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 죄인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한 사람을 살리고 캠퍼스와 가정과 전 세계 가운데 복의 근원 된 삶을 살게 하신다고 약속하여 주십니다. 이를 믿음으로 날마다 죄와 게으름에서 떠나 주님이 맡겨주신 한 영혼과 캠퍼스로 나아가겠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주님의 복을 받아 이름이 창대케 되며 복의 근원 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문제 많은 세상과, 많은 것이 부족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희망을 갖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큰 소망 가운데 부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복의 근원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과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실 큰일들을 기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