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나의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내 것인 줄로만 알았던
나의 가족
나의 소유
그것들이 주님의 것임을 알려주는
때를 우리는 만나게 된다.
심지어 우리의 신체들도
우리에게 이야기 해 준다.
언제까지 내 말을 잘 듣고
묵묵히 봉사하는 월급주지 않아도 되는
식모처럼 섬겨왔던 것들이
하나씩 둘씩 파업을 일으킨다.
신체하나 하나가
세포하나 하나가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진작에 잘 보살피고
고마워하고
잘 챙겨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제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존재의 소중함들을 깨닫는다.
언젠가는 다 떠나고
누구나 홀로 그분앞에 서야한다.
공지영 작가의 최근 산문집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에서
가슴에 와닿는 몇 단락을 옮겨본다.
“얼마 전에 허리를 다쳤다. 떨어진 비눗갑을 집어 들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고통이 번개처럼 나를 덮쳤다. 겸손이란 무엇일까? 들을 사람은 없었지만 홀로 헛되이 비명을 지르면서 잠시 멈추어 서 있었다. 그날 이후 잠결에 뒤척이는 것, 걷는 것, 눕는 것, 양말 신는 것, 의자에 앉는 것, 운전 중에 핸들을 살짝 트는 것조차 그동안 내가 잘나서 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내 몸의 전근육, 온몸의 연결 상태를 고통이 비춰준다. 어찌 보면 참으로 복된 고통이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치 전과 23범이라도 된 듯이 내가 고통의 수갑을 반항하지 않고 묵묵히 찬다는 것이다. 뼛속까지 동의하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오늘 내내 생각했는데, 얍복강가에서 천사를 만나 축복해 달라고 떼쓰던 야곱이, 나였다. 아마도 곧 나도 환도뼈를 다치고 커다란 축복을 얻겠지.
“이 자연은 가만히 놓아두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아무리 큰 통나무라 해도 생명이 다한 후에 그것들은 아스라이 흙 속으로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 어쩌면 죽는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하나 됨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것은 아무리 작은 것들도 자연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영원히 썩지 않은 채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 그것들이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본질이 아니라 껍질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저 넓은 바다까지 흘러들어가 미세플라스틱이라는 이름으로도 떠돌아다닌다.
사람이 만든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그래서 외로웠나 보다.
도시에서,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그 많은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화사함 속에서도 나는 오래된 목욕탕의 굴뚝처럼 외로웠다.
그런데 이 적막이 침묵, 이 자연 속에서 나는 외롭지 않았다.
저 나무, 산, 바위, 그리고 바람과 구름들, 우리 집 강아지 동백이와 자태가 아름다운 들고양이들조차 에덴의 신성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껍질의 허망함을 아는 듯했다.
그들은 도시에서 헤매다가 하늘이 주신 신성을 다 잃어버리고 누더기가 되어 돌아온 나에게 그것들을 한 숟가락씩 먹여주는 듯했다. 이곳에서 내가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닌 까닭이 그것이었다.”
https://youtu.be/sbv-8Hl7Ei8?si=Ublfs0rYkFF8xlWo
https://youtu.be/cMn_8Xqq5Gg
https://youtu.be/9CNJzNfEKos
https://youtu.be/oykVYejMQ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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